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특집
④메밀꽃이 지고 난 후

  • 기획특집
  • 2022년 여름호 (통권 84호)
④메밀꽃이 지고 난 후

성정순은 메밀밭을 지나다 멈칫하였다. 메밀꽃 가득 들어 있는 꿀 내음이 성정순을 어지럽혔다. 죽자고 마음먹은 마당에 고작 꽃향기에 흔들리다니. 성정순은 자신을 책망하며 발걸음을 재촉하려 했으나 마음과는 정반대로 허리를 굽혀 꽃에 얼굴을 들이밀었다. 익숙한 냄새가 얼굴을 덮치자 오래전의 그날 밤이 떠올랐고, 이어 무릎에 힘이 빠져 앞으로 고꾸라졌다. 성정순은 키가 큰 메밀꽃 사이에 무릎을 꿇고 파묻힌 꼴이 되었다.

 

*

20년 전, 성정순이 물레방앗간을 찾은 그 밤도 메밀꽃이 온 마을을 뒤덮고 있었다. 이제 막 열여섯 살이 된 성정순은 섬돌에 걸터앉아 바람을 타고 날아오는 메밀꽃 향을 맡고 있었고, 평소라면 그것으로 족했을 터였다. 그러나 성정순의 뒤로, 방에 가득 찬 봇짐이 마음을 어지럽혔다. 다음 날이면 이제 이 집을 떠날 것이고, 메밀밭이 천지인 마을도 떠날 것이다. 그리고 소운도. 영영.

소운의 얼굴을 떠올리자 성정순은 더 이상 참지 못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밤 산보나 해야겠다. 이 밤에 나돌아 다닌 걸 알면 부모님이 크게 역정을 내시겠지만 당장 야반도주를 해야 하는 상황에 정순을 오래 꾸짖을 수는 없을 것이다. 성정순은 치맛자락을 단단히 여미고 길을 나섰다.

골목 끝 객줏집은 붐볐다. 선선한 가을밤이었다. 한 달도 더 못 가 밤바람이 얼음장같이 차가워지고 툇마루에 아무렇게나 걸터앉아 밤의 정취를 느끼기 어려워질 터였다. 그 사실을 모르지 않을 사내들이 시끄럽게 떠들며 탁주를 주고받고 있었다. 옷고름이 헐거워져 몸을 드러낸 사내들을 피해 정처 없이 걷다 보니 메밀밭이었고, 물방앗간이었다.

어찌 보면 당연했다. 소운이 성정순의 손을 이끌고 간 곳이 그곳이었고, 숱한 밤 서로의 몸을 탐한 곳도 그곳이었다. 그러니 성정순이 마을을 떠나기 전 마지막 밤 그곳으로 향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러나 당시에는 그것이 그저 얄궂은 운명처럼 느껴졌다.

왜 다시 이곳이냔 말이냐. 멀리 도망치겠다 굳게 마음먹은 이 순간마저 왜 나는 다시 이곳에 서 있어야 하느냐. 그는 다시 돌아오지 않을 이곳에 왜 나만 남아 있는 것이냐.

성정순의 부모가 야반도주를 하겠다고 했을 때, 성정순은 이미 복중에 소운의 태아가 있음을 알고 있었다. 성정순은 여느 때와 같이 오일장이 서는 밤 물방앗간에서 소운을 만나 그 모든 사실을 고백했다.

“부모가 도망간다고 하오. 나는 부자 홀아비한테 시집보내고 당신들은 그 돈으로 멀리 떠난다고 하오. 나는 안 갈 것이오. 나는 싫소. 아무리 좋은 혼처도 나는 싫소. 여기 그대의 아기가 있소. 나는 그대와 함께 가겠소. 부모가 아니라 그대를 따라가려 하오. 어디든 가겠소. 나와 그대의 아기를 데려가시오.”

소운은 고개를 숙였다. 꽃이 꺾이듯 천천히 꺾인 고개는 성정순의 무릎에 닿았다. 소운은 성정순의 양손을 잡고 그 위에 이마를 댄 채 한참을 울었다. 성정순의 손이 그의 눈물로 젖었다.
그 눈물이 무슨 의미였을까. 성정순은 묻지 않았다. 대신 이를 앙다물고 울음을 참았다. 끝내 소운에게서 한마디 언약도 듣지 못하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 성정순은 양손으로 치맛자락을 움켜쥐고 눈물 한 방울도 흘리지 않았다.

봉평을 떠나기 전 마지막 밤, 달콤한 메밀꽃 향이 가득한 물방앗간에서 성정순은 그간 참아온 눈물을 쏟아냈다. 수천 번 허벅지를 꼬집으며 버텨온 설움이 쏟아져 나왔다. 그때 허 생원이 나타났다. 깊은 밤, 달빛만으로도 그의 얼굴이 순식간에 붉어지는 것을 볼 수 있었다. 그리고 그 얼굴 가득히 연모의 감정이 차오르는 것도 볼 수 있었다.


*

메밀밭 한복판에서 서른여섯의 성정순은 그날 밤을 떠올렸다.

그때 성정순은 소운에게 복수를 하고 싶었던 걸까? 아직도 소운의 숨결이 배어있는 곳에서, 소운의 태아를 배고서, 다른 사내와 몸을 섞으면서 소운에게 어디 이거 보라고 하고 싶었던 걸까? 아니면 연모라는 감정이 얼마나 우스운지 알았으므로 허 생원의 연모를 비웃어주고 싶었던 걸까? 아니면 반대로 연모하던 이에게 배신을 당한 자신을 가여이 여기는 마음으로 허 생원에게 자비를 베풀어주고 싶었던 걸까? 그것도 아니면 모든 것을 포기하고 될 대로 되라 하는 마음에 불과했을까?

자신이 무슨 마음을 가지고 허 생원에게 몸을 허락했는지는 기억나지 않았지만 허 생원과 몸을 섞으면서 들려오던 물소리는 기억났다. 당장이라도 그 물속에 몸을 던지고 싶었던 것도 기억났다. 그리고 허 생원이 몸을 벌벌 떨던 것 역시 선명하게 기억났다. 여인의 몸을 처음 만지는 것이 분명했다. 그는 무척이나 서툴렀고, 그건 성정순으로 하여금 소운을 더더욱 그립게 했다.

그렇다, 성정순은 그때나 지금이나 소운이 그리웠다. 몸의 깊숙이를 샅샅이 뒤지던 소운의 섬세하고 가느다란 손. 성정순을 향한 연심을 쏟아내던 낮고 부드러운 목소리. 웃을 때면 반달처럼 휘던 눈과 여린 갈색 눈동자. 그 모든 것이 미치도록 그리웠다. 소운에 대한 그리움은 아무리 노력해도 줄어들지 않았다. 소운을 꼭 빼닮은 동이를 키우는 시간이 온통 그랬고, 허구한 날 주먹을 휘둘러대는 남자를 참아내며 사는 시간 동안 더 커지기만 했다. 그러다 소운과의 과거를 떠올리게 하는 허 생원이 다시 찾아온 이후에는 더 이상 참을 수 없는 지경이 되었다.

허 생원이 아니라 소운이었다면! 불쑥 찾아와 이제라도 부부의 연을 맺고 살자며 손을 붙잡고 눈물을 보인 것이 소운이었다면! 그런 생각에 잠을 설치기까지 하였던 것이다.

목숨을 끊으려 메밀밭을 건너 강으로 향하는 지금까지도, 성정순은 소운이 그리웠다.

나를 왜 그렇게 두고 갔소. 왜 나를 버렸소. 당신의 아들은 지금 피 한 방울 안 섞인 사내를 아비라 부릅니다. 왜 우리를 이렇게 만들었소. 왜.


*

허 생원이 돌아온 후에 성정순은 동이에게 사실을 말하려 했다. 한 번도 소운에 대해 언급한 적이 없지만 이제라도 말하려 했다. 적어도 저자는 아니라고, 네 어미가 평생을 그리워한 네 아비가 저렇게 못난 이는 아니라고 말하려 했다. 그러나 그러지 못했다. 동이는 허 생원이 제 아비라 철석같이 믿고 있었고, 허 생원이 떠들어대는 물방앗간에서의 하룻밤이 거짓은 아니었다.

동이를 밴 채로 다른 사내와 몸을 섞었단 이야기를 어떻게 할 수 있겠는가.

성정순은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고, 이산가족이라도 만난 듯 서로 얼굴만 봐도 히죽이는 부자를 볼 때마다 고개를 돌릴 뿐이었다.

“이제라도 이렇게 아버지를 만나니 얼마나 좋소. 이것이 운명이 아니면 무엇이 운명이란 말이오. 어머니가 고약한 의부를 견디며 고생한 그 시절에 대한 보답이 이제야 오나 보오. 우리 세 가족 이제는 떨어지지 맙시다.”

 

 

이런 말을 하는 동이에게, 허 생원과 오붓한 시간을 보내라며 자꾸 자리를 비우는 동이에게 성정순은 입 밖으로 튀어나오려는 말을 꾹 눌러 삼켰다.

네 아비는 다른 이다. 저자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아름다운 이다. 얽둑배기 저자와는, 그래, 단 한 번 몸을 섞었을 뿐이었다. 우리를 모질게 떠난 네 아비에 대한 복수였고, 여전히 네 아비에 대한 연심으로 가득했던 나 자신에 대한 고문이었다. 그러니 저자를 아버지라 부르지 마라. 망나니 의부를 저주했듯이 저자를 미워하고 경멸해라. 저자는 내 정인(情人)이 아니다. 네 아비가 아니다.

동이가 허 생원을 사랑하는 만큼 성정순은 허 생원을 미워하고 싶었다. 허 생원은 동이의 사랑을 받을 자격이 없었고, 그 자격 없는 사랑을 독차지하는 만큼 미움을 받아야 했다. 그러나 눈 한 번 흘기는 것조차 쉽지 않을 만큼 허 생원은 성정순과 동이에게 극진했다. 성정순이 동침을 거부해도 한 번 싫은 소리를 하는 적이 없었고, 매일 아침 동이를 깨워 장터로 나갔다. 장을 파하고 동이가 주막에 한 번 들르자고 해도 절대 안 된다고 막아선다고 했다. 동이에게는 참을 사 주었지만 자신은 굶어가며 번 돈을 한 푼도 빠짐없이 성정순에게 가져왔다. 그간 혼자서 자신의 아들을 키우느라 고생이 컸는데, 이제라도 갚아야 한다는 말도 잊지 않았다.

허 생원이 얼마나 애를 썼는지 몇 달이 채 지나지 않아 살림이 눈에 띄게 나아졌다. 끼니 걱정을 하지 않게 되었고, 뜨끈뜨끈하게 덥힌 방에서 세 가족이 지낼 수 있게 되었다. 허 생원은 몇 년만 고생해서 큰 집으로 옮겨가자고 말하기도 했다. 그때 동이의 얼굴이 환하게 밝아지는 걸 성정순은 보았다. 동이의 얼굴에는 허 생원을 향한 깊은 신뢰와 감격이 고스란히 드러나 있었다. 동이에게 그런 기쁨을 심어준 허 생원을 어찌 미워할 수 있을까. 세상천지 홀로 살아온 모자의 지아비가, 아버지가 되어주는 사람을 어찌 박대할 수 있을까.

허 생원과 성정순은 그렇게 부부로 살아갔다. 허 생원은 어느 순간 성정순을 ‘여보’라고 부르기 시작했고, 마을 사람들은 성정순에게 ‘서방’의 안부를 물었다. 그럴 때마다 성정순은 언제까지고 미룰 수는 없겠다는 생각을 했다.

이미 한 번 동침한 사이인데 이제 와 꺼릴 것이 무엇이 있겠는가. 마흔이 가까워져 오는, 인생 풍파를 다 겪어 젊은 아리따운 기색이 모조리 사라진 자신을 여전히 사랑스러운 눈길로 바라보는 남자를 더 미워해서 무엇하겠는가. 동이를 쥐어패고 자신에게 칼을 휘두르는 남자와도 숱하게 동침을 했는데 자신과 동이에게 그토록 헌신하는 남자에게 몸을 허락하지 않을 이유가 무엇이 있단 말인가.

성정순은 자개장 깊이 숨겨둔 창호지를 다시 꺼냈다. 망나니 같은 남자의 씨를 밸 수 없어서 삼패 기생에게서 얻은 창호지였다. 삼패 기생은 남자가 묻거든 부적이라고 둘러대라면서 성정순의 손에 창호지를 쥐여 주었다. 그 덕분인지 성정순은 동이를 끝으로 다른 아이를 배지 않았다. 이제 마흔이 다 되어가는 나이에 회임을 할 리 없었지만 그래도 조심하고 싶었다. 성정순에게 이생에서 정인(情人)은 소운뿐이었고, 자식은 동이뿐이었다.

시간이 오래 지나 창호지가 삭은 건지, 그 망나니가 으스대기만 했지 남자 구실을 못 하는 자였는지 성정순은 허 생원과 동침을 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달거리를 걸렀다. 성정순은 초조해져서 삼패 기생을 다시 찾았고, 기생은 매운 고추를 먹으라고 했다.

“고추를 먹으면 몸에 열이 올라온다오. 그 열이 아기를 떨어뜨려 줄 거요.”

성정순은 눈물이 줄줄 날 정도로 매운 고추를 한 소쿠리를 먹어서 배탈이 났지만 여전히 달거리를 하지 않았다. 눈이 돌 지경이 되어 닦달하는 성정순에게 기생은 약을 구해다 주었다.

“창호지를 끼고도 애가 들어서고 고추를 먹고도 떨어지지 않는 걸 보면 그 애는 그냥 나올 애인 거요. 애를 죽이려다 엄마가 죽어요.”

기생은 성정순의 성화에 약첩을 전해 주면서도 자꾸만 먹지 말라고 했다.

“애가 그냥 죽겠소? 이게 사람을 죽이는 약이요.”

누가 죽어도 죽는 게 낫겠다는 마음으로 성정순은 약을 먹었고 사흘간 사경을 헤맸다. 간혹 정신이 돌아올 때마다 허 생원이 안 그래도 못난 얼굴을 잔뜩 구기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정신이 드오? 이것 좀 마셔 보오.”

허 생원이 성정순을 억지로 일으켜 입으로 숟가락을 밀어 넣었고, 정순은 없는 정신에도 엉덩이 아래로 손을 넣어 축축하게 빠져나온 것이 없는지 살폈다. 하혈을 하지 않았다는 것을 확인하고 나면 성정순은 다시 정신을 잃었다.

그렇게 며칠간 허 생원의 극진한 간호를 받고 나서 드디어 정신을 차린 날, 성정순은 아직 찬바람을 쐬면 안 된다는 허 생원의 만류를 뿌리치고 답답하다며 밖으로 나섰다. 허 생원은 몇 발자국을 따라나섰으나 성정순이 면박을 주자 어깨를 늘어뜨리고 돌아갔다.

성정순은 뒤돌아보지 않았다. 다시 돌아오지 않을 계획이었다. 마을 입구 장승을 지나 메밀밭을 지나면 물길이 세고 수심이 깊은 강이 있었다. 창호지도 고추도 약첩도 하지 못한 것을 해줄 시퍼런 강물이.


*

메밀꽃 향을 맡으며 성정순은 배에서 태동을 느꼈다. 이 끈질긴 아이가 나를 죽이는구나. 성정순은 그대로 꽃들 사이에 쓰러졌다.

소운 씨. 이것은 당신의 아이가 아니오.

고요한 가을밤. 저 멀리에서 물소리가 들렸다. 허 생원과 몸을 섞던 밤에도 물소리가 들렸었다. 그때도 그 물속에 뛰어들고 싶었는데 20년이 지난 지금도 같은 마음이라니. 다른 것이라면 그때는 소운의 아이를 배고 있었고, 지금은 허 생원의 아이를 배고 있다는 거였다.

다시 한 번 배를 걷어차는 아기의 움직임이 느껴졌다. 이번에도 자기도 모르게 낮은 비명이 나올 정도로 강했다.

너는 살려는구나. 살고 싶구나.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성정순은 일어나 치맛자락에 잔뜩 붙은 메밀 꽃잎을 떨구어내고 집으로 다시 향했다.


*

허 생원이 양팔을 허우적대며 맨발로 달려 나와 성정순을 부축했다.

“아니, 몸도 성치 않은데.”

성정순은 허 생원을 마주 보면서 고개를 주억거렸다.

서수진
소설가, 1982년생
장편소설 『코리안티처』 『유진과 데이브』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