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편소설
기압 배치 유형 연구

  • 단편소설
  • 2024년 봄호 (통권 91호)
기압 배치 유형 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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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7월의 첫 번째 수요일 아침, 정한솔은 아버지가 되었다.

딸 쌍둥이를 임신한 아내의 출산 예정일은 열흘 뒤였다. 쌍둥이 출산이 흔히 그렇듯 제왕절개수술을 하기로 하고, 병원에서 일러준 대로 예정일에 맞춰 수술 전날 입원할 계획이었다. 그런데 어젯밤 자정이 가까워 아내에게 산기가 찾아왔다. 실제 출산이 예정일 전후로 꽤나 유동적일 수 있다는 것을 한솔도 아내도 모르지 않았다. 알고 있었음에도 막상 닥치니 역시 당혹스러웠다. 숫자를 세는 호흡법이 짐짓 어림없이 느껴졌고, 급히 물컵을 가져오다 바닥에 물을 쏟았고, 아내의 부은 맨발이 미어지게 들어차는 천 슬리퍼 한 짝은 어디로 사라졌는지 보이지 않았다.

아내는 두 달 전 임산부 프로필 사진을 찍을 때와는 비교조차 할 수 없을 정도로 크게 부풀어 오른 배를 힘겨워하며 침대에 걸터앉아 있었다. 한솔은 아내를 마저 일으켜 세워야 좋을지, 다시 눕혀야 좋을지 알 수 없었다.

“자연 분만은, 안 되겠지?”

무심코 튀어나온 말이 제가 생각해도 엉뚱하기만 했다.

“무슨 소리 하는 거야! 이제 와서, 무섭게……”

통증으로 일그러진 아내의 얼굴에 짜증이 더해졌다.

“전화 갖다 줘, 엄마한테 전화하게. 오빠는 진통 시간 좀 확인해.”

“지금 12시 넘었어.”

“아, 누가 시간 물어봤어? 진통 간격 체크하라고.”

자정이 넘어 장인 장모가 취침 중일 거라는 언질은 하등 쓸모없는 것이었고, 자기 몸으로 직접 느낄 수 없는 분만통의 간격을 확인하는 것은 출산 임박 매뉴얼의 첫 번째 지침이었다.

얼마간 우왕좌왕한 끝에 새벽 1시를 넘기지 않고 병원에 도착할 수 있었다. 가까이 사는 장인 장모도 바로 도착했다. 장모는 아내가 임신한 후 거의 매일 집을 찾았다. 현관문 도어락의 비밀번호는 결혼 직후부터 알고 있었다. 그 번호가 한솔과 아내가 처음 만난 날짜의 조합이란 것도 알고 있었다. 전세보증금의 절반 이상이 처가의 돈이었으므로, 한솔은 딱히 불만을 갖지 않았다. 아내가 쌍둥이를 임신했다는 걸 알고 장인은 SUV가 필요하겠다며 지프 체로키로 차를 바꿔주었다. 중고였지만 최근 연식에 풀옵션이었다.

병원에서 만나자마자 아내와 장모는 실랑이를 벌였다. 장모는 수술과 입원을 앞두고 며칠 전부터 미리 출산 가방을 싸놓자 했었고, 아내는 예정일이 열흘 넘게 남은 데다 해외직구로 주문한 출산용품 중 아직 택배가 도착하지 않은 것이 있다며 늑장을 부렸다. 아내가 급히 불러주는 대로 한솔이 어설프게 챙겨 온 캐리어를 열어 본 장모는 혀를 찼다.

“아니, 복대랑 거즈 세트 지퍼백에 담아둔 거 어쨌어? 옷방 서랍장 위에 내가 올려뒀잖아.”

교무실로 불려 온 학생 같은 얼굴로 아내도 캐리어 안을 들여다보았다.

“얘네가 진짜 앞으로 무슨 정신에 쌍둥이를 키우려고……”

아내는 제 엄마에게 해야 할 듯한 얘기를 한솔을 바라보며 우물거렸다.

“나 압박스타킹 깜빡했어. 보조 배터리도…… 따로 챙겨 놨었는데, 오빠가 집에 좀 다시 갔다 와.”

장모가 목소리를 높였다.

“의사 곧 내려온다며? 바로 수술 들어갈지도 모르는데 애 아빠가 어딜 가.”

잠자코 있던 장인이 나섰다.

“거참, 우리가 잠깐 갔다 오는 걸로 해.”

한솔은 난처한 얼굴로 둘을 바라보았다.

“근데, 저희 둘만 있으면……”

“그럼 그냥 당신 혼자 갔다 와, 엄마 빨리 어플로 택시 불러줘라.”

“그러게 진즉에 짐을 제대로 싸놨어야 된다니까.”

장모는 캐리어를 끌고 엘리베이터 쪽으로 종종걸음을 쳤다.

새벽 시간인 탓에 아내의 담당 의사 대신 당직 의사가 와서 바로 진행해야 하는 몇 가지 검사에 대해 설명했다. 예정일보다 시기가 빠른 만큼 산모와 쌍둥이 태아가 수술이 가능한 상태인지 확인이 필요하다는 것이었다. 한솔은 간호사가 건넨 서류 몇 장에 보호자 동의 서명을 했다. 의사는 드물지 않은 일이라 했지만, 한솔은 하릴없이 두려움에 사로잡혔다.

“아빠, 나 무서워.”

장인의 손을 잡고 잠시 울먹이던 아내가 한솔에게 말했다.

“오빠, 엄마한테 전화해서 산후조리원 예약 변경 어떻게 할지 물어봐 줘.”

아내는 외동딸이었다. 1987년생인 한솔보다 세 살 아래로, 서른셋 여름 곧 엄마가 될 참이었다. 결혼식은 3년 전 여름 코로나 팬데믹 2년 차에 올렸다. 확진자 수가 하향세가 되기를 기다려 날을 잡았어도 참석한 하객 모두 마스크를 쓰고 사진 촬영을 해야 했다. 장년층 세대들이 흔히 그렇듯 20대에 결혼해 20대에 부모가 된 장인은 바로 아이를 낳는 게 좋겠다고 했고, 장모는 몇 년쯤 지나 천천히 낳는 게 좋겠다고 했다. 한솔과 아내는 오락가락했다. 아이를 원하는 것도 아니었고, 원하지 않는 것도 아니었다. 번번이 최저 출산율이 경신되며 아이를 낳지 않는 것이 일반화된 분위기에 ‘키우기도 힘들고 돈도 많이 들고’라는 말을 자연스레 입에 올리기도 했고, 잠들기 전 어두운 침실에서 ‘그래도 하나님이 선물로 주시면 예쁘게 잘 키워야겠지’라고 소곤거리기도 했다. 철저하게 피임을 한 시기가 있었는가 하면, 배란일에 맞춰 의식적으로 관계를 갖고 초조하게 테스트기를 확인하기도 했다. 이도 저도 시들해져 무신경한 날들이 반복되기도 했다. 문득 두 번째 결혼기념일이 지나도록 계획으로도 우연으로도 아기가 생기지 않고 있다는 것을 자각하고, 서로에게 말은 하지 않은 채 자신이나 상대에게 원천적으로 불임의 가능성이 있는 게 아닐까 의심하던 차에, 임신이 되었다. 주변에 쌍둥이 임신 소식을 전하자 난임시술이나 인공수정을 했냐고 물어오는 지인들이 있었다. 저출산의 심각성이 흔한 뉴스가 된 만큼 불임부부에 대한 이슈도 예전보다 익숙한 것이 되었고, 인공수정이 늘면서 유독 쌍둥이 출산이 증가했다는 통계도 사람들이 제법 아는 얘기가 되었다. 그러나 결국은 ‘한꺼번에 둘이나!’ 하는 농담조의 애국자 타령이 빠지지 않았다.

한솔도 아내도 임신보다 ‘쌍둥이’에 놀란 게 사실이었다. 친가인 한솔 쪽 가계에도 외가인 아내 쪽 가계에도 쌍둥이는 없었다. 인공수정이 꼭 쌍둥이 임신으로 이어지는 것이 아닌 것처럼, 쌍둥이 임신이 꼭 유전적인 요인에서 비롯되는 것은 아니라고 했다. 그럼에도 한솔과 아내는 온전히 놀랐다. 인스타그램에 초음파사진과 함께 해시태그를 붙여 ‘#우리가_쌍둥이_엄마_아빠가_된다니! #태명은_꼬물이와_쪼물이_ㅋㅋㅋㅋ’라 올렸다. 귀엽고 장난스러운 이모티콘도 잔뜩 사용했지만, 삶이 순식간에 다른 차원으로 진입해 버리는 얼떨떨한 생경함을 상쇄하지는 못했다. 계획이나 우연 같은 단어는 이미 현실감이 없었고, ‘키우기도 힘들고 돈도 많이 들고’의 의미와 형태는 가늠조차 할 수 없게 되었다. 쌍둥이 임신과 출산에 대한 경험과 정보를 나누는 인터넷 카페에 가입해 이런저런 게시글을 살펴보았지만, ‘육아 강도 2배ㅠㅠ; 행복 강도 2배^o^;’라는 표현이 와 닿는 것은 아니었다. 쌍둥이 육아 채널에서 젊은 부부가 두 아기를 목욕시키는 동영상을 보던 한솔은 지금껏 자신이 쌍둥이와 직접적인 관계를 맺어본 적이 없다는 사실을 새삼 깨달았다. 학교, 군대, 직장 어디서도 쌍둥이와의 인연은 없었다. 흔히 그렇듯 미디어에서 늘 비슷한 방식으로 묘사되는 쌍둥이의 이미지를 인지하고 있는 정도였다. 똑같은 옷을 입고 똑같은 표정을 짓는 똑같은 외모의 쌍둥이. 똑같지만 다른 사람, 왜 똑같은지, 왜 같은 사람이 아닌지. 한솔은 왠지 모를 두려움에 사로잡혀 동영상을 껐다. 쌍둥이의 아빠인 자신이 그 둘을 구분하지 못할까, 똑같지만 다른 둘을 제대로 알아보지 못할까, 번번이 이름을 잘못 부를까, 한솔은 두려웠다. 그 기이한 두려움을 누구에게도 말하기가 어려웠다.

“오빠 양팔에 애 하나씩 안고 스쿼트 하면 되겠네.”

아내는 웃었고, 한솔도 따라 웃었다. 차츰 배가 불러오자 아내는 임산부 프로필 사진을 찍고 싶어 했다. 한솔은 아내가 건넨 태블릿PC를 받아 들었다. 속이 비치는 크림색 쉬폰 드레스를 입은 만삭의 임산부는 여왕 같은 표정을 짓고 있었고, 공처럼 부푼 배를 하고도 날씬하고 유연한 팔다리로 필라테스 동작을 취한 임산부도 있었고, 젖가슴을 두 팔로 감싸듯 가리고 크고 둥근 배를 누드로 드러낸 임산부를 역시 상의를 입지 않은 근육질의 남편이 백 허그한 흑백사진도 있었다.

“완전 멋지지? 나중에 애 낳고 다 같이 찍는 출산 사진은 조리원에서 스튜디오 연계해 준대. 만삭 사진도 업체가 따로 있긴 한데, 우리 웨딩 화보 찍어준 유 실장님한테 연락해볼까? 근데 쌍둥이 임산부는 만삭이 되기 전에 촬영해야 된다네. 진짜 만삭 때는 배가 너무 불러서……”

아내는 결혼 전 사촌언니가 운영하는 온라인 패션몰에서 일했다. 중국산 저가 원단으로 자체 디자인 제품을 다종 소량 생산하는 영세 브랜드였다. 2년제 산업디자인과를 나온 아내는 쇼핑몰의 홈페이지 개설 작업을 도왔다. 지지부진 운영되던 쇼핑몰은 코로나 팬데믹과 함께 호황을 맞는 듯했다. “사람들이 집에 틀어박혀 있으니 다 온라인으로만 옷을 사!” 아내는 주문 제품 포장이나 택배 송장 업무도 거들게 되었다. 155센티미터의 신장 때문에 원하는 대로 피팅 모델을 할 수는 없었다. 그래도 상반신 부분 컷 위주로 촬영을 했고, 전문 피팅 모델이 제대로 소화하지 못한 아담한 소녀풍의 옷을 입고 카메라 앞에 섰다. 얼마 못 가 사촌언니의 쇼핑몰은 폐업했다. “사람들이 집안에 틀어박혀 있으니 입고 나갈 데가 없어 옷을 안 사!”

아내는 만삭 드레스를 검색하다 텐셀 소재의 오프숄더 블랙 롱드레스를 장바구니에 담았다. 바로 결제를 하는 대신 증권사 어플을 화면에 띄웠다.

한솔은 서울에 본교를 둔 4년제 지방 분교의 체대를 졸업했다. 입학할 때 학과명은 사회체육학과였지만, 군대를 다녀온 후 복학하니 생활체육학과로 이름이 바뀌어 있었다. 한솔은 재수생 시절 체대 입시를 시작했다. 어려서 잠시 태권도를 배운 적이 있지만, 특정 종목 운동선수가 되고 싶다는 생각은 한 번도 해 본 적이 없었다. 어쨌든 ‘사회’나 ‘생활’이란 단어를 구색에 맞춰 이리저리 써먹을 수 있는 체육학과에 입학했고, 재수하며 다녔던 체대 입시학원에서 합격생 프리미엄을 받고 보조강사 아르바이트를 하기도 했다. 167센티미터의 장인은 한솔의 키가 181센티미터라는 것과 한솔이 논산훈련소에서 조교로 복무했다는 점을 과하다 싶을 정도로 마음에 들어 했다. 흔히 그렇듯 신병 교육 때 ‘180 이상 손 들어!’, ‘체대 손 들어!’로 조교병이 되었을 뿐이었다. 헌병으로 차출되거나 최전방 부대에 배치되지 않은 게 다행이라면 다행이었다. 한솔은 구기 종목에 유난히 소질이 없어 군대에서조차 축구와 족구 실력이 딱히 늘지 않았다. 제일 좋아하는 동시에 제법 잘 가르칠 수 있는 것은 수영과 스키였다. 복학 후 수영장과 스키장에서 줄곧 아르바이트를 하며 관련 강사 자격증을 취득했다. 경제적으로나 오락적으로나 20대를 제법 잘 즐길 수 있는 조건이 갖춰졌고, 한솔은 그렇게 했다.

30대가 되자 사정이 달라졌다. 결혼을 염두에 두면 더욱 그러했다. 아르바이트나 단기 계약직이 아닌 강사 자리를 찾기가 힘들었다. 해당 종목의 선수 출신 강사와의 경쟁에서는 밀릴 수밖에 없었다. 여성 수강생이 대다수인 수영장과 스키장에서 시즌마다 계속 연락이 왔지만, 번번이 새로운 얼굴의 20대 남자 강사들과 마주해야 했다. 버는 만큼 쓰는 걸로 굳어진 소비 습관은 좀처럼 고쳐지지 않았다. ‘몸짱 열풍’ 속에 학과 선후배나 동기 대부분 직접 피트니스 센터를 차리거나 전문 헬스 트레이너로의 변신을 꾀했다. 한솔도 마지못해 벌크업 식단을 하며 본격적으로 기구 운동을 시작했지만, 수영이나 스키와 달리 극기 훈련으로만 여겨졌다. 그러나 피트니스 센터도, 수영이나 스키도, 생활체육이라 불리는 모든 것이 코로나 팬데믹으로 잠정 중단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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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년 7월의 첫 번째 수요일 아침, 잠을 설친 이인길은 누운 채로 한숨을 내쉬었다.

한 달쯤 뒤면 백일을 맞는 어린 아들이 밤새 유난히 울며 보챘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지난주 일요일 전쟁이 터졌다. 불과 사흘 만에 서울이 점령되었다고 했다. 북한군의 남하를 막기 위해 한강 다리가 폭파되었다는 소식이 온갖 흉흉하고 불길한 풍문과 함께 인천까지 당도했다. 혼란의 와중에 어디부터가 사실이고 어디까지가 소문인지 정확히 알아낼 방도가 없었다. 인길이 공무원임에도 그랬다. 북한 인민군 6사단이 김포를 점령했다는 건 분명한 듯했다. 영등포에서부터 경인로와 경인선이 차단되어, 며칠째 인천에는 서울을 출발한 어떤 차량이나 인편도 도착하지 않고 있었다. 가장 믿기 어려운 얘기는 서울의 대통령이 한강 다리를 끊기 전 이미 경무대를 비우고 남쪽 지방으로 줄행랑을 쳤다는 것이었다.

하지(夏至)가 지난 지 얼마 되지 않아 일찌감치 동이 터 사위는 희붐하게 밝아지고 있었다. 그러나 본격적인 장마철이 시작된 참이었다. 어제는 종일 비가 쏟아졌다. 인길은 이부자리에서 몸을 일으키며 오늘도 맑은 하늘을 보기는 어려울 거란 생각을 했다. 아랫목에는 세 살배기 딸 연숙이 잠들어 있었다. 건넛방에서 제 할머니와 고모와 함께 자던 것을 동이 틀 무렵 이 방으로 옮겨와 눕혔다. 인길의 아내 김난옥은 밤새 보챈 아들을 시어머니에게 건네고 부엌으로 들어간 참이었다. 마당에서 막내 여동생이 요강을 부시고 걸레를 빠는 소리가 들렸다. 뒤란에서 손자를 등에 업은 어머니가 자장가를 부르듯 중얼중얼 경을 외는 소리가 들렸다. 집 안에 남자는 인길과 어린 아들뿐이었다.

“백일을 무사히 넘겨야 한단다, 일단 백일을!”

인길의 어머니는 손자가 태어나자 정성껏 새끼를 꼬아 대문에 금줄을 걸고 용한 무당을 찾아 강화도까지 다녀왔다.

“배 타고 나오기 전에 전등사에도 들러 공물 올리고, 부처님께 삼배도 하고, 니 애비랑 수길이한테 집안 장손 또 델고 가면 안 된다고, 내가 빌고 또 빌고……” 굳이 강화도까지 가지 않아도 인천에도 무당은 많았다. 사나운 바다가 가장을 집어삼키는 일이 다반사인 어촌에서는 숱하게 굿판이 벌어졌다. 인길의 아버지는 주로 인천 조계지(租界地)의 외국인들을 상대로 이런저런 물건을 사고파는 양행(洋行)상점의 조달 책임자였다. 바다에 나가 생선을 잡는 뱃사람은 아니었지만, 배를 타고 황해도 해주나 충청도 태안반도를 오갔다. 전라도 군산을 찾는 일도 있었다. 경인선 기차에 많은 짐을 실을 수 없을 때는 한강을 거슬러 서울의 노량진과 마포에 다녀오기도 했다. 인길의 아버지를 태운 배가 당진에서 소금을 싣고 돌아오다 폭풍에 난파되어 대부도 앞바다에 침몰한 것은 10년 전쯤의 일이었다. 나이 마흔에 과부가 된 인길의 어머니는 울며불며 제물포의 무당을 찾아갔다. 굿을 하라는 대신 큰아들을 서둘러 혼인시키라는 점괘를 듣고 왔다.

인천공립상업학교 졸업반이었던 인길은 일찍 결혼하고 싶은 마음이 없었다. 3년 상을 치른다는 개념은 신식 관혼상제에 맞지 않는 일이 되었지만, 장남인 자신이 어머니를 비롯해 여동생 둘과 남동생 하나를 건사해야 하는 가장의 처지가 된 것은 부정할 수 없었다. 인길은 일본에 가고 싶었다. 대한제국 황제의 칙령으로 개교한 인천 유일의 5년제 갑종(甲種) 학교 출신이란 자부심과 허영심 때문만은 아니었다. 인길은 일본어 외에도 영어와 노어에 통달하고 싶었다. 아버지의 영향으로 집에는 조계에서 흘러나온 물건들이 꽤 있었다. 노어, 불어, 서반어로 된 책들, 특히나 영문판 세계지도 책자가 인길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낯설지만 매혹적인 머나먼 구라파(歐羅巴)의 도시 이름들을 되뇌며, 인길은 일본으로 건너가 외국어 전문학교에 입학하고 싶었다. 아버지의 죽음으로 경제적 지원을 기대할 수 없게 되었지만, 그보다 직접적으로 유학을 포기하게 된 것은 태평양전쟁의 전황이 심각해지며 총동원령이 떨어졌기 때문이었다. 일본의 조선인 유학생 상당수가 체포되듯 징집되어 만주 전선이나 남양 군도로 끌려갔다는 얘기는 헛소문이 아니었다.

어머니는 징병을 피해야 한다며 급히 친인척들을 찾아다니며 인길의 중신을 부탁했다. 둘째인 여동생의 혼인도 서둘렀다. 조선인 10대 소녀들이 정신대(挺身隊)에 동원되었다 일본군 주둔 전선으로 보내져 겪게 된다는 일들은 차라리 헛소문이길 간절히 바랄 만큼 무섭고 끔찍한 것이었다. 함께 양행상점에서 일했던 아버지의 지인이 중신을 섰다. 서울 낙산 동소문 부근, 명륜동 옆 동네인 성북동의 중인 출신 김씨 집안의 셋째 딸과 넷째 딸도 정신대 동원을 피해 혼처를 찾고 있다는 것이었다. 구리와 남양주 일대에 적잖은 토지가 있어 소작으로 매년 꽤 많은 소출을 거둬들인다는 얘기는 조금 과장된 것일지 몰랐다. 그러나 그 집안의 아버지와 죽은 인길의 아버지가 언젠가 중간상인들의 남대문 회합 자리에서 만난 적이 있다는 것은 사실인 듯했다. 인길보다 서너 살 위라는 그 집안의 장남이 선린상업학교를 졸업하고 조선은행에서 일하고 있다는 점도 어머니의 마음을 샀다. 졸업 후 인길은 체신국 산하 인천우편국에 취직해 우편저금 관리부에서 일하고 있었다.
1920년생인 이인길과 1924년생인 김난옥은 1943년 봄 혼인했다. 난옥은 동네에서 서울새댁 또는 성북댁이라 불렸다. 어려서 1년간 조선인소학교를 다녔다는 난옥은 한글을 읽고 쓸 줄 알았다. 집에서 남자 형제들에게 히라가나를 배웠고, 한자도 몇 글자 알고 있었다. 인길이 ≪삼천리(三千里)≫ 같은 잡지의 과월호를 구해다 주면 무척 좋아했고, 학교를 다닌 적 없는 막내 시누이에게 ‘가갸거겨’나 ‘1234’ 쓰는 법을 가르쳐 주기도 했다. 이듬해 여름 난옥은 첫아들을 낳았다. 그러나 아기는 삼칠일을 넘기지 못하고 고열과 설사에 시달리다 죽고 말았다. 갓난아기가 죽는 것은 흔한 일이었다. 오래전 인길의 어머니 역시 인길보다 먼저 맏딸을 낳았지만 난산 끝에 태어나자마자 숨이 끊어졌다고 했다. 난옥도 어려서 갓난쟁이 쌍둥이 형제를 잃었다. 쌍둥이가 죽지 않았다면 난옥은 칠남매가 아닌 구남매의 셋째였을 터였다.

첫아기가 죽은 지 얼마 되지 않아 인길의 남동생 수길이 강제징용을 당하고 말았다. 사남매 중 둘째인 인길의 여동생은 인길과 난옥이 혼인한 해 가을 용인으로 시집을 갔다. 장남과 장녀를 혼인시킨 어머니는 근심을 덜었다 생각했지만, 가가호호 할당제로 내려오는 근로동원까지 피할 길은 없었다. 외가 쪽 친척이 운영하는 약재상에서 사환으로 일하던 열여덟 살의 수길은 배달을 위해 배운 자전거를 능숙하고 유연하게 몰았다. 천진하고 활달한 성격에 서울에서 시집온 형수와도 잘 지냈고, 군말 없이 가족 중 대표로 근로동원에 나가 인천항이나 부평 조병창(造兵廠)에서 방공호를 파고 벽돌과 고철을 날랐다.

조병창에서 그만 일이 터졌다. 식민지 조선 유일의 일본육군 무기공장이었던 조병창에는 충청도나 경상도의 궁벽한 농촌 출신 강제 징용자들이 혹독하고 열악한 환경에서 공원(工員)으로 일하고 있었다. 도망치지 못하도록 인천 주변 지리를 잘 모르는 먼 고장에서 차출되어 온 그들 중에는 겨우 열너댓 살 소년소녀도 적지 않았다. 조병창은 일을 하다 팔다리가 잘리거나 눈과 귀가 멀거나 끔찍한 화상을 입는 경우가 부지기수라는 소문으로 악명이 높았다. 수길은 공장부지 확장을 위해 땅을 다지는 작업에 동원되어 수십 명의 조선인들과 함께 뙤약볕 아래서 땅을 파고 돌을 고르고 있었다. 돌덩이를 담은 무거운 삼태기를 옮기던 수길은 후미진 공장 건물 뒤편에서 심상찮은 움직임을 목격했다. 관리자로 보이는 두 남자가 누더기 같은 작업복 차림의 앳된 공원 다섯을 일렬로 세워놓고 훈계를 하는 듯하더니, 무지막지한 기세로 그들의 따귀를 때리기 시작했다. 다섯 중 둘은 거의 어린아이로 보이는 십대 소녀들이었다. 줄줄이 뺨을 얻어맞고 무력하게 휘청대며 고개를 떨구는 모습, 끝자리에 서 있던 유난히 체구가 작은 소녀의 차례였다. 남자는 소녀의 머리통을 목에서 떼어낼 작정이라도 한 것처럼 가차 없이 따귀를 갈겼다. 건물 벽면에 부딪힌 소녀의 몸뚱이가 짚단처럼 풀썩 바닥에 널브러지는 모습을 본 수길은 짐승처럼 괴성을 지르며 그곳을 향해 달려들었다. 함부로 내던진 삼태기에서 돌덩이가 와르르 쏟아졌다. 수길이 남자를 덮친 것이 그보다 먼저라고 느껴질 정도로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다나카 99식 소총 조립반의 작업을 관리 감독하는 두 남자 중 한 명은 일본인이었고 한 명은 조선인이었다. 당연히 둘은 징용자가 아닌 미쓰비시(三稜)제강 소속 직원이었다. 비명과 고함이 난무하고 여기저기서 사람들이 달려오고 주먹질과 발길질이 한참 오간 끝에 소동은 잦아들었다. 이글대는 뙤약볕이 덩이진 곤죽처럼 모두에게 엉겨 붙어 끈적이고 있었다. 근로동원 감독에게 곤봉으로 얻어맞은 수길의 이마에서 피가 흘렀다. 수길은 팔다리를 하나씩 붙잡힌 채로 씩씩대다, 바닥에 공처럼 웅크린 채 떨고 있는 뺨을 맞은 소녀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조병창이 떠나가라 “왜!”라고 괴성을 내질렀다.

일본인에게, 그것도 천하의 미쓰비시 직원에게 주먹을 휘둘렀다는 것은 체포되어 형무소에 갈 사안이었다. 수길의 형 인길은 갖은 수를 총동원해 그것을 막았다. 관공서에 있는 모든 지인을 찾아다니며 읍소했고, 소개받은 일본인들에게 전부 뇌물을 바쳤다. 보름쯤 지나 상황이 잠잠해졌나 가족들이 안심하고 있던 즈음, 서울 용산역 집결을 알리는 징용장이 수길 앞으로 날아왔다. 인길의 어머니와 아내 난옥과 막내 여동생 모두 수길의 팔다리를 부여잡고 울음을 터뜨렸다. 동생의 옥살이를 막으려 백방으로 뛰어다닌 것이 외려 누군가의 눈에 먹잇감처럼 포착된 것이 아닌가 인길은 후회막급의 심정이 되었다. 다른 징용자들과 함께 용산역에 도착한 수길이 기차에 태워져 부산으로 향했다는 정보를 어렵게 입수할 수 있었다. 소문대로라면 규슈나 홋카이도행일 터였다. 부산도 규슈도 홋카이도도 학생 시절 인길이 그저 가보고 싶던 곳이라 생각하니 기가 찰 노릇이었다. 얼마 뒤 인길은 경찰 쪽 지인으로부터 조심스러운 얘기를 전해 들었다. 수길이 조병창에서 벌인 소동이 우발적인 단순 사건이 아니라 독립운동 단체와 연관된 모종의 선동 시도가 아니었나 하는 얘기가 경찰 내부에서 오갔다는 것이었다. 인길은 한참 동안 식은땀을 흘렸다. 징용장이 날아온 이유를 알 것도 같았다. 수길이 정확히 일본 어디로 보내졌는지 알아내는 것은 아무리 애를 써도 불가능한 일이었다. 법원 서기가 된 동창이 총독부의 지인을 통해 알아낸 바에 따르면, 작년 초부터 내지(內池)의 징용 충원 요구가 더욱 거세져 조선 팔도 각지에서 부산으로 끌려온 징용자들이 한 달이면 만 명도 넘게 현해탄을 건너고 있다는 것이었다. 대부분 규슈나 홋카이도의 탄광으로 보내진다고 했다. 인길은 부산항 부둣가에 도열해 짐짝처럼 배에 실릴 순서를 기다리고 있는 수백, 수천의 징용자들 사이 수길의 모습을 그려보았다. 남해는 서해와는 완전히 다른, 가없이 무서운 바다라고 했던 오래전 아버지의 말이 떠올랐다.

수길은 돌아오지 않았다. 이듬해인 1945년 여름, 해방이 되었지만 수길은 돌아오지 않았다. 신탁(信託)이냐 반탁(反託)이냐를 두고 무시무시한 대립과 지긋지긋한 혼란이 벌어졌다. 38도 분단선이 그어지고, 미군정(美軍政)이 시작되었다. 수길은 돌아오지 않았다. 공산정권이 들어선다는 북에서 내려온 월남민들로 인천항은 북새통을 이루었다. 인길의 학교 선후배 중 사회주의자가 된 이들이 가족을 데리고 혹은 단신으로 월북을 감행했다. 인길과 난옥 사이에 사실상 둘째인 첫 아이가 태어났다. 둘은 부모가 되었다. 인길이 연숙이란 이름을 지어준 딸아이는 다행히 돌을 넘기고도 죽지 않았다. 수길은 돌아오지 않았다. 여수와 순천에서, 그리고 제주에서 마구잡이로 빨갱이 사냥이 벌어져 숱한 이들이 끔찍하게 학살되었다는 얘기가 들려왔다. 1948년 선거를 전후로 백색테러가 더욱 기승을 부렸다. 인천의 공식 명칭은 인천부(府)에서 인천시(市)가 되었다. 인길은 인천시청 산하 남동출장소에서 재무 관리와 물자 감독을 담당하는 공무원이 되었다. 1950년 만개했던 벚꽃이 진 어느 봄날, 난옥은 다시 아들을 낳았다. 어머니는 대문에 금줄을 치고 강화도의 무당을 찾아가 무사히 백일을 넘겨야 한다는 점괘를 듣고 왔다.

인길은 해방 이듬해 혼자 강화도에 다녀왔다는 얘기를 몇 년이 지나도록 가족 누구에게도 하지 못하고 있었다. 강화도 서쪽의 작은 섬 석모도에 가서 한 사내를 직접 만나봐야 했다. 수길과 같은 날 기차를 타고 용산으로, 다시 부산으로, 같은 배를 타고 멀리 홋카이도로, 다시 깊은 산속 탄광에 도착해 함께 일했을 거라 추정되는 사내를 기어이 찾아낸 것이었다. 사내는 인길과 동갑이었다. 작은 섬에서 고기도 잡고 농사도 지으며 살아가는 작은 집성촌이 일원이었다. 부모는 어려서 여의었고, 징용을 가기 전 혼담이 오가고 있었다. 형수와 조카들이 있는 두 형을 대신해 사내는 마을의 징용자 할당을 채워야 했으므로 떠날 수밖에 없었다. 해방이 되고도 무려 육 개월 만에 산 송장의 몰골로 석모도로 돌아왔다는 사내는 이내 초가집 골방에 틀어박혔다. 낮 동안은 죽은 듯 잠만 자다, 한밤중이면 집 밖으로 뛰쳐나와 광인처럼 소리를 지르며 온 마을을 휘젓고 다녔다. 남의 집 장독을 깨고, 닭장을 부수고, 순무밭 이랑을 마구잡이로 파헤쳤다. 이웃들은 징용에 끌려갔다 일본 귀신이 들려왔다며 혀를 찼다. 사내는 죽겠다며 바다에 뛰어들기 일쑤였고, 앞섶을 풀어 헤치고 제 가슴에 낫을 겨누기도 여러 번, 사내가 돌아온 후 몇 달간 가족들이 눈물을 흘리지 않은 날이 없었다고 했다. 혼담은 없던 일이 되었다.
사내의 뭉뚝한 오른손에는 엄지손가락만 달려 있었다. 석탄을 실은 궤도차 쇠바퀴에 깔려 손가락 네 개가 형체도 없이 짓이겨졌다고 했다. 동생 수길이 그 순간을 목격했을까. 동갑내기면서도 노인처럼 늙어버린 사내를 마주한 인길은 쉽게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사내는 정신이 오락가락하는 듯하면서도 인길의 얘기에 귀를 기울이더니 눈을 반짝이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수길, 수길이, 수길이 형, 인천우편국 다니는 수길이 형.

탄광에서는 해를 본 적이 없다고 했다. 동이 트기 전 캄캄한 새벽에 까마득히 깊은 갱도로 내려가 훈도시 하나만 찬 벌거숭이로 새카만 땀을 흘리며 뜨거운 탄을 캐다 밖으로 나오면 다시 캄캄한 밤이었다. 손발톱이 빠지고, 머리털과 치아가 빠졌다. 혓바닥이 빠질 만큼 배가 고팠다. 팔다리가 부러져도 치료는 없었다. 돼지우리 같던 숙소에서 밤새 끊이지 않던 신음소리, 울음소리, 조선 팔도 온갖 사투리의 욕설과 신세 한탄과 고향 노래, 폭발 사고와 붕괴 사고로, 또 탈출 시도로 징용자들은 숱하게 죽어 나갔다. 조선인들은 죽은 동료들의 장례를 치르게 해달라고 요구했다. 들어주지 않자 몇몇이 강하게 항의했다. 모두 죽을 만큼 얻어맞았다. 그중에 수길이 있었다고 했다. “왜!” 인길이 들은 적 없는 그 목소리.

홋카이도 북동부의 가을은 이미 겨울이었고 봄마저도 내내 겨울이었다. 그 북동쪽 바다 건너 차디찬 오호츠크해에 쿠릴 열도가 있었다. 영원히 겨울이 계속된다는 시베리아 사할린이 있었다. 주기적으로 인원이 차출되어 쿠릴 열도와 사할린으로 보내졌다. 미국과의 전투를 위한 비행장을 건설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홋카이도 탄광 여기저기서 끌려온 징용자 수백 명이 해골처럼 마른 몸을 추위에 떨며 다시 배에 올랐다. 석모도의 사내는 수길이 쿠릴 열도의 어느 섬으로 향하는 일행에 속해 탄광을 떠나간 며칠 뒤, 징용자들이 탔던 배가 바다 속으로 가라앉았다는 소식을 들었다. 미 군함의 어뢰를 맞고 침몰했다는 것이었다. 네 손가락을 잃기 전 석모도에서 전어를 잡던 순박한 사내는 결코 어뢰라는 단어를 알지 못했을 터였다. 석모도를 나와 다시 강화로, 강화에서 다시 인천으로 향하는 배를 기다리다, 인길은 커다란 갯바위 틈에 몸을 숨기고 오랫동안 목 놓아 울었다.

 

*


“밖에 비 온다.”

압박스타킹과 보조 배터리, 그 밖에 이런저런 물건들로 다시 캐리어를 채운 장모는 젖은 우산을 들고 병원으로 돌아왔다. 본격적인 장마철이었고, 아내의 진통이 본격적으로 시작된 참이었다. 담당 의사는 새벽에 호출을 받은 터라 몹시 피곤한 얼굴을 하고 있었지만, 유명 산부인과 전문병원에서 ‘제왕의 신’이란 별명으로 불리는 제왕절개수술의 권위자답게 등장만으로 나름의 안도감을 주었다. 전신마취를 하기로 하고 훗배앓이가 심하다는 제왕절개 특성상 무통주사, 페인버스터, 흉터방지제 처치도 선택했다. 한솔은 간호사가 건네준 ‘제왕절개 산모 수술 전후 돌봄 안내서’라는 엑셀 출력 문서를 들여다보며 가족 대기석에 장인 장모와 함께 앉아 있었다. 활력징후 측정, 수술 부위 복대 착용, 소변줄 제거, 빈혈 검사, 모유수유실 예약제 운영 확인, 출생카드와 속싸개 겉싸개 준비……

오전 5시 즈음 쌍둥이가 태어났고, 정한솔은 아버지가 되었다. 몸무게는 각각 2,810그램과 2,590그램이었다. 한 걸음 한 걸음, 엄마가 된 아내와 제 자식이 된 딸들에게로 향하며, 한솔은 짐짓 감당 불가였던 두려움, 똑같지만 다른 둘을 제대로 알아보지 못할까, 번번이 이름을 잘못 부를까, 그 기이한 두려움, 무엇을 어떻게 느껴야 하는지, 무엇을 어떻게 내줘야 하는지, 삶 그 자체인 두려움이 뱀처럼 목을 옥죄어든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문이 열리고, 숨을 들이쉬고, 탄식을 내뱉고, 눈을 맞추고, 성대를 울리고, 손을 뻗고, 후끈거리며 일렁이는 공기의 온도와 냄새와 무게, 허물처럼 벗겨져 흩뿌려진 시간의 껍질들, 귓속을 가득 메우는 굉음의 리듬과 높낮이, 샅샅이 혈관을 핥으며 내달리는 빛과 그늘, 땀과 피와 칼과 바늘, 침이 고이고 때가 끼고 털이 돋고 주름이 패는 찰나와 영원, 뜨겁고 끈적하게 물크러지는 몸, 소용돌이치는 그물에 온전히 사로잡힌 오래된 새것…… 속절없이 다급하면서도 안일한 낙관이 자리를 잡는 순간, 한솔은 울음을 터뜨렸다. 걷잡을 수 없이 눈물이 흘러나왔다. 뱀이 스르륵 똬리를 풀고 모습을 감췄다. 잠시 두려움에서 놓여난 한솔은 오래도록 눈물을 멈출 수가 없었다.

비가 내리고 있었다. 한솔은 병원 밖으로 나와 작년에 이혼해 각기 다른 신도시에 살고 있는 부모에게 전화해 아내의 출산 소식을 전했다. 차례로 통화를 마친 뒤 여전히 목이 잠기고 코가 막힌 채로 편의점에서 산 차가운 커피를 마셨다. 곧 출근 러시아워가 시작될 이른 아침의 거리, 밤새 쏟아진 빗물이 아스팔트가 움푹 꺼진 곳마다 가득 고여 있었다. 그 위로 가는 비가 드문드문 떨어지고 있었다. 장인 장모와 아내는 방금 전 한솔의 과하다 싶은 눈물 바람에 제법 감격한 듯했다. 그러나 갓 태어난 딸들을 마주한 순간 한솔이 경험한 것은 출산에 대한 환희와 감동이라기보다, 불현듯 떠오른, 제 생의 첫 기억에 대한 예상치 못한 감각적 재현이었다.

생의 첫 기억, 갓난아기는 아니다. 아마도 세 살쯤, 그러나 한솔은 갓난아기처럼 업혀 있다. 할머니 김난옥에게 업혀 있다. 포대기에 잘 감기지 않을 정도로 이미 꽤 컸다. 그러나 어린 한솔은 늘 할머니의 품을 파고들거나 등에 찰싹 매달린다. 늘어진 빈 젖을 집요하게 빨고 만지며 두 팔로 늙은 목을 감싸고 굽은 등을 무겁게 누른다. 에그그그그, 신음 소리를 내면서도 할머니는 조금만 더 안아주기로 하고 조금만 더 업어주기로 한다. 생의 첫 기억, 좁은 집의 좁은 부엌에는 손자 한솔과 할머니 난옥 둘뿐이다. 방이 두 개인 집에 한솔과 한솔의 부모와 한솔의 조부모가 산다. 그 순간 왜 둘뿐인지는 알 수 없으나 한솔은 제 할머니의 등에 업혀 있다. 생의 첫 기억, 솥에서 물이 끓고 있다. 열기와 습기가 부엌을 가득 메우고, 불꽃이 쉭쉭거리고 물이 부글거린다. 나무 도마 위 여러 종류의 채소를 다듬고 썰고 짓이기는 소리, 코끝에 감기는 싱그럽고 알싸하고 텁텁한 냄새들. 개수대의 물이 채워지고 출렁대고 빠져나가는 소리. 할머니의 어깨와 팔과 손가락의 움직임이 등에 업힌 한솔의 몸에도 리듬과 높낮이가 다른 파동으로 고스란히 전해진다. 국자를 휘휘 젓고, 물기를 꽉 쥐어짜고, 껍질을 벗겨내고, 적당한 그릇을 찾아 달그락거린다. 숨을 내쉬고, 침을 삼키고, 얼룩이 번지고, 반복해 헹궈낸다. 고소한 확신과 비릿한 망설임, 뜨겁고 끈적하게 물크러지는 먹이, 맵고 짜고 달고 시고 쓴 삶의 맛을 아직 모르면서 알게 되는 순간, 죽음이 다른 식으로 변환된다. 속절없이 다급하면서도 안일한 낙관이 자리를 잡는다. 하품이 나고 눈물이 맺힌다. 한솔은 할머니의 등에 매달려 늙은 어깨와 함께 흔들리며 퇴행의 안온감에 휩싸인다. 에그그그그, 할머니는 신음 소리를 내며 손자의 포대기를 바싹 추어올린다.

“밖에 비 온다.”

생의 첫 기억, 머지않아 식구들이 돌아와 할머니 김난옥이 마련한 삶과 죽음을 먹을 것이다.


*

 

밤새 쏟아진 빗물이 마당의 땅이 움푹 꺼진 곳마다 가득 고여 있었다. 어머니가 뒤란에서 손자를 업고 경을 외울 때만 해도 그 위로 가는 비가 드문드문 떨어졌다. 인길의 예상과 달리 아침 식사를 할 즈음이 되자 날이 선명하게 개었다. 푸른 하늘이 드러나고 쨍한 햇살이 쏟아졌다. 그러나 밤새 잠을 설친 인길의 머릿속은 여전히 먹구름이 자욱한 것처럼 무거웠다.

일주일 전 인천항에 엄청나게 큰 배가 입항했다. 배는 노르웨이 국적의 선박이었고 일본에서 왔으며, 북의 남침이 시작된 직후 서울을 빠져나온 미국 대사관 관계자들을 비롯해 인천으로 급히 모여든 주한 외국인들을 일본으로 피신시킬 임무를 맡고 있었다. 집안 대대로 인천 토박이인 인길은 이 전쟁이 간단치 않을 변고임을 예감했다. 인천 앞바다에 크고 낯선 배가 출몰한다는 것, 그 배의 입항과 출항으로부터 아주 많은 것들이 돌이킬 수 없이 달라진다는 것. 외국인들을 가득 실은 거대한 배는 이틀 만에 다시 일본으로 향했다.

일찌감치 피난길에 오르는 사람들도 있었다. 대통령이 서울을 등졌고, 한강 다리가 폭파됐다. 정확한 사실과 흉흉한 소문을 구분할 수 없었지만, 인천도 안전하지 않을 터였지만, 대부분은 그저 혼란 속에 우왕좌왕 갈팡질팡할 뿐이었다. 애초에 현명한 판단이나 체계적 대안이 있을 수 있단 말인가. 확실한 안전과 효과적인 구제책 같은 것이 존재할 수 있는 세상이란 말인가. 짧게는 해방 후 몇 년, 길게는 일제 치하 수십 년, 무지와 모순과 불안과 공포는 삶의 기본이었다. 갈등, 분열, 폭력, 증오, 굴욕, 울분, 저주는 세상 그 자체가 되어 거대한 폭발만큼이나 강력한 마비로 삶을 장악하고 있었다.

인길은 장마철의 눅눅하고 끈끈한 습기처럼 체념과 무기력이 오래도록 자신에게 들러붙어 있다고 생각했다. 징용에서 돌아온 석모도의 사내, 엄지손가락 하나만이 남은 오른손으로는 숟가락도 삽자루도 낚싯대도 제대로 움켜쥘 수가 없는 것이다. 탄광의 갱도처럼 깊고 어두운 무력감. 인길은 한 달쯤 뒤 백일을 맞는 아들의 출생신고를 아직 하지 못했다. 어뢰를 맞고 차디찬 바다에 수몰된 동생의 사망신고를 아직 하지 못했다. 어머니 말대로 금지옥엽 갓난아기는 백일을 무사히 넘기는 게 급선무일지 몰랐다. 어머니 말대로 수완 좋은 수길은 용케 어딘가로 도망쳐 일본 여자와 숨어 살고 있을지 몰랐다. 전쟁이니 피난이니 선뜻 엄두를 내지 못하는 것은 애써 미뤄둔 탄생과 죽음 때문일지 몰랐다. 아들은 태어났고 동생은 죽었다. 아버지는 아들의 이름을 지어야 했다. 형은 동생의 장례를 치러야 했다. 출생신고도 사망신고도 하지 못해, 아들은 아직 제대로 태어난 게 아니었고, 동생은 아직 제대로 죽은 게 아니었다.

부엌에서 숭늉 그릇을 들고나오던 막내 여동생이 비명을 질렀다. 툇마루에서 아침 밥상을 마주하고 있던 인길과 아내와 어머니는 그대로 얼어붙었다. 그릇이 깨지는 소리에 세 살배기 연숙만이 고개를 돌려 제 고모를 바라보았다. 총을 든 인민군 둘과 붉은 완장을 찬 한 남자가 마당에 들어섰다. 아내는 아들을 품 안 깊숙이 끌어안으며 앉은 채로 몸을 틀었다. 완장을 찬 남자가 큰소리로 인길의 이름을 불렀다. 이어 손에 쥔 종잇장을 들여다보며 인천시청 산하 남동출장소에서 재무 관리와 물자 감독을 담당하는 인길의 소속과 직급을 읊었다. 푸른 하늘 아래 맑은 햇빛이 내리쬐고 있었다. 어젯밤의 폭우로 마당 여기저기 생긴 물웅덩이에 어지러운 그림자가 내비쳤다. 남자는 지난 새벽 인천이 해방되었으며, 지금 시청 건물에는 인공기가 나부끼고 있다고 말했다. 반동분자에게는 오직 죽음이 기다리고 있을 뿐이며, 투항한 공무원은 사상 교육과 군사 훈련을 거쳐 의용군에 자원입대할 기회가 주어진다고 말했다. 선언하듯 큰소리로 말했지만, 기회를 주는 것이 선택이 아닌 복종을 요하는 명령임은 말하지 않았다.

아침 식사를 마치는 것도, 짐가방을 싸는 것도 허락되지 않았다. 어머니가 두 팔을 휘저으며 짐승처럼 괴성을 내지르자, 반사적으로 총구를 들이민 인민군은 징용으로 집을 떠날 때의 수길처럼 앳된 청년이었다. 어머니는 울며불며 세상 그 어디에도 없는 아버지와 수길을 불렀다. 몇 번이고 반복해 사라진 남편과 아들을 불렀다. 부엌문 옆에 바짝 붙어선 아내와 막내 여동생은 공포에 질려 신음을 내뱉었다. 밤새 유난히 보챘던 아들은 희한하게도 아내의 등에 업힌 채 내내 조용했다. 그리고 생의 첫 기억, 아버지 이인길과 어머니 김난옥의 맏딸, 세 살배기 연숙의 생의 첫 기억이 시작되고 있었다. 여름 아침의 푸른 하늘과 맑은 햇빛, 서른 살 아버지와 영원히 이별하는 세 살 여자아이. 수십 년의 세월이 지나도, 머리가 센 노파가 되어도 낱낱이 생생히 떠오를 아버지와의 마지막이라는 생의 첫 기억. 세 여자의 흐느낌이 둔하게 귓전을 메우는 가운데, 인길은 툇마루에 걸터앉아 천천히 구두끈을 묶었다. 아침 식사를 마치는 것도 짐가방을 싸는 것도 허락되지 않았으므로, 한 달쯤 뒤 백일을 맞는 아들의 이름을 지어주는 것도, 해방 전 징용으로 끌려간 동생이 이미 불귀의 객이 되었다는 것을 알리는 것도 허락될 수 없었다. 체념과 무기력, 인길은 아주 천천히, 최선을 다해 느리게 구두끈을 묶었다. 그리고 댓돌을 딛고 마당으로 내려섰다. 한 걸음 한 걸음, 인길은 딸아이를 번쩍 안아 올렸다. 머리 위로 높이 들어 눈을 맞추고 이름을 불렀다. 인길이 이름을 지어준 세상 유일한 존재, 아직 제 이름을 읽고 쓸 줄 모르는 존재, 누가 그것을 제대로 일러줄 것인가, 한글과 한자로 이름을 온전히 익힐 때까지 누가 그것을 반복해 바로잡아 줄 것인가. 인길은 딸아이의 작은 뺨에 제 큰 뺨을 포갰다. 1947년생 이연숙의 생의 첫 기억이었다. 이내 총부리가 인길을 향하고, 완장을 찬 남자는 큰소리로 재촉했다. 인길은 그들과 함께 집 밖으로 사라졌다. 다시는 돌아오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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딸 쌍둥이의 이름은 아름과 다운으로 결정되었다. 정아름과 정다운, 아내는 장인 장모가 다니는 교회의 목사가 추천했다는 소망과 은혜라는 이름에 질색하는 반응을 보였다. ‘아름다운’은 한솔이 문득 떠올린 단어였고, 장인 장모와 아내는 이런저런 품평을 늘어놓다 적당히 찬성하는 분위기가 되었다.

한솔은 병원 복도에 설치된 신생아 면회 신청 키오스크와 모유수유실 이용 키오스크의 사용법을 장인 장모에게 설명했다. 둘은 제법 어렵지 않게 이해했다. 무인 빨래방 체인점을 다섯 곳이나 운영하고 있기 때문인지 몰랐다. 빨래방 전에는 세탁소였다. 장인 장모는 재건축 이슈의 대명사 같은 강남의 오래된 아파트 단지 내 상가에서 30년 가까이 세탁소를 운영했다. 그 아파트 단지와 가까운 또 다른 아파트 단지, 평수가 더 작고 층수가 더 낮고 준공 연도가 더 오래된 아파트에서 월세와 전세를 거쳐 자가를 마련하고 목돈을 모을 때까지 그만큼의 시간이 걸렸다. 강남의 세탁소 전에는, 아내가 태어나기 전에는, 궁벽한 농촌에서 상경해 ‘시다’라 불리며 동대문과 창신동 일대의 봉제공장을 전전했다고 했다. 장인은 한솔과 술을 마시다 그 시절 얘기하는 것을 좋아했다. 친구 같은 딸, 아들 같은 사위, 장인 장모가 지인들과 함께한 자리에서 그런 표현을 쓰며 웃을 때면 한솔도 멋쩍게 따라 웃었다. 아들 없는 집에 아들이 들어왔네, 아주 키도 크고 듬직한 아들내미가 생겼어, 그런 말을 들을 때면 장인은 한솔의 키가 181센티미터라는 것과 체대 출신의 한솔이 논산훈련소에서 조교로 군 복무했다는 얘기를 어김없이 덧붙였다. 코로나 팬데믹 기간 수영 강사로도 스키 강사로도 일할 수 없던 한솔은 장인 장모의 무인 빨래방 다섯 곳을 차례로 돌며, 동전을 수거하고 비품을 채워 넣고 CC-TV 작동 상태를 점검했다. 친구 같은 딸, 아들 같은 사위, 그런 표현의 이면에 기이하게 뒤틀린 음습한 그림자가 웅크리고 있다는 식의 말을 해주는 사람이 한솔 주변에는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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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길은 돌아오지 않았다. 짐승의 시간인 전쟁, 모두가 쫓기는 짐승이 되었고, 동시에 쫓는 짐승이 되었다. 인간의 시간인 전쟁, 모두가 짐승이라면 결코 하지 않았을 짓을 서슴없이 했고, 짐승이라면 결코 겪지 않았을 일을 오롯이 겪었다. 한 달여 장마철이 그렇게 흘러가고 있었다. 집집마다 날카로운 비명이 들리거나 애끓는 곡소리가 이어졌다. 불현듯 찾아오는 무겁고 단단한 정적에 여름의 거리는 창백하게 질려 차갑게 얼어붙었다.

인길은 돌아오지 않았다. 난옥의 시어머니는 피난을 가지 않겠다고 했다. 아들 인길이 집으로 도망쳐 올지 모르니 혼자서라도 기다리겠다고 했다. 혹여 다른 아들 수길이 살아 돌아올지 모르니 혼자서라도 남겠다고 했다. 어느 아들이든 돌아왔을 때 아무도 없는 빈집에 발을 들이게 할 수는 없다는 거였다. 본격적인 무더위가 시작되고 있었다. 스물여섯 살의 난옥은 막내 시누이와 딸 연숙과 아직 호적상의 이름이 없는, 곧 백일을 맞는 어린 아들을 데리고 피난길에 나서야 했다. 행선지는 남쪽 멀리 대전이나 대구나 목포나 부산이 아닌, 용인으로 정해졌다. 용인은 인길의 여동생, 난옥의 큰시누이가 시집 가 살고 있는 곳이었다. 인천보다 조금 더 남쪽일 뿐인 그곳이 과연 안전할지, 그곳의 사람들이 이 난리통에 사돈 식구들을 선뜻 맞아줄지, 용인의 그 마을 그 집을 어떻게 찾아가야 할지, 난옥은 알 수 없었다. 서울 성북동의 친정집 역시 전쟁 후의 소식을 전혀 알 수 없었다. 알 수 없는 것들이 너무 많아서, 그토록 많은 알 수 없음의 이유나 답을 일일이 찾아내는 것이 딱히 중요하게 여겨지지도 않았다. 전화도 편지도 전차도 기차도 없었다. 없는 것도 너무 많아 마찬가지였다. 있어도 없는 것과 진배없어 전쟁인 셈이었다. 난옥은 아들을 등에 업어 천으로 동여매고 커다란 보따리를 머리에 이었다. 막내 시누이도 등에 하나 머리에 하나 보따리를 짊어졌다. 그리고 왼손으로 조카 연숙의 오른손을 움켜쥐었다. 난옥과 시누이는 출발하기 전부터 땀을 비 오듯 흘렸다. 가족이 또 집을 떠나게 되었으므로, 시어머니는 어김없이 눈물을 흘렸다. 아버지와 영원히 헤어지는 순간을 생의 첫 기억으로 갖게 된 세 살배기 연숙은 1950년 여름 한국전쟁 피난길의 지옥도를 기억의 다음 장에 선명히 아로새겼다. 연숙은 제 엄마와 고모처럼 흰 무명옷을 입고 크고 작은 보따리를 짊어진 사람들이 길가에 늘어서 한 방향으로 걷는 모습을 보았다. 연숙은 소달구지에 살림살이와 함께 실린 제 또래 아이들을, 지게 가득 새끼줄로 동여맨 이불 더미와 가마솥을, 완전히 등이 굽어 지팡이를 짚고 연숙보다 느리게 걷는 흰 수염의 노인을 보았다. 연숙은 전투기와 탱크와 트럭과 총을 보았다. 제각각 인민군과 국군을 보았다. 행군하는 군인들을 만나면 피난민들은 공처럼 몸을 잔뜩 웅크리고 보따리와 다를 바 없는 모양새로 무조건 종종걸음을 쳤다. 연숙은 시뻘건 불길에 휩싸여 시커먼 연기를 내뿜으며 타들어 가는 초가집을 보았다. 허리가 꺾인 채 논두렁에 고꾸라져 있는 피투성이 시신들을 보았다. 지붕까지 사람들이 빼곡히 올라탄 기차가 평야를 가로질러 산 너머로 사라지는 모습을 보았다. 때로는 멀리 대포소리와 총소리를 들었다. 때로는 가까이 폭발음과 울부짖음을 들었다. 사흘, 이레, 열흘, 백일짜리 사내아이를 업고 세 살짜리 계집아이와 함께 걷고 있는 엄마와 고모의 얼굴, 피곤과 허기와 통증과 혼돈과 공포로 막대기처럼 딱딱하게 굳어버린 그녀들이 안전하게 난리를 피하고 있다거나 목적지를 향해 나아가고 있다고는 느껴지지 않았다. 쉴 곳도 잘 곳도 없었다. 비를 피할 곳도 모기나 파리를 쫓을 곳도 없었다. 남동생의 똥기저귀나 고모의 피 묻은 서답을 빨아 말릴 곳도 없었다. 어디에나 행색이 비슷한 거지꼴의 가족 단위 피난민들이 넘쳐나 어떤 의미로는 외롭지 않았다. 길바닥에 주저앉아 가슴을 드러내고 아이에게 젖을 물리거나, 불이 붙은 덤불을 둥글게 에워싸고 오줌을 갈기거나, 빈 농가를 뒤져 이불 홑청과 감자를 훔치거나, 아무려나 상관없는 일이었다. 연숙의 엄마와 고모는 해가 지고 불을 피우면 폭격을 맞는다는 오지랖 잔소리를 들었고, 용인으로 가는 길이 어느 쪽이냐 물으면 온통 제각각인 답을 들었다.

계절보다 빠르게 깊어졌던 전쟁, 뒤늦게 가을이 깊어지자 깜짝 놀랄 만한 소식이 전해졌다. 미국의 사령관이 이끄는 연합군의 배를 타고 수많은 군인이 인천에 상륙했다는 것이었다. 연숙은 엄마와 고모를 따라 용인을 떠나 다시 인천으로 향했다. 혼자 남은 할머니가 죽었을지도 모른다는 얘기를 아무도 입 밖으로 꺼내지 않았다. 왔을 때와 다를 바 없이 까마득히 걸어서 인천의 집으로 돌아갔다. 몇 달 사이 할머니의 할머니처럼 늙어버린 모습으로 할머니가 집을 지키고 있었다. 할머니의 두 아들은 돌아오지 않았다. 버선발로 달려 나와 연숙을 끌어안고 울음을 터뜨린 할머니는 제 며느리와 막내딸을 바라보다 우뚝 멈추어 섰다. 갓난쟁이 손자가, 피난길에 백일을 넘겼을 어린 손자가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미처 이름을 지어주지 못한 인길과 난옥의 아들은 수원과 용인 사이 어느 숲길에서 죽었다. 날이 저물어 걸음을 멈추고 내내 등에 업혀 있던 아이에게 젖을 먹이려 돌려 안았을 때, 아이는 죽어 있었다. 완벽히 캄캄한 밤이 지나고 동이 틀 무렵, 난옥은 숲속에 죽은 아기를 묻었다. 무릎을 꿇고 맨손으로 축축한 땅을 팠다. 너무 깊게 묻고 싶지는 않다는 생각에, 너무 얕게 묻었다는 생각에, 뱀이나 살쾡이에게 파 먹힐 수 있겠다는 생각에, 난옥은 성냥 한 줌을 그 위로 흩뿌렸다. 태어난 지 백일을 며칠 앞두고 인길과 난옥의 아들이 죽었다. 갓난아기가 죽는 것은 흔한 일이었다. 출생신고를 뒤로 미루는 것도, 사망신고를 하지 않는 것도 흔한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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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내가 쌍둥이를 임신했다는 소식을 전한 뒤 처음으로 아버지를 직접 만났던 날, 한솔은 제 할아버지와 할머니가 한국전쟁 때 각자의 아내와 남편이 죽어 전쟁이 끝난 이듬해 재혼해 제 아버지를 낳았다는 얘기를 들었다. 지금의 저보다 나이가 어린 서른세 살의 홀아비 정동춘과 스물여섯 살의 과부 김난옥. 완전히 새롭고 충격적인 비밀이라 하기는 어려웠다. 자라며 미루어 짐작할 수 있는 어떤 순간들이 있었고, 친척 어른들이 모여 옛날 얘기가 오갈 때면 애써 쉬쉬하는 분위기도 아니었다. 관련해 한솔은 복잡한 전후 사정이나 세세한 전모를 알고 싶다는 생각을 해 본 적이 없었다. 아버지는 연숙 누나의 호적 정리가 제때 되지 않아 결혼 전까지 정연숙이 아닌 이연숙이란 이름을 썼다고 말했다. 요는 아버지의 친부와 큰고모의 친부가 서로 다르다는 것이었다. 사이가 나빠 보이지 않았던 한솔의 할아버지가 큰고모의 계부였다는 것이다. 아버지보다 일곱 살 위인 큰고모가 여상을 졸업한 뒤 직장에 다니며 아버지와 작은고모의 학비를 대고 결혼 준비를 시켰다는 것은 한솔도 알고 있는 일이었다. 얘기를 듣던 한솔은 종종 그렇듯 무엇을 어떻게 느껴야 하는지, 어떤 반응을 보여야 적절한 것인지 가늠하기가 어려웠다. 대신 한솔은 아버지가 받아보지 못한 쌍둥이의 다른 초음파사진을 휴대폰에 띄웠다. 분위기를 보아 저도 아버지에게 할 얘기가 있었다. 쌍둥이가 태어나면 처가와 합가를 할 수도 있다는 것을, 장인이 스크린골프장이나 테니스교습소를 차려보면 어떻겠냐 제안했다는 것을, 골프나 테니스에 딱히 소질이 없고 관련 자격증도 없지만 어찌어찌 잘해 나갈 수 있지 않겠나 하는 것을. 한솔은 아버지에게 어떤 식으로 얘기하면 좋을지 눈치를 살폈다.

한솔의 아버지는 한솔에게 마저 얘기하지 못했다. 전쟁 때 어머니 난옥이 첫 남편만을 잃은 게 아니라는 것을, 내내 걸어서 피난을 가다 백일도 못 된 아들이 등에 업힌 채로 죽었다는 것을, 성북동 친정의 아버지와 큰오빠가 서울 점령 며칠 만에 창경원으로 끌려가 학살되었다는 것을, 피난에서 돌아온 직후 헛것을 보며 실성해 시댁에서 무당을 불러 굿을 했다는 것을, 휴전 협상이 시작될 즈음 살아남은 친정 오빠들이 인천으로 찾아와 시댁에 간곡히 읍소하듯 그러나 실상 으름장을 놓듯 막무가내로 과부가 된 여동생과 아비를 잃은 조카딸을 서울로 데려갔다는 것을. 죽음이 다른 식으로 변환되었다는 것을 말하지 못했다.

피난길에 전처와 딸 둘을 폭격으로 잃었다는 이북 출신의 할아버지 정동춘은 한솔이 중학교에 입학하던 해에, 할머니 김난옥은 한솔이 재수로 체대 입시를 준비하던 해에 세상을 떠났다. 아내의 출산 때 한솔이 죽은 할머니와의 생의 첫 기억을 떠올리며 눈물을 쏟은 뒤, 예기치 못한 순간 한솔은 다시 한번 눈물을 흘렸다. 아내와 딸 쌍둥이가 산후조리원을 나와 처음으로 집에서 아이들을 목욕시키던 순간이었다. 장모의 진두지휘 아래 한솔과 아내는 온수를 채운 유아용 욕조에서 조심스레 두 딸을 씻기고 있었다. 불현듯 한솔이 떠올린 것은 어려서 할머니와 목욕탕에 갔던 기억이었다. 여섯 살 어쩌면 일곱 살까지도 한솔은 할머니와 함께 동네 목욕탕에 갔다. 비록 취학 전이었지만 엄연히 여탕 출입이 금지되는 나이였다. 어쨌든 할머니는 번번이 한솔을 데리고 목욕탕에 갔다. 알몸의 할머니가 알몸의 한솔을 씻겼다. 자욱한 습기와 후끈한 열기 속에서 한솔이 처음으로 인지한 인간의 몸, 부드럽고 따뜻하고 미끌미끌한 몸, 물렁물렁하고 쭈글쭈글하고 흐물흐물한 몸, 삶과 죽음이 모조리 각인된, 온전히 제 것으로 비롯된, 제 것이나 다름없는 인간의 몸은 할머니 김난옥의 몸이었다. 쌍둥이를 씻기던 한솔이 갑자기 울음을 터뜨리자 아내와 장모는 이번에도 감격한 듯했다. 눈물을 닦을 수 없어 어쩔 줄 몰라 하는 사이, 한솔의 전화기가 울렸다. 한솔은 서둘러 손과 얼굴의 물기를 닦고, 벌거벗은 쌍둥이 딸들에게서 물러서며 전화를 받았다.

큰고모였다. 처음엔 이연숙으로 나중엔 정연숙으로 살아온 70대의 큰고모는 한솔이 보낸 쌍둥이의 사진을 잘 봤다며 아내의 몸 상태가 괜찮은지 안부를 물었다. 목이 잠기고 코가 막힌 채였지만 한솔은 부러 명랑하게 대꾸했다. 전화기 너머 큰고모는 “돌아가신 네 할머니가”라고 운을 뗐다. 그러나 이어지는 얘기는, 갑자기 들려온 두 아이의 울음소리, 아름과 다운의 칭얼거림 탓에 제대로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이신조
소설가, 한양여자대학교 문예창작과 교수, 1974년생
장편소설 『기대어 앉은 오후』 『가상도시백서』 『29세 라운지』 『우선권은 밤에게』 『크리에이터』, 소설집 『나의 검정그물스타킹』 『새로운 천사』 『감각의 시절』 『다른 소년』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