곤경의 드라마, 의식의 드라마
곤경의 드라마, 의식의 드라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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헨리 제임스는 19세기 중후반부터 20세기 초에 걸쳐 소설뿐 아니라 비평과 여행기에 이르기까지 방대한 작품을 남긴 작가이다. 전통적 사실주의 기법으로 시작해서 자연주의 소설과 희곡에 관심을 돌렸던 중기를 거쳐 후기에는 사건보다 인물의 의식에 집중하여 모더니즘으로 이어지는 다리 역할을 했으니, 작품의 양만이 아니라 그 다양성에서도 독보적이라 할 만하다. 의식의 기록에 집중하는 후기 작품은 아무래도 읽기가 쉽지 않지만, 중기까지의 작품은 당대 소설보다 더 난해할 것이 없고 오히려 유머와 위트가 두드러지는데도 제임스에게는 늘 ‘난해함’이 꼬리표처럼 따라다닌다. ‘위대한 소설 100선’으로 종종 꼽히는 작품이 주로 난해하기로 유명한 후기 작품인 『비둘기의 날개』, 『대사들』, 『황금 주발』이거나 『한 여인의 초상』인 탓도 있을 것이다(『한 여인의 초상』은 초기에서 중기로 넘어가는 시기의 작품이지만, 말년에 뉴욕판 전집을 내면서 상당히 수정한 탓에 읽기 만만찮은 작품이 되었다).
『비둘기의 날개』는 일단 인물보다 서사를 중요시하는 요즘 추세에 잘 들어맞지 않는다. 게다가 짧은 문장을 선호하는 경향과는 당연히 거의 상극이라 할 만하다. 사건 자체보다는 주로 그 속에서 서로 얽힌 인물들의 생각과 판단, 미묘한 긴장과 반응이 공들여 세세히 묘사되기 때문인데, 사실 사랑과 돈, 음모, 삼각관계 등을 중심으로 펼쳐지는 줄거리 자체는 요즘 드라마에서도 즐겨 다뤄지는 주제라 할 만하다. 어마어마한 재산을 물려받은 혈혈단신의 젊은 여성이자 요절할 운명인 밀리 실이라는 인물부터가 그렇고, 가난한 연인 케이트와 덴셔가 그 재산을 차지하기 위해 벌이는 위험천만한 계획과 그들이 이루는 일종의 삼각관계가 극적인 묘미를 더해준다.
미국 여성인 밀리가 런던에 찾아오면서 벌어지는 이들의 드라마는 제임스가 초기부터 즐겨 다룬 이른바 ‘국제 주제’를 전형적으로 보여준다. 한편으로 활기차고 자신만만하지만 전통이나 문명적 세련됨이 없이 순진한 미국, 다른 한편으로 오랜 역사와 성숙한 문화를 지녔지만 교묘하고 노회한 유럽이라는 두 세계를 비교하는 일은 제임스가 신생국 미국의 특성을 탐구하는 중요한 방식이었다. ‘국제 주제’에서 유럽과 대면한 미국인이 이런저런 곤경에 처하고 실패를 겪는 까닭은 무엇보다 겉으로 드러나지 않는 사회적 관계의 내밀한 의미를 알아보지 못하기 때문이다. 밀리 역시 케이트와 덴셔의 음모를 눈치채지 못한 채 케이트의 애정을 순수하게 받아들이며 그 속에 말려 들어간다. 하지만 국제 주제를 다룬 대표적 작품인 「데이지 밀러」의 데이지 밀러와 『한 여인의 초상』의 이저벨 아처가 작품 내에서는 희생자에 머무는 반면, 밀리는 죽음 이후에 역설적으로 케이트와 덴셔의 관계를 깨뜨리고 만다. 죽기 전 두 사람의 음모를 알아챘으면서도 그들의 애정을 지켜주고자 활짝 펼쳐 보인 비둘기의 날개가 오히려 하나로 맺어진 케이트와 덴셔의 의식을 떼어내고, 두 사람은 절대 ‘예전 그대로의 모습’일 수 없게 되는 것이다.
제임스는 <서문>에서 자신의 의도와 달리 밀리의 서사와 케이트의 서사가 동등한 비중으로 다뤄지지 못했다고 아쉬움을 토로하는데, 그것은 무엇보다 자신의 운명에서 벗어나려 몸부림치며 덴셔와의 사랑을 지키려 고군분투하는 케이트가 워낙 강렬하고 생동감 넘치는 인물이기 때문일 것이다. 덴셔가 내내 감탄하듯 어느 면에서나 특출한 인물인 케이트는 성공적인 삶을 이룰 길이 결혼뿐인 여성의 처지에 울분을 삼키고 가족의 굴레와 신분적 한계에 짓눌리면서도 자신의 수완으로 어떻게든 원하는 것을 얻고자 한다. 그런 점에서 케이트는 인상적이고 독특한 여성 인물이 가득한 제임스의 작품 세계에서도 특히 도드라진 인물이라 할 만하다.
소설이 언어예술임을 증명하는 공들인 묘사와 인상적인 표현, 독특한 인물들의 미묘한 관계와 각자의 곤경, 『비둘기의 날개』는 그것들이 수많은 벽돌로 쌓여 세워진 ‘소설의 집’이다. 미로처럼 복잡한 구조일지는 몰라도 일단 들어가면 즐길 것, 볼 것이 적지 않을 테니, 천천히 둘러 보고 싶은 독자라면 그 안으로 성큼 발을 들여놓으라고 권하고 싶다.
『비둘기의 날개 1, 2』는 대산문화재단의 외국문학 번역지원을 받아 필자의 번역으로 문학과지성사에서 대산세계문학총서 198~199번으로 출간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