②수정은 아름답고, 수정은 정확하고, 수정은 승리한다, 의자는

  • 2022년 여름호 (통권 84호)
②수정은 아름답고, 수정은 정확하고, 수정은 승리한다, 의자는

요즘엔 커다란 세계나 마음보다 아주 작고 무심한 사물들에 관심이 간다. 유튜브 영상에서 발견한 어둠 속의 백수정이나 카페의 조명을 받아 더 희게 빛나던 의자 같은. 그것들을 해체해 자세하게 바라보다 보면 내가 모르던 마음과 세계와 이상한 방식으로 만날 수 있다는 사실이 좋다. 납작하게 눌린 모든 마음들은 사실 연결되어있으므로, 눈앞의 사물들에서 한 발자국이라도 멀리 갈 수 있을 때 나 여기 있어요, 존재감 없는 존재지만 여전히 무심결에 살아있답니다 가끔은 쓸데없는 것 그러나 순간 반짝이는 것들도 본답니다 지루해질 때까지 공짜로 본답니다 외칠 수 있을 것 같고 그럼 오늘을 살아낼 힘이 생긴다. 단 한 순간이라도 미움이나 원망 없이 말할 수 있는 사람이 된다. 나는 조용하게 분투하는 사람이고 싶다. 답답한 마음들에 정확하고 투명한 구멍을 뚫어주는 사람이 되고 싶다.

수정은 아름답고, 수정은 정확하고, 수정은 승리한다*

나는 어둠 속에서 내가 나를 부끄러워하는 냄새를 맡을 수 있는데

버튼만 누르면
이 방을 조금 전과 다른 다른 감정으로 채우는 전기가 들어온다는 사실은 얼마나 새삼스럽고 간편하고

현대적인 아픔인가요

그래요 나 그것 덕분에
내 몸에 걸려 넘어지거나 모서리 날카로운 악취에 부딪치지 않을 수는 있지만

낮 동안의 수치가 얼마나 정교한
무늬와 기울기
절단면을 얻었는지

손바닥에 올려놓고 가까이 들여다볼 수도 있겠지만

형광등을 켜는 것은 단지
한밤중에도 이 따뜻하고 복잡한 세공에 많은 시간이 필요해서입니다
하나쯤

몰입하고 싶은

죽어서도 잊고 싶은 것이 있어서입니다

인공 빛 아래에는 나만큼 납작하고
존재감 없고
어떤 열도 금방
식히곤 하는 스테인리스 작업대

매일 봐도 익숙해지지 않는 도구들이 있어요

눈 오던 밤
비 오던 밤
나는 이 앞에 서서 해왔습니다
낮에는 하지 않는 일을



상상할 수 없을 만큼 멀고 적막하고 추운 나라 그 나라에서도 긴 시간 기차를 타고 들어가야 하는 지역의 광산에서 자라는 백수정이라 한다 구하기 어려운
이 난감하고 차가운 수정들을 대체 누가 작업실에 가져다두었는지 언제부터 내가 이것들을 다루게 되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표면을 다듬고 눈물처럼

날카롭게 갈아

간격을 둔 채 가장 커다란 수정에 하나하나 접붙이는 것, 이것이 내 몽둥이의 기본 형태
구조로서

이음새가 헐겁거나 지나치게 들뜬 부분은 없는지 가파른 면이 광석 가루를 떨어트리고 있지는 않은지 다른 수정들에 비해 돌출된 형태로 솟은 수정의 끝이
물보다 허기보다

본색을 드러내기 직전의 사랑보다 지나치게 환하지는 않은지 새벽까지 점검하는 것이 나의 일 백수정의 사전적 의미는 다른 빛깔이 없는 희고 맑은 수정이다 다른 빛깔 다른 의도가 없는 독창적인 깊이와 강도의 수정

이슬 모양으로 맺힌
중심에

광부들의 느슨한 어둠 고전적인
아픔을 가두고 있는 수정입니다 그것으로 몽둥이의 날을 만들어 사방에서 튀어나오는 자신의 부끄러움을

한번에 내려치려는 사람의 앞으로

그 나라 열차 천천히 지나가요 눈 내리는 소리 내면서

그 안에 내가 타 있었답니다
차창에 기대 있던 내 얼굴 슬프고
시원했어요 있죠
이런 식으로 나에게도 거칠고 아름답고
뜨거운 부분이 있다는 것을 오직 나의 노동이 확인시켜주는 순간이 좋았어요

좋지만은 않았지만요



하나쯤 잊고 싶은

죽어서도 몰입하고 싶은 것이
있어서입니다

날에 베이지 않기 위해
특수장갑을 끼고서 나 말고는 아무도

모르는 일 할 때

작업대에서는 백수정으로 된 눈부신 날들이 타들어가는 냄새가 났어요 몽둥이
내 완성품을 들어 조심스레 돌려볼 때마다

미세하게 다른 속도와 각도로 형광등 빛을 튕겨내며 움직이던 수정의 소리 자신들을 견고하게 빛내는 소리가 났습니다 규칙적이었고

아주 조용했어요


* 에르베 기베르 『연민의 기록』의 “단어는 아름답고, 단어는 정확하고, 단어는 승리한다”를 변용.

 


의자는

연속적으로 꾸는 악몽처럼 하얗다. 의자는 야구장 조명처럼 하얗고 집중력처럼 하얗다. 의자는 스포츠 기록의 슬픔처럼 하얗다. 의자는 짐을 다 뺀 방처럼 하얗다. 의자는 악바리처럼 하얗다. 의자는 모순적인 문장의 아름다움처럼 하얗다. 의자는 갈색 종이봉투에서 과자가 부서지는 소리처럼 하얗다. 의자는 각진 유리 케이스 안의 도자기처럼 하얗다. 의자는 수수께끼처럼 하얗다. 의자는 각설탕 더미처럼 하얗고 복잡한 과거사나 가구에 긁힌 상처처럼 하얗다. 의자는 어색한 강의실에서 배우는 외국어처럼 하얗다. 의자는 동시대처럼 하얗다. 의자는 의심처럼 하얗다. 의자는 광고 카탈로그에 인쇄된 피서지의 환상처럼 하얗다. 의자는 식물의 뼈처럼 하얗다. 의자는 cm단위로 하얗다. 의자는 근현대사 교과서의 어리둥절한 얼굴들처럼 하얗다. 의자는 도서관에서 도서를 분류하는 방식처럼 하얗다. 의자는 함성처럼 하얗다. 의자는 끝없이 구르는 구슬처럼 하얗다. 의자는 밤처럼 하얗다. 의자는 술병에 담긴 뜨거운 술처럼 하얗다. 의자는 노인의 거동처럼 하얗다. 의자는 스모그처럼 하얗다. 의자는 이해받을 수 없는 영역처럼 하얗다. 의자는 관에 비치는 조문객들의 차림처럼 하얗다. 의자는 심한 말처럼 하얗고 의자는 장작 타는 냄새처럼 하얗다. 의자는 열이 식어가는 속도처럼 하얗다. 의자는 양배추처럼 하얗다. 의자는 결혼식 전날의 두려움처럼 하얗고 의자는 속기사의 손가락들처럼 하얗다. 의자는 한밤중 나눈 약속처럼 하얗다. 의자는 멧돼지의 눈동자처럼 하얗다. 의자는 철물점 구석의 쇠막대처럼 하얗다. 의자는 무서운 이야기의 중간처럼 하얗다. 의자는 처음으로 부모님 없이 세운 텐트의 중심처럼 하얗다. 의자는 도둑이 흘린 발자국처럼 하얗다. 의자는 삼단 케이크의 체리 장식이 무너지는 순간처럼 하얗다. 의자는 포크처럼 하얗다. 의자는 부자유처럼 하얗다. 의자는 몇 개의 화석으로 요약된 선사시대의 낮과 밤처럼 하얗다. 의자는 다이빙대처럼 하얗다. 의자는 수군거림처럼 하얗다. 의자는 뒷골목에 버려진 악보처럼 하얗다. 의자는 한밤중 드러난 허벅지 상처처럼 하얗다. 의자는 허기처럼 하얗다. 의자는 책꽂이에 거꾸로 꽂힌 책처럼 하얗다. 의자는 모두에게 인정받은 사랑처럼 하얗고 의자는 갑오징어의 빨판처럼 하얗다. 의자는 비료 포대처럼 하얗다. 의자는 억지로 참은 잠처럼 하얗고 X-선처럼 하얗다. 의자는 현재형으로 하얗다. 의자는 장정된 자서전의 두께처럼 하얗다. 의자는 실망처럼 하얗다. 의자는 구석에 처박힌 전선들처럼 하얗다. 의자는 사교적인 사람처럼, 교통사고 현장처럼 하얗다. 의자는 상상 속의 포물선을 그리며 하얀 상태다. 의자는 누군가 떠벌린 나의 과거처럼 하얗다. 의자는 냉장고 안처럼 하얗다. 의자는 화장실 방향제의 강력한 향처럼 하얗다. 의자는 배신당한 두 사람처럼 하얗고 몽유병자의 몸짓처럼 하얗다. 의자는 시트콤처럼 하얗다. 의자는

김연덕
시인, 제17회 대산대학문학상 시 부문 수상자, 1995년생
시집 『재와 사랑의 미래』, 산문집 『액체 상태의 사랑』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