NOPF에서 JJJJJEROME의 낭독을 본 일에 대해
NOPF에서 JJJJJEROME의 낭독을 본 일에 대해
![]() ‘완전한 마모의 돌 찾기 대회’를 위해 찾은 미시시피 강가. 멀리 보이는 철교는 크레센트 시티 커넥션(Crescent City Connection)이다. |
뉴올리언스를 거쳐 뉴욕에 이르는 낭독 투어 일정이 마무리되어 가던 어느 저녁. 내 첫 시집 『오늘 아침 단어』(문학과지성사, 2011)와 최근작 『겨울밤 토끼 걱정』(현대문학, 2023)의 번역가 스틴 안(Stine An) 씨가 내게 물었다. 시인님. 우리가 이 프로젝트를 어쩌다 어떻게 시작하게 되었지요. 같은 질문을 나 스스로에게 던진 적이 있다. 댈러스 국제공항에 도착했을 때. 장식 하나 없이 삭막한 입국심사대 앞에서 차례를 기다리면서. 어쩌다, 여기에 오게 되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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펍 한구석에 조그마한 무대가 있다. 이런 곳을 카바레라고 한댔다. 무대 위엔 기다란 마이크 스탠드만 우뚝하다. 시계를 본다. 공연 시작까진 십 분 넘게 남아 있다. 둘러봐도 앉을 곳이 없다. 그런 채 홀은 사람들로 가득하다. 모두 지인인 모양이다. 요란하게 반가움을 나누고 대화를 시작한다. 곧 새로운 이가 인사를 건네며 대화에 합류한다. 무슨 이야기를 나누는지 알고 싶다. 알 수가 없다. 낯선 언어. 영어를 낯선 언어라고 할 수 있나. 익숙지 않은 언어. 그래, 이편이 맞겠다. 뜻하지 않게 섬이 되어 있다. 자그마한 신경질이 일어난다. 한껏 예민해져 있기 때문이다. 어제 도착한 이곳은 한국과 열두 시간 시차. 내 몸 시계는 밤을 꼴딱 새우고 난 오전 아홉 시를 가리킨다. 길게 하품한다. 나가서 담배라도 피우고 올까. 이 인파를 헤치고 나설 엄두가 나지 않는다. 문 앞에서 신분증 검사를 하는 이에겐 또 무어라 설명해야 한단 말인가. 그놈의 언어, 영어. 나서길 포기한다. 누가 등을 쿡 찌른다. 돌아보니 이제니가 맥주잔을 건넨다. 오 감사해요. 지금 내게 필요한 거예요. 받아 드니 뒤쪽을 가리킨다. 해욱이 샀어. 손가락이 가리킨 조금 떨어진 곳에 신해욱이 보인다. 혼자가 아니라는 사실이 위로를 준다. 맥주를 홀짝이는 사이 한 사람이 무대에 오른다. 뉴올리언스 시 페스티벌의 주최자 중 하나인 션(Sean F. Munro) 씨다. 금방 알아본다. 그는 언제나 화려한 셔츠를 입는다고 했다. 오늘도 역시. 션을 둘러싼 사람들이 환호를 보낸다. 휘파람을 보내는 사람도 있다. 션은 오늘 행사를 소개한다. 낭독할 시인은 셋. 그중 두 명은 오프닝, 남은 한 명이 주인공이다. 소개가 끝나자, 다시 환호가 터진다. 즐거운 것일까, 즐거워지려 하는 것일까. 어느 쪽이든 익숙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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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올리언스 시 축제(New Orleans Poetry Festival), 약자로 NOPF는 올해로 11회를 맞이하는 시 축제다. 대안을 제시하는 실험적 시, 시인을 환대하며 해마다 규모를 키워왔다고 한다. 2025년에는 시인 하재연·황유원 등이 초대받아 참석했다고 알고 있다. NOPF 총괄을 맡고 있는 션 씨가 나와 스틴 안 씨를 초대하고 싶어 한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 — 내 기억에 따르면 이렇게 시작되었다 — 나는 한 치의 망설임 없이, 갈 수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렇게 시간을 낼 수 있을 만큼 한가하지 않다는 것이 내세울만한 이유였지만 내심으로는, 영어를 잘하지 못하므로, 솔직히 고백하자면 영어를 아주 못하므로 꿔다 놓은 보릿자루가 되고 말 거라는 불안이 더 컸다. 그럼에도 어떤 이유에서인지 — 지금도 잘 모르겠다 — 나는 딱 잘라 거절하지는 않았다. 곧 두 번째 번역 시집이 출간될 거였고, 스틴 안 씨는 어쩐지 참여하고 싶어 하는 듯 보였으며, 그를 실망하게 하고 싶지 않았던 게 아닐까, 이제 와 추측해 볼 뿐이다. 그러니 시작점을 찾자면, 중차대한 결정을 앞두고 좌고우면하며 망설이는 내 우유부단함일 수도 있다. 가정이 미정이 되고 사실상이 되었다가 마침내 확정이 되기까지 그리 오랜 시간이 필요하진 않았다. 여기에 내친김에, 가 덧붙어 기왕이면, 이 되었고, 그리하여 뉴욕행을 타진하고 그에 걸맞게 규모를 키우고 동행할 시인들 수를 늘리고 확정하는 일 또한 물 흐르듯 자연스럽게 꾸려졌다. 입국 심사대 앞에서 뒤를 돌아보았다. 거기 시인 이제니·신해욱이 서 있었다. 며칠 뒤 뉴욕에 도착할 때쯤에는 시인 오은이 와 있을 거였고. 몸이 휘청였다. 어깨가 무거웠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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홀을 채운 사람 대부분은 NOPF를 찾은 시인일 것이다. 전날 오전에 NOPF의 출판 박람회에서 만났던, 더러 인사를 나누기도 했던, 인사들이 눈에 띄었다. 그들은 낭독이 끝날 때마다, 션에게 그러했듯, 환호, 환호. 우스운 부분일 때는 웃음이 터지고, 안타까운 부분에서는 탄식이 흘러나온다. 이곳 분위기가 미국 시 낭독회 전체 분위기를 대변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그렇더라도 나는 귀를 열어둔 채 침묵에 빠져 있는 한국의 시 낭독회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어느 쪽이 더 나은가, 따위의 판단은 각자 몫일 것이며, 나의 호오 또한 그리 중요하진 않다. 다만, 매번 다른 방식을 도모하는 문학 문화 기획자 입장에서 흥미로웠던 것은 사실이다. 한국 문화에 이와 같은 분위기가 없는 건 아니다. 가령, 판소리 사설과 이를 듣는 관객·청중을 떠올려보자. 그 왁자한, 동시에 압도적인 분위기가 딱 이와 같을 것이다. 따위의 상념에 빠져 있는데, 앞선 두 명 시인과는 분명히 차별되는 환호가 들렸다. 이번 낭독 행사의 주인공이 무대에 오른 것이다. 행사 전에 나는 그의 시집을 사두었다. 『Aster of Ceremonies』. 직역하면 ‘의식의 들국화(개미취)’ 정도가 될 텐데 이렇게 이해하면 곤란하고 — 물론 표지에는 들국화 그림이 있긴 하다 — 아마 Master of Ceremonies, 즉 ‘사회자’나 ‘행사의 주연’에의 말놀이로 보아야 할 것이다. 그러나 눈에 띄는 건 시집 제목이 아니다. 시인 이름이다. 그는 자신의 이름을 JJJJJEROME ELLIS, 라고 적어두었다.
휘트니 비엔날레(Whitney Biennial) 초대 작가로 최근 가장 주목 받는 시인이자 행위 예술가라고 한다. 그에겐 유창성장애가 있다. 흔히 말하는 말더듬이(Stutterer)다. 그가 자신의 이름을 위와 같이 표기한 까닭이다. 그는 자신의 정체성을 Stuttering, Afro-Caribbean으로 둔다. 정확한 맥락은 알 수 없으니 구글링을 해본다. “카리브해 지역 흑인 공동체의 구비 전승의 전통, 언어, 그리고 정체성에 대한 독특한 문화적 관점”에 대한 해석, 이라고 한다. 문화인류학적 견해에 대해 무지하므로 덧붙일 말은 없고 다만 Stuttering’(말더듬)을 내세우는 그 자신의 예술적 고찰은 흥미롭다. 요약하면 ‘말더듬’은 단순한 장애가 아닌 지연-유예로부터 비롯되는 시간과 언어에 대한 새로운 경험이자 음악성이라는 것이다. 알아낼 수 있는 이해는 여기까지가 전부였고, 충분히 지쳐 있었으며, 그리하여 그가 저 좁은 무대에서 무얼 보여줄 것인가, 하는 것이 내 관심의, 사실상 전부였다.
![]() JJJJJEROME ELLIS의 낭독회 |
어느새 무대에는 노트북을 올려놓은 작은 책상과 의자가 마련되었고, 큰 환호 속에 제롬이 그 앞에 앉았다. 감사 인사를 이어가는 듯하더니 어느 순간 시 낭독이 시작되었다. 아니, 퍼포먼스가 시작되었다고 해야 한다. 즉흥으로 시를 만들어가면서 자신의 언어를 노트북에 받아적었고, 무대 뒤 화면엔 그가 입력하는 시가 차근차근 적혀나가기 시작했다. 물론 나는 그의 말-시를 알아듣지 못했다. 그저, 한 줄 한 줄 사람들-시인들이 보이는 반응과 그의 발음이 가진 독특한 리듬과 템포만이 흥미로웠다. 그러던 어느 순간, 그의 말-시가 멈췄다가 이어지기를 반복한다는 사실을 알아챘다. 저거로구나. 말더듬의 지연-유예라는 것. 멈춤과 이어짐 사이는 단순한 공백이 있는 게 아니라 터질 듯한 긴장감이 있었다. 무언가 부풀어 올랐다 톡 터졌고, 그로부터 망설임은 느껴지지 않았다. 그는 말-시를 이어 나갔고 그때마다 객석에선 침묵과 감탄이 오갔다. 어째 아연할 때쯤, 제롬이 벌떡 일어나 자신의 가방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금빛 색소폰이었다. 그는 그것을 불며 객석을 휘저었다. 예상했겠지만, 색소폰에선 아무 소리도 나질 않았다. 리드(Reed)에서 비어져 나오는 그의 숨소리만이 들릴 뿐이었다. 한 차례 반복. 행사 종료. 박수갈채와 환호.
![]() 낭독회의 막바지, 소리가 나지 않는 색소폰 연주를 하며 홀을 돌고 있는 JJJJJEROME ELLIS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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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후텁지근한 홀에서 서둘러 빠져나왔다. 술집 앞에는 우리와 같은 이들이 이곳저곳에 모여 제롬의 말-시와 그의 퍼포먼스에 대해, 덧붙여 자신의 시적 작업에 관해 이야기를 나누는 사람들로 북적거렸다. 우리 대화에는 어떤 열기가 있었다. 낯선 것을 만났을 때의 경계, 결국 이겨내지 못하는 호기심, 반추와 해석과 적잖은 감탄… 그리고 우리는 우리를 생각했을 것이다. 두고 온 곳에 있는 것들을 뒤적여보고 있었을 것이다. 그러는 동안 점점 밤이 깊어 갔다. 그사이, 나는 점점 형언하기 어려운 감정, 애써 단어를 찾자면 일종의 애틋함에 사로잡혀 있었다. 우리가 목격한 해프닝과 무관하다고 단정지을 수 없는 어떤 상태에 대한, 이곳 뉴올리언스에 모여 있는 한 사람 한 사람에 대한, ‘시’라는 도무지 알 수 없는 이상(理想)에 사로잡혀 있는 여기 모두에 대한, 시를 이야기하고 싶고 그것을 드러내고 싶어 하는 애씀에 대한 애틋함이었다. 그리고 나는 그날 오전에 대해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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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전에 우리는 강까지 걷기로 했다. 강에 용무가 있었다. 뉴올리언스에는 미시시피강이 흐른다. 『톰 소여의 모험』에 나오는 그 미시시피강이다. 조니 캐시(Johnny Cash)의 명곡 〈Big River〉에서 “River” 또한 이 미시시피강이다. 하지만 우리의 용무는 미시시피강이 아니라 강에 있었다. 일단 숙소에서 뉴올리언스 최대 관광 지구라는 ‘프렌치 쿼터(French Quarter)’까지 걸었다. 강은 그 근방을 흐르고 있다. 얼마 걷지 않아 프렌치 쿼터 인근에 닿았다는 걸, 지도를 보지 않고도 알 수 있었다. 거리가 명랑해졌으므로. 사방에서 재즈 공연이, 그야말로 되는 대로 벌어지고 있다. 우리는 자주 멈춰 섰다. 어떤 이는 춤을 추고 어떤 이는 손뼉을 치고 어떤 이는 맥주를 홀짝인다. 나는 팔짱을 끼고 들었다. 옆에 함께 서 있던 이제니도 신해욱도 대충 비슷했다. 한 번에 한 곡, 때로 두 곡 정도 듣고 자리를 떴다. 점차 분위기에 익숙해진 다음에는 그냥 지나치기도 했다. 미시시피강에 닿았다. 신해욱이 가방에서 돌을 꺼냈다. 하나는 이제니가 사는 거제도에서, 다른 하나는 내가 운영하는 서점 ‘위트 앤 시니컬’에서 가져온 돌이라고 했다. 나는 내 몫의 돌을 한눈에 알아보았다. 말라 죽어버리고 말아 이젠 없는 고무나무 화분에 있던 장식용 돌이다. 신해욱은 돌을 옮긴다. 이쪽에서 가져온 돌을 저쪽에 둔다. 양양으로, 베를린으로, 거제로, 다랑쉬굴로. 신해욱이 닿는 곳마다 돌은 이동한다. 이것을 ‘완전한 마모의 돌 찾기 대회’라고 한다. 나와 이제니는 돌을 미시시피강에 던졌다. 신해욱은 뉴올리언스의 돌멩이를 줍기 위해 강둑 아래로 뛰어 내려갔다. 강을 떠도는 목조 유람선이 긴 경적을 울렸다. 멀리 노랫소리는 그치지 않았다. 그 장면을, ‘완전한 마모의 돌 찾기 대회’를 모여 있는 사람들에게, 제롬에게 보여주고 싶었다. 환호와 박수 소리를 들은 것만 같다. 우리끼리 몰래, 시-하기를 본 사람은 그러나, 아무도 없었다. 거기에도 시가 있었는데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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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날은 이제니와 내 차례였다. 오전 10시의 시 낭독회와 라운드 테이블. 이제 그만 가자. 더 밤이 깊기 전에 택시를 불렀다. 좀 멋지게 해내고 싶었던 것 같다. 그래서 어땠느냐면, 글쎄. 어땠을 것 같은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