번역서리뷰
새로운 글쓰기, 그리고 번역의 어려움

- 스페인어역 성석제 장편소설 『도망자 이치도』

  • 번역서리뷰
  • 2024년 봄호 (통권 91호)
새로운 글쓰기, 그리고 번역의 어려움

- 스페인어역 성석제 장편소설 『도망자 이치도』

 

성석제의 작품은 진지함과 엄숙함이 지배하던 1990년대 한국 문단에 웃음과 해학과 풍자가 얼마나 중요한지 보여주었다. 그의 ‘이야기꾼’은 기존 소설의 인과적 플롯을 거부하고 이상하고 낯선 사건을 나열하며 기성 가치를 전복한다. 이 작가는 미국의 문학 이론가 로버트 스콜스(Robert E. Scholes)가 20세기 말 현대 문학의 대표적 특징이라고 지적한 우화적 소설화(fabulation)를 순박하고도 씁쓸한 이야기꾼을 통해 구체화하면서, 우리 사회의 그늘과 슬픔을 이야기한다.

『도망자 이치도』는 성석제 작품의 특징을 잘 드러내는 소설로, 한번 읽기 시작하면 손을 놓을 수 없는 재미있는 작품이다. 독자에게는 엄청난 흡인력을 과시하고, 문학적으로는 스토리텔링이라는 글쓰기를 제시하지만, 번역하기에는 정말로 힘든 소설이다. 번역가는 유머와 해학을 번역문 속에 잘 녹여놔야 하고, 이야기꾼답게 장단을 맞추어 막힘없이 서술해야 하며, 입담 좋게 구사하는 대중적 표현을 어떻게 번역해야 할 것인지 끊임없이 고민해야 하기 때문이다.

『도망자 이치도』는 순진하고 순정적인 척하는 ‘고약한 소설’로, 이치도라는 도둑이 시련을 겪으며 ‘도둑 왕’으로 등극하지만, 결국 몰락하는 비극적인 삶을 서술한다. 그렇게 이 작품은 서민의 애환과 정서를 대변하면서, 양반 중심의 권선징악을 대중의 관점에서 카니발화하여 재해석하고 평가한다는 점에서 큰 의미가 있다.

『도망자 이치도』의 스페인어 번역본은 대산문학상 번역 부문 수상자이자 한국문학번역상을 받은 고혜선 교수와 프란시스코 카란사 교수가 공동 번역하여 2023년에 출간되었다. 이들은 국내 최고의 스페인어 번역자라고 불러도 무방할 정도로 많은 작품을 번역했고, 번역의 질도 매우 뛰어나다. 하지만 아무리 훌륭한 번역자라더라도 성석제의 작품은 번역자의 경험을 초기화시킬 정도로 문체 면에서 낯설고 다르다는 사실은 부인할 수 없다. 한 예를 들어보자.

“대야만 한 접시에 내놓는 시금털털한 김치 쪼가리만 먹던 사내들은 작고 고소한 배추를 골라 야무지게 손질하고 선연한 빛깔의 양념을 쳐서 꼭 익을 만큼 두었다가 간장 종지만 한 새하얀 그릇에 담아낸 김치를 보고는 처음에는 입이 벌어져서, 다음에는 귀해서 먹을 생각도 하지 못했다. 간이 맞는 나물무침, 제철의 싱싱한 야채가 빠지지 않으니 대포(大砲)만 없지 없는 것이 없는 왕대포(王大匏) 집이라 소문이 났고, 소싯적에 좀 놀았다 하는 인간들에게는 대도시의 관청 뒷골목 요정에 간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키기도 하는 것이었다.”

이 부분은 대포(大砲)와 왕대포(王大匏)의 말장난, 그리고 김치 상태에 관해 세밀하고도 구수하게 서술하는 대중 언어, 그리고 대폿집의 분위기를 보여준다. 그러나 번역자의 관심을 사로잡는 것은 소설 문장이 장단을 맞추며 이미지를 차례차례 전개해 나간다는 것이다. 이것은 번역문이 산문이지만 운(韻)이 맞아야 하고, 콜론과 세미콜론 등의 문장부호를 적절하게 사용하면서 이미지의 순서가 뒤섞이지 않는 문체가 되어야 함을 의미한다. 그렇기에 성석제의 작품을 번역하기 위해서는 고도의 번역 능력과 문학 문체에 대한 풍부한 지식을 비롯해 술술 읽히도록 가독성이 뛰어난 문체의 소유자가 되어야 함을 뜻한다. 다시 말하면, 가르시아 마르케스의 『백년의 고독』과 같은 문체가 되어야 한다.

『도망자 이치도』의 스페인어 번역본은 이런 까다로운 번역 조건을 상당 부분 충족한 것으로 보인다. 여기서 ‘상당 부분’이라고 말한 건 이 작품에 맞는 문체가 완전하게 구현되지는 못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게 번역가들의 능력이 부족해서라는 말은 아니다. 그건 화룡점정이란 말처럼 용의 눈을 찍는 작업을 하는 편집자의 역량이 부족해서라고 말할 수 있다. 흔히들 번역 작품은 80%가 번역자의 몫이고 나머지 20%는 편집자의 몫이라고 한다. 다시 말해, 번역자와 편집자의 공동 혹은 협력 작품이 되어야 하는데, 번역자의 뛰어난 번역과 달리, 이 경우는 편집자가 제대로 뒷받침하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이것을 보여주는 예가 이 번역서의 겉표지에 적혀 있는 문구이다. 여기에는 ‘피카레스크 소설’과 ‘잔인한 폭력’ 그리고 ‘에로틱한 상황’ 같은 글이 적혀 있다. 하지만 피카레스크 소설의 요소가 없는 소설이 얼마나 있을까? 유머와 해학이 중요한 작품에서 ‘잔인한 폭력’이란 잔인하기보다는 오히려 이야기꾼이 과장하여 웃음을 초래하기 위한 장치가 아닐까? 대중문화에 자연스럽게 녹아 있는 서민 혹은 민중의 자연스러운 성적인 내용을 에로틱한 상황으로 이해하는 것을 어떻게 평가해야 할까? 이제는 번역자와 함께 작품을 제대로 이해하는 편집자가 꼼꼼하게 작업하면서 번역의 완성도를 높여 질적인 발전을 꾀할 시간이다.


※ 스페인어역 『도망자 이치도(CHIDO, EL FUGITIVO)』는 재단의 한국문학 번역·연구·출판 지원을 받아 고혜선·프란시스코 카란사의 공동번역으로 2023년 스페인 베르붐(Verbum) 출판사에서 발간되었다.

송병선
울산대학교 스페인중남미학과 교수, 1962년생
저서 『보르헤스의 미로에 빠지기』 『영화 속의 문학읽기』, 역서 『거미여인의 키스』 『콜레라 시대의 사랑』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