탄생 100주년 문학인 기념:나의 어머니·나의 할머니
나의 어머니 김자림

믿음과 사랑 심어 주신

  • 탄생 100주년 문학인 기념:나의 어머니·나의 할머니
  • 2026년 가을호 (통권 101호)
나의 어머니 김자림

믿음과 사랑 심어 주신

김자림(1926~1994)

1959년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돌개바람」이, 1960년 국립극장과 서울신문이 공동 주최한 작품 모집에 「인공낙원」이 입선되며 작품 활동을 시작하였다. 여성 문제에서 출발해 분단의 비극, 물질문명에 대한 비판, 한국 현대사의 단면까지 주제를 폭넓게 확장하였다. 개인의 삶과 시대의 모순을 날카롭게 포착하며 한국 희곡의 지평을 넓히는 데 기여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김자림 극작가

어머니는 호랑이띠이다. 그리고 정말 우연찮게도 어머니와 나는 8월 21일, 같은 날에 태어났다. 유년 시절 내가 기억하는 어머니는 범처럼 활동적이고, 자신만만하며, 세상에 무서울 것이 없는 분이셨다. 동시에 아버지와 같은 길을 걷는 문필(文筆) 부부로서 사랑 넘치는 아내였고, 세 아들을 양육하는 다정한 어머니였으며, 가정주부로 숨 쉴 틈 없이 바쁜 와중에도 늘 원고지에 파묻혀 살며 왕성하게 집필 활동을 하시던 분이었다. 매사에 적극적이고 긍정적이셨던, 그야말로 ‘보통이 넘는’ 어머니의 행보와 생각을, 평범한 아들인 내가 따라가기에는 늘 힘에 부치곤 했다.

집에서의 어머니는 늘 원고지와 함께 계셨다. 깊은 밤까지 책상 앞에 앉아서 한 줄 한 줄 글을 써 내려가시던 모습이 아직도 눈에 선하다. 작품을 쓰실 때는 누구보다 엄격하셨지만, 가족을 향한 사랑은 그보다 훨씬 깊었다. 때로는 엄한 어머니였어도 자식들의 미래를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희생하셨고, 올바르게 살아가는 것이 무엇인지 삶으로 몸소 보여주셨다. 항상 앞서가시던 어머니. 우리는 늘 가사도우미분의 도움을 받으며 지냈는데, 그렇게 분주하시던 어머니가 아주 드물게 우리 세 형제에게 음식을 만들어 주실 때가 있었다. 그 손길은 참 정갈했고, 음식은 얼마나 맛있었는지…. 그때 맛본 어머니의 손맛이 아직도 사무치게 그립다.

어머니와 아버지는 늘 서로를 아끼고 배려하며 사랑하셨고, 우리는 그 모습을 보며 자랐다. 아버지는 비가 오는 날이면 우산을 들고 어머니를 맞이하러 버스 정거장에 나가 기다리실 정도로 사랑이 애틋하셨다. 두 분은 당신들의 작품세계와 문학관을 늘 의논하고 나누셨다. 응접실 소파에 나란히 앉아 서로의 작품을 품평하며 다정하게 대화를 주고받으시던 모습이 종종 기억난다. 사범대학을 졸업하신 어머니는 교육자로서 유년 시절의 우리를 꽤 엄격하게 교육하기도 하셨다.

종종 작품 구상이 잘되지 않을 때면 어머니는 원고 뭉치를 싸 들고 조용한 공간을 찾아 집필에 몰두하셨다. 그래서 우리 집은 늘 조용해야만 했다. 어머니 서재 문은 언제나 닫혀있었고, 방과 후 돌아온 내가 조심스레 그 문을 열 때면 책상에 앉아 집필에 몰두해 계신 어머니 뒷모습이 보였다. 나는 소리 없이 다시 문을 닫곤 했다.

내 유년 시절은 늘 부모님 원고지 위에서 함께 채워져 간 삶이었다. 원고를 시간과 날짜에 맞춰 신문사·잡지사·방송국에 배달하는 것은 내 소소한 일거리였다. 그때 늘 궁금했던 것은, 두 분 모두 왜 번갈아 가며 꼭 마감 직전에야 탈고하시는지였다. 시간에 쫓겨 짜내신 글을 배달하느라 나 역시 늘 시간에 쫓겼고, 급하게 택시를 타거나 숨이 턱에 차도록 뛰어야 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원고료를 받으러 다니는 것도 내 몫이었다. 각 신문사와 잡지사의 편집국 담당자들이 나를 다 알아볼 정도였다. 한번은 부모님께 “삼형제 중에 왜 내게만 일을 시키시느냐?”고 투정을 부린 적이 있다. 그때 부모님께서는 “네가 가장 정확하고 일 처리를 잘한다”라고 말씀하셨고, 나는 그 말에 더는 할 말을 잃은 채 울며 겨자 먹기로 원고 심부름을 도맡아 하는 ‘배달의 기수’가 되었다.

어릴 적 어머니는 나를 데리고 시장에 자주 다니셨는데, 돌아오는 길 내 두 손에는 장 본 보따리가 가득했다. 삼형제 중 둘째인 나는 늘 어머니와 아버지의 양옆을 보필하는 비서 역할을 많이 했다. 부모님이 늘 나만 부르셨던 것을 보면, 나는 부모님 말씀에 늘 순종하는 착한 아들이었던 모양이다.

어머니는 새벽예배를 자주 다니셨다. 추운 겨울 새벽, 예배를 마치고 돌아오셔서 내 머리에 손을 얹고 안수기도를 해주실 때면 잠이 확 깨곤 했다. 잠은 깼지만 차마 눈은 뜨지 못했다. 내가 깬 것을 알면 어머니가 당황해하실까 봐, 그저 숨을 죽인 채 꼼짝하지 않고 누워 있었다. 지금도 현관문이 ‘찰칵’ 하고 열리는 소리가 들리면 어머니의 그 찬 손이 먼저 생각난다. 이제는 만질 수 없는 어머니의 찬 손, 그리고 나를 위해 눈물로 쏟아내시던 그 영적인 기도가 너무나도 그립다. 어머니 기도에는 영적인 힘이 있었다. 그런 어머니가 사무치게 보고 싶다.

아버지가 작고하신 후, 어머니는 부부의 그 애틋한 사랑을 못 잊어 외로워하셨다. 그래서 내가 사는 공기 좋고 물 맑은 알래스카로 어머니를 모셔 왔다. 한국에서의 모든 문학 활동과 함께했던 여성 문인들을 뒤로하고 시작된 어머니의 이민 길을 보며, 나는 내가 초등학교 5학년(11살)이던 1966년 명동국립극장에서 공연된 어머니의 희곡 「이민선」을 떠올렸다. 당시 우리 가족은 어머니의 첫 연극 공연을 관람한 후, 국립극장 인근에 있던 ‘허바허바 사진관’에 모여 다 함께 가족사진을 찍었었다. 세월이 흘러 어머니는 당신이 쓰신 희곡 제목처럼 진짜 이민선에 오르신 것이었다.

미국으로 이주하신 후, 어머니는 한동안 큰아들과 작은아들 집을 오가며 사셨다. 손주들도 품에 안아보시고, 일찍이 기독교에 귀의하셨던 당신의 깊은 신앙을 바탕으로 권사가 된 어머니는 신앙 창작과 간증을 통해 믿음의 열매를 맺어가는 일에 온 열정을 쏟으셨다.

1994년, 캘리포니아에 계시던 어머니께서 알래스카를 거쳐 시애틀로 이주해 온 내게 전화를 걸어오셨다. “성우야, 이젠 너하고 살고 싶구나.” 그렇게 어머니는 내가 사는 워싱턴주 벨뷰(Bellevue)로 오셨다.

오신 지 얼마 되지 않아, 어머니는 가슴 아래가 자주 담이 걸린 것처럼 결린다고 하셨다. 걱정스러운 마음에 병원을 찾았는데, 아, 이게 웬 청천벽력 같은 날벼락인가. 어머니가 암에 걸리셨고, 앞으로 남은 시간이 6개월 남짓이라는 시한부 선고를 받게 되었다. 이제 어머니를 모시고 정말 행복하고 재미있게 살려고 했는데… 가슴이 무너져 내렸다.

그날 이후, 우리 부부와 어머니는 기도로 하나님께 더 많이 매달리며 의지했다. 어머니는 오히려 담담한 믿음의 빛을 보이시며 “이제 하나님께서 나를 부르시는구나!” 하고 받아들이셨다. 종종 내 얼굴을 바라보시며 “넌 네 아버지를 참 많이 닮았구나” 하실 때면, 나는 “그럼요 어머니, 저 보실 때 아버지 본다고 생각하시면 되겠네요” 하고 일부러 장난스레 웃음 섞인 농담을 건네기도 했다. 그런 와중에도 어머니는 틈틈이 집필하신 수필과 신앙 간증문을 한국에 팩스(Fax)로 보내셨고, 나와 함께 지나온 날들의 추억을 더듬으셨다.

 

 『이민선』 출판기념회에서 아버지(양명문 시인)와 어머니

 

 

 

1960년 《여원》에 실린 어머니(김자림)의 수제비 칼국수를 맛있게 먹는 가족 사진. 왼쪽 아래부터 시계 방향으로 동생 양성태, 필자, 아버지, 장남 양성규, 어머니

하루는 어머니께서 내 손을 꼭 잡고 말씀하셨다. “이 세상에서는 부귀영화도, 그 어떤 것도 다 필요 없다. 난 네가 예수님 잘 믿고 천국에서 다시 만나자는 것이 내 유언이다.” 어머니가 남기신 그 말씀대로, 나는 어머니가 작고하신 후 유언을 마음에 품고 더욱 신실하게 믿음 생활을 이어오고 있다.

나는 어머니와 마지막 6개월을 함께 살며 어머니의 임종을 지켰다. 수십 년간 함께해 온 모자(母子)의 잊지 못할 마지막 합동 생일을 뒤로하고, 어머니는 국화꽃이 가득한 어느 가을날 하늘나라로 가셨다. 내 삶에는 수많은 간증이 있지만, 그 고통이 극심하다는 암 투병 중에도 어머니의 기도에 응답하셔서 마지막 순간까지 통증 없이 평안하게 인도해 주신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할 뿐이다.

생전에 어머니는 내게 물으셨다. “성우야, 앞으로 내가 지낼 수 있는 크리스마스는 몇 번이나 될까?” 1993년 겨울, 어머니와 나누었던 크리스마스의 대화를 떠올리며, 나는 지금 부활절 아침 집 앞에 화창하게 피어난 벚꽃을 바라본다.

‘어머니, 저에게 이 흐드러지게 핀 부활절 벚꽃을 볼 수 있는 날은 앞으로 몇 번이나 남아 있을까요?’

사랑하는 나의 어머니. 나에게 세상에서 가장 고귀한 믿음의 유산을 남겨주신 분. 삶의 마지막 순간까지 믿음의 열매를 맺어가셨고, 내 삶의 가장 소중한 이정표를 남겨주신 나의 어머니.

어머니, 당신의 인생이라는 연극의 막은 내려졌을지 몰라도, 아들이라는 가장 아름다운 배역이 이 무대 위에 남아 당신의 대사를 눈물과 사랑으로 이어가고 있습니다. 8월 21일에도, 그리고 그다음 해에도, 저는 우리 두 사람의 생일을 축하하며 당신이 가르쳐준 대로 당당하게 제 삶의 무대를 채워가겠습니다. 제 삶의 영원한 작가이신 어머니, 당신의 아들이어서 진심으로 자랑스럽고 행복합니다. 

양성우
극작가 김자림 선생의 차남, 장로, 1955년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