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편소설
①제천 1907

  • 단편소설
  • 2021년 봄호 (통권 79호)
①제천 1907




뻐꾸기 때문인지도 몰라. 김민근은 음죽으로 뻗은 한길을 바라보며 생각했다. 내 곁을 스치고 날아간 뻐꾸기 한 마리가 나를 여기에 주저앉힌 게 아닐까, 하고.



다릿재를 넘고 남한강을 건너고 나서부터 매가리가 풀린 기분이었다. 땅이 널러져서 시야가 트인 탓도 있었지만 여기서부터는 느닷없이 총알이 날아오는 일 따위는 없으리란 확신이 들었다. 농작물들 속에 폭 파묻혀 있다가 혹간 고개를 빼고 쳐다보던 농부들도 입을 모아 말했다. 사날 전까지는 총을 들고 우르르 몰려가더니 어제오늘은 그림자도 안 뵌다고. 모다 저짝 산을 넘어가드니 그 뒤로는 기척도 읎어. 콩밭을 매던 어떤 할머니는 심상한 표정으로 그렇게 말했다. 큰 재를 두 번 넘고 강을 한 번 건넜을 뿐인데, 새로운 지경으로 들어선 느낌이었다. 여전히 암울하기는 하지만 참혹한 데서는 살짝 비껴난 듯한 느낌. 아무려나 민근은 일행을 앞질러 가면서 정찰을 해야 했던 수고를 더는 하지 않아도 되었다. 어느 사이 충청도를 벗어나 경기도로 넘어온 거였다.
그럼에도 네 사람은 여전히 말과 노새를 양쪽에 두고 그 틈에 끼어서 걸었다. 그래야 좀 안심이 되었다. 한쪽은 껑충하고 다른 쪽은 작달막했는데, 등에 실리거나 양쪽으로 축 처진 짐이 불룩하게 튀어나와서 자꾸만 서로를 건드렸다.
네 사람이 지거나 둘러멘 짐들도 마찬가지였다. 처음엔 쌀과 밀가루, 모포와 식기들, 담배와 맥주, 이러저러한 문서와 책들, 그리고 사진기와 그 부속들로 그득했지만, 보름이 지나는 동안 먹을 수 있는 것들은 대부분 사라지고 먹을 수 없는 것들만 남았다. 많이 덜어내 무게가 가벼워졌는데도 오랜 여독으로 말이나 노새나 사람이나 할 것 없이 발걸음이 무겁기는 매한가지였다. 잠깐씩 길가에 서서 뭔가를 수첩에 적던 매켄지 선생은 팔짱을 겯고 고개를 푹 숙인 채로 침묵했다. 수다한 이야기를 이어 붙이던 덕칠 아재도 입을 꾹 다물고 땅만 보고 걸었다. 이따금씩 허― 이거 참, 소리를 내며 뒤를 돌아보는 게 전부였다. 모두 말을 잃은 사람들 같았다. 아니 어쩌면, 정말로 저 뒤에다 넋이라도 놓고 온 게 아닐까 하고 민근은 생각했다.
그렇게 걷고 있을 때, 채마밭에서 참외 덩굴을 정리하는 노인이 눈에 띄었다. 지난번에 이 어름을 지나갔을 때도 수박과 참외를 달게 먹은 기억이 나서 괜스레 침이 고였다. 그때는 노랗고 통통한 것들이 길 양쪽으로 지천이더니, 참외도 이젠 끝물이었다. 익기에도 지쳤다는 듯 싯누런 참외들이 마른 덩굴 사이로 엉성드뭇했는데, 시들시들해도 제법 달아 보이기는 했다. 모두가 발걸음을 늦추는 사이 덕칠 아재가 밭으로 들어가 노인과 객쩍은 소리 몇 마디를 나누었다. 먼발치에서도 노인이 민근 일행을 흘끔거리는 게 보였다. 노인의 시선은 주로 매켄지 선생을 향해 있었는데, 노인만 그런 건 아니었다. 길을 가다 마주치는 사람들은 애 어른 할 것 없이 선생에게 시선을 둔 채로 아래위를 훑었다. 호리호리하고 허여멀건 피부에 중절모를 쓰고 있는 이방인은 이목을 끌기에 충분했다. 보름 전엔 윤기가 자르르 흐르는 시커먼 말에 올라타고 있었으니 더 말할 것도 없지만.
흥정이 되었는지 덕칠 아재가 매켄지 선생에게서 엽전 몇 닢을 받아다가 노인의 손에 쥐여 주었다. 노인은 배 속에 담아 가기만 한다면 양껏 먹고 가도 좋다며 낡은 짚단을 가져다가 원두막 마룻바닥을 쓸어주었다. 그러면서도 횡재수를 만났다는 표정을 굳이 감추지는 않았다. 어차피 며칠 안으로 곯아서 문드러질 게 뻔한 것들이었다. 손이 불편한 덕칠 아재를 대신해 수복이가 말과 노새 먼저 덩굴째로 긁어다가 여남은 개 던져주니 녀석들은 게걸스레 참외 무더기를 헤집었다. 노인은 멀찍이 떨어져서 매켄지 선생이 참외 고르는 걸 보고 앉았다가 이내 바짓부리를 털고 일어섰다. 다른 말을 하지는 않았지만 막걸리를 바꿔 먹으러 가려는 심사가 눈에 읽혔다. 노인이 마을 쪽으로 멀어져 가는 걸 보며, 민근은 저 노인네가 저쪽 산 너머, 강 하나와 재 두 개 너머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기나 할까 싶었다.

*

선생님이 나를 찾아온 건 스무날쯤 전이야. 종로나 서소문 근방에서 우연히 만나 잠깐씩 인사를 나눈 적은 더러 있었지만 나를 만나려고 일부러 발걸음을 한 건 삼 년 만일 거야. 그러잖아도 선생님하고 이쪽 지방으로 취재를 떠나게 되었다는 수복이 말을 듣고…… 아, 저 녀석 말이야. 저기서 웅크리고 자고 있는. 저 녀석 말을 듣고 나한테도 머잖아 기별이 오겠구나 짐작하던 참이었어. 수복이는 올해 열다섯이니까 취재 여행을 따라다니기엔 맞춤한 나이지. 너나 나는 열여덟이나 먹었으니 솔직히 이런 심부름꾼 노릇을 하기는 어중간하잖아. 아무튼 저 녀석도 옛날에 내가 그랬던 것처럼 사대문 안을 제집 드나들듯 하면서 신문도 팔고 이런저런 잔심부름을 하고 사는데, 눈치도 빠르고 행동이 재발라서 선생님이 눈여겨 봐왔던 모양이야. 그래도 수복이 입장에서는 처음이니까 되게 불안했던지 나를 붙여달라고 졸랐던가 봐. 선생님이 나를 찾아와서 이렇게 말했어.
민쿤, 궁금증을 풀러 가야지.
뭐긴, 네가 좀 전에 나한테 물었던 그거지.
선생님은 삼 년 전에 노일전쟁을 취재하러 조선에 처음 왔어. 그땐 나 혼자서 선생님을 수행했었지. 이월이었는데 날이 얼마나 춥던지 제물포 해변에 석탄을 이렇게 피워놓고…… 아, 석탄은 시커먼 돌멩이 같은 건데 불을 붙여놓으면 한나절도 넘게 이글거리고 타. 땅속에서 캐내는 거라는데, 잘 꺼지지도 않고. 아무튼 그걸 곁에 피워놓고도 추워서 오들오들 떨면서 왜놈들이 함선에서 내리는 걸 내내 지켜봤어. 시커먼 군복을 입고 이만한 군장을 등에 메고 총을 들고 척척척척 줄을 맞춰 내리는데, 저기 동네 초입쯤 되는 데까지 늘어선 길이로 수십 줄을 맞춰 서더니 우리 쪽을 향해 소리소리 지르더라. ……무슨 소리였는지는 나도 모르지. 한쪽에선 수백 마리나 되는 말을 끌어내리고, 대포도 끄집어내고, 또 뭐에 쓰는 건지 모르겠는 군수품들을 끝도 없이 내려서는 한쪽에 차곡차곡 쌓아 놓았어.
선생님하고 나는 그 일이 마무리될 때까지 기다렸다가 사진 몇 장을 찍어서 돌아왔어. 그게 내 첫 번째 임무였지.
……아, 사진? 그건 우리 눈에 보이는 모습을 그림으로 똑같이 찍어내는 건데…… 내가 이따가 어떤 건지 보여줄게. 몇 장만 봐도 금방 알 수 있을 거야. 아무튼 그날 보았던 게 나는 좀 무서웠던 모양이야. 군장을 갖추고 걸어오는 왜놈들이 마치 성난 사마귀 떼 같았거든. 시커멓고 커다란 사마귀들이 열을 맞춰 밀려들던 모습이 한동안 꿈에 보였으니까.
이듬해까지 이어진 전쟁은 결국 왜놈들의 승리로 끝났지. 선생님도 되게 놀랐던 모양이야. 그 엄청난 아라사의 발틱 함대가 침몰됐다고 몇 날 며칠을 얼마나 흥분했었는지 몰라. ……우리나라? 어떻게 되긴, 을사늑약을 체결하고 왜놈들한테 외교권을 뺏기고 말았지. 이완용이 이지용이 박제순이 이근택이 권중현이, 개새끼!

*

네 사람은 원두막 기둥을 하나씩 등에 괴고 앉아 참외를 반찬 삼아 딱딱하게 굳은 주먹밥을 오래도록 우물거렸다. 그늘이 마침맞게 든 원두막 마루는, 그렇게 앉고 보니 주변을 살피기에도 더없이 좋은 자리였다. 앙성 밤나무골에서 하룻밤을 묵고 새벽길을 나설 때 얻어 온 주먹밥은 심하게 짰다. 쉬지 않게 하려는 배려였겠지만, 참외가 없었더라면 어찌 먹었을까 싶을 만큼 짰다. 주머니칼로 껍질을 깎아내고 먹는 건 매켄지 선생뿐이었다. 보름 전엔 냇물에 한참 담가뒀다가 새참으로 먹었었지만, 그런 걸 떠올리는 것조차 호사라는 생각이 들었다. 흙만 툭툭 털어낸 참외를 껍질째로 우걱거리면서 민근은 중절모를 비스듬히 눌러 쓴 선생을 바라보았다. 모자에 가려져 그의 눈은 보이지 않았다.
기자. 글을 써서 백성들에게 여러 소식을 알리는 사람. 그가 사흘 전에 나는 기자야, 하고 소리치던 목소리가 귀에 쟁쟁했다. 나는 기자야. 알아? 나는 군인이 아니고 기자라구. 매켄지 선생이 민근에게 그렇게 소리를 지르기는 처음이었다. 민근은 그의 푸른 눈동자를 바라보며 목구멍까지 올라오는 말을 삼켰다. 그렇지요, 선생님은 영국인 기자지요, 절대로 조선 사람일 수는 없을 테니까요. 매켄지 선생 역시, 너는 내가 고용한 사동(使童)이야, 이런 식으로 말썽을 부린다면 품삯은 한 푼도 못 받을 줄 알아, 하는 말을 꾹 눌러 참았을까?
잊었던 소리처럼 먼 산에서 뻐꾸기가 울었다.
민근은 마른세수를 하고 나서 덕칠 아재와 수복이의 기색을 살폈다. 앞에 놓였던 참외를 양껏 먹고 나서 두 사람은 멀뚱한 표정으로 매켄지 선생을 쳐다보고 있었다. 부지런히 걷는다면 내일 저녁엔 한양 언저리에 당도할 수 있을 터였다. 선생은 선잠이라도 든 것처럼 미동도 없이 기대앉아 있었다. 이쪽 산에서, 잠시 뒤엔 저쪽 산에서, 뻐꾸기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푸― 푸― 투르르 투르르르, 말과 노새의 투레질 소리. 한양에 도착하면 매켄지 선생은 기사를 써서 영국의 신문사로 보내겠지. 영국 신문에 실린 기사는 불란서와 독국으로 그리고 구라파 전역으로 퍼져나가고, 미국을 돌고 돌아 태평양을 건넌 뒤에는 다시 아세아로…… 민근은 선생의 가방에 들어 있는 세계지도를 떠올려보았다.
운종가와 숭례문, 북촌과 서소문으로 돌아치며 대한매일신보를 팔던 때가 아련했다. 그리하여,
어쩐지 오늘은 아무 갈래도 없이 같이 살자는 쪽으로 자꾸만 생각이 미치는구나 싶었다. 같이 살아보는 쪽으로. 사는 게 뭐 별건가. 그렇게 가시버시 되어서 새끼도 너덧 낳고 아웅다웅 살다가 땅속에 나란히 묻히는 게지. 새로 생긴 전차도 타보고, 할 수 있다면 바깥 나라에 유람도 가보고 하면서. 민근은 물레를 돌려 실을 뽑고 있는 이영 옆에서 씨아질이나 하며 빈둥거리던 때가 떠올랐다. 전에는 느껴보지 못했던, 괜스레 온몸이 노곤해지면서 가슴이 두근거리던 순간들을. 도르르 도르르 물레 돌아가는 소리와 찌그득 찌그득 씨아 돌리는 소리, 그리고 이영이 아니라면 짐작조차 할 수 없을 야릇한 체취들을. 그리고…… 그 순간,
그 소리가 지나갔다.
헉― 헉―
원두막 기둥에 기대어 잠시 머리를 비우고 있던 찰나, 민근의 머리 뒤쪽으로 한 발쯤이나 떨어진 곳으로, 그러니까 아주 가까운 옆으로, 무언가가 날아갔다. 숨 가쁜, 마치 오랫동안 쉬지도 못하고 뛰어온 사람이 뱉어내는 것과 흡사한 날숨소리를 내면서 시커먼 형체가 지나갔는데, 민근은 그것이 지나가고 나서야 그것이 새였다는 것을, 그것이 한 마리의 뻐꾸기였다는 것을 느낌으로 알았다.
아재! 좀 전에 그 소리…… 아재도 들었지요?
민근의 소스라치는 소리에 덕칠 아재가 게슴츠레 눈을 떴다. 그게 무슨 소리냐는 표정이었다.
이 옆으로 뻐꾸기가 날아가면서 헉― 헉― 소리를…… 꼭 숨 가쁜 사람처럼 소리를 내면서 저짝으로 날아갔는데…… 그 소릴 못 들었단 말이오?
*

얼마 전에 황제 폐하가 폐위되고 시위대마저 해산된 건 너도 알고 있지? 저 밖에서 보니 시위대 출신 의병들도 꽤 많던데…… 그래, 왜놈들은 시위대에게 맨손으로 무예를 익히도록 해놓고 그사이에 무기를 뺏는 치사한 수법을 썼어. 몇몇 눈치 빠른 대대에서는 미리 무기를 빼돌렸지만. 그때 왜놈들 분견대하고 종일 대치하고 싸우다가 총알이 다 떨어지는 바람에 흩어졌다가 이쪽 의병대로 합류한 거잖아. 나도 해산된 시위대가 왜놈들하고 교전하는 걸 먼발치에서 보았어. 점심 전부터 시작된 총소리가 숭례문 근방에서 하루 종일 콩 볶는 소리를 내고, 밤이 이슥한 뒤에도 산발적으로 이어졌지. 다음 날 들으니 다들 한여름인데도 두툼한 목화솜 이불을 뒤집어쓴 채로 자기 집에 엎드려서 울었다더라. 왜긴, 혹시 총알이 날아오더라도 목화솜 이불을 뚫기는 힘들 테니까 그랬지. ……이건 선생님한테 들은 얘긴데, 늦은 밤에 났던 총소리는 왜놈들이 승리를 자축하는 의미로 허공중에 쏘아댔던 거래. 조선 사람들을 겁주기 위해서 일부러 쏘아댄 거지. 아무튼 내 평생 그렇게 총소리를 많이 듣기는 처음이야.
흩어진 시위대가 무기를 챙겨서 충청도와 강원도 쪽 의병에 합류했다는 말은 선생님한테서 들었지. 그러니 그들을 취재하러 가지 않을 수 있느냐고. 아까 내가 했던 말이 그때 나온 말이야. 민쿤, 궁금증을 풀러 가야지.
덕칠 아재는…… 저기 벽 보고 누워서 코 고는 사람 말이야. 덕칠 아재는 역참(驛站)에서 일하다가 일자리를 잃었대.
나라를 통째로 잃을 판인데, 일자리 잃은 사람이야 숱하지. 일없이 맨날 구들장이나 지고 누워 있다가 선생님이 마부를 찾는다니까 말 한 마리하고 노새 한 마리를 냉큼 끌고 왔어. 그 밖에도 이번 취재를 위해서 꽤 많은 이들하고 접촉을 했던 모양인데, 그이들은 결정적인 순간에 발을 뺐대. 이번 취재 여행은 군인들 막사 앞에 둘러앉아서 행군이나 지켜보다가 사진 몇 장 찍는 걸로 끝날 게 아니란 걸 알았던 거지. 노일전쟁 때야 선생님도 왜놈들의 보호를 받는 종군기자 신분이었지만, 이번에는 일본 공사의 허가를 받지 못해서 몰래 떠나온 거거든. ……왜긴 왜겠어? 제놈들 생각에도 떳떳하지 못한 수작을 들킬 게 뻔하니 막은 게지. 그래서 여행을 떠난다면 안전을 보장하지 못한다면서 갖은 협박을 했던 것이고. 아무튼 이번 취재 여행은 혼비백산할 일이 꽤 여러 차례 있었어. 오늘 해거름에도 그랬지만…… 왜놈들은 우릴 의병대로 오인하고 의병대는 왜놈들로 오인하기 십상이니까.
충청도 쪽으로 의병대를 만나러 간다고 하니까 이영이가 두 눈을 동그랗게 뜨고 나를 한참 동안 바라봤어. 그게 지금도 눈에 선해. ……이영이는 나하고 예전에 정혼한 아이야. 올해 열일곱이니까 나이가 꽉 찼지. 떠나오는 날까지 잘 다녀오라는 말도 걱정된다는 말도, 아무 말도 않더라. 돌아오는 대로 내가 마포에 오막살이라도 한 채 알아보겠노라 말했는데도. 가타부타 말이 없었어.

*

하기야 뻐꾸기도 숨을 쉬고 사는 동물이니 날면서 그런 소리를 낼 수도 있겠지.
무명천을 휘감아놓은 오른손을 살살 어루만지며 덕칠 아재가 말했다. 수복이는 마치 그것이 제 임무라는 듯 채마밭 너머 먼 데를 주시하고 있었다. 한여름 햇살이 온갖 곡식들의 잎사귀 위에서 찰랑거렸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잊고 있었던 것처럼 다시 뻐꾸기 소리가 들려왔다.
웬놈의 뻐꾸기가 저리 울어대나, 제기랄.
그만 길을 나서자는 뜻으로 덕칠 아재가 목소리를 돋웠지만 매켄지 선생은 흐트러짐 없이 앉아 있었다.
여름이니까 울겠지요.
뻐꾸기는 망자의 넋이라던데. 아무래도 한 맺힌 사람들이 많은 게지. 그런 사람들이 이 동네라고 없고 저 동네라고 없겠어.
……죽은 사람들, 말이지요?
그렇지. 죽은 사람들이 이 골짝 저 골짝에서 하소를 하는 게지. 뻐―꾹 뻐―꾹 하면서.
덕칠 아재가 뻐꾸기 소리를 실감 나게 내고 있으니 그제야 선생의 중절모가 살짝 움직였다.
한이 사무치면…… 그리되나요?
오죽하면 새가 되어서 울겠나. 억울해서 저승에는 죽어도 못 가겠으니 저리 우는 게지.
……
에이, 망할 노무 세상.
매켄지 선생도 이제는 눈을 뜨고 덕칠 아재와 수복이의 두런거리는 소리를 듣고 있는 듯했지만, 다 알아듣기는 힘들 거라고 민근은 생각했다. 조선에 들어와 있은 지 이제 겨우 이 년 남짓인데, 그나마 일 년씩 나누어 있었으니 조선말을 제대로 익힐 시간은 많지 않았다.
그를 처음 만났던 때가 떠올랐다. 선생은 영한사전과 한영사전이 한데 붙은 책을 항상 들고 다니다가 이해되지 않는 말이나 물건을 만나면 사전을 뒤적여 영어 뒤에 붙은 한글풀이를 가리키곤 했었다. 그가 처음 가리킨 글자는 ‘사전’이었다. 물론 민근이 아직 사전이란 말을 모르던 때였다. 서로 다른 나라의 글이 나란히 붙어 있는 걸 여러 차례 겪고 나서야 이게 이런 데 쓰는 물건이구나 짐작할 수 있었다. 민근이 한영사전을 뒤적여 한글 뒤에 붙은 영어풀이를 가리키는 적도 있었다. 물론 그것만으로는 분명치 않아서 손짓 발짓을 곁들여야 했지만, 대체로 매켄지 선생이나 민근은 눈치가 빠른 편이었다.
선생을 알고 얼마 지나지 않았을 때, 한번은 서소문을 지나다가 그를 우연히 만난 적이 있었다. 초저녁인데도 제법 취해 횡설수설했는데, 민근이 선생의 말을 한마디도 제대로 알아듣지 못하니까 가방을 뒤져 사전을 꺼냈다. 그가 가리킨 낱말 뒤에는 한글로 ‘가여운, 불쌍한, 비참한’이라고 적혀 있었다. 민근이 그것들을 소리 내 읽어주자 선생은 ‘민쿤, 나는 대한제쿡이 불쌍한이다’ 하고 말했다. 그는 이어서 ‘독립’, ‘강한’ 같은 말들을 가리켰다. 술에 취한 목소리로 선생은 ‘민쿤, 나는 대한제쿡 독립 바랍니다. 강한 합시다’라고 큰 소리로 말한 뒤에 자신의 숙소 쪽으로 비틀대며 걸어갔다.
지금쯤이면, 역시 머리 굵은 놈들은 사동으로 쓰는 게 아닌데, 하고 선생이 후회하고 있지 않을까. 고분고분 시키는 일이나 실수 없이 처리할 녀석들을 데리고 다녔어야 했는데, 하고. 그러면서 민근은 목화밭 고랑에 엎어지거나 뒤집어진 채로 하늘을 노려보고 있던 사람들이 선하게 떠올랐다. 어떤 식으로든 무기를 구입할 수 있도록 주선을 했더라면, 지금 일본군이 주둔하고 있는 곳을 짚어주기만 했더라도…… 그랬으면 달라지지 않았을까? 선생이라면 충분히 도와줄 수도 있었을 텐데. 민근이 날숨을 내뱉으며 도리질을 치는 사이,
덕칠 아재가 벌떡 일어서며 말했다.
선생님, 그만 출발하시지요. 오늘은 어째도 이천에는 당도해야 됩니다. ……자, 내일은 집에들 가야지. 험한 꼴을 하도 많이 봐서 그런가, 새끼들이 자꾸 눈에 밟히네, 제기랄.

*

노일전쟁을 취재하러 다닐 때만 해도 우리는 마실 나온 사람 같았어. 어젯밤엔 어느 마을 뉘 댁에서 묵었습니다, 하고 윗전에다 고하기만 하면 만사형통이었지. 그 집보다 나은 대접을 하겠다고 작정한 양반들이 줄을 이었으니까. 양반들은 한양과 바다 건너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 항상 궁금했고, 아랫것들이란 그저 선생님의 허연 피부나 붉은빛이 도는 머리털 따위를 곁눈질로라도 한번 볼 수 있기를 바랐으니까. 우리는 준비해 간 맥주 한 병이나 시가 한 개비…… 그건 술 담배를 말하는 거야. 이런 걸 선물로 내놓고 상다리가 부러지게 차려진 저녁상을 받곤 했지. 맥주 맛은 사실 우리 입맛에 안 맞고, 시가는 너무 독해서 이맛살을 찌푸리기 십상이야. 그런데도 양반님네들은 시가를 덜어 장죽 끝에다가 꾹꾹 눌러 담고 나서 하인들이 붙여주는 담뱃불을 있는 힘껏 빨아댔어. 그러고는 선생님 가방에서 나온 세계지도를 들여다보거나 이런저런 사진들에 관심을 보였지. 아니, 중국이 정말 이만하고 미국이나 아라사는 이렇게나 크단 말이오? 그러면서 말이야.
그런데…… 삼 년 사이에 세상이 달라졌더라. …… 왜 아니겠어. 우린 외교권도 없어지고 군대도 흩어지고, 황제 폐하마저……
노일전쟁이 끝난 뒤로 왜놈들의 태도가 얼마나 달라졌는지는 한양에서도 알 수 있었어. 그런데 이번에 이쪽으로 오다가 보니까 실감이 되더라. 이제 왜놈들은 바깥 눈치 볼 것도 없이 조선을 짓뭉개버리기로 작정을 한 모양이야. 이천을 거쳐 여주와 충주를 지나오는 동안 우리가 내내 본 게 뭔지 알아? 집이란 집은 폭삭폭삭 무너졌고 항아리란 항아린 죄다 깨져서 장 내를 풍기고, 사람들은 산속으로 피난을 가 있다가 우리가 나타나니까 우르르 달려 내려와서 여기 이런 일이 있었으니 제발 나라님께 알려달라고 아우성을 치고…… 어떤 동네는 집집마다 적십자기를 손수 그려서 달아 놓았어. 그렇게 해놓으면 왜놈들이 건드리지 않을까 싶었던 거지.
우리는 그렇게, 어떤 날은 육십 리도 걷고 또 어떤 날은 백 리 넘게도 걸으면서, 여기까지 온 거야.
……그런 일이 왜 없었겠어. 혼비백산도 여러 번이지. 아까 저물녘에만 해도 여기 전초병이 쏜 총알이 내 머리 위로 핑― 하고 날아갔는데. 까딱 잘못했으면 황천길로 갈 뻔했지. ……흐흐흐, 소문이 다 났구나? ……어쩌겠어, 땅바닥에 납작 엎드려서 소리소리 질렀지. 쏘지 마시오. 우리는 왜놈들이 아니오. 여기 영국인 기자가 있소. 쏘지 마시오. ……하하하.
진짜로 죽을 뻔했던 건 충주에서 왜놈들을 만났을 때였어. 번듯한 집들이 즐비한 대로변이라 긴장을 늦춘 채로 걷고 있었는데…… 저만치서 갑자기 시커먼 놈들이 여남은이나 쏟아져 나오더니 천둥같이 따다다다 쏘아대는데…… 그땐 진짜로 죽는 줄 알았어. 노새는 어느새 도망가고 없고 흥분한 말을 달래려고 고삐를 틀어쥔다는 게 그만…… 그때 말이 덕칠 아재 손을 깨물어서 저렇게 된 거야. 덕칠 아재 손이며 말 코뚜레가 온통 피칠갑이 되고…… 맞아, 다 무서워서 벌어진 일이야. 나중에 들으니 우리가 겁도 없이 일본군 막사 쪽으로 걸어가니까 이만큼 위쪽으로 경고 사격을 했던 거였어. 왜놈들은 총알이 아깝지도 않은지 원.
……글쎄, 선생님이 왜놈 대좌인가 하는 꽤 높아 보이는 장교를 잠깐 만나기는 했어. ……그런 거야 우리가 알 수 있나.
우리 세 사람은 처마 밑에 쪼그리고 앉아서 왜놈들의 감시를 받고 있었으니까.
……충주 다음으로 간 곳? 그다음은 당연히, 제천이었지. ……거기서는 별일이랄 게 없었어. 거긴 아주 조용하고, 평화로운 고장이더라. ……왜놈들이라고는 그림자도 안 봬서, 우리는 원주 쪽으로 내처 달려왔어. 사람들마다 이쪽으로 가면 의병대를 만날 수 있을 거라고 그랬거든.
또 그 소리야? 글쎄…… 나는 아직 모르겠어. 세월이 지나면 자연히 알게 되려는지도 모르지.
잠깐만 기다려봐. 내가 가지고 있는 걸로 몇 장 보여줄게. 그리고 내일, 그럴 여가가 날지 모르겠는데…… 선생님께 여쭤보고 여기 의병대원들 사진을 찍어주실 수 있을는지 부탁을 드려볼게.
……자, 이게 사진이라는 거야. 이건 남산에서 내려다본 한양이고 이건 광화문 앞 대로…… 여기는 숭례문 앞, 그리고 이 사람은……

*

매켄지 선생은 그가 원하던 대로 마침내 의병대를 만났다. 한양을 떠난 지 보름여 만에 제천과 원주 사이의 어느 마을에 진주해 있던 의병대장들을 만나 인터뷰를 하게 된 것이었다. 그러는 동안 민근은 허름한 초가의 사랑방에 겹으로 뉜 여러 명의 의병대원들을 한꺼번에 만날 수 있었는데, 그중 새벽녘까지 이야기보따리를 풀어놓게 된 이는 김정근이었다. 민근과는 같은 항렬을 쓰는 일가라 해도 이상하지 않을 이름자를 쓰는 데다 나이도 동갑이었다. 둘은 오랜 친구처럼 붙어 앉아서 그간의 여정을 시시콜콜 들려주며 희붐하게 동이 트는 걸 함께 바라보았다.
그날, 정근 앞에서 밤새 수다를 떨 수밖에 없었던 건 아마도 죄책감 때문이었을 거라고 민근은 나중에 생각했다. 그에게 아무것도 해줄 수 없다는 죄책감. 그가 제천에서 왔다는 걸 알게 되었을 때, 그 죄책감은 더 커졌다. 거기서 민근이 본 걸 그대로 말해줄 수는 없었다. 그의 각시가 거기 남아서 홀로 집을 지키고 있다는 말을 들었을 때, 그리고 민망한 표정으로 각시가 말은 안 했지만 애를 밴 것 같아 여간 걱정이 아니란 말을 했을 때, 민근은 갑자기 할 말을 잃었다. 아무려나, 이제 우리가 믿을 건 의병밖에 없게 되었다는 말은 매켄지 선생과 함께했던 취재 여행 이야기로 두서없이 흐르고 말았다.
제천이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산이랄 것도 없는 야트막한 언덕바지를 오르는 동안 아무도 입을 열지 않았다. 굳이 올라가 봐야 다 알게 되는 것도 아닌데, 민근은 매켄지 선생의 뒤를 따라서 묵묵히 산을 올랐다. 사진을 찍어야 했으니까. 눈앞에 펼쳐진 참상은 누구에게 고해본들 믿을 성싶지 않은 몰골이었다. 며칠 전까지 이삼 천이나 되는 사람이 살았다는 고을은 뭐 하나 남은 게 없을 정도로 깡그리 뭉개지고 없었다. 아무것도 남은 것이 없다는 게 이토록 무서운 일인 줄 민근은 그제서야 실감했다.
매켄지 선생은 가장 높은 언덕바지에 사진기를 설치하고 사방으로 방향을 바꿔가며 여러 장의 사진을 꼼꼼하게 찍었다. 동서남북을 비교해도 크게 다르지 않을 사진을.
아재…… 지난 갑오년에도 이랬을까요?
글쎄다, 나도 겪어보지 않았으니 알 턱이 없지만, 아무래도 그때가 더하지 않았을까?
어떻게 하면 이보다 더할 수가 있어요?
그러게…… 어떻게 하면……
지붕이며 벽이며 기둥, 장독 하나가 멀쩡한 것이 없었다. 드문드문 잿더미를 파헤치며 쓸 만한 물건을 찾는 이들이 굼벵이처럼 간신히 꼼지락거리고 있을 뿐이었다. 수복이가 주저앉아 우는 사이에 민근은 얼마 전에도 본 적 있는 장면들이 자연스레 떠올랐다. 일본군은 세 군데 방향에서 투입되었음이 분명해 보였다. 말을 탄 장교가 번쩍이는 칼을 휘두르며 명령을 내리면 거총 자세의 병사들이 도열해 있다가 일제히 사격을 퍼부었을 것이다. 몇몇 병사들은 우르르 달려들어 불붙은 짚단을 초가지붕 위로 집어던지고…… 불을 끄거나 피하기 위해 뛰어나온 사람들에게는 총알이, 울분을 참지 못하는 이에게는 착검한 칼날이…… 그리고 연이어 치솟아 오르는 불기둥, 연기와 흙먼지 사이에서 아우성치는 사람들. 남아 있는 흔적들은 그런 장면들을 고스란히 일깨워주었다.
나중에 의병대를 만났을 때 매켄지 선생이 가장 많이 들은 말은 무기를 구해달라는 부탁이었다. 돈은 얼마든지 구해다 드릴 테니 무기를 구해달라는 말. 의병대가 든 총 중에 그나마 쓸 만한 것이란 들기름을 발라 번들거리기는 해도 총신이 녹슬어 벌겋게 변한 것들이고, 나무로 된 밑동도 거지반 갈라진 걸 무명끈으로 여러 번 둘러 바짝 조인 것에 지나지 않았다. 그렇게라도 총알이 발사되는 것이라면 괜찮았다. 총구로 장탄하는 구식 사냥총이나 밖에서 불을 붙이는 화승총은 비라도 내릴라치면 차라리 죽창만도 못한 물건이었으니까.
의병대와 헤어진 후, 덕칠 아재와 함께 민근이 간절하게 부탁했을 때에도 매켄지의 생각에는 변화가 없었다.
선생님, 이 사람들에게 무기를 구해주세요.
……
구할 수 없다면…… 우리가 가지고 있는 것이라도 나누어줄 수 있게 해주세요.
……
선생님, 지금이 아니면 저 사람들은…… 결국 다 죽고 말아요.
……
침묵으로 일관하던 선생이 결국 언성을 높였다.
나는 기자야. 알아? 나는 군인이 아니고 기자라구.
이틀 전에는 새벽부터 온종일 추적추적 비가 내렸다. 우려했던 대로, 원주 근방을 둘러보고 나서 제천 쪽으로 되돌아오던 중에 민근 일행은 다시 의병부대를 만났다. 어떤 이는 길가에, 어떤 이는 고추밭에, 그리고 또 어떤 이는 목화밭 고랑에 엎어지거나 누운 채로 움직이지 않았다. 해산된 시위대가 일본군과 싸울 때는 그래도 전투를 하는 모양새였지만, 이번엔 그냥 사냥감에 불과했으리라 짐작되었다. 의병대가 가진 무기를 잘 알고 있는 일본군이 비 오는 새벽 시간을 놓쳤을 리 없었을 테니까.
민근이 수복이와 함께 의병대의 시신을 수습하는 동안 매켄지 선생은 입을 꾹 다물고 한쪽에 서 있었다. 아는 이의 얼굴이 보일까 봐 민근은 시신을 젖힐 때마다 오금이 저렸다. 매켄지 선생을 따라 취재 여행을 떠나올 때부터 왜놈들이 쏜 총알이 날아와 자신의 어느 곳을 뚫고 들어오는 상상은 구체적인 것이었다. 그런 생각이 스치기라도 할라치면 민근은 몸에 난 털들이 쭈뼛거리며 일어서곤 했다. 실제로 벌어진 일도 아닌데 통증이 느껴지기까지 했었다. 그 상상들이 눈앞에 산재해 있었다. 민근은 숨이 막히고 울음이 막혀서 목구멍이 뻐근하게 아팠다.
수습해야 할 시신은 끝이 없고, 언제 다시 일본군이 들이닥칠지 모르는 일이었다. 어쩔 수 없어서, 민근은 수복이와 함께 매켄지 선생의 뒤에 따라붙었다.



뻐꾸기가 울었다. 이 산에서 그리고 저 산에서.
음죽을 향해 걸으며 민근은 이영을 생각했다. 그간 모아둔 돈에다가 이번 취재 여행 품삯을 보태면 허름하나마 오막살이 한 채는 얻을 수 있었다. 거기서 이영과 함께 목화솜을 트고 물레와 씨아를 돌리며 이불도 짓고 옷도 지으면 입에 풀칠이야 할 수 있겠지, 싶었다. 민근은 정근과 비슷한 내력을 지닌 게 많았는데, 어머니를 산후더침으로 잃고 또 지난 동학 난리 때는 아버지마저 잃어 너덧 살 때부터 더부살이로 자란 것이 그랬다. 부모 정을 모르고 커서 이제 막 가족을 꾸릴 희망을 조금씩 갖기 시작할 나이였다. 나라가 이런 꼴만 아니었더라면. 나라가 조금만 더…… 아무려나 솜을 트고 실을 자으면서 살다가 돈이 좀 모이면 남대문 근방에 점방을 내고, 애들이 생기면 신식 학교에도 보낼 수 있으리라 싶었다. 이번 난리통에 정근이는 몸을 잘 피했는지, 피했다면 지금쯤 제천에 돌아가 각시를 만나게 되었을지…… 아기를 밴 각시를……
뻐꾸기가 울었다. 어디선가 헉― 헉― 하는 날숨소리도 들렸다.
그리고, 이제 저 앞에 음죽으로 갈라지는 길이 보이기 시작했다.
헉―
헉―
민근은 그 자리에 주저앉아서 날숨소리 같은 울음을 터뜨렸다. 덕칠 아재와 수복이가 서고, 매켄지 선생이 서고, 말과 노새가 걸음을 멈췄다. 투르르 투르르르, 투레질 소리.
선생님…… 여기서부터는 제가 필요하지 않을 겁니다. ……저는 여기…… 여기까지만……
민근의 울음은 그쳐질 성싶지 않았다. 매켄지 선생은 민근을 한참 동안 바라보았다. 처음에는 당황스러운 표정이더니 잠시 후엔 화난 표정으로 노려보다가 얼마 지나지 않아서는 차차 표정이 누그러들었다. 말린다고 되돌릴 수 있는 일이 아니라는 걸 그도 알게 된 듯했다. 덕칠 아재와 수복이는 선생 옆에 말없이 서 있었다. 마음 같아서는 함께하고 싶은 심정이지만 그럴 만한 사정이 못 된다는 표정이었다. 아무려나 덕칠 아재는 말과 노새를 끌고 가야 하는 책임이 있었고, 집에서 기다리는 처자식이 있었다. 수복이도 빨리 돌아가 수발을 들어야 하는 병든 아버지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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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참을 걸어가던 매켄지 선생이 일행을 멈추고 나서 홀로 민근에게 돌아왔다. 그리고 가방을 뒤적여 38형 콜트식 권총 한 자루와 남아 있던 총알 전부를 민근에게 건넸다. 그가 지닌 두 자루의 총 중 하나였는데, 그중 성능이 좋은 쪽이었다.
품삯 줘야 되는데, 지금 돈이 조금밖에 없어. 부족하지는 않을 거야.
……
그리고 또, 가방을 뒤적여 두 장의 사진을 골라 민근에게 내밀었다. 전부터 민근이 눈독을 들이던 사진이었다. 한 장은 대한매일신보사 앞에서 옆구리에 신문을 잔뜩 낀 채로 동료들과 둘러선 사진이었고 다른 하나는 이영과 함께 마루에 올라앉아 있는 사진이었다. 사진 속에서 이영은 물레를 민근은 씨아를 앞에 놓고 손잡이를 잡은 채로 웃고 있었다. 민근은 한참 동안 그 사진을 들여다보았다. 그러면서, 선생이 내게 사진을 줬다는 것은 다시 볼 일이 없으리라 생각해서일까, 하고 생각했다. 나는 정근이 무사히 집으로 돌아가 각시를 만난 것만 확인하면 다시 한양으로 돌아갈 작정이었는데.
매켄지 선생이 민근의 눈을 들여다보며 말했다.
민쿤, 궁금증을 풀러 가야지.
선생은 발걸음을 돌려 다시 앞쪽으로 걸어갔다. 기다리던 두 사람도 손을 크게 흔들고 나서 발걸음을 돌렸다. 아무려나,
이건 다 뻐꾸기 때문인지도 몰라, 하고 민근은 음죽으로 뻗은 한길을 바라보며 생각했다. 내 곁을 스치고 날아간 뻐꾸기 한 마리가 나를 여기에 주저앉힌 게 아닐까, 하고.
보름이 넘도록 함께했던 일행들이 시야에서 사라졌다가 나타나기를 반복하며 작아졌다. 활등처럼 휜 한길 양옆으로 이어진 고추밭과 수수밭, 목화밭, 참깨밭, 감자밭, 옥수수밭…… 그 사잇길로 윤기가 흐르는 검은 말과 탁한 흙색의 노새가 느릿느릿 멀어졌다. 그리고 그 틈에 낀, 흰옷을 입은 사람들이 점처럼 어른거리다가 가뭇없이 사라졌다.
막상 일행들이 눈앞에서 아주 사라지고 나니, 민근은 어디로 가야 할지 갈피를 잡을 수 없게 되었다.
원종국
원종국
소설가, 1972년생
소설집 『용꿈』 『그래도』, 르포집 『그날 그들은 그곳에서』(공저)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