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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상물의 위력
인공지능의 지원을 받아 제작된 다양한 생산물이 우리 주위에 불시로 다가와 우리를 놀라게 한다. 다양한 예술 창작에도 뛰어난 수완을 보여 작가들을 긴장시키기도 한다. 번역과 통역에 중요한 역할을 맡은 것은 오래되었고, 앵커로 나와서 뉴스를 보도하거나 대담을 하기도 하고, 알려진 인물의 어린 시절이나 노년 시대를 재현하기도 한다. 그런 경우 화면 아래 “AI를 기반으로 제작한 영상입니다”라는 자막이 깔려서 사실 관계를 알려주는데, 그 문구를 통해 인공지능이 우리에게 이렇게 육박해 왔다는 사실을 절감하게 된다.
ChatGPT와 Gemini 같은 대화형 인공지능과 문답을 나누고 정보를 공유하다 보면, 내 질문에 알뜰하게 대답해 주며 나의 잘못된 발음까지도 교정해 주는 가상 비서에게 인간 이상의 친밀감을 느끼기도 한다. 어렵고 지루한 팔리어 경전 번역본을 읽다가 거기 등장하는 인물의 이름을 일일이 검색하기 어려워 대화형으로 질문했다. 예를 들어 “마가다의 왕 아자따삿뚜 웨데히뿟따”처럼 경음으로 이어져 발음조차 까다로운 명칭이었는데, 무엇을 물어도 조금도 막힘없이 친절하게 대답해 주어 감사의 마음이 저절로 우러났다. 이러한 경험을 계속하다 보면 경탄의 심정과 함께 일말의 두려움이 마음에 일어난다. 이렇게 AI에 의존하다 보면 나의 사고력과 추리력은 점점 유약해지고 퇴화하는 것이 아닐까 하는 의구심이 든다.
드라마를 위시한 다양한 오락 영상물에도 인공지능이 다양한 역할을 맡고 있다. 드라마 도입부에 일부 영상은 AI로 제작되었다는 문구만 나와서 실제 장면 어디까지가 인간의 연기이고 어디서부터가 AI의 구성인지 헷갈릴 때가 있다. 감독과 제작자의 표현력을 확장하는 데 AI는 실제로 혁명적인 기능을 수행한다. 연기자가 실제로 하기 어려운 격렬한 액션 장면이나 잔혹한 장면을 AI로 구성하는 때가 많은데 그런 경우 영상은 예외 없이 폭력적이고 파괴적이다. 이러한 영상물이 끔찍할수록 보는 사람 뇌리에 깊게 박히고 한번 박힌 영상의 기억은 쉽게 사라지지 않는다. 특히 시각적 영상은 흡인력이 아주 크고 기억과 재생의 강도도 높다.
최근 사회 현상을 보면 특별한 이유 없는 폭력과 살상 행위가 증가하는 것을 볼 수 있다. 대화를 나누다가 감정이 격해지면 흉기를 들고 무차별 공격하는 사건이 빈번하게 일어난다. 폭력도 전염이 되는지 나이와 성별을 넘어서서 어린 소년이나 젊은 여성이 잔인하게 폭력을 행사하거나 집단 폭행에 가담하는 사례도 많이 볼 수 있다. 이러한 폭력 행위의 생산과 확대에 기억 속에 남아 있는 폭력 영상물의 영향이 작용했을 가능성이 아주 높다. 살인 관련 영상물을 많이 접한 사람이 살인을 저지르고, 폭력 관련 영상물에 많이 노출된 사람이 유사 행위를 벌일 가능성이 높다는 사실은 이미 많은 사례를 통해 입증되었다. 성폭력 범죄자일수록 포르노 영상물에 노출된 비중이 높다는 것도 이미 검증된 사실이다. 이야기를 나누다가 어떤 이유로 흥분하면 예전에는 멱살을 잡거나 주먹다짐을 벌이는 것이 보통이었는데, 지금은 흉기부터 찾거나 둔기를 들어 가격한다. 누가 시킨 것도 아닌데 흉기를 찾는 것이 우연이 아닐 것이다. 자신이 본 영상물의 한 장면이 자기도 모르게 그러한 행동을 유도했다고 해석할 수 있다.
사정이 이러하다고 해서 지금 폭력 외설 영상물을 규제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아니다. AI가 인간 능력을 넘어설까 우려하여 AI와 싸울 수는 없다. 이미 굴러온 바퀴를 어떻게 되돌리겠는가? AI의 과잉 작용에 대비하면서 효율적으로 이용할 길을 찾는 것이 상책이다. 인간이 만들어낸 영상물의 범람 속에서 어떻게 인간 윤리를 회복하고 윤리의 지침을 유지할 수 있을지 방안을 모색해야 한다. 여러 가지 가닥이 꼬인 착잡한 문제를 해결할 묘책은 없지만, 결자해지(結者解之)의 심정으로 하나씩 실마리를 풀어가야 한다.
분노와 절제
이유 없는 폭력이라고 했지만, 폭력을 행사하는 것은 어떤 이유에서든 화가 났기 때문이다. 남에게 논리적으로 설명할 수 없다고 하더라도 분노가 치밀었기 때문에 폭력을 가한 것이다. 화가 났다고 해서 무조건 폭력을 행사함이 옳은 일이냐고 물으면, 열의 아홉은 아니라고 답한다. 그렇게 생각하는 것은 우리가 지금까지 사회생활을 하면서 익힌 도덕률 때문이다. 사람으로서 지켜야 할 기본적인 도의를 알기에 화가 나도 그것을 참고 폭력으로 번지지 않도록 인내하게 된다. 연이어 일어나는 폭력 사건을 보면 이 인내와 절제가 사람들에게 결여되어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한마디로 말하여 참는 훈련이 되어 있지 않은 것이다. 사회에서든 학교에서든 지켜야 할 규범을 넘지 않도록 절제하는 훈련이 필요한데, 이 중요한 규범을 가르치지 못했다. 욕망의 절제가 욕망의 충족보다 중요하다는 사실을 어릴 때부터 알게 해야 하는데, 이 중요한 덕성을 기르지 못한 것이 병통이 되었다.
욕망은 끝이 없고 충족의 정도는 제한이 있으니 충족되지 못한 욕구는 분노로 변한다. 분노는 남에 대한 적개심으로 변해서 불쾌한 일이 발생하면 타인에 대한 공격으로 터져 나온다. 그러니까 우리가 먼저 자각하고 인정해야 할 것은 우리 내부에 분노가 팽배해 있다는 사실이다. 이웃에 대한 사랑은 종교 법전에 나오는 고상한 담론이고, 우리는 모두 타인에 대한 적개심에 바탕을 둔 분노가 머리와 가슴을 채우고 있다. 이 적개심의 정체는 무엇인가?
적개심은 경쟁에서 오고 경쟁은 비교에서 온다. 우리 사회는 어릴 때부터 경쟁을 부추기고 어떻게 해서든 남을 앞서야 한다고 가르친다. 경쟁 사회를 살고 있으니 남보다 내가 나아야 하는데 비교해 보면 그렇지 못하고 자신의 능력으로는 남을 뛰어넘을 수 없다. 이러니 타인에 대한 적개심이 농축된다. 저놈이 없으면 내가 경쟁할 필요가 없고 내가 뒤처져도 괴로울 이유가 없는데 저놈 때문에 괴롭게 되었다는 무의식적 충동이 타인에 대한 증오와 적개심을 갖게 한다.
모두가 가난하고 못 살던 시절에는 남보다 못한 것이 그렇게 괴롭지 않았다. 자료를 찾아보니 내가 태어난 1955년 1인당 국민소득은 67불 정도였다. 그때는 전 국민이 가난했으므로 뛰어 봤자 벼룩이고 앞서 봤자 도토리 키 재기였다. 그러나 지금은 국민소득이 4만 불에 육박한다고 한다. 어떤 사람은 4만 불 이상으로 소득과 부를 점유하고, 어떤 사람은 2만 불 이하 소득에 머문다면 두 사람의 격차는 엄청나게 크다. 부가 세습되면서 소위 금수저와 흙수저의 피할 수 없는 대립과 갈등이 발생한다. 태어날 때부터 부자인 사람은 이변이 없는 한 평생 부자로 살고, 가난하게 태어난 사람은 부자를 능가할 수 없다. 두 부류의 사람은 경쟁 자체가 성립되지 않으니, 적개심과 증오심이 쌓일 뿐이다. 소득의 분배는 정책으로 가능하지만, 자산의 재분배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가능하지 않다.
이 문제가 무엇보다 심각하다는 점을 많은 사람이 알면서도 그 해결책은 누구도 제시하지 못한다. 해결책은커녕 격차가 점점 커지는 것이 문제다. 서울 중요 지역 아파트 가격은 지방 부동산의 열 배 스무 배에 달한다. 부동산 가격이 오른다고 아우성칠 때, 지방 집값은 오히려 하락한다. 이러한 부의 격차가 치명적인 경쟁의식을 부추기고, 과도한 경쟁심이 타인에 대한 증오와 적개심을 낳는다. 증오와 적개심은 직접 노출되지 않은 상태에서 무의식의 저층에 적재된다. 자기도 모르는 가운데 내면의 저장고에 알 수 없는 덩어리로 축적된다. 이 감정이 어떤 자극에 의해 분노로 폭발하면서 무의식에 저장되어 있던 시각적 폭력 영상과 접합하면 자신도 모르는 가운데 걷잡을 수 없는 가학적 폭력이 발생한다. 폭행으로 사람을 해친 사람들이 이구동성으로 하는 말이 있다. “이럴 생각은 없었어요.”, “이렇게 될 줄은 몰랐어요.” 끔찍한 폭력 사건이 발생하는 심리적 메커니즘은 대체로 이러하다.
고전적 명제의 반추
현대 AI 영상시대의 초 첨단 문명사회에서 나는 아주 오래전 과거의 해묵은 원초적 사유에서 해결의 실마리를 찾아보려 한다. 오랫동안 전승되어 온 인간의 고전적 지혜 속에 현대 문제를 해결할 단서가 내장되어 있을지 모르기 때문이다. 과거란 단순히 지나간 시간이 아니다. 인류의 지혜가 응축된 무의식의 저장고다. 오랜 전승을 거친 과거 담론이 현대인 행동 윤리와 도덕 생활의 방향을 제시해 줄 수 있을지 모른다. 특히 동양의 한문 문구가 지닌 추상적 함축성이 의미의 다면성을 통해 현대의 분석적이고 일의적인 사유를 해체하고 열린 지평을 제시해 줄 수 있을 것이다.
동양의 고전 『논어』 ‘자로편(子路篇)’에 다음과 같은 유명한 구절이 나온다.
자로가 여쭈었다. “위나라 군주가 선생님을 모셔서 정치를 하려고 합니다. 선생님은 무엇을 먼저 하시겠습니까?” 공자가 말하기를 “반드시 이름에 맞는 처신을 하도록 바로잡을[正名] 것이야.” 자로가 말하기를 “그렇게 하신다고요? 선생님은 현실과 먼 이야기를 하십니다. 어떻게 그것을 바로잡을 수 있겠습니까?” 공자가 말했다. “네 말이 거칠구나. 올바른 사람(군자)은 자기가 모르는 일에 대해서 입을 다무는 법이다. (들어 보아라) 이름에 맞는 처신을 하지 않으면 말이 순조롭지 않고, 말이 순조롭지 못하면 일이 이루어지지 않는다. 일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예악(질서와 조화)이 흥하지 못하고, 예악이 흥하지 못하면 형벌이 공정하지 못하게 된다. 형벌이 공정하지 못하면 백성들이 어찌할 바를 모르게 된다. 그러므로 군자가 이름을 내세울 때는 반드시 말이 그 이름에 부합해야 하고, 말은 반드시 실행할 수 있어야 한다(언행이 명분에 맞아야 한다). 군자는 자신의 말에 구차한 구석이 없어야 한다.
[子路曰 衛君待子而爲政 子將奚先. 子曰 必也正名乎. 子路曰 有是哉 子之迂也 奚其正. 子曰 野哉由也 君子於其所不知 蓋闕如也 名不正 則言不順 言不順 則事不成 事不成 則禮樂不興 禮樂不興 則刑罰不中 刑罰不中 則民無所措手足 故君子名之必可言也 言之必可行也 君子於其言 無所苟而已矣.]
몇 개의 번역서를 열람하고 속뜻을 살펴 의역해 보았다. 공자가 이렇게 말한 시대적 배경이 있지만, 그것을 따로 살펴 논의를 확장하지 않고, 공자의 뜻만을 파악하여 우리가 이용할 맥락을 찾아보겠다. 공자는, 군주는 군주의 이름에 맞는 언행을 하고 신하는 신하의 이름에 맞는 언행을 하는 것을 이상으로 삼았다. 세상 모든 사람은 자신의 상황과 신분에 맞는 이름을 갖게 되는데, 그 이름을 갖게 되면 거기 맞는 언행을 해야 질서와 조화가 유지된다고 보았다. 질서와 조화가 겉으로 드러난 제도적 형태를 예도와 음악으로 상징화했다.
공자의 생각은 현대에도 활용할 만한 유용한 요소가 있다. 여기 나오는 ‘이름’은 요즘 말로 하면 명분, 가치관이란 개념으로 대치해 이해하면 좋을 것이다. 학교에 직장을 얻어 교사라는 명칭을 갖게 되면 그 사람은 교사라는 명분에 맞는 언행을 해야 옳고 그 교사에게 배우는 학생은 학생이라는 이름에 맞게 처신해야 옳다. 학생을 학교에 보낸 학부모는 학부모라는 이름에 맞는 언행을 보여야 한다. 시대가 변하고 복잡해져서 교사를 믿지 못하고 학부모의 위상이 바뀌었다고 해도 인간의 기본 바탕으로 돌아가 가만히 자신의 위치를 생각하면 교사는 어떠해야 하고 학부모는 어떠해야 하는지 모를 리가 없다. 그런데 그런 자숙의 시간을 갖지 못하고 당장 감정에 휩싸여 분노를 조절하지 못하면 상대방에 대한 기이한 적개심이 비대해져서 폭력과 고소, 고발로 이어지게 된다.
우리 사회가 직면한 사회 문제 중 가장 심각한 사안이 데이트 폭력이다. 사랑으로 엮어진 두 사람이 폭력으로 관계를 끝장낸다는 것은 우리 사회의 인간관계가 얼마나 모순과 위선으로 엮여 있는가를 노골적으로 드러낸다. 사랑을 내세우던 남자가 헤어지자는 여자 말에 격분하여 폭력을 행사하고, 남자에게 접근 금지 명령을 내려도 빈틈을 노려 끝내 목숨을 빼앗는 엽기적인 사건이 반복해서 일어나고 있다. 여자만 목숨을 잃는 것이 아니라 여자의 가족까지 목숨을 위협당하는 일이 일어난다. 이런 일은 전에는 별로 없었는데 어느 시점 이후로 발생하더니 시간이 갈수록 빈도가 증가하고 있다. 통계에 의하면 한 해에 일어나는 데이트 폭력 사건은 만 건 가까이 되고 사망 건수도 해마다 증가하는 추세다.
이렇게 생명을 위협하는 데이트 폭력 사건이 일어나는 것은 생명 경시 풍조 때문이 아니다. 남녀의 애정 관계를 지탱하는 사랑이라는 개념이 어떠한 것인지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연인이라는 이름에 부합하는 언행이 무엇인지 학습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사랑이 무엇인지 모르고 단순히 본능적인 호기심에 끌려 교제하다가 한쪽에서 절교를 선언하면 경쟁심과 적개심으로 뒤범벅이 된 분노가 치솟는다. 분노 조절 능력을 상실하고 증오와 적개심이 팽만하면 상대방을 잔인하게 해치게 된다. 일이 다 끝난 다음에야 왜 이렇게 되었는지 모르겠다고 중얼거린다.
이런 경우 분노가 치미는 사람에게 연인이었던 자신의 처지나 위상을 생각해 보라고 말하는 것은 설득력이 없다. 분노로 이성을 잃은 사람에게 무슨 조언이 필요하겠는가? 정말 필요한 것은 그 전에 수행되어야 했을 평상시 윤리 교육과 심성 수양이다. 인간이란 이름을 가진 존재에 관한 기본적인 윤리 학습이 이루어져야 옳았다. 인간이란 어떤 존재이며 어떻게 세상을 살아가야 하는가에 대한 기본적 학습이 기회 있을 때마다 지속적으로 행해져야 한다. 교육은 학교에서만 하는 것이 아니라 사회 전체가 광범위하게 전반적으로 수행해야 한다. 방송과 언론을 통해서, 책자를 통해서, 대중전달 매체를 통해서, 다양한 방법으로 존재 학습이 수행되어야 한다.
존재 학습은 추상적인 덕목이 아니라 교육 실천의 아주 중요한 영역이다. 이것은 공자가 말한, 이름에 맞는 언행의 학습이다. 사람이라면 사람에 맞는 언행을 실천해야 하고, 애인이라면 애인에 맞는 언행을 보여 주어야 한다. 자신이 사람인데 어떤 언행을 취해야 할지 모르고, 애인인데 어떤 언행을 보여야 할지 모른다면, 어떤 방법을 통해서라도 그것을 학습해야 한다. 가정과 학교와 사회가 이것을 총체적으로 교육해야 한다. 국민소득을 늘리고 부동산 문제를 해결하고 분열과 갈등을 조정하는 일보다 존재 학습이 가장 먼저 실행되어야 한다. 사회 지도층부터 이 문제의 중요성을 자각하고 이것이 이루어지도록 다양한 방안을 모색하고 추진해야 한다. 존재 학습과 교육이 국가 백년대계를 넘어 인류의 존폐를 좌우할 것이다. 여기에 대한민국의 미래와 인류의 미래가 달려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