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대의 풍경
통금시대의 숨가쁜 사건 취재 숨바꼭질

- 사쓰마와리 <상>

  • 근대의 풍경
  • 2024년 봄호 (통권 91호)
통금시대의 숨가쁜 사건 취재 숨바꼭질

- 사쓰마와리 <상>

“네? 사슴앓이가 아니었어요?”

1975년 1월, 입사 직후 선배의 설명을 들은 여기자는 눈이 동그래졌다. 신문방송학과 출신인 그녀는 대학을 찾아온 기자들의 기민한 모습을 본 날, 사건 취재를 하러 다니는 기자들을 ‘사슴앓이’라고 부른다는 걸 우연히 알게 됐다. 기자를 ‘사회정의와 언론자유 수호를 위해 노력하는 지성인’이라고 믿고 있던 그녀는 ‘취재현장에서 안타까워 가슴을 앓는 일이 얼마나 많을까. 그런데 기자들은 가슴을 사슴이라고 발음하는구나.’ 하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건 기자의 낭만이나 세련된 언어감각과 무관한 일본어 ‘사쓰마와리’일 뿐이었고, 사치마와리라고 더 이상하게 발음하는 사람까지 있었다.

일본국어대사전은 사쓰마와리(察回)를 ‘기사를 얻기 위하여 경찰에 출입하는 것. 신문과 잡지 기자들이 쓰는 말’이라고 풀이하고 있다. 이 말은 일제강점기 신문사 시절부터 내려온 용어다. 언론사에 입사하면 취재의 기본을 익히고 온갖 궂은 사건을 취재하는 담력과 밀착력을 길러주기 위해 사쓰마와리 훈련부터 시킨다. 대표적 훈련방법은 집에 들어가지 않고 경찰서 기자실에서 숙식하며 24시간 밀착 취재하는 하리코미(張込み; 잠복)다.

기자도 주 52시간 근무(실질적이든 형식적이든)를 하는 요즘 시대에 그런 일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인권침해이며 갑질이다. 이제부터 하는 이야기는 주로 1970~80년대, 조간신문 한국일보 사회부를 중심으로 한 옛날 풍경이다. 글에 다수 등장하는 일본어는 당시 일상적으로 쓰던 말이다.

2010년 2월 미국 LA타임스가 한국 사쓰마와리들의 하리코미 생활을 보도하면서 게재한 사진. 어지러운 경찰서 기자실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사쓰마와리는 사회부의 ‘하원’이다. 하원생활을 통해 경험과 이력을 쌓아야 ‘상원’으로 불리는 행정부처에 출입하게 된다. 아침 일찍 출근하면 시경 캡(사쓰마와리 조직의 우두머리, 서울시경 출입기자)에게 간밤의 사건 등 취재상황과 그날 계획을 보고하고 지시를 받는다. 이용하는 전화는 경찰서 기자실의 경비 전화다. 타사 기자들이 들으면 안 될 내용이나 도쿠다네(特種), 요즘 ‘단독’이라고 표기하는 특종거리를 보고할 때는 다른 곳에 가서 연락한다. 시경 기자실의 전화 받는 여성(주로 미혼)은 무슨 신문 누구라고 밝히기도 전에 누가 누군지 각 언론사의 수도 없는 사쓰마와리들 목소리를 다 알아서 캡과 연결해준다.

보고를 마치면 ‘마와리’(回り; 돌기, 순환, 순회)나 기획 취재에 나선다. 중부경찰서 출입기자(시경 캡 바로 아래 바이스 캡)를 예로 들면 중부를 중심으로 성동·동부·강동·강남경찰서, 한양대·건국대, 한양대병원, 동부지검 등이 주요 취재처다. 그때 하던 말로 나와바리(縄張り; 담당 영역)다.
언론사마다 취재차가 늘 있는 게 아니어서 기자들은 대개 그날 배차된 회사의 차에 여럿이 편승해서 다닌다. 들르는 곳은 서장실, 수사과장실, 형사계 등인데, 입시철에는 대학이 주요 순회 코스에 들어간다. 이렇게 몰려다니면 특종도 없지만 낙종도 없다. 이른바 도쿠누키(特抜き), 왕따를 당할 일도 없다.

경찰서나 대학으로서는 여럿이 한꺼번에 오는 게 편하다. 어느 한 군데에 자기네가 관련된 특종기사가 보도되면 다른 언론사 기자들로부터 엄청 시달리고, 때로는 낙종의 분풀이로 엉뚱한 기사를 쓰는 기자도 있어 언론에 해명하랴 상부에 보고하랴 아주 성가시게 된다.

차량 이야기를 했으니 야근 풍경부터 소개해보자. 그때는 서울 시내를 동쪽과 서쪽 둘로 나누어 순서에 따라 매일 2명이 야근을 돌았다. 서울 시내 경찰서가 지금은 31개이지만 1970년대엔 절반 정도(정확하지 않음)였다. 나의 경우는 동쪽 사쓰마와리여서 종로·성북·북부·동대문·청량리·성동·동부·강남·강동경찰서 등을 맡았다. 동쪽 야근은 종로경찰서에서 시작해 서울대병원, 성북경찰서, 동대문경찰서… 이런 순으로 돈다. 서쪽 나와바리는 남대문·서대문·마포·영등포·노량진·관악·용산·서부경찰서와 신촌세브란스병원, 서부지원 등인데, 한쪽 지역만 계속 다니는 바람에 내 경우는 서쪽 지리를 잘 모른다.

야근을 나갈 때는 동전을 꼭 챙겼다. 휴대폰이 없던 시대에 회사에 기사를 길게 부르려면 공중전화를 이용해야 하기 때문이다. 큰 사건이 나면 공중전화든 개인 집 전화든 전화기부터 확보하는 전쟁이 벌어진다.

야근기자는 평소 사건이 많거나 관내에 주요 기관 시설이 있는 경찰서 위주로 다니면서 형사계 사건 접수장부를 챙겨 보고 때로는 형사반장 서랍도 뒤지고 그랬다. 가지 않는 곳은 경찰서 경비 전화로 마와리를 돈다. 형사계에 “오늘 4반이지요? 별일 없어요?” 하고 물으면 “조요옹합니다” 하기 일쑤다. 그러나 큰 사건이 벌어지면 접수장부에 기록도 하지 않거나 거짓말로 기자를 따돌려 숨바꼭질이 시작된다.

1980년대 중반까지는 조간신문이 한국일보와 조선일보 둘뿐이었다. 그래서 경쟁이 심했지만 그만큼 친해지기도 했다. 오늘 밤 상대지의 동쪽 사쓰마와리가 누군지, 어떤 인물인지, ‘액물(厄物)’인지 아닌지 다 안다. 친한 기자끼리 만나면 마와리를 돌지 않고 술을 마시며 이따금 번갈아 전화로 별일 없는지 체크하는 일도 있었다. 그러면 그날 밤은 아무 일도 없다. 큰 사건이 났어도 난 게 아니다.

 

40년 전에 제작된 수건. ‘경찰기자’라는 표현이 눈에 띈다    

 

하지만 보통은 각자 열심히 취재를 하러 다닌다. 상대지 기자가 지금 어디쯤 가 있나, 거기서 뭘 취재하고 갔나 그런 걸 알아보는 것도 중요하다. 그러니까 되도록 상대지보다 야근을 좀 늦게 출발하는 게 낫다.

그 시대엔 통금이 있었다. 1982년 1월 1일 모처럼 쉬는 날에 전두환 대통령이 통금 해제를 발표하는 바람에 쉬지도 못하고 나가 호외를 제작한 기억이 생생하다(해제 시점은 1월 5일). 야근 차량에는 야간통행증이 있었다. 사회부 기자들은 정규 야근을 하지 않으면 술 야근을 했다. 아이가 학교에 가는지, 집에 쌀이 있는지, 몸이 망가지는지 알지도 못하고 살던 시절, 마시다 보면 통금시간이 된다. 그러면 사쓰마와리 야근자에게 집에 태워다 달라고 연락하기 일쑤다.

상대지 기자가 “또 술꾼 배달을 하라네”라고 투덜거리며 사라지면 긴장해야 한다. 그렇게 핑계를 대고 모치코미(持ち込み), 즉 제보받은 단독기사를 취재하러 가곤 했으니까. 얼마 후 다시 만나면 시치미를 뚝 떼지만 다음 날 신문에 바탕은 시커멓고 글자는 흰 베다시로(어원과 정확한 표기를 모르겠다) 컷으로 크게 물 먹은 걸 알면 화장실 변기에 앉아 화투짝 쪼듯 신문을 보다가 응가가 안 나오게 된다.

병원 취재에서 중요한 것은 DOA(도착 시 사망), DI(약물중독) 이런 환자가 있는지 알아보는 것이다. 의학용어를 대며 아는 척을 해야 바쁜 간호사나 당직의사들이 그나마 상대를 해준다.

통금이 ‘좋은’ 점도 있었다. 조용한 도로에서 기사 대신 운전대를 잡고 주행 연습을 하는 것이다. 그렇게 해서 대충 운전면허를 딴 사람도 있고, 서투르게 운전하다 차가 뒤집히는 바람에 겨우 살아난 사람도 있었다.

야근이 끝나면 청량리경찰서 앞 ‘라순네집’ 등에서 소주와 함께 라면을 먹은 뒤 그날 밤을 마감하고 귀가한다. 기자들끼리 친해지는 시간이다. 그러나 아까 말했듯이 크게 물을 먹은 날은 자는 둥 마는 둥 금세 일어나 시경캡에게 박살이 나고, 서둘러 출근해 반카이(挽回, 만회)를 하러 다녀야 한다. 사쓰마와리에게는 야근했다고 해서 그다음 날 출근하지 않는 건 없었다. 물 먹지 않았으면 오후에 늦게 출근한다는 것뿐. 휴가를 갔다가도 자기 출입처에서 큰 사건이 나면 돌아와야 하는 시대였다.

지금은? 이런 야근, 그런 출근은 없다. 사건을 챙기기보다 기획기사, 트렌드기사 위주로 취재와 보도활동을 하는 게 요즘 사건기자들이다. 사건은 그 시대를 알려주는 기호와 같지만, 지금은 사건이 기사 보도의 중심이 아니다. 사건 취재를 할 수 있는 접근 방식이나 기자와 경찰의 관계도 크게 달라졌다.

<다음호에 하(下)편이 이어집니다.>

임철순
데일리임팩트 주필, 자유칼럼그룹 공동대표, 1953년생. 한국일보 편집국장, 주필 역임.
저서 『조선의 맹자 언론가 이율곡』 『손들지 않는 기자들』 『효자손으로도 때리지 말라』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