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밭단상
문학은 숨결을 넘어서는 독신(篤信)의 길

  • 글밭단상
  • 2024년 봄호 (통권 91호)
문학은 숨결을 넘어서는 독신(篤信)의 길

정년을 앞두고 3년 전부터 진도에 내려와 많은 시간을 보냈다. 연구년에다가 줌 수업이 기회를 만들어주었다. 반도의 남단 진도의 바닷가 폐교를 구입하여 시인들의 시와 그림이 있는 시에그린 한국시화박물관과 양두환 조각관, 김일해·류영도·정우범관, 창현박종회관, 고암정병례관, 국전작가전시관, 박주부·박달목·배현의 조각과 공예관이 있는 여귀산 미술관, 진도수석박물관과 남도우리문학관이 있는 공간을 만들었다.

연못을 파고 정원을 만들고 물레방아와 윤동주의 자화상 우물샘까지 정말 바쁘게 보냈지만, 하루하루가 은혜와 축복이 있는 날들이었다. 작년에는 개관 2주년을 맞이하여 해변시인창작학교를 열었다. 나태주·신달자·허형만·정일근·안도현·김선태·하린 등의 시인과 동화작가 고정욱, 화가 박성현 등이 특강을 해주었다. 300명의 인원이 특강과 국악과 춤과 갯벌체험까지 3박 4일 동안 꿈의 시간을 가졌다. 서울에서 정말 먼 곳 진도에 이렇게 많은 사람이 모인다는 것이 기적처럼 느껴졌다. 숙박과 식사의 인프라가 전혀 되지 않는 곳에서 인근 6개 마을의 마을회관을 동원하여 혼연일체가 되어 이루어낸 성과였다. 이 공간이 더 의미가 있는 것은 시에그린 문학의집 레지던스 시설이 있다는 것이다. 옛날의 사택을 리모델링하여 아무런 비용부담 없이 작가들이 머무르며 창작활동을 할 수 있다는 것이다. 나는 이 모든 일에 누군가 도와주는 따뜻한 손길이 있음을 느낀다. 햇살의 찬양, 들녘의 용서, 나무의 감사, 식탁의 신뢰가 넘치니 얼마나 은혜로운가. 가진 것 없어도 풍요롭고, 채우지 않아도 가득하다. 물결인 듯 바람결인 듯, 소릿결인 듯, 오래된 살의 숨결인 듯 매끄럽다. 글을 쓴다는 것은 창작하는 이의 땀과 노력이 절대적이지만 이 숨결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나는 지금도 일주일에 한 편씩 시를 쓰고 있다. 쓰기 싫어도 꼬박꼬박 한 편씩을 쓴다. 고향에 있는 해남군민신문에 연재를 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을 시작하게 된 것은 이 지역신문이 새롭게 창간을 하면서 일부러 서울에 있는 나를 취재하러 온 기자와의 인연 때문이다. 식사나 음료 하나 대접 못 한 내게 기자는 시를 청탁했고 나는 기꺼이 시 한 편을 보냈다. 그것이 인연이 되어 연재가 시작된 것이다. 정말 바쁘고 힘든 때도 있었지만 나는 이 연재를 쉬지 않고 500회가 되도록 10년 가까이 계속해 오고 있다.

이 연재를 하는 동안 세월호 침몰이 있었고, 메르스와 코로나 바이러스의 시기가 있었다. 굵직한 사건 사고가 끊임없이 터져나왔다. 제천스포츠센터에서는 29명이, 밀양세종병원에서는 47명이 넘게 죽은 대형 화재 사건 등이 일어났다. 아마 연재를 하지 않았다면 견디기 힘들다는 이유로 아무것도 쓰지 않은 채로 넘어갔을 것이다. 그러나 힘든 시기를 건널수록 그것은 고스란히 내 작품 안으로 들어왔다. 어떤 것에 대하여 기민하게 쓰지 못하는 성격이지만 매주 쓸 거리 생각해야 하는 나에겐 어느 사이 자신도 모르게 관련된 작품들이 창작되었다. 이 연재를 하는 동안 크고 작은 문학상을 받게 되었는데 대부분 연재를 한 작품들이었다.

연재를 하는 동안 나는 한 사람의 특별한 은혜를 체험했다. 외솔 최현배 선생이시다. 연재한 작품으로 외솔시조문학상을 타게 되면서 이분에 관한 자료를 수집하면서 보다 세밀하게 알게 되었다. 외솔 최현배 선생은 1894년 경남 울산에서 태어나 1926년부터 1938년까지(33~ 45살) 연희 전문학교 교수로 재직하기도 했지만 1942년 10월 1일부터 1945년 8월 15일까지(49 ~ 52살) 이른바 조선어학회 사건으로 3년 동안 옥중 생활을 하였다.
선생은 벽돌담이 열 길이나 되고 “겹겹이 닫힌 문” 저승과 같은, 이를 데 없이 춥고 배고프고 고독한 단절의 공간인 함흥형무소에서 4년간 옥살이를 하게 된다. 「기한(飢寒)」이라는 작품은 감옥에서의 춥고 굶주림을 여과 없이 그려내고 있는 작품으로 생지옥 같은 현실을 담담하게 그려내고 있다. 콩밥덩이 하나를 한 끼로 먹으니 “한둥 만둥”이다. 다음 끼니가 기다려지지만, 겨울밤은 춥고도 길기만 하다. 살을 에는 고통과 주린 배를 움켜잡고 밤을 견뎌야 한다. 얼마나 굶주렸으면 “시커먼 수수콩밥”을 꿀과 같이 달다고 했으며 “바늘 뼈, 소금국”까지도 금보다 소중하다고 했겠는가.

 

벽력 같은 기상 호령, 놀라아 일어나니,

네 벽만 들러 있고, 말동무 하나 없다.

외로운 독방 고생은, 새벽마다 새롭네.

- 「나날의 살이(日常生活)」 부분


옥중의 일상을 세밀하게 적고 있는데 어려움에도 굴하지 않고 의연하게 이겨나가는 모습을 강단 있게 보여준다. 감방이라는 곳이 좁은 곳이긴 하지만 어쩌겠는가 윗목과 아랫목, 책상과 누울 곳, 앉을 곳이 다 있어야 한다. 좁은 곳을 나눠 써야 하니 “아랫목은 식당되고, 웃묵은 뒷간이”이 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지척 간에 “식당”과 “뒷간”이 다 섞여서 공존하는 비극적 상황을 생생하게 보여주고 있다. 이 열악한 상황에도 “물통을 책상하여, 책으로 벗 삼”는 학자다운 면모를 읽을 수 있다. 독방에 있으니 “벽력 같은 기상 호령, 놀라아 일어”날 필요가 없는데도 선생은 독신(篤信)의 자세를 늘 지니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새벽마다 새롭”게 스스로를 다잡아가는 자세에는 늘 자신을 낮추고 겸허한 자세로 임하는 선비의 자세를 읽을 수 있다.

나는 글을 쓰면서 앞서의 숨결의 자세와 독신의 자세를 생각한다. 부드럽고 유연한 숨결의 호흡을 사랑하되 “벽력 같은 기상 호령”의 정신이 살아 있어야 한다는 것을 요즘 들어 더욱 절감하고 있다.

이지엽
시인, 경기대학교 국어국문학과 교수, 시에그린 한국시화박물관 관장, 1958년생
시집 『빨래 두레 밥상』 『내가 사랑하는 여자』 『담양에서 시를 묻다』,
연구서 『현대시 창작강의』 『우리말 우리글』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