번역후기
텍스트의 미세한 떨림을 전하기 위해

-마르셀 프루스트 장편소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완역

  • 번역후기
  • 2024년 봄호 (통권 91호)
텍스트의 미세한 떨림을 전하기 위해

-마르셀 프루스트 장편소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완역

2022년은 프루스트 사후 100주년이 되는 해였다. 외국문학을 가르치는 사람에게서 전공 작가의 작품 번역이란 누구나 한번은 꿈꾸어 보는 일이지만, 워낙 방대한 작품이기에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의 번역은 오랫동안 내게는 불가능한 꿈으로 남아 있었다. 그러다 2005년 민음사로부터 작품의 첫 권인 『스완네 집 쪽으로』의 번역 청탁을 받았고, 거기다 한국어로 번역을 하면 기꺼이 도움을 주겠다는 박사학위 지도교수이자 세계적인 프루스트 전문가이신 장 미이 교수님의 열성적인 가르침 덕분에 드디어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의 완간이라는 긴 여정을 마칠 수 있었다.

프루스트의 소설은 일찍부터 글쓰기에 대한 욕망을 깨달은 한 문학청년이 어떻게 자연과 사랑과 사회와 예술을 읽는 방법을 배워가는 지를 조망하는 성장 소설의 전통에 속하면서도, ‘자기 삶의 이야기’가 아닌, 텍스트의 어원인 ‘직물’이라는 단어가 의미하듯 상상적인 또는 실제 삶에 대한 체험의 ‘기억을 짜며’, 그 실을 품고 덧붙이면서 한 권의 책 속에 우리 모든 삶을 담으려고 했다는 점에서는 자전적 소설 또는 허구적 자서전의 효시로 간주된다. 또한 일종의 재현된 사물의 변형을 보여주기 위해 시간과 빛의 변화를 화폭에 고정시키려 했던 엘스티르의 그림이나 뱅퇴유의 칠중주곡이 프루스트가 쓰려고 했던 ‘책’의 비유라면, 예술 전반에 걸친 성찰과 반사성의 미학은 예술가 소설의 전형이라는 평을 낳기도 한다.

이처럼 자전적 소설 또는 예술가 소설의 정전으로 정의되는 작품을 번역함에 있어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한 것은 텍스트에 관한 정확한 이해와 작품의 가독성을 높이는 문제였다. 문학 미술 음악 연극 건축 조각 등 고대에서 중세를 거쳐 현대에 이르기까지 모든 예술 장르에 대한 탐색이 주를 이르며, 또 암시나 비유 풍자 등 프랑스 고유의 역사나 사고방식에 관계된 수많은 표현의 의미를 전달하기 위해서는 주석 작업이 절대적으로 필요했다. 게다가 총 7편으로 구성된 연작 소설에서 앞 권에 기술된 내용을 환기하지 않고는 사건이나 사유의 흐름을 쫓아갈 수 없으므로 수시로 ‘텍스트의 기억’을 소환해야 했다. 이런 주석 작업이 지나치게 많은 정보를 주어 때에 따라서는 텍스트의 가독성을 방해한다는 평을 낳을 수도 있지만, 이는 프루스트가 러스킨을 번역하면서 택했던 방식을 따른 것으로 조금은 이해될 수 있는 여지가 있지 않을까? 프루스트는 주석 작업이 오히려 독자와 함께 작품을 이해하는 즐거움을 준다고 말하면서 단순한 박학의 과시가 아닌 타자의 담론을 이해하기 위한 독자와 번역가의 긍정적인 만남의 공간으로 평가한 적이 있다.

번역이란 작품의 문학성과 연결된다. 문학작품의 본질은 벤야민의 지적처럼 “포착할 수 없는 것, 신비로운 것, 시적인 것”이기에, 이런 텍스트의 미세한 떨림을 포착하기 위해서는 직역 위주의 번역을 통해 원문의 순서와 호흡을 최대한 살려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문장을 쓰는 일을 마치 비단을 짜는 누에고치에 비유하며 수많은 종속절이나 줄표, 쉼표, 쌍점, 쌍반점이라는 부호들의 그 무시무시한 소용돌이 앞에서, 우리가 택한 해결책은 우선 화자 의식의 흐름을 쫓아 사건이 전개되는 순서, 가까운 것에서 먼 것으로 시선이 펼쳐지는 순서, 사유나 기억의 범위가 확대되는 순서에 따라 전개되는 텍스트에서 원문 단어들의 순서와 이미지들의 전개 순서를 따른다는 것이었다. 프루스트는 오랜 시간에 걸쳐 대가들의 작품을 모작하거나 번역하면서 이전 세대의 모든 문학과 예술에 대한 성찰을 책이라는 공간으로 끌어들이려 했다. 이와 같은 시도는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란 작품이 바그너의 총체극이나, 총체 예술로서의 문학의 이미지를 구현하는 교차로임을 말해주며, 따라서 그것은 자아에 대한 존재론적인 성찰, 삶의 불연속성과 예술의 연속성이라는 문제로 귀결될 수밖에 없다. 어쩌면 프루스트는 윔스의 지적처럼 “삶을 구원하는, 다시 말해 시간을 구원한다는 경이로운 도전을 수행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모든 존재를 사로잡는 시간의 파괴적인 힘과 마주한 인간에게 허락된 유일한 방법이 기억과 예술이며, 이런 돌이킬 수 없는 불가역적인 시간 앞에서 홀로 투쟁하며 좌절하고 그 흔적을 글로 남기고자 하는, 또는 무한한 존재와 무한한 글쓰기를 통해 불가능에 도전하고자 하는 작품 앞에서… 번역은 그 ‘미세한 떨림’을 얼마만큼이나 담아내어 감동의 공명상자를 울릴 수 있었을까?

※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한국어 완역본은 필자의 번역으로 2012년 첫 책 『스완네 집 쪽으로』가 나온 이후 10년 만인 2022년 전 13권으로 민음사에서 완간되었다.

김희영
번역가, 한국외국어대학교 프랑스어과 명예교수
저서 『문학장과 문학권력』(공저), 역서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사랑의 단상』 『텍스트의 즐거움』 『벽』 『구토』 『운명론자 자크와 그의 주인』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