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화제작
당신, 그림자가 없잖아요

- 무라카미 하루키 장편소설 『도시와 그 불확실한 벽』

  • 오늘의 화제작
  • 2024년 봄호 (통권 91호)
당신, 그림자가 없잖아요

- 무라카미 하루키 장편소설 『도시와 그 불확실한 벽』

 

도시와 그 불확실한 벽돌책

대마불사(大馬不死)라고 해야 할까. 출판 시장의 불황과 독서 문화의 위기도 무라카미 하루키는 피해 가는 모양이다. 2023년 8월 예약 판매를 시작한 장편소설 『도시와 그 불확실한 벽』(문학동네, 2023)은 그 즉시 3대 온라인 서점의 베스트셀러에 올랐고, 4주 연속 종합 1위를 지켰다. 최근에는 알라딘에서 실시한 ‘2023 올해의 책’으로도 뽑혔는데, 약 45만 명의 독자가 참여한 투표에서 슬램덩크와 푸바오를, 조국과 유시민을 제치고 당당히 1위를 차지했다. 그렇다면 하루키와 그의 소설은 왜 이렇게 많은 관심과 사랑을 받는 걸까. 누군가는 베스트셀러가 베스트셀러인 이유는 ‘그것이 베스트셀러이기 때문’이라는 냉소적인 진단을 내릴 수도 있다. 대형 출판사의 ‘마케팅빨’이라는 평가도 가능할 것이고, 90년대에 만들어진 ‘하루키 신화’가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는 해석도 가능할 것이다. 40년 만에 다시 쓰인 작품이라는 소식에 숨어 있던 ‘샤이 하루키’들이 결집한 결과라는 분석도 물론 일리가 있다. 그러나 그러한 분석들은 작품의 내적인 측면을 반영하지 않는다/못한다. 도대체 무엇이 아무도 책을 읽지 않는다고 말하는 시대에, 독자로 하여금 786쪽에 달하는 책을 선택하게 했는지는, 그 ‘벽’을 직접 통과해 봐야 비로소 알 수 있을 것이다.

 

진짜와 가짜, 그리고 그림자
그런 순간이 있다. 매일매일 반복되는 지루한 일상 속에서 내가 나를 바라보게 되는 순간. 내가 속한 세계로부터 한도 끝도 없이 줌아웃되는 순간. 그러니까 “내가 무언가의, 누군가의 그림자처럼 느껴”(111쪽)지는 순간. 일종의 유체이탈이라고도 할 수 있는 순간에는 언제나 다음과 같은 질문들이 뒤따르기 마련이다. ‘이게 전부일까?’, ‘나는 진짜 나일까?’, ‘지금 여기가 유일한 세계일까?’ 요컨대 스스로에게 그러한 질문을 던져본 사람이라면 하루키 월드의 입장권을 손에 쥔 셈이다. 내가 살고 있는 “현실이 나에게 어울리지 않는다”(228쪽)고 생각하는 순간, 지금 여기의 “현실 세계와 마음이 이어져 있지 않다”(535쪽)고 느껴지는 순간의 감각을 하루키만큼 탁월하게 그려내는 작가도 드물 테니까. 원인과 결과, 진실과 거짓이 뒤섞여 ‘나’와 ‘세계’에 관한 어떠한 판단도 내릴 수 없게 된 이들에게 하루키의 소설은 외면할 수 없는 말을 걸어온다. 소설 속 ‘나’에게 “진짜 내가 사는 곳은 높은 벽에 둘러싸인 그 도시 안이야”(13쪽)라는 미스테리한 말만 남겨 놓고 갑자기 사라진 소녀처럼 말이다.

결국 ‘나’는 자신의 그림자마저 포기한 채 소녀가 말했던 미지의 도시로 향한다. 도시는 역병을 막기 위한 ‘벽’으로 둘러싸여 있는데, 벽은 ‘이 세계’와 ‘저 세계’를 구분하는 경계이자, 인간이라면 누구나 느낄 법한 감정들을 차단하는 시스템이다. 도시에선 ‘나’와 ‘세계’의 부딪힘으로 인해 발생하는 모든 감정들이 무용하고 해로운 것, 다시 말해 “역병의 씨앗”(178쪽)일 뿐이다. 물론 벽 바깥의 세계를 살아가는 동안 자신의 본모습을 “잃는다”(452쪽)고 느꼈던 이들이라면 감정쯤이야 마땅히 포기할 것이다. 그림자를 포기하는 것이 그림자로 살아가는 것보다는 나을 테니까. 그러나 도시는 슬픔, 질투, 공포, 절망, 미움, 고뇌뿐만 아니라 꿈과 사랑과 음악도 없는 곳이다. 애타게 찾았던 소녀는 ‘나’의 존재조차 기억하지 못하고, 도시가 ‘나’에게 부여한 역할도 어째서인지 익숙해지지 않는다. 그렇게 완전하다고 믿었던 벽 안의 도시 역시 불완전한 세계라는 것을 깨달아 갈 때쯤 ‘나’는 ‘나의 그림자’와 조우한다.


“당신은 바깥세계에 있던 것이 그녀의 그림자고, 이 도시에 있는 것이 본체라고 생각해요. 하지만 글쎄올시다. 실은 반대일지도 모르거든요. 어쩌면 바깥세계에 있던 것이 진짜 그녀이고, 이곳에 있는 건 그림자인지도 몰라요”(152쪽).

 

Seek & Find, 그리고 Return

잘 알려져 있듯이 하루키의 소설은 대부분 ‘찾아 헤매다(捜し求める, Seek & Find)’의 구조를 취한다. 잃어버린 대상은 분명하지만, 그 내막은 전혀 알 수 없는 수수께끼 같은 상실. 그리고 사라진 대상을 찾아 헤매는 주인공. 이번 소설 역시 언뜻 보기에는 익숙한 구조를 따르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도시와 그 불확실한 벽』의 핵심은 찾아 헤매는 것이 아니라 ‘돌아오는’ 것에 있다. 실제로 ‘나’와 ‘소녀’의 재회는 진작에 이루어진다. 그보다 훨씬 많은 분량이 다시 돌아온 세계의 이야기로 채워져 있다. 지금까지 주인공의 관념적인 ‘내면 세계’를 그리는 것에 집중했던 하루키는 이번 소설에서만큼은 주인공이 살아가는 ‘현실 세계’를 있는 그대로 직면하는 것을 선택한 것이다.

3부로 구성된 책에서 가장 많은 분량을 차지하는 2부는 ‘도시’에서 ‘현실’로 돌아온 주인공이 후쿠시마에 위치한 도서관의 관장으로 일하면서 만나게 되는 여러 사람들과의 관계를 중심으로 전개된다. 누구에게도 말할 수 없는 비밀을 가지고 있지만 누구보다 ‘나’를 잘 이해해 주는 선임 관장 ‘고야스’, 묵묵히 ‘나’의 일을 돕는 믿음직한 사서 ‘소에다’, ‘나’의 새로운 사랑이자 ‘소녀’의 미래처럼도 보이는 ‘카페 주인’, 그리고 ‘나’의 계승자이자 ‘나’의 과거처럼도 보이는 ‘옐로 서브마린 소년’. 주인공은 무엇이 진짜이고 무엇이 가짜인지 여전히 혼란스럽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러 관계들과 함께 자신의 ‘진짜 삶’을 살아낸다. 어쩌면 하루키는 진짜와 가짜, 그런 구분 자체가 도시의 벽처럼 불확실한 것이라고, 그 절대적인 불확실 속에서 인간이 택할 수 있는 유일한 선택지는 지금 여기의 ‘나’와 ‘세계’를 긍정하며 살아가는 것이라고 말하고 싶었던 것은 아닐까.

이번 소설에서 ‘나’는 두 번 돌아온다. 한 번은 자신의 의지와 다르게, 한 번은 분명한 자신의 의지로. 요컨대 두 번째 선택에 담긴 의미를 읽어내는 것이 이번 소설의 핵심이 아닐까. 자신의 내면에 지었던 벽과 도시를 부수고, 자신이 사랑했던 소녀와 이별한 ‘나’처럼, 이미 거장의 반열에 오른 75세의 작가는 지금도 여전히 다른 선택을, 다른 소설을, 다른 삶을 쓰는 중이다.

 

“걱정하실 것 없습니다. 누가 뭐래도 지금 이곳에 있는 당신이, 당신 자신이니까요.” (452쪽)

하혁진
평론가, 1996년생
평론 「감각의 질서와 그녀들의 환상통」 「슬픔의 아나키스트, 그리고 ‘이후의 시(詩)’」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