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원히 빨갛지만은 않은 열매
영원히 빨갛지만은 않은 열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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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2020년 「빨간 열매」라는 단편으로 경향신문 신춘문예를 통해 데뷔했다. 초등학생 때부터 이야기를 지어내는 걸 좋아하긴 했지만, 본격적으로 꼴을 갖춘 소설을 쓰기 시작한 것은 스무 살 때의 일. 그리고 2020년은 내가 서른 살이 된 해였으므로 데뷔까지 꼬박 10년이 걸린 셈이다. 나이 앞자리가 2에서 3으로 바뀌는 동안에는 누구나 그러하듯 내게도 많은 일이 있었다. 천신만고 끝에 대학을 졸업했고, 호주로 워킹 홀리데이를 다녀왔으며, 서로 업무 연관성이 전혀 없는 세 군데의 회사를 전전하는 등. 어디에 어떤 모양으로 존재하든 소설은 계속 쓰고 있었다. ‘소설 쓰는 사람.’ 이렇게 말하면 너무 거창하여 부끄럽지만, 그때는 그것이 내 본질이라고 생각했다. 물은 어떤 모양의 병에 담기는지에 따라 모양이 변하지만 그렇다고 물이 물이라는 사실은 변하지 않듯이, 처한 상황에 따라 다른 곳에서 다른 모양으로 살아가지만, 소설을 쓴다는 사실이 변하지 않는다면 나는 변하지 않은 것이다, 라고 생각한 것이다.
지금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소설 쓰기를 자신의 본질로 삼는 인간은 소설가가 될 수는 있을지언정, 좋은 인간이 될 수는 없기 때문이다.
![]() 「빨간 열매」 수록 소설집 『브로콜리 펀치』 |
「빨간 열매」는 내가 이십 대 중반에 쓴 소설이다. 소설은 화자의 병든 아버지가 자신을 화장하여 유골을 화분으로 만들어 달라는 유언을 남기고 죽게 되는데, 그 유언을 따랐더니 화분에 심은 나무가 아버지 목소리로 말하는 것으로 시작되는 이야기다. 화자는 아버지-나무를 데리고 산책을 나갔다가 자신과 매우 닮은 P라는 남자와 그의 어머니-나무를 만나게 되고, 화자는 P와, 아버지-나무는 P의 어머니-나무와 각각 사랑에 빠지게 된다. 네 사람-식물들은 한집에 살며 평온한 사랑의 나날을 보내고 어느새 줄기가 서로 꼬여 한 그루처럼 되어 버린 나무는 빨간 열매를 맺는다. 화자와 P는 그 열매를 어떻게 할지 고민하다가 반으로 나누어 먹어버린다.
이 소설에는 당시의 내가 생각하던 사랑에 대한 정의가 그대로 반영되어 있다. 나는 사랑이란 서로 비슷한 사람끼리 만나 더욱 비슷해져 종내에는 구분할 수 없는 하나의 존재가 되어가는 행위라고 생각했다. 뒤집어 말하면 그 경지에 이르지 못하면 결국 사랑이 아니라고 생각했다는 거다. 실제로 이십 대 시절, 나는 내가 사랑했던 모든 사람을 무조건 닮아가려고 애썼다. 그것을 진심으로 좋아해서 그러는 척하면서. 별로 오고 싶지 않았던 곳에서 입고 싶지 않았던 옷차림을 한 채 즐거워하려 애썼고, 다른 사람에게서 발견했다면 눈살을 찌푸렸을 지점들을 사랑하는 사람의 독특함이라고 포장하며 따라 했다.
삼십 대에 접어들며 그 모든 것이 바보짓이었다는 걸 깨달아 알고 있었으므로, 나는 데뷔 후 등단작 「빨간 열매」에 관해 말해야 할 때마다 이 이야기를 하곤 했다. 그때 내가 얼마나 맹목적이고 고리타분했는지, 지금 내 생각은 얼마나 바뀌었는지. 그러면서 이렇게 말했던 것도 같다. ‘사랑은 비슷한 사람이 만나 더 비슷해지는 것이 아니라, 서로 다른 사람들이 만나 각자의 다름을 유지하면서 살아가는 것’이라고. 글쎄, 그때는 그 깨달음이 너무 기껍고 신나서 그렇게 떠들었는데, 지금 와 생각하면 이 말도 우습기 짝이 없게 들린다. 서로 사랑하는 두 인간이 각자의 다름을 유지한다는 것이 가능한가? 그냥 멋대로 살게 내버려둔다는 말을 좀 정돈된 언어로 다듬은 것 아닌가? 아니, 그전에 사랑이 무엇인지를 정의하려 한다는 자체가 사랑에 대해 잘 모른다는 의미가 아닐까? 그래서 나는 말을 아끼기로 했다. 잘 모르는 것에 대해서 으레 그래야 하듯이. 그런데 이상하지, 소설을 쓰고 나면 그건 어김없이 사랑 얘기다. 마치 사랑이라는 감정만 있는 별에 사는 사람처럼.
「빨간 열매」를 통해 독자를 만나게 된 지 이제 7년쯤 됐다. 언제까지 사랑 얘기를 할지는 모르지만 아마 앞으로도 좀 더 하게 되지 않을까 싶다. 인간사에서 가장 중요한 것, 하지만 정확히 무엇인지는 알 수 없는 그것에 관한 이야기를. 그리고 언젠가 알게 되는 날이 온다면, 나는 비로소 더 이상 그것에 관해 쓰지 않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