꺾이지 않는 지조로 사신 '설중매'
꺾이지 않는 지조로 사신 '설중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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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현숙(1926~2020) 1959년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항변」이 입선하였고, 1962년 「땅 위에 서다」가 당선되었다. 배우, 기자, 가정법원 조정위원으로 쌓은 경험을 바탕으로 가족과 결혼이라는 주제를 통해 제도의 모순과 균열을 관찰하였다. 가정이라는 사적 공간과 역사적 현실을 이어 전후 한국 사회의 부조리를 포착한 작품을 다수 창작하였다. |
![]() 박현숙 극작가 |
2023년 8월 어머니 관련 주제로 진행된 한국여성문학인회 심포지엄에서 중앙대 후배로, 소설가이신 김지연 선생님은 회고사에서 “내가 하늘나라에 가면 꼭 찾아서 뵙고 싶은 한 분이 박현숙 작가님이시다”라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리고 며칠 후 낯선 번호의 전화를 받았습니다. 성신여대 교수셨던 허영자 시인이셨습니다. 대학로 한 카페로 향했습니다. “이제 나이도 들고 다시 유족에게 돌려주고 싶다”는 말씀과 함께 어머니께 선물 받은 청와대 문양 식기를 전해주셨습니다.
어머니는 정이 참 많고 베푸는 삶을 사신 따뜻한 분이셨던 걸로 전 기억합니다. 그리고 어려움에 맞서서는 정면 돌파를 하시는 강인하고 대범한 여장부셨습니다.
어머니는 할아버지가 독립운동에 관여하시다 2~3살 때 돌아가셔서 무남독녀로 외롭게 자라셨습니다. 어머니는 “할아버지가 구타당한 흔적으로 밭에 버려져 있었다는 사실을 상당 기간 지난 후에 알게 되었다”고 하셨습니다. 할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일본군을 피해 평안도 출생인 어머니는 황해도로 피신하셔서 본적이 황해도 재령으로 되어 있습니다.
해방 후 이북에 소련 군정이 시작되자, 홀로 서울로 내려오셔서 중앙대를 다니셨습니다. 학교 여성부장으로 활동하며 받은 장학금으로 학비를 일부 해결하고, 가방에 화장품을 넣고 다니며 방문판매 등을 하며 생활하셨습니다. 정부 배급 쌀을 받으러 갔다가 “대학생이 무슨 배급 쌀을 타러 왔냐?”는 말이 가슴에 지워지지 않는 멍으로 남으셨는지 가끔 반복해서 말씀하시곤 했습니다.
초등학교 시절, 저는 황달이라는 병으로 입원한 적이 있습니다. 그때 제가 자는 줄 아시고 눈물을 흘리시며 나직한 목소리로 “제가 죄인이니 저에게 벌을 주십시오”라고 기도하시던 어머니의 모습을, 저는 실눈을 뜨고 보았습니다. 아직도 그 모습이 눈에 선하게 떠오릅니다.
할아버지를 기억하시지는 못하셨지만 전해 들으셨던 대로 “할아버지 외모와 성격을 많이 닮은 것 같다”고 말씀하신 적이 있었습니다. 그래서인지 어머니는 저에게 조금은 각별한 사랑을 주신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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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는 참 다양한 활동을 하셨습니다. 대학 시절에는 성우·연극배우·영화배우 등 다양한 활동을 하셨습니다. 1949년 제1회 전국남녀연극경연대회에서 한국 초연 <햄릿>에서 오필리어 역으로 개인 연기상을 받으시고, 같은 해 영화 <북위 38도> 배우로 발탁되어 “촬영은 완결됐지만 6·25 때 필름 훼손으로 상영되지는 못했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이후 기자 생활, 연극 연기 등을 계속하시다 1956년 제작극회 창단 멤버로 참여하시게 됩니다.
그리고 꾸준히 작품활동을 하셔서 희곡집 4권과 수필집 4권 그리고 2001년에는 『박현숙 문학전집』(전 7권)을 출간하셨습니다.
노년에 어머니께서는 본인이 직접 가서 보시고 선택하신 요양병원 시설을 갖춘 실버타운에서 지내셨습니다. 코로나-19로 게스트룸이 폐쇄되기 전까지는 한 달에 한 번 이상 하루이틀 숙박하며 어머니를 뵈었습니다. 어머니는 제가 오면 주려고 맛있는 음식이나 음료수를 준비하셨고, 아무리 거절해도 차비를 주려고 하셨습니다.
어머니가 가신 2020년 겨울에는 코로나-19가 더 확산해, 특히 노인분들이 거주하는 장소는 대면 면회가 금지되어 유리문을 사이에 두고 인사를 드릴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고, 위독하셨을 때조차 방문이나 면회가 어려웠습니다. 제가 기억하는 어머니의 마지막 말씀이 “너무 힘들다. 이제 쉬고 싶다”란 말씀입니다.
입관식에서 어머니께 전하는 마지막 인사말로 “어머니! 어머니는 참 좋은 어머니셨어요”라는 말 외에는 할 수가 없었습니다. 머리가 하얘져 다른 인사말은 생각나지 않았습니다. 어머니는 일생을 당신의 호 ‘설중매’처럼 꺾이지 않는 지조로 사셨습니다. 저희를 사랑으로 키워주셨습니다. 어머니 숙원이셨던 장학사업은 아직 저희 숙제로 남아 있습니다.
어머니 그립습니다. 보고 싶습니다. 하늘이 허락하실 때까지 부끄럽지 않은 아들로 이 삶을 잘 마무리하도록 노력하며 살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수고 많으셨습니다.
사랑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