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편소설
시인

  • 단편소설
  • 2026년 가을호 (통권 101호)
시인

 

눈 맞춤에 관한 시가 있었다. 아이스크림 공장이 배경인 시였다. 파업이 끝난 농성장에서 앳된 남녀 노동자가 서로를 하염없이 바라본다. 시인은 그들을 싸만코와 빠삐코라고 부르고 싶어 한다. 시월이었고 그들은 새벽을 맞는다. 체온보다 1도 낮은 바람이 분다. 왜 1도였을까. 지수는 외롭고 추운 계열의 감정을 가만히 더듬어 보았다. 시림·쓰라림·서글픔·서러움 같은 말들이 늘어섰고, 1도는 아마 그런 작은 낱말들이 머금은 온도일지 몰랐다. 형용사에서 명사로 뭉치는 낱말들. ‘감정으로 변해가는 느낌’이라고 지수는 시집 갈피의 깊숙한 여백에 연필로 작고 흐리게 적어 넣었다. 감상을 거기에 적어넣는 건 그녀의 습관이었다.

플라타너스잎이 져 내리는 은행 창구에 앉아서 지수는 코끝이 시큰했다. 계절감보다 한층 더 마음이 스산했다. 그녀는 마감하는 옆자리 언니를 장난스럽게 바라보았다. 선아 언니가 시재를 맞추다 말고 고개를 들었다. ‘왜?’하고 입술로 물었고, 지수는 “땡! 2초” 하고 눈을 흘겼다. 그 후로 선아 언니와의 아이 콘택트는 곧잘 눈싸움이 되곤 했다.

가만히 마주 보고 있어도 어색하지 않은 눈길.

싸만코와 빠삐코가 연인 사이일 거라고 지수는 멋대로 상상했다. 행간에 그렇게 짐작할 만한 표현은 없었다. 어쩌면 그들은 그저 동료일지 몰랐다. 농성장에서도 신나게 장난치던 공장의 막내들. 동지라는 호칭이 어색해서 서로 동지라고 불러보는 열아홉 살 아이들. 싸만코 동지. 빠삐코 동지.

“난 아직 못 읽었는데, 좋니?”

선아 언니가 물었다. 언니는 지수가 넘긴 시재 명세서를 검수하고 있었다. 지수는 대답을 못 하고 머뭇거렸다. 그날 시집에 대해 지수가 뭐라고 대답했는지 기억나지 않는다. 그 무렵 언니를 보고 있으면 괜히 눈시울이 뜨거워지고, 언니 곁에 오래 머물고 싶다는 생각에 휩싸이고는 했다. 지점 행원들은 파란색 투쟁 조끼를 입고 근무하고 있었을 것이다. 아침저녁으로 유인물을 챙겨서 인근 지하철역이나 백화점 앞으로 선전 활동을 나가고는 했다. 언니가 점심때 식당에서 챙겨온 사탕을 내밀었다. 박하사탕을 입에 물고 시집을 뒤적거리던 늦은 오후가 환해지던 기억은 선명했다.

지수가 그 시를 읽은 건 스물여덟 살 때였다. 인수합병 반대 투쟁을 반년이나 벌이면서 직원들은 지쳐 있었다. 말이 인수합병이지 실상은 은행이 정리되는 수순이었고, 고용 승계 역시 약속처럼 이루어지지 않으리라고 내다봤다. 대규모 구조조정이 불가피하며 기능직 행원부터 해고될 거라고 했다. 지수는 노동쟁의 경험이 처음이었다. 아이스크림 공장의 막내들과 다를 바 없었다. 한편으로 지수는 주정뱅이에다가 빚쟁이로 살던 고향의 아버지를 석 달 전 여름에 떠나보냈다. 고모 말대로 이제 산 사람들이 발 뻗고 살 만해졌는데도, 지수는 때때로 이렇게 괜찮아도 되는지 알 수 없어 마음이 허허로웠다. 마치 헛것이 되어 앉아 있는 기분이었다. 자신이 이미 무너져 버렸는데 눈치를 못 채고 있는가 싶어서 슬리퍼에서 발을 빼 바닥에 대보고는 했다.

그래서 달짝지근한 연시로 읽고 싶었는지 모른다. 뭔가를 천천히 녹여 먹고 싶은 심정이었다. 노조 산하의 문학회에서 시인 초청 강연을 앞두고 나누어 준 시집이었다. 지수는 노동시라는 장르가 생소했다. 그녀는 평소 시를 읽던 감성대로 시집을 읽으며 오독일지도 모른다고 의심하면서도 제 독법으로 읽어 나갔다. 그런 눈빛으로 1도 정도는 능히 온기로 바꿀 수 있으며, 그만한 온도에서 사랑은 시작되는지 모른다. 어디 사랑뿐일까. 시를 읽은 후 지수는 관계의 밀도를 의식하게 되었다. 누군가와 마주 앉았을 때 편하게 눈을 맞출 수 있는 사이인지 가늠해 보고 싶어서 유치하고 은밀한 행동을 하고는 했다. 2초는커녕 잠시도 그렇게 바라볼 수 있는 사이는 그리 많지 않았다. 지수 자신이 겸연쩍어 눈길을 먼저 피하는 경우가 많았을 테지만 이제 서른이 되면 그런 사람을 서너 명쯤 갖고 싶었다. 

 

*계간 <대산문화> 2026 가을호(통권 101호)에 전문이 수록되어 있습니다. 

 

전성태
소설가, 국립순천대학교 문예창작학과 교수, 1969년생
소설집 『매향(埋香)』 『국경을 넘는 일』 『늑대』 『두번의 자화상』 『여기는 괜찮아요』, 장편소설 『여자 이발사』, 산문집 『세상의 큰형들』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