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계절의 문학
2023년의 마지막을 채워준 원로, 중견, 신인 작가

  • 이 계절의 문학
  • 2024년 봄호 (통권 91호)
2023년의 마지막을 채워준 원로, 중견, 신인 작가

원로, 중견, 신인 작가를 가르는 정확한 기준이 어디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2023년 연말은 세 그룹이 모두 빛났던 시기라고 할 수 있다. 중견 작가에 해당하는 소설가 한강은 프랑스에서 권위 있는 상을 받았다. 현기영 작가도 대산문화재단의 상을 받았다. 조정래 작가도 여든이 넘은 나이에 왕성한 작품활동을 보여줬다. 문학계에서 연말의 가장 큰 행사라고 하면 ‘신춘문예’다. 한국 문단의 주요 등단 통로인 각 언론사의 신춘문예 공고가 11월 첫 주 시작되고 ‘봄을 기다리는 마음’을 담은 원고가 속속 접수된다. 한국 문단의 2024년을 열어갈 신인 작가가 탄생하는 시기인 셈이다. 신인과 중견, 원로 작가들이 함께 어우러진 2023년 연말에 문학의 부활을 다시 한번 생각해본다.

지난해 연말 한국 문학의 명성을 드높인 일이 있었다. 소설가 한강의 장편소설 『작별하지 않는다』(문학동네)이 지난해 11월 프랑스의 4대 문학상 중 하나인 메디치 외국문학상 수상작으로 선정된 것. 프랑스에서는 지난해 8월 최경란·피에르 비지우 번역으로 ‘불가능한 작별(Impossibles adieux)’이라는 제목으로 출간됐다. 메디치상은 공쿠르상, 페미나상, 르노도상과 함께 프랑스의 4대 문학상으로 꼽히는 권위 있는 상이다. 한강은 한국인 최초로 메디치상을 받았다.

2021년 출간된 『작별하지 않는다』는 제주 4·3 사건을 경하, 인선, 정심 세 여성의 시선으로 풀어낸 장편소설이다. 작가는 출간 당시 “제주 4·3사건에 관한 소설이기도, 죽음에서 삶으로 가는 소설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지극한 사랑에 대한 소설”이라고 소개했다. 한강 작가는 수상 이후 한국에서 열린 기자간담회에서 수상을 예측하지 못했다고 한다. 그는 “이 소설을 쓰면서 어떻게 하면 완성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밖에는 할 겨를이 없었다”며 “(소설을) 완성하기까지 7년이 걸렸는데, 상 받은 순간이 기쁜 게 아니라 소설 완성한 순간이 가장 기뻤다”고 말했다.

 

 

수상 이후 『작별하지 않는다』는 2021년 출간작인데도 차트를 ‘역주행’해 교보문고 등에서 국내소설 분야 베스트셀러에 올랐다. 프랑스 현지에서도 추가 인쇄에 들어갔다.

85세의 현기영 작가도 제31회 대산문학상에 수상자로 뽑혔다. 그 스스로도 “상을 줘야 할 나이에 상을 받는다는 게 쑥스럽기도 하다”며 “현기영에게 준 상이라기보다 ‘제주도 역사를 긍정하겠다. 대한민국 아픈 역사인데 중요한 현대사 부분이다’라는 것을 인정해주는 거 같아서 뿌듯하다”고 수상소감을 말했다. 수상 작품인 『제주도우다』는 제주 4·3 사건을 다룬 3권짜리 장편소설로 제주의 역사를 넘나들며 4·3 사건을 깊게 해부했다.

원로 작가인 조정래 소설가가 4년 만에 낸 장편소설 『황금종이』(해냄)도 출간 직후부터 계속 베스트셀러에 올랐다. 『황금종이』는 학생운동 중심에 섰고 현재 촉망받는 엘리트 검사가 된 이태하가 재벌 비리를 수사하다 수뇌부의 압박을 견디지 못하고 변호사로 개업하면서 벌어지는 이야기를 여러 가지 사건을 엮어 담았다. 이태하의 정신적 멘토 한지섭까지 소설은 두 주인공을 통해 돈과 관련한 여러 소송 속에 드러난 자본주의 사회의 이면을 들춘다. 작가는 출간 기념 기자간담회에서 “앞으로 등단 60주년 회문식(回文式)에서 마지막 작품을 내면서 정리하는 것이 소망”이라고 했다.

해마다 연말은 신인 작가가 움트는 시기이기도 하다. 보통 언론사들의 신춘문예 공고는 11월 1일에 나온다. 한 달간 접수된 원고는 12월 중순 심사를 거쳐 크리스마스 전후로 당선자들에게 사전 통보를 하고, 2024년 새해 첫날 신문에 실린다.

언론사의 신춘문예는 한국 문학의 오래된 등단 제도다. 1925년 동아일보에서 시작된 신춘문예는 경향신문, 문화일보, 서울신문, 세계일보, 한국일보, 조선일보 등이 운영하고 있다. 지역 일간지까지 포함하면 훨씬 더 숫자가 늘어난다. 현기영 작가도 1975년 동아일보, 한강 작가는 1994년 서울신문을 통해 등단했다. 신춘문예가 더러 비슷한 작품만 낳는다는 비판이 나오기도 하고, 요새는 꼭 신춘문예를 통해서만 작가가 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그렇지만 매해 연말 언론사에 접수되는 수백 편의 원고를 보고 있노라면, 제도가 어떠하든, 여전히 문학이 살아있다는 사실에 한없이 기쁘다.

올해 신춘문예는 소설과 시 분야 모두 언론사를 막론하고 대부분 응모 편수가 늘었다. 특히 50대 소설가, 40대 시인 등 올해는 유독 청춘을 넘어선 당선자들이 눈에 띈다. 경향신문의 시 당선자 맹재범 씨는 냉면 가게를 운영하다가 한 구석에서 쓴 시로 당선됐으며, 동아일보 소설 당선자 임택수 씨도 55세의 나이에 등단했다. 서울신문의 시조 당선자 강성재 씨는 예순 셋에 드디어 ‘중앙일간지 등단’이라는 꿈을 이뤘다. 문화일보 신춘문예 소설 당선자인 마흔 여섯의 기명진 씨(본명 황정숙)도 5년간 신춘문예와 공모전에 응모하고 투고하면서 드디어 당선 전화를 받았다.

2023년을 보내며 신춘문예의 한 당선자에게 당선 통보 전화를 했던 순간을 떠올려본다. 전화를 받은 사람은 “네? 잠시만요”라고 하고선 한숨을 크게 내뱉었다. 뭔가 잘못된 일이 있나 걱정이 스쳤지만, 그는 너무 놀라서였다고 한다. 그는 나중에 “심장이 반쯤 멈추는 전화”라고 전해줬다.

무언가를 ‘보는’ 데만 열중하는 시대에 여전히 포기하지 않고 ‘쓰는’ 데 집중하는 마음이 이어져 2024년 결실로 나타나길 희망해본다.

임지선
경향신문 문화부 기자, 1981년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