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있지"와 "없어" 사이
"있지"와 "없어" 사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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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책에는 무엇이 있고 무엇이 없을까? 그림책에는 어린이가 있다. 그림책은 어린이만 읽는 책은 아니지만 어린이가 누구보다 사랑하는 책이다. 너덜너덜해질 정도로 밤마다 읽어달라고 조르고, 행여 꿈에서 만날까 머리맡에 책을 두는 어린이 독자들의 애정이 없었다면 그림책의 시대는 없었을 것이다. 그림책에는 어른도 있다. 어린이는 그림책에서 낯선 어른을 만난다. 그들이 믿음직할 때 어린이는 세상에 나설 용기를 얻는다. 한편 어른들은 그림책을 읽으며 익숙한 어린이와 마주친다. 길을 헤매다가 잘 아는 골목의 낡은 대문을 밀고 들어서는 기분 같은 것이다. 과거의 나와 우정을 맺는 시간의 마법이 그림책에는 있다.
『세상에서 가장 멋진 새』는 김복희 시인의 『스미기에 좋지』(봄날의책, 2022)라는 시집에 실린 동명의 시를 이명애 작가가 그림책으로 만든 것이다. “서점에 나 혼자였다”로 시작하는 두주(頭注)가 무려 네 페이지 가까이 되는 시다. 시에서 이렇게 긴 두주를 만나는 건 흔한 일이 아니다. 그에 비하면 시의 본체는 7연 23행으로 간결하다. 두주에 등장하는 ‘나’는 여성 어른으로 어느 아침, 주인이 출근하지 않은 단골 책방에 앉아 있다가 어린이 손님과 독대한다. 그 어린이는 “혹시 세상에서 가장 멋진 새를 그려줄 수 있는지” 묻는다. “새를 무척 좋아하지만 엄마가 새를 기르는 걸 허락하지 않아서 가장 멋진 새 그림을 볼 수 있었으면 좋겠다”라는 것이다. 둘의 대화는 “가장 멋진 새”라는, 있을 것 같고 어쩌면 없을 수도 있는 미지의 존재에 관한 증명 노력으로 이어진다. 그 새를 모르지만 어린이의 간절한 요청을 들어주고 싶었던 ‘나’는 어린이 마음속에 있을 그 새에 대한 설명을 부탁한다. 그러나 어린이는 거듭 고개를 젓는다. 마치 데카르트의 신 존재 증명처럼 까다로운 대화가 이어진다. “세상에서 가장 멋진 새”라는 절대적 관념을 향한 두 사람의 밀고 당김이 생생한 표정과 몸짓으로 펼쳐진다. 그림책은 시가 상상한 풍경을 증빙하듯 자신만의 엄밀함으로 재구성한다. 책을 덮을 때쯤이면 선연한 실물의 감각이 마음을 덮쳐 이 새의 존재, 시가 어린이를 존중하는 방식에 설득당하고 만다. 세상에서 가장 멋진 그 새를 보고 온 것처럼 흡족해진다.
그림책의 무엇이 이처럼 강렬한 사실적 감각을 불러일으키는 것일까. 그중 하나는 서점 ‘위트 앤 시니컬’이라는 구체적 공간의 등장이다. 작품의 배경인 이곳은 서울시 종로구 혜화동 동양서림 2층에 있다. 이명애 작가는 ‘사가독서’라는 알림판이나 시 읽기 포스터, 눈에 익은 출판사별 시집 표지들까지 담담한 드로잉으로 고스란히 재현했다. 동양서림은 장욱진 화백의 부인 이순경 여사가 1953년 창업하여 1977년까지 운영했고, 70년이 넘도록 그 자리에 있는 유서 깊은 서점이다. 책의 첫 장면은 화자인 ‘나’가 혜화동 로터리 건널목을 건너며 시작하고 마지막 장면은 동양서림의 문을 밀고 나와 신호등 아래 인파 속으로 사라지는 검은 후드 티의 어린이 뒷모습으로 끝난다. 수채화 붓이 지나는 투명한 자리들은 두 마음의 교점처럼 티 없이 맑다. 이 시가 책 안의, 책 밖의 사람을 얼마나 근접한 지점까지 연결하는지 느낄 수 있다.
![]() 그림책 안에 등장하는 시집서점의 풍경 |
또 하나는 시집에서는 막연하게 그려보던 아이와 새의 구체적이고 주체적인 등장이다. 그림책은 상상을 보여주는 일에 시보다 더 과감하다. 그리고 책 안에 이 책을 읽을 어린이의 자리를 적극적으로 마련한다. 이마를 덮은 앞머리 안쪽에서 번뜩이는 기대의 눈빛과 종이를 쥔 손가락 움직임들은 더없이 어린이의 것이다. 스치듯이 둘의 대화 사이에 내려앉다가 마침내 독자의 눈앞에서 펼쳐지는 새들, 책방 천장을 뚫고 날아오르는 그 새들은 그림책이었기에 만날 수 있는 환상적 실재들이다. 하루도 드로잉을 거르지 않는다는 이명애 작가는 관찰이라는 공든 탑에 올라 새들을 더 높은 곳에서 내려다보며 그들의 창공을 그림책 안으로 불러온다. 아이 눈에 보이는 새, 화자인 ‘나’의 눈에는 보이지 않지만, 그들이 공유하고 있는 그 새다. 새는 사각의 한정된 영역을 벗어나 책 밖으로 연장선을 그으며 날아간다. 골몰하는 두 사람을 내려다보며 대각선으로 비행하는 노란 새는 삶의 가장 멋진 어느 지점을 꿈꾸는 우리들 모두의 새이기도 하다.
여기에 이 책을 디자인한 김재미 디자이너의 예민한 디자인이야말로 실물 감각과 몽환적 경험의 교류를 결정지었다고 할 수 있겠다. 트레이싱 페이퍼로 된 표지는 안쪽을 말갛게 비춘다. 앞표지는 독자 눈앞에 새들이 날고 있으며 어린이가 안쪽에서 새들의 날갯짓을 마주 바라보는 입체적 구조다. 반짝이는 박을 입힌 짙은 녹색 나뭇잎들은 현실의 서점과 상상의 숲을 동시에 재현한다. 뒤표지에서는 화자인 ‘나’가 자신의 마음에 깃들어버린 노란 새와 나란히 앉아 아이가 떠난 방향을 바라본다. 트레이싱 페이퍼를 걷어내면 ‘나’만 남는다. 겹겹의 연출은 성공적으로 독자의 마음에 안착한다. 그림책에서 작가와 디자이너의 호흡이 얼마나 중요한지 알려주는 장면이다. 콕콕 박힌 문장들에 고르게 집중하도록 만드는 가늘고 가지런한 서체도 이 그림책의 시적 특성을 드높인다. 문학을 이해하고 해석하여 더욱 풍요롭게 만드는 디자인의 역할을 보여준다.
시집 『스미기에 좋지』의 앞쪽에는 「세상에서 가장 하얀 토끼」라는 시가 실려 있다. “있지? / 하얀 토끼 있어? / 없어 / 없어? / 하얀 토끼 같은 건 없어 / 없어? / 흰색은 없어 / 토끼도 없어 / 있어 하지만 하얀 토끼는 있어 / 있어?”라는 문답으로 출발한다. 이 그림책을 읽기 전, 혹은 읽은 후에 살펴보면 좋을 작품이다. 우연히 서점 위트 앤 시니컬에 들러 김복희 시인의 이 시집을 구입한 그림책 편집자 김진은 집에 돌아가 여기 실린 시들을 읽다가 「세상에서 가장 멋진 새」로 그림책을 만들고 싶어져서 이튿날 바로 시인에게 연락할 방도를 찾았다고 한다. 요즘 시를 그림책으로 만드는 사례가 드물지 않다. 그림책은 문학을 품는다. 문학에는 그림책이 깃들 수 있다. 그렇다면 그림책은 문학인가? 문학이고 문학만이 아니기도 하다. 독자로서는 이들이 서로 만나서 현저하게 새로워지고, 풍성해지는 순간이 있다는 것에 감사할 따름이다.
그림책 사진 제공 : 사계절출판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