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상인터뷰
지금, 여기에 있어야 할 우리들의 천국

- 소설가 이청준 선생과의 대화

  • 가상인터뷰
  • 2024년 봄호 (통권 91호)
지금, 여기에 있어야 할 우리들의 천국

- 소설가 이청준 선생과의 대화

이청준
소설가. 1939년 전남 장흥에서 태어나 서울대 독문과를 졸업했다. 1965년 《사상계》에 단편 「퇴원」이 당선되어 문단에 나온 이후 40여 년 동안 수많은 작품을 남겼다. 대표작으로 장편소설 『당신들의 천국』 『신화를 삼킨 섬』등이, 소설집 『별을 보여드립니다』 『소문의 벽』 『비화밀교』 등이 있다. 대한민국 예술원 회원을 지냈고, 동인문학상·호암상 등을 수상했으며, 사후에 대한민국 금관문화훈장이 추서되었다. 2008년 7월 지병으로 타계하여 고향 장흥에 안장되었다.

 

이윤옥 이하  윤    이청준 선생님, 16년 만에 뵙습니다. 『이청준 평전』을 낸 지 반년 만에 선생님과 인터뷰를 하니 새삼스럽습니다. 그간 어떻게 지내셨는지요?

2007년 『그곳을 다시 잊어야 했다』 출판기념회에서의 이청준 선생(왼쪽)과 필자

 

이청준 이하  청    여러분 염려 덕에 잘 있습니다.

 윤    평안하시다니 다행입니다. 먼저 선생님의 등단작 「퇴원」에 대해 여쭙겠습니다. ≪사상계≫ 신인상 수상작인 「퇴원」은 당시 심사위원 다섯 분 중 네 분이 당선작으로 뽑기를 주저했다고 들었습니다. 정명환 선생의 강력한 주장이 아니었다면 탈락했을 텐데요. 「퇴원」에 대한 정 선생님의 확신은 어디에서 왔을까요?

 청    그분이「퇴원」을 ‘프랑스 누보 로망’과 연결시킨 점을 볼 때, ‘징후’로서의 문학을 생각하신 것 같아요. 문학 자체가 한 시대와 사회의 징후를 드러내는 현상 말입니다. 「퇴원」은 환부를 알지 못하는 아픔에 대한 질문이기도 하니까요. 통증은 있는데, 그 아픔의 원인이 무엇인지 모르는 세대와 시대에 대한 징후로 여기신 것 아닐까요? ‘알리바이 문학’은 시대의 사건들에 빠짐없이 나서는데, 그 대척점에 있는 징후로서의 문학은 사회문제를 직접적으로 거론하지 않아서 때로 관념적이라고 공격의 대상이 되기도 합니다.

 윤    「병신과 머저리」도 환부에 대한 이야기니 「퇴원」과 연계해서 읽으면 재미있겠네요. 정보부에 끌려가 고초를 겪은 일에 대해서 함구하신 것도 사회문제에 직접적으로 말하지 않으려는 태도 때문인가요?

 청    소설가는 소설로 말해야 하고, 소설로 말할 뿐입니다.

 윤    그래서인지 선생님 소설에는 소설가나 자서전 작가 등 말을 다루는 사람이 주 인물인 경우가 많습니다. 「다시 태어나는 말」은 10여 년에 걸쳐 쓰신 두 연작소설 『남도사람』과『언어사회학서설』을 맺는 작품이지요?

 청    말에 대한 천착은 소설쓰기에 대한 궁구(窮究)이기도 합니다. 『남도사람』과 『언어사회학서설』은 각각 존재적 삶과 관계적 삶을 다루었습니다. 『언어사회학서설』의 중심은 말[言語]이고『남도사람』의 중심은 소리입니다. 흔히 남도 소리의 핵심을 한이라고 하는데, 삶의 과정에서 맺힌 매듭 같은 한을 삶으로 풀어나가는 양식을 저는 소리로 이해합니다. 소리 자체가 삶의 한 양식인 겁니다. 그러니 말이 소리로 넘어가는 것은, 말이 우리 삶을 떠나서 의미를 잃고 말 자체의 질서 속으로 응축되는 것이 아니라 삶과 더 깊이 연결되는 세계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윤    「새와 나무」의 작가노트를 보면, 선생님의 소설에서 새와 나무는 관계적 삶과 존재적 삶의 표상으로 보입니다.

 청    새와 나무에 관한 꿈은 관계적 언어질서와 존재적 언어질서가 조화롭게 통합된 총체적 언어질서에 대한 꿈입니다. 나무는 새의 자유와 사랑과 새로운 비상의 터전입니다. 나무와 새가 하나가 되는 꿈은 존재적 삶의 표상인 나무에 관계적 삶의 표상인 새가 스스로 날아와 깃들인 그런 꿈입니다.

 윤    깃들 나무가 없는 ‘빗새’의 아픔이 떠오릅니다. 「서편제」로 유명한 『남도사람』은 ‘토속적 정한’의 세계를 그린 것으로 여겨집니다. 문제는 『언어사회학서설』의 핵심인 ‘말’에 대한 이견은 거의 없지만 ‘한[情恨]’에 대해서는 다르다는 것입니다. ‘한’은 『남도사람』뿐 아니라 선생님 소설의 시종을 관통하는 중심 정서인데, 저부터 ‘한’이 정확히 무엇인지 정의내리기 어렵습니다. 다행히 선생님은 폐암으로 투병 중이던 2007년, 한에 대해 꽤 긴 글을 쓰셨지요? 그 글이 이청준 특집으로 엮인 동경대 책자1)에 실린 것으로 아는데, 아쉽게도 이후 우리나라에서 발표되지 않았습니다. 이 기회에 그 글을 중심으로 답해주시기 바랍니다. 한이 도대체 무엇입니까?

 청    한은 어떤 순리적이지 못한 일방적인 힘에 의해 온당한 삶의 자리를 빼앗기고, 마땅히 누려야 할 삶의 덕목을 올바로 누릴 수 없게 된 데서 오는 아픈 박탈감과 상실감이 빚은 정서적 침전물입니다.

 윤    온당한 삶의 자리를 잃음이란 무엇이지요?

 청    우선 고향 같은 태생적 삶의 터를 잃는 것을 뜻합니다. 존재적 삶의 뿌리 뽑힘이라고나 할까요. 내 소설 속 빗새가 그런 경우이지요. 다음으로 사람과 사람 사이의 온당한 ‘관계의 자리’가 깨어져 이탈하는 현상인 이별·죽음·배신 등이 있습니다. 끝으로 삶의 보편적 조건이나 희망과 관련된 인간적 존엄성(삶의 위상)의 추락 현상이 있지요. 여기에는 재산이나 사회적 지위 같은 개인적 단계에서 권력의 폭압이나 여론재판에 의한 억울한 짓밟힘 등 사회·국가 단위의 단계까지 여러 층위가 있습니다. 특히 국가 폭력이나 사회적 편견

에 대해서는 ‘광주의 한’을 낳은 1980년대 광주 민주화 운동과 지역감정의 갈등이 만든 폐해를 상기하면 충분할 겁니다. 그래서 한에 대한 답을 하다 보면 자연스럽게 폭력의 정의가 나오게 됩니다. 이 모든 한 맺힘의 단초인 ‘온당한 삶의 자리를 빼앗김’에는 항상 ‘순리적이지 못한 부당한 힘’이 밑자리하고, 그래서 ‘억울함’을 낳고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 억울함이 즉시 한의 정서를 낳는 것이 아니라 시간적 경과를 매개로 함도 유의해야 하겠지요.

 윤    미야모토 히사오 동경대 교수가 쓴 「이청준 문학에 있어서의 한(恨)과 하야톨로기아(Hayatologia)」에는 이런 부분이 있습니다. “『남도사람』을 읽고 다음 『흰옷』에 대해서 그 내용을 알게 됐고 계속해서 『당신들의 천국』 등 이청준의 대표작품을 읽어가는 사이, 내 마음 안에 응어리졌던 일본적인 원한이 한국적 정한으로 승화되고 그것이 종교적 에너지로 심화되어 가는 마음의 궤적을 체험했던 것이다.” 더 나아가 “이청준의 화해와 용서를 기저로 한 해한의 통찰은, 20세기 이래, 아우슈비츠나 대동아전쟁 등으로 인하여 분열되어 있고 원한(怨恨)을 넘어설 수 없는 현대세계에 화해(和解)와 공생(共生)을 가져올 수 있는 광명처럼 내 마음을 비추어 주었다.”2) 이청준 소설의 독자 입장에서 매우 인상적인 글인데요, 원한과 한의 차이에 대해서 말씀해 주시기 바랍니다.

 청    한을 원한이나 원(怨)과 같은 말로 취급해 동어반복식 한자풀이로 뭉뚱그리면 안 됩니다. 한의 개념 정리는 여전히 사전이나 사람에 따라 차이를 보입니다. 사정이 이러니 한의 뜻은 차라리 일상의 쓰임에서 유추하는 것이 더 쉽습니다. 한이 맺히다, 한이 풀리다 같은 용례 말입니다. 한이 맺히다와 풀리다는 한의 정서적 특성을 그 생성과 해소 과정 속에 잘 함축하고 있습니다. 한의 ‘맺힘’이나 ‘풀림’은 국가나 사회의 역사적 경험, 지역 공통의 정서적 경험과 무관할 수 없지만, 무엇보다 개인 단위의 삶과 심적 경험을 기초로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한의 맺힘과 풀이의 양상을 살피려면 개인 단위의 삶과 경험적 사실의 관련성을 고려해야 합니다.

 윤    선생님 작품에서 한풀이와 ‘한 삭임’은 같은 말인가요?

 청    그렇지요. 한풀이의 길에는 두 방향이 있습니다. 먼저 한풀이라는 말 자체의 일차적 의미에서, 삶의 아픔을 실제로 되갚음으로써 해소시키는 원상회복의 길이 있습니다. 그렇다고 이 길이 폭력을 동반하거나 현실적 삶의 개혁을 지향하는 사회혁명의 길은 아닙니다. 이 길의 좋은 예로 씻김굿이 있습니다. 다음으로 삶의 충격을 내면화해 삭여나가는 ‘아픈 상처의 매듭풀이’가 있습니다. 상처에 대한 보상이나 원상회복보다 그 ‘아픔 넘어서기’를 지향하는 이 길에는 한 고유의 평화적이고 생산적인 정서, 삭임과 재생의 순환적 삶이 담겨 있어요. 낙엽이 떨어져 삭아 다시 생명의 자양이 되는 나무의 삶과 같다고나 할까요.

 윤    선생님의 말씀을 들으니 『남도사람』 연작부터 『신화의 시대』까지 이어지는 흐름이 느껴집니다. 궁금한 것은 방금 답에도 들어있듯이 한풀이 양식 중에서 씻김굿 같은 굿에 대한 선생님의 관심입니다. 굿은 『흰옷』, 『신화를 삼킨 섬』 등 여러 소설에서 중요한 요소로 기능하니까요.

 청    굿과 판소리는 진행형 격인 한풀이의 구체적 양식 가운데 하나입니다. 한은 민중에게 굿·판소리·탈춤·연극·민요 같은 예술적 승화를 통해 저항정신이나 사회적 상상력을 부여합니다. 나는 그 예술 양식들 속의 언어적 요소인 ‘이야기’에 주목합니다. 해원굿의 일종인 제주 ‘본풀이’3)가 좋은 예입니다. 한국인에겐 ‘이야기’ 자체가 이미 ‘풀이’가 되는 것입니다.

 윤    선생님께서 「비화밀교」, 『신화를 삼킨 섬』 등 소설과 동화로 여러 번 쓰신 설화 ‘아기장수 이야기’도 본풀이 같은 것일까요?

 청    우리에게 ‘삶의 이야기’는 얽힌 궤적을 되짚어 헤매는 ‘말풀이’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아기장수 이야기’는 이야기 자체가 한풀이의 과정이 되어 그 삭임과 전승이 개인이나 사회적 삶의 방편과 의지로 기능한 경우로, 우리나라 곳곳에 널리 전해오는 비극적 죽음의 설화입니다. ‘아기장수 이야기’의 핵심은 비극적 사건 자체가 아니라 이후의 이야기화와 전승 쪽에 있습니다. 사람들은 아기장수의 비극을 자기 일로 원통해 하면서 뒷사람들에게 전합니다. 그 이야기에는 또 다른 구세주 아기장수의 출현을 기다리는 소망이 담길 수밖에 없습니다. 사람들은 그 소망에 기대어 당대 삶의 질곡을 견디는데, 그런 점에서 설화나 민담은 우리 삶의 동력이 됩니다.

 윤    한에 대한 말씀을 들으니 선생님의 여러 소설을 더 깊이 새롭게 읽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이건 좀 다른 질문인데요. 선생님께서는 종교를 갖고 계신가요? 「행복원의 예수」, 『낮은 데로 임하소서』 등도 쓰셨고, 선생님을 기독교 신자라고 믿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청    나는 종교를 갖고 있지 않지만, 절집에 가면 편안해요. 특정종교를 믿지 않는 이유는 투철한 신념에 대한 회의 때문입니다. 소설가는 현상의 이면에 대해 끝없이 질문하고, 현상을 움직이는 숨은 힘에 대해 천착해야 합니다. 종교든 무엇이든 어떤 것에 대한 확고한 신념 아래서 그런 일은 불가능합니다.

 윤    선생님께서 장흥 보림사 주지 현광스님과 친하셨던 것이 기억납니다. 현상의 이면에 있는 힘에 대해서는 언제부터 관심을 갖게 되었나요?

 청    어린 시절부터 내게는 책으로 만나는 세상과 몸으로 만나는 세상이 있었어요. 눈에 보이는 세계가 지닌 겹, 현상 뒤의 세계에 대한 생각은 그때부터 싹텄던 것 같습니다.

 윤    독자들은 선생님의 소설을 ‘어렵다’고 여기는 경우가 많습니다. 가시적인 세계를 움직이는 본질을 드러내려는 소설이어서 그런 것 같습니다. 선뜻 선생님의 소설을 손에 들지 못하는 독자들을 향해 종종 이렇게 말씀하셨지요? 안 읽으면 지들만 손해지. 정말 그렇게 생각하시나요?

 청    (웃음) 읽어줬으면 하는 바람의 표현이지요.

 윤    그 어렵다는 선생님의 소설들이 매우 활발하게 영화, 연극, 드라마 같은 장르로 확산되는 것을 봅니다. 「벌레 이야기」를 원작으로 하는 영화 <밀양>을 비롯해 작년 12월에는 「예언자」를 각색한 연극 <씨레네>가 무대에 올랐습니다. 그 연극의 연출자가 제게 전화로 묻더군요. 주인공 나우현이 소설 끝 무렵 홍 마담에게 돌을 주는 행위를 어떻게 해석하냐고.

 청    뭐라 대답했나요?

 윤    그때 저는 선생님께서 죽음을 앞두고 제게 주신 두 개의 돌이 생각났습니다. 하나는 소설가 최명희의 돌이고 다른 하나는 그보다 훨씬 큰 검은 돌이었습니다. 선생님의 분신이라 할 만한 소설가 나우현이 돌을 주는 행위는 자신의 죽음에 대한 예언이 분명합니다. 하지만 저는 연출자에게 아무 말도 하지 않았습니다. 연극에서 해석의 몫은 그의 것이니까요.

 청    나우현은 자신의 죽음을 예언하고 죽음으로 예언을 완성하지요. 내 소설을 바탕으로 했더라도 다른 장르의 예술들은 다 그들의 몫이에요. 내 지분은 없다고 보는 편이 맞아요.

 윤    제가 어쩌다 보니 선생님 전집작업에 손을 보태고 평전도 썼는데요, 그 기간이 10년 혹은 15년 걸렸다는 기사들을 봤습니다. 사실 전집의 서지비평을 하는 10년 동안 틈틈이 쓴 덕택으로 평전은 대략 5년 정도 걸렸습니다.

 청    내가 글을 발표한 뒤에도 계속 수정을 멈추지 않았으니 서지비평하기가 꽤 까다로웠으리라 짐작이 갑니다. 단순히 글자나 문장을 고친 정도가 아니라 「매잡이」처럼 마지막 장이 삭제된 소설도 있고, 『당신들의 천국』처럼 발표작과 최종본이 구조부터 이야기까지 달라진 작품도 있으니 말입니다.

 윤    서지비평을 하면서 느낀 것은 소설을 대하는 선생님의 엄격함과 고뇌였고, 평전을 쓰면서는 ‘자신에게 좀 덜 엄격하면 안 되셨나’ 하는 생각이 떠나지 않았습니다. 그나저나 사모님과 따님에게 하실 말은 없나요?

 청    내가 평소 표현을 잘 못해서… 꿋꿋하게 잘 지내는 것 같아 고맙지요.

 윤    그뿐인가요? 그럼 제가 선생님께서 병을 진단받은 후 쓰신 일기의 몇 장면을 가져오겠습니다. 2007년 8월 5일에 선생님께서는 ‘일생 은지 모를 내세워 나를 보호하려 했을 뿐, 내가 나서서 ‘당신’을 지켜주지 못했다는 회한’을 토로하셨습니다. 9월 22일에는 따님에게 주는 편지를 쓰셨더군요.

 청    그러고 보니 단둘이 남을 모녀에게 꼭 남기고 싶었던 말을 쓴 일기가 기억납니다.
은지야, 네 모녀의 당당한 삶의 모습은 저세상의 나를 조금은 덜 아프게 할 것이다. 부디 당당하여라. 당당하여라.

 윤    끝으로 ‘천국’에 대한 질문을 드리기 전에 알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선생님께서는 “죽음은 정전 같은 것. 사물로 돌아가기”라고 하셨는데, 정말 그런가요?

 청    사물로 돌아갔다면 이런 인터뷰를 할 수 없었겠지요. 사실 잘 모르겠습니다.

 윤    그럼 대중가요 <테스형!>을 빌어 다시 여쭙겠습니다. 저세상에 가보니 천국은 있던가요? 있다면 그곳은 우리들의 천국인가요?

 청    내세(저승)에 천국이 있다한들 그것이 어찌 우리들의 천국일 수 있겠소. 우리는 지금, 이곳에 뿌리박고 살아가는 운명공동체입니다. 우리들의 천국이란 현세에 구현되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당신들의 천국』에서 소록도와 오마도 간척지가 당신들의 천국이 된 이유를 잊지 말아야 합니다. 지배세력은 다음 세계(미래, 내세 따위)에 우리가 누릴 천국을 위해 지금, 여기를 희생하라고 하지만 그래서야 되겠습니까? 반복되는 낙토(樂土)의 약속은 결코 오지 않을 낙토에 대한 반증입니다. 우리들의 천국이 끝없이 유예되는 한 현실은 여전히 당신들의 천국일 뿐입니다.

 윤    천국은 영원히 오지 않을 것 같네요.

 청    그래도 ‘내가 읽은 세상은 아름답더이다.’


1) 이청준, 『한국인의 삶과 ‘한’의 정서』, UTCP(University of Tokyo Center for Philosophy) BULLETIN Vol. 9 2007, 13쪽~21쪽
2) 앞의 책, 3쪽
3) 당신(堂神)의 내력을 이야기로 풀어가는 제주굿의 첫 과정

이윤옥
문학평론가, 1958년생
저서 『이청준 평전』 『비상학, 부활하는 새, 다시 태어나는 말-이청준 소설읽기』 『시를 읽는 즐거움』 『그림을 보는 즐거움』 『옛날이야기』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