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편소설
한 번의 가을

  • 단편소설
  • 2026년 가을호 (통권 101호)
한 번의 가을

그해 가을에 나는 토요일마다 아빠와 의정부에 갔다. 중령의 딸한테 과외를 받기 위해서였다. 철원에서 의정부까지는 왕복 두 시간 반이 걸렸다. 아빠와 단둘이 차에서 보내기엔 결코 짧지 않은 시간이었다. 매주 국도를 오가면서 아빠와 무슨 얘길 나누었는지는 기억이 나지 않는다. 어쩌면 얘기 자체를 거의 안 했을 수도 있다. 아빠는 워낙 말이 없는 사람이었고 나는 자도 자도 졸린 고등학생이었으니까.

시간이 흐른 뒤 가끔 그런 것들이 궁금해지곤 했다. 내가 중령의 딸한테 수업을 받던 세 시간 동안 아빠는 무엇을 하고 있었을까? 차 시트를 젖히고 잠을 잤을까? 부용천변을 걸었을까? 차를 끌고 어딘가를 다녀왔을까? 이제는 알 방법이 없지만 수업을 마치고 나오면 아빠의 은색 갤로퍼가 천변 옆 갓길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던 장면만은 선명하다. 차는 어김없이 같은 자리에 세워져 있었고 그 안엔 어김없이 아빠가 있었다. 의정부에서 철원으로 돌아오다 보면 어느새 날이 저물어 검문소와 대전차 방호벽을 지나고 나면 어둑어둑한 논들이 펼쳐졌다. 아빠가 직접 라이딩을 해준 그 이상한 장거리 과외는 다음해 봄까지 계속되다 아빠가 사라지면서 갑자기 중단됐다.

중령의 딸에 대해선 뭐라고 말하면 좋을까. 과외를 시작할 때 엄마는 그녀가 카이스트를 졸업했으며 과외비를 추가로 더 받지 않으면서도 나한테만 한 시간을 더 써주는 거라고 했다. 하지만 그런 요소들이 내 성적에 미친 영향은 거의 없었다. 중령의 딸은 문제 푸는 것만 좋아하는 이십 대 여자였다. 세 시간 동안 다섯 번 정도, 그녀는 무언가를 설명하다 갑자기 고개를 들고는 내 눈을 똑바로 쳐다보며 물었다.

“이해했니?”

부용천을 끼고 있는 다세대주택 2층엔 중령의 딸과 나뿐이었고 나는 그것이 무엇이든 이해를 해보기 위해 나름대로 최선을 다했다. 그러고 있다 보면 그녀가 내 입시를 위해 애쓴다기보다 내가 그녀의 수입을 위해 애쓴다는 생각이 들었다. 화분도 액자도 없어 눈 둘 곳이 책상밖에 없던 거실에서 나는 자주 생각했다. 그녀의 아버지인 중령은 내 아버지에게 대체 뭘까.

“우리 아빠는 군인 아닌데요.”

어느 날 수업 중 무슨 말 끝에 나는 중령의 딸에게 그렇게 말했다. 그녀가 무슨 말을 했기에 나는 그렇게 말했을까. 군인 가족으로 사는 기분에 대해 말하며 내 동의를 구했을까? 자신도 어렸을 때 철원에 잠깐 살았었다는 얘기를 했을까? 중령의 딸이 수업 중에 그런 얘기도 하는 사람이었나? 이유가 무엇이었든, 내 아빠는 군인이 아니라는 말에 그녀의 눈길이 내 얼굴에 잠시간 머물다 거두어지던 것이 떠오른다.

그녀의 아버지는 6사단 소속이었다. 내 아버지는 군인은 아니었지만 역시 6사단 소속이었다. 청운사도 6사단 소속이었다.

그해 가을에 나는 일요일마다 청운사에 갔다. 청운사는 집에서 걸어서 갈 수 있는 거리였다. 동송 읍내로 나와 상노리 쪽으로 십여 분을 걷다 보면 대로변에서 바로 청운사 일주문이 보였다. 일주문 현판은 한글로 쓰여 있었다.

제6보병사단 호국 청운사.

오후 일찍 청운사에 가면 먼저 도착한 애들 몇몇이 한쪽에서 족구를 하거나 군종병의 일을 거들고 있었다. 인근 부대의 병사들이 종교 활동을 하고 빠져나간 시간이었다. 법당엔 법요집과 간식 부스러기들이 흩어져 있었고 뭐라 설명하기 힘든 복잡한 냄새가 고여 있었다. 그 무렵의 청운사는 그 특유의 냄새로 남아 있다. 향냄새만도 아니고 발냄새만도 아니고 빵 냄새만도 아닌 냄새. 오직 군 법당에서만 나는 냄새. 짬내와 향내가 뒤섞인 청운사 냄새.

절 뜰을 분주히 가로질러 걸어가거나 누군가와 오래 얘기를 나누는 군승이 보이기도 했다. 그건 확실히 그해 가을에 청운사에 새로 등장한 풍경이었다.

6사단 군 법당에 새로운 군종 장교가 왔다.

청운사에 한 번이라도 드나들었던 사람은 모두가 그 사실을 체감했다. 법회 홍보물의 문구와 서체가 달라졌고 교리 퀴즈 프로그램과 상품이 등장했다. 교회나 성당으로 가던 병사들이 하나 둘 절로 모여들었다. 청소년 법회 시작 시간이 꽤 남았는데도 여고와 남고 아이들이 절에 미리 와 어슬렁거리기 시작했다. 나도 예외는 아니었다.

내가 토요일 부용천의 그 장거리 과외를 견딘 건 일요일에 있을 보상 때문이었는지도 몰랐다. 아빠만이 내가 청운사에 다니는 걸 싫어했다. 

 

*계간 <대산문화> 2026 가을호(통권 101호)에 전문이 수록되어 있습니다. 

 

최은미
소설가, 1978년생
소설집 『너무 아름다운 꿈』 『목련정전(目連正傳)』 『눈으로 만든 사람』 『다른 사랑』, 장편소설 『아홉번째 파도』 『마주』, 중편소설 『어제는 봄』, 짧은 소설 『별일』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