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편소설
해피 프라이스 데이

  • 단편소설
  • 2024년 봄호 (통권 91호)
해피 프라이스 데이

그해 가을 우리는 놀이터에서 불장난을 하곤 했다. 아이들은 모래바닥에 둘러앉아 손으로 흙을 파서 홈을 만들었다. 그런 다음 좁고 깊은 구멍 속에 불에 잘 타는 것들을 채워 넣었다. 이를테면 신문지와 낙엽, 나뭇가지, 그리고 비밀스럽게 접힌 쪽지 같은 것들을. 구멍 속을 들여다보고 있으면 잉크냄새와 젖은 흙냄새가 뒤섞여 코끝이 시큰했다. 나는 이름도 모르는 아이들과 잘 어울려 놀았다. 저녁 시간을 함께 때울 친구들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불 있는 사람?”

그중 가장 나이가 많은 중학생 언니가 가방을 뒤적거리며 말했다. 우리는 암묵적으로 서로를 별명으로 불렀는데 언니는 형아라는 이름 때문에 모두에게 형이라고 불렸다. 형은 자연스레 무리의 우두머리 역할을 했다. 형 빼고는 대부분 나보다 어린애들이었다.

“불.”

대답을 구하듯 형이 우리의 얼굴을 하나씩 살피며 말했다. 나를 포함한 아이들 대부분이 고개를 저었다. 형이 한숨을 내쉬자 아이들 사이에서 묘한 긴장감이 돌았다.

그때 누군가 주머니에서 꺼낸 라이터를 홈 안으로 던졌다. 나이스. 라이터를 던진 아이는 자신을 추켜세우는 말에 어깨를 한번 으쓱였다. 신문지 귀퉁이에 불이 붙자 순식간에 종이가 우그러지며 그을음이 생겼다. 활자들은 곧 사라졌다. 불이 다른 곳으로 옮겨 붙기까지는 약간의 시간이 걸렸다. 습기 찬 나뭇가지가 섞여 있는 부분에는 불이 잘 붙지 않았다. 아이들은 긴 나뭇가지를 불쏘시개 삼아 구덩이를 들쑤셨다. 그러다 입고 있던 외투에 불티가 튀어 손쓸 새도 없이 구멍이 생기기도 했다.

아이들은 얼굴이 뜨거워지는지도 몰랐다. 나중에 밝은 곳에서 보면 빨갛게 달아오른 얼굴 군데군데가 거뭇했다. 옷과 머리카락에 밴 불 냄새는 물로 씻어도 잘 지워지지 않았다. 불은 잠시간 크게 타오르다 곧 사그라졌다. 어설프게 모아온 태울 거리들이 금방 동이 났기 때문이다. 싫증이 난 아이들은 먼저 집에 갔다. 곧 부모가 집에 올 시간이라며 가방을 챙기는 아이들도 있었다. 더 놀고 싶은데 어쩔 수 없다는 듯 욕을 중얼거렸지만 나는 무리를 빠져나가는 애들의 표정에서 일종의 안도를 보았다. 그러나 나는 끝까지 남아있었다. 형과 함께였다. 나는 용기를 내어 형에게 말을 걸었다.

“형은 집에 안 가요?”

“안 가. 지들이나 체육관에서 자라고 해.”

뜻밖의 대답에 나는 곧바로 사과했다. 여름이 끝나갈 무렵 동네에 태풍이 덮쳤다. 아파트에 사는 애들은 괜찮았지만 바로 옆 동네의 낮은 지대 주택 단지는 하루아침에 물에 잠겼다. 정부의 보상을 기다리며 체육관에서 임시로 지내는 집들이 있었는데 형도 그중 하나인 것 같았다.

“넌 사과할 때만 말이 빨라진다.”

형은 주눅이 든 나를 툭 치며 웃었다. 나는 다시 입을 꾹 다물었다. 다음에 해야 할 말이 생각나지 않았다. 나는 어릴 때부터 또래보다 말이 느리다는 이야기를 자주 들었다. 무언가 말해야 한다고 생각하면 그때부터 심장이 뛰어 말할 타이밍을 놓치고 말았다. 학년이 바뀔 때마다 선생님들은 나의 그런 성격을 잘 포장해 부모에게 전달해 주었다. 조심성이 많은 아이. 내향적인 아이. 생각이 깊은 아이. 하지만 조금 더 적극적인 표현능력을 요함.

형은 재밌는 걸 보여주겠다며 엉덩이에 묻은 모래를 털며 일어났다. 다 타버린 재가 풀썩 피어올라 공중에 흩날렸다. 나는 앞으로 성큼성큼 걸어가는 형의 뒤를 쫓았다. 놀이터를 빠져나와 어둑한 길가를 조용히 걷다 보니 비가 한두 방울씩 떨어져 내렸다. 비에 젖어 축 가라앉은 형의 짧은 머리카락이 바람을 타고 흔들렸다. 어디로 가는 걸까. 나는 형의 옆얼굴을 힐끔 쳐다보았다. 어딘가 비밀스럽고 휑한 얼굴을.

도착한 곳은 어린이집 앞이었다. 앞문이 굳게 잠겨 있었다. 불투명한 창문 너머로 보이는 복도는 어둡고 고요했다. 형은 건물 뒤편으로 향하더니 허술하게 잠긴 철제 대문을 손쉽게 열곤 안으로 들어갔다. 나는 주위를 살피며 형이 열어둔 문틈에 조심스레 발을 집어넣었다. 형은 여기 봐, 하고 나를 향해 손짓했다.

돌로 만든 커다란 연못이었다. 연못 안에는 여러 마리의 작은 금붕어들이 헤엄치고 있었다. 물이 검어 깊이를 가늠하기는 어려웠다. 수면에는 이끼인지 모를 푸른 찌꺼기들이 떠다녔다. 형은 배를 보인 채 거꾸로 떠 있는 금붕어 몇 마리를 손가락으로 툭 건드렸다. 물에 작은 파문이 일었다. 그러곤 손 우물을 만들어 뒤집힌 채 떠다니고 있던 금붕어 한 마리를 물속에서 꺼냈으나 곧바로 놓쳤다. 바닥에 떨어져 파득거리는 금붕어를 보고 놀란 나머지 뒷걸음질 쳤다. 금붕어는 아가미로 가쁘게 호흡하며 몸을 이리저리 비틀었다.

“이미 죽어가는 애들이야. 너도 하나 꺼내 봐.”

바닥에 쪼그려 앉은 형이 말했다. 형은 금붕어 한 마리를 연못에서 꺼냈다. 나도 무언가에 이끌리듯 형 옆에 섰다. 무서워? 형이 물었다. 나는 그 말에 눈을 질끈 감고 금붕어 한 마리를 물속에서 꺼냈다. 생각보다 차가운 물에 손톱 아래가 시렸다. 손바닥 안에서 아가미의 호흡이 느껴질 때마다 나는 손을 움찔거렸다. 거봐, 형이 잘했다는 듯 웃었다. 너 그러다 놓친다. 그 말에 나는 조금 더 힘을 주어 금붕어를 쥐었다.

“느낌이 어때?”

“터질 것 같아요.”

“우리가 돕는 거야.”

“도와요?”

편하게 죽을 수 있도록 돕는 거지. 여기 있는 애들은 죄다 병 걸린 애들이야. 형은 그렇게 말하곤 손바닥 안에 있는 금붕어를 단번에 그러쥐었다. 팽창해 있던 무언가가 사방으로 터져나가는 소리가 났다. 형은 손바닥을 펴서 금붕어의 사체를 내게 보여주었다. 나는 뒷걸음질 치다 쥐고 있던 금붕어를 다시 연못 안에 빠트렸다. 금붕어는 아래로 가라앉았다가 잠시 후 다시 수면 위로 떠오르며 무리에 섞여들었다. 연못 안의 금붕어들은 대부분 원을 그리며 빙글빙글 돌고 있었다. 죽었는지 살았는지 확인해 보기 두려웠다.

“멍청해.”

형이 뒤에서 속삭였고 나는 그 말을 듣자마자 얼굴이 뜨거워졌다. 그대로 대문을 박차고 나와 아파트 단지를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어둠을 지나 단지 안에 들어서자 주변이 환해졌다. 조금만 더 걸으면 집이 나올 것이고 엄마 아빠는 화난 얼굴로 거실을 서성거리며 나를 기다리고 있을 것이었다. 그 사실을 떠올리자 울음이 났다. 가로등 아래 멈춰 서서 참았던 숨을 내뱉었다. 형은 연못이 거기에 있다는 걸 어떻게 알았을까? 또 누구를 데려갔을까. 나는 그날 밤늦게 집으로 돌아가 종아리를 맞고 울다 지쳐 잠들었다. 그날이 내가 기억하는 형의 마지막 모습이었다.


그즈음 동네 아이들 사이에서는 흉흉한 소문이 돌았다.

“어떤 아저씨가 자전거 타고 동네를 돌아다니면서 자위를 한대.”

바지를 내리고 성기를 문지르는 걸 봤다는 애들도 있고, 자전거를 타고 자기를 쫓아와서 신고했다는 애들도 있었다. 어떤 애는 아예 발가벗고 자전거를 타는 걸 본 적도 있다고 했다. 나는 이야기를 들으면서 그 아저씨를 한번 만나보고 싶다고 생각했다. 그런 다음 애들에게 말해주고 싶었다. 그런 변태 아저씨 정도는 별 거 아니라고.

얼마 뒤 집에 가는 중에 누군가 따라오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뒤를 돌아보자 저 멀리 자전거를 타고 있는 사람이 보였다. 직감적으로 그 아저씨구나 했다. 아파트 주차장이었다. 나는 일부러 의식하지 않는 척 천천히 걸었다. 페달 밟는 소리가 점점 가까워질 때쯤 고개를 돌렸다. 야구 모자를 쓴 남자가 자전거를 멈춰 세우고 나를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나는 언제든 뛸 기세로 다리에 힘을 주었지만 시선만은 피하지 않았다. 남자는 나를 보며 허벅지 쪽으로 손을 가져다 대더니 무언가를 움켜쥐었다. 어두운 데다 거리가 있어 정확한 동작이 보이지는 않았다. 잘못 본 걸지도 몰라.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그저 허벅지 사이가 간지러워 멈춰 서서 긁는 걸 수도 있었다. 어쩌면 전부 겁먹은 아이들이 만들어낸 헛소문일지도 모르지. 긴장이 풀리자 웃음이 나왔다.

그 순간 자전거 바퀴의 휠이 돌아가는 소리가 들렸다. 남자가 내 쪽을 향해 페달을 밟았다. 나는 소리를 내지르며 아파트를 향해 전속력으로 달렸다. 집에 도착해 문을 걸어 잠갔는데도 페달 소리가 귓가에 들려오는 듯했다.

그 일이 있고 나는 한동안 비슷한 소리라도 들려오면 흠칫 놀라 뒤를 돌아보았다. 엄마 아빠에게 말하자 너도 드디어 바바리맨을 만난 모양이라며 학창시절 학교 앞을 서성이던 변태 아저씨 얘기를 들려주며 웃었다. 나는 하나도 웃기지 않았다.

중학교 진학을 앞두고 다른 동네로 이사를 가게 되면서 그 일은 차츰 잊혀졌다. 새로 살게 된 곳은 대규모 아파트 단지가 있는 신도시로 전에 살던 곳보다 건물들이 훨씬 높고 깨끗했다. 이사를 가고 나서는 더 이상 동네 애들과 놀이터에서 어울려 놀지 않았다. 그곳엔 놀이터 대신 잘 조성된 공원이 있었기 때문이다. 아이들은 저녁마다 분수대에서 터지는 물줄기 사이사이를 피해 뛰어다니며 놀았다. 엄마는 나를 데리고 까르푸에 갔다. 생긴 지 얼마 안 된 대형할인마트라서 늘 사람들로 붐볐다. 식품매장부터 푸드 코트, 문구 완구 매장이 한데 모여 있는 지하 2층에 가면 여기저기서 내 또래의 아이들이 튀어나왔다. 부모의 쇼핑이 끝날 때까지 아이들은 책장 아래에 붙어 있는 낮은 간이 의자에 허리를 구부리고 앉아 책을 읽었다. 공포 만화책이나 로맨스 소설은 약간의 경쟁이 붙을 정도로 인기가 많았다. 나는 비교적 사람이 없는 세계문학 코너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바로 앞에 애완동물 코너가 있어 동물들을 마음껏 구경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진열장에는 거북이와 햄스터, 도마뱀, 물고기 같은 작은 동물들이 전시되어 있었다.

“다녀올게.”

엄마가 그렇게 말하고 떠나면 나는 혼자가 되었다. 엄마는 볼일을 보러 갔다가 저녁 무렵 나를 데리러 왔다. 엄마가 올 때까지 나는 애완동물 코너를 몇 바퀴 돌면서 유리진열장 속 동물들에게 말을 걸었다. 너무 가까이 가면 안 된다고 적혀 있는 걸 알면서도 직원이 보고 있지 않을 때마다 몰래 유리창을 두드리거나 케이지 안에 손을 넣어 햄스터를 쓰다듬었다. 친해지고 싶었다. 그러나 동물들은 반응이 없었다. 몇 시간이고 잠만 잤다. 지하에서는 바깥의 시간을 알 수 없었으므로 나는 엄마가 얼마나 오랜 시간 그곳에 나를 내버려두는지, 또 어디에 다녀오는 건지 헤아릴 수 없었다. 엄마가 평소보다 늦는 날에는 까르푸의 불이 모두 꺼질 때까지 아무도 나를 데리러 오지 않는 것을 상상해보기도 했다. 이상하게 그러고 있으면 마음이 놓였다.

어느 날 햄스터를 사러 온 손님이 직원과 한참 이야기를 나누는 바람에 나는 주위를 얼쩡거리다가 다시 세계문학 책장 아래로 가서 앉았다. 아무 책이나 읽어볼까 하는 마음에 가장 눈에 잘 띄는 곳에 꽂혀있는 두꺼운 책 한 권을 꺼내들었다. 내가 집어든 책은 파트리크 쥐스킨트의 『향수』였다. 머나먼 외국을 배경으로 하는 소설이라 첫 장부터 이해할 수 없는 말들이 가득했는데 더러운 냄새에 대한 묘사만큼은 생생하게 느껴졌다. 나는 앉아서 천천히 책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주인공 그루누이가 태어났을 때, 그를 내려다보며 유모는 말한다.

“이 아인 도대체 냄새라는 게 없어요.”1)

나는 엄청난 구절을 발견한 것처럼 가슴이 두근거렸다. 서가 아래에 앉아 그 문장을 소리 내어 조용히 읽어보았다.

“도대체 냄새라는 게 없어요.”


때때로 엄마는 자신이 무언가를 물어볼 때마다 느릿느릿 대답하는 나를 답답하다는 듯 내려다보았다. 이사 오고 나서 엄마가 가장 먼저 한 일은 동네 엄마들끼리 만든 스피치 팀에 나를 가입시킨 것이었다. 우리는 일주일에 한 번씩 집을 오가며 모임을 가졌고 그때마다 스피치 아저씨가 왔다. 엄마는 스피치 수업이 있는 날마다 내 손톱을 바짝 깎아주고는 치렁하게 내려온 긴 머리를 하나로 묶어 핀으로 고정시켰다. 잘 입지 않아 새것처럼 빳빳한 청원피스까지 입고 나가는 날에는 종일 배가 살살 아팠다. 아이들은 제 엄마의 옆에 붙어 앉아 손장난을 치고 있다가 아저씨가 오면 긴장해 자세를 고쳐 앉았다. 아저씨는 항상 멀쑥한 정장 차림에 네모난 가죽 가방을 들고 와서 사람 좋은 얼굴로 웃어 보였지만, 왠지 거리감이 느껴졌다. 엄마들이 보고 있어서인지 아저씨는 수업 이외의 잡담은 일절 하지 않았다. 엄마는 아저씨의 그런 점을 마음에 들어 했다. 아저씨가 나누어 준 종이에는 매시간 우리가 해야 하는 역할이 적혀 있었다. 어느 날에는 기자가 되었고 어느 날에는 학급 반장이 되어 앞에 나가 발표를 했다. 아저씨는 아이들이 자신감 있게 말하지 못할 때마다 이렇게 외쳤다.

“감정을 더 실어서!”

“끊어 읽기!”

“제스처!”

우리는 고장 난 사물들처럼 말을 하고 또 말을 했다. 나는 유독 감정을 실어서 말하는 것이 어려웠는데, 아저씨는 진정성 있는 사람이 되려면 말에서도 감정이 느껴져야 한다고 했다. 그래서 나는 감정을 연기하기 시작했다. 엄마는 아저씨가 시키는 걸 곧잘 따라하며 조금씩 나아지는 나를 보며 안심한 표정으로 다른 엄마들과 함께 앉아 있었다. 그러나 그 시간이 끝나면 나는 긴장이 풀려 화장실로 달려가 먹은 것을 다 게워냈다. 나중에는 웬만해선 입을 열고 싶지 않아졌다. 특히 사람들 앞에서 말해야 하는 상황이 오면 손발이 차가워지고 입술이 바싹 말랐다.

그맘때쯤 나는 같은 반 남자애에게 공개적으로 고백을 받았다. 짝을 정하는 날이었다. 우리 반은 달에 한 번 짝을 바꾸어 앉았다. 보통 제비뽑기로 짝을 정했지만 담임선생님의 재량으로 뽑기가 시작되기 전 추천을 받았다. 선착순으로 손을 들고 누구랑 짝을 해보고 싶다고 말하면 되었다. 용기가 없으면 말할 수 없는 순간이었다. 나는 잠자코 앉아 있었다.

“아무도 없어요?”

선생님은 없으면 곧바로 추첨을 시작하겠다고 했다. 그때 한 남자애가 손을 들었고 내 이름이 호명되었다. 선생님이 짓궂게 웃으며 나를 지목한 이유를 묻자 남자애는 망설임 없이 좋아서요, 라고 대답하며 내가 있는 쪽을 쳐다보았다. 애들 사이에서 야유와 환호성이 동시에 터져 나왔다. 누군가는 박수를 쳤다. 모두의 시선이 나에게로 쏠렸다. 나와 가까이 앉아 있는 애들은 1일이다 1일, 하며 장난을 걸었다. 나는 담임선생님을 바라보았다. 여기서 나를 도와줄 수 있는 사람은 선생님뿐이었다. 선생님은 난처해하는 내 표정을 보더니 너희는 저번에 짝을 하지 않았느냐며 상황을 무마시켰다. 애들은 선생님의 말에 한 번 더 야유를 보냈다. 나에게 고백을 한 남자애는 고개를 빳빳이 세운 채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어서 자신의 옆자리로 오라는 듯. 거기서 멍청하게 느껴지는 건 나뿐이었다. 결국 빨개진 얼굴을 숨긴 채 수업이 다 끝날 때까지 자리에 엎드려있었다. 나는 바닥을 내려다보면서 스피치 시간에 배운 ‘진정성’이라는 단어를 떠올렸다.


집에 도착했을 때, 나는 내내 오줌을 참고 있었던 것을 깨달았다. 참을 수 없이 오줌이 마려워져서 급하게 초인종을 눌렀다. 분명 안에서 소리가 들린 것 같았으나 묵묵부답이었다. 나는 한 번 더 초인종을 누르는 대신 문을 두들겼다.

문을 열고 나온 것은 엄마였다. 나는 엄마를 보자마자 화장실에 가려던 것도 잊어버리고 품에 안겼다. 엄마가 내 등을 부드럽게 감싸주면 학교에서 있었던 일을 터트리듯 쏟아낼 생각이었지만, 엄마는 어쩐지 어정쩡한 자세로 서 있었다. 그러나 엄마의 몸에서 나는 좋은 향기 때문에, 방금 씻었는지 덜 마른 몸에서 풍기는 포근한 비누 향기 때문에 하려던 말을 다 잊어버리고 가만히 서 있었다. 그러느라 뒤따라 나온 스피치 아저씨를 뒤늦게 발견했다. 엄마는 끈적끈적한 것을 떼어내듯 내 몸을 자신의 몸에서 떨어뜨렸고 그 찰나 나는 아저씨와 눈이 마주쳤다. 그때 나는 어렸지만 내가 지금 본 걸 누구에게도 말하면 안 된다는 걸 직감적으로 깨달았다.

하지만 그 일은 금방 아빠가 알게 되었다. 아빠는 고철을 가공하는 공장을 운영했다. 공장이 집에서 먼 데다 일이 늦게 끝나 밤이 다 되어서야 집에 돌아왔다. 아빠는 어느 날 평소보다 일찍 수심이 가득한 얼굴로 집에 들어오더니 내게 엄마와 스피치 아저씨의 사이에 관해 몇 가지를 물어본 뒤 다시 집을 나갔다. 나는 내가 알고 있는 것의 절반만 말했다. 엄마만큼 아빠를 생각했기 때문이다.

한 달 동안 아빠와 나는 분명 마주쳤는데 마주친 적 없는 사람들처럼 굴었다. 그러다 아빠는 마음에 있던 것들을 꺼내 터뜨렸다. 새벽마다 엄마 아빠가 거실에서 속닥이는 소리가 들렸다. 가끔은 어떤 말인지 다 들릴 정도로 큰 소리도 오갔다.

긴 방학이 지나고 나는 드디어 중학생이 되었다. 졸업식에는 다행히 엄마 아빠 둘 다 왔다. 엄마는 졸업식이 끝나고 함께 밥을 먹으면서 당분간 외할머니 집에 가 있을 거라고 했다. 며칠 뒤 엄마는 짐을 싸들고 집을 나갔다. 나가기 전 새 책을 사는 데 쓰라면서 내 통장에 돈을 넣어주었다. 그 돈은 혼자 교복점에 가서 몸의 치수를 재고 교복을 맞추는 데 썼다.

나는 중학생이 되었지만 여전히 시간을 때울 곳이 필요했다. 그래서 학교가 끝나면 곧장 까르푸에 갔다. 교복을 입고 돌아다니려니 전보다 눈치가 보였다. 가슴팍에서 달랑거리는 명찰을 떼어 가방 옆 주머니에 넣었다. 학교에서 점심을 굶은 날에는 아빠에게 받은 용돈으로 푸드 코트에서 밥을 사먹었다. 세계문학 코너에 가서 다시 『향수』를 찾았을 때는 누군가 책을 사간 건지 책장이 비어 있었다.

 

그 무렵 동네에는 나처럼 학교가 끝나고 오갈 데 없는 애들을 위탁해주는 공부방이 여러 곳 생겨났다. 아빠는 아파트에 붙은 전단지를 보고 너는 앞으로 여기에 다니게 될 거라 했다. 첫 상담에 가던 날, 아빠는 내게 옷을 갖춰 입으라고 말했다. 나는 왠지 가라앉은 채로 개어 두었던 청원피스를 꺼내 입었다.

그리고 공부방 아줌마를 만났다. 공부방은 일반 가정집을 개조해 만든 곳이었다. 가정집과 다른 점이라 하면 거실에 다른 가구 없이 커다란 원형 테이블이 덩그러니 놓여 있다는 것과 양쪽 벽면이 책들로 가득 채워져 있다는 것이었다. 개인 공간으로 쓰는 큰방을 제외하곤 모든 방문이 활짝 열려있었다. 상담과 등록이 끝나자 아줌마는 곧 저녁 시간이라 먼저 일어나 보겠다며 주방으로 향했다. 그러곤 전을 좀 부치려 하는데 너도 먹고 가겠니? 하고 물었다. 나는 얼결에 고개를 끄덕였고 공부방 아이들과 같은 테이블에서 함께 감자전을 먹었다.

다음날부터 나는 학교가 끝나면 곧장 공부방으로 갔다. 아빠가 퇴근할 때까지 공부방에서 문제집을 풀었다. 공부방 애들 중에서는 내가 가장 나이가 많았다. 초등학생 여자애들이 나를 언니, 언니하며 잘 따랐다. 아줌마에게는 두 아들이 있었다. 쌍둥이 형제였다. 형제는 영재반을 다닐 정도로 똑똑한 애들이었다. 초등학교 4학년인데도 벌써 고등학교 수학 문제를 풀었다. 잘 먹어서 또래보다 몸집이 컸고 웃음이 많았으며 자기 물건을 빌려주는 일에도 인색하지 않았다. 내가 수학 문제를 풀다가 어려운 문제에 머리를 쥐어뜯고 있으면 아줌마 몰래 정답을 알려주기도 했다. 식탐은 많아서 군것질거리를 늘 입에 달고 살았다. 아줌마가 집안에 있는 과자들을 높은 곳에 숨겨두어도 의자를 밟고 올라가 찾아내거나 잠깐 자리를 비운 사이 허겁지겁 먹다가 아줌마에게 들켰다.

아줌마는 화가 나도 언성을 높이지 않았다. 부드럽고 단호한 목소리로 하고 싶은 말을 했다. 쌍둥이 아들들은 곧바로 들고 있던 과자봉지를 내려놓으며 제 엄마에게 사과했다. 발끝만 바라보며 끝까지 입을 다물고 있던 아이들과는 달랐다. 나는 그런 애들에게 익숙했다. 형제에게서는 놀이터 아이들에게서 느껴지던 비슷한 분위기를 찾아볼 수 없었다.

공부방에 다니는 아이들끼리는 적당한 유대감과 거리감이 있었다. 각자 하루에 해야 할 숙제들이 정해져 있었고 아줌마는 개별 노트를 만들어 진도를 체크했다. 나는 요일별로 영어, 논술, 한문, 수학을 배웠다. 숙제를 일찍 끝내는 날에는 휴게실로 사용하는 작은 방에 들어가서 티브이를 보거나 아이들과 짝을 지어 앞마당에서 배드민턴을 치거나 축구를 했다. 아줌마는 갓 삶은 수건들을 마당에 길게 늘어진 빨랫줄에 걸며 우리가 노는 모습을 바라보곤 했다. 바람이 불면 섬유유연제 냄새가 났다. 평화로운 날들이었다.


가끔은 모든 게 허무해졌다. 매일 테이블에 앉아 같은 패턴의 문제들을 반복해서 풀고 있다 보면 바깥으로 뛰어나가고 싶어졌다. 나는 답지를 모아두는 데를 기억해 두었다가 몰래 커닝하곤 했는데 아줌마가 눈치 챈 듯 언제부턴가 어디서도 답지를 찾을 수가 없었다. 틀리는 문제 수가 늘어날수록 나는 마음이 복잡해졌다. 아줌마가 내게 실망할까 봐 두려워졌기 때문이다.

한번은 공부방에 아기가 온 적이 있었다. 아줌마의 동생이 낳은 아기라고 했다. 반나절 정도만 아기를 봐달라는 동생 가족의 부탁에 아줌마는 우리에게 양해를 구하고 작은 방 침대에 아기의 자리를 마련했다. 아이들은 낯선 아기의 등장에 처음에는 신기하고 어리둥절해 했으나 시간이 지나자 다시 테이블로 돌아갔다. 나만이 계속 아기 앞에서 얼쩡거렸다.

“가까이서 보고 싶니?”

아줌마가 문밖에 멀찍이 떨어져 서서 아기를 지켜보는 내 어깨를 감싸며 물었다.

“네. 보고 싶어요.”

그럼 손을 깨끗이 씻고 오렴. 아줌마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나는 어느 때보다도 꼼꼼히 손을 씻고 왔다. 아줌마는 먼저 방문을 열고 들어가서 아기를 살피더니 나에게 들어와 보라고 손짓했다.
“아기도 밥을 먹을 거야. 네가 줘 볼래?”

아줌마는 묽은 죽을 스푼으로 떠서 아기의 입에 갖다 주며 먼저 시범을 보여주었다. 아직 잘 씹지 못하는 터라 아기는 자꾸 침을 흘렸다. 나는 아기가 혼날까 봐 조마조마해 아줌마를 쳐다봤지만 아줌마는 전혀 개의치 않는 얼굴로 아기의 입을 작은 손수건으로 닦아주었다. 아줌마는 내게 스푼을 건네며 이제 네가 줘보라고 말했다. 나는 조용히 고개를 저었다.

“왜?”

“무서워요.”

“맞아. 아기는 언제나 무섭지.”

아줌마는 농담처럼 말한 뒤 웃었다. 곧 공부방의 전체 낮잠 시간이 되었고 나는 작은 방에 아줌마와 함께 누웠다. 아기는 배가 불렀는지 밥을 먹자마자 새근새근 잠이 들었다.

“너도 잘 거니?”

“조금만요.”

“그럼 책을 읽어줄게.”

뭘 읽어주면 좋으려나, 아줌마는 잠시 고민하더니 ‘어른을 위한 동화’라고 적힌 책을 꺼내 내게 보여주었다. 그러곤 아기가 깰 수도 있으니 조용히 읽어주겠다고 했다. 내가 조금씩 잠에 빠져들 즈음 아줌마도 잠시 조는지 말이 끊겼고 문장과 문장 사이에 틈이 생겼다. 나는 거기서 발생하는 침묵이 좋았다. 아줌마의 몸에서 나는 풀 비린내도 자꾸 맡고 싶었다. 자고 있는 아줌마를 깨워 무엇이든 마음에 있는 것을 말하고 싶어졌지만 덜컥 겁이 나 그만두었다.


공부방을 다닌 지 일 년째 되던 날이었다. 아줌마의 쌍둥이 아들들이 학교 앞에서 병아리를 사왔다. 아줌마는 허락도 없이 벌어진 일에 당황스러워 보였지만 버릴 수는 없는 노릇이니 마당에서 키우기로 했다. 마당은 거실 베란다 문을 열고 나가면 보였다. 형제는 신이 나 머리를 맞댄 채 병아리가 살 집을 계획하기 시작했다. 아줌마는 필요한 목록들을 작성하라며 펜과 종이를 형제에게 주었다. 나는 그날 집에 가서 아빠에게 그 얘기를 들려주었다. 아빠는 학교 앞 병아리들은 병든 애들이 대부분이라 금방 죽을 거라 했다.

하지만 병아리는 계속 자라 하얀 닭이 되었다. 공부방 아이들은 고약한 새똥 냄새에 코를 찌푸리기도 했지만 점심시간이 되면 다 같이 밖으로 나가 닭을 구경했다. 나도 그 옆에서 닭이 모이를 쪼아 먹는 모습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어느 날은 닭이 몸을 부풀리고 앉아 허공을 응시하고 있었다. 숙제를 한 문제 정도 남겨두고 딴짓을 하던 중이었다. 모두가 다른 일에 한눈을 팔고 있을 때 나는 조용히 마당으로 나갔다. 내가 다가가도 닭은 미동이 없었다. 나는 쪼그려 앉아 닭에게 좀 더 가까이 가려다가 중심을 잃고 넘어질 뻔 했고 놀란 닭이 푸드덕 하며 몸을 움직였다.

그때 알 하나가 보였다. 아주 조그맣고 금방 깨질 것처럼 껍질이 얇은 알이었다. 닭은 혼자서도 하루에 하나씩 알을 낳았다. 형제는 닭이 낳은 알을 가지고 가서 따듯한 방안에 두었다. 부화할 수 없는 알이라고 아줌마가 설명해주어도 며칠만 두고 지켜보겠다며 손수건을 덮어 주었다. 사흘 정도 지나면 방안 어디선가 장마철에 나는 쿰쿰한 냄새가 났다.

알은 빛이 희미하게 드는 자리에 있어 표면이 더 하얗게 보였다. 등을 돌려 집안을 바라보았다. 아줌마는 통화를 하느라 잠깐 밖에 나간 모양이었다. 저녁 시간이라 남아 있는 아이들은 몇 없었다. 아무도 이쪽을 신경 쓰고 있지 않았다. 나는 철창문을 열고 알을 꺼내 두 손으로 감쌌다. 계속 품고 있었는지 알에서 온기가 느껴졌다. 궁금한 마음에 손톱으로 반투명한 껍질을 꾹 누르자 바로 금이 갔다. 나는 깨진 껍질을 수습해 보려다가 당황해 힘을 주었고 알을 완전히 깨트려버렸다. 그 순간 닭과 눈이 마주쳤다. 내가 닭을 보았기 때문에 그렇게 느낀 건지도 몰랐다. 손바닥을 타고 불투명한 액체가 흘러내렸다. 익숙한 감촉이었다. 나는 기억 속에서 지워버렸다고 생각했던 형을 끄집어내고 말았다.


동네를 떠나기 전 마지막으로 들은 흉흉한 소문의 주인공은 형이었다. 놀이터에 모여 있던 아이들 중 누군가 너네, 형 어디로 갔는지 알아? 물었고 모두 그게 누구냐는 듯 웅성거렸다. 누구네 형? 아니, 그 언니 있잖아. 형아 언니. 여자였어? 몰랐어. 머리가 짧았잖아.

그러다 어떤 애가 형이 스무 살짜리 남자와 사귀고 있었다는 얘기를 했다. 스무 살이랑? 나도 자세히는 몰라. 들은 얘기긴 한데. 아이들이 궁금해하자 화제를 던진 애는 슬쩍 발을 뺐다. 다른 애가 말했다. 아마 죽었다던데? 옆에 있던 애가 외투 주머니에 손을 넣으며 나도 그렇게 들었다고 속삭였다. 말들이 보태졌다. 애들의 말을 조합해보자면 형은 새벽녘 사귀던 오빠의 오토바이 뒤에 타고 도로를 질주하다가 가드레일을 박고 비탈길 아래로 떨어졌는데 죽었는지 살았는지는 아무도 모르는 듯했다. 뒤가 아니라 앞에 탄 거랬어. 형이 오토바이를 몬 거야. 이야기는 가속도가 붙듯 계속 이어졌다. 놀란 아이들이 모두 입을 벌리고 있는 동안 나만이 조용히 모래바닥의 구덩이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때 내 머릿속에는 단 하나의 생각만이 맴돌고 있었던 것 같다. 형이 죽었다. 정말?

정말 터졌을까.

“진짜 어디로 사라진 거야?”

한 아이가 중얼거렸다. 그날 나는 형이 연못에서 내게 알려준 것들에 대해 아이들에게 말해주지 않았다.

 

감춰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재빨리 마당 저편 풀숲 사이에 알을 던진 뒤 손에 남아 있는 것들을 흙에 문질러 버렸다. 끈적거리는 손에 흙까지 묻자 손바닥이 금세 더러워졌다. 누가 보기 전에 얼른 화장실로 달려가 손을 씻었다. 세면대에 남아 있는 흙을 몇 번이고 물로 씻어 내려 보냈다.

나는 공부방에서 제일 늦게까지 남아 있는 애였다. 아빠는 종종 공장에 문제가 생길 때면 밤 열시가 되어서야 나를 데리러 왔다. 아줌마는 난처해했지만 내가 민망해할까 봐 티를 내지 않으려 했다. 늦은 저녁 아줌마의 남편이 퇴근해 집에 돌아왔고 나를 보더니 이미 얘기를 전해들은 듯 가볍게 손을 흔들었다. 아저씨 무서운 사람 아니야, 하면서 가벼운 농담을 던지기도 했다. 형제는 제 아빠가 오자마자 배드민턴 라켓을 들고 나가자 재촉했다. 너도 배드민턴 칠 줄 아니? 아저씨는 내게 함께 치자며 라켓을 내밀었다. 나는 고개를 저으며 재빨리 말했다.

“저는 집에 있을게요.”

아줌마는 그럼 티브이를 보고 있으렴, 하며 작은방의 티브이를 켜주었다. 나는 감사하다고 답한 뒤 작은방으로 들어갔다. 곧 9시 뉴스가 시작되었지만 집중이 되지 않았다. 잠시 후 셔틀콕이 오가는 소리가 방안까지 들려왔다. 나는 목이 말라 거실로 나갔다. 창문 너머로 아줌마의 가족들이 보였다. 형제는 뚱뚱한 몸을 열심히 움직이며 제 아빠를 이기려고 사투 중이었다. 아줌마는 그런 자식들이 웃긴지 휴대폰 카메라를 꺼내 그들을 찍었다. 모두 서로의 얼굴을 재밌다는 듯 바라보고 있었다. 나는 컵에 물을 받으면서 그 모습을 지켜보다가 다시 작은방으로 돌아가려고 발걸음을 옮겼다.

늘 굳게 닫혀 있던 큰 방의 문이 조금 열려 있었다. 열린 방문 틈으로 어둠이 새어 나왔다. 나도 모르게 발걸음이 그쪽으로 향했다. 안 되는 걸 알면서도 문고리를 잡아당긴 것은 잠깐은 괜찮지 않을까 하는 마음이 들어서였다.

방문을 열자 커다란 침대가 가장 먼저 보였다. 이불과 베개는 각을 맞춰 흐트러짐 없이 정돈되어 있었다. 그 옆으로는 옷장과 화장대가 놓여 있었다. 화장대 위에 올려둔 탁상용 시계와 작은 달력을 한 번씩 만져보았다. 나는 고요한 방 안을 은밀한 기분으로 걸어보다가 더욱 과감해졌다. 여러 개의 옷장 문 중 하나를 열어보았다. 코트와 패딩 같은 두꺼운 겨울 외투부터 얇은 반팔 카디건까지 계절별로 분류된 옷들이 걸려 있었다. 나는 그중에서 제일 눈에 띄는, 아줌마가 즐겨 입는 자주색 재킷을 꺼내 들었다. 그러곤 입고 있던 티셔츠 위에 재킷을 걸쳐 보았다. 안에 입은 티셔츠가 두꺼워 재킷이 잘 잠기지 않았다. 나는 티셔츠를 머리 위로 벗었다. 화장대 거울을 통해 벗은 몸이 드러났다. 얼마 전부터 조금씩 솟아오르기 시작한 가슴 위로 찬기가 닿자 소름이 돋았다. 맨몸을 쓰다듬으면서 바로 자주색 재킷을 걸쳤다. 거울을 보며 재킷의 단추를 하나씩 잠가보았다. 아까보다 옷이 몸에 달라붙는 느낌이 들었다. 그러나 색 때문인지 어깨 패드 부분이 조금 솟아있어서인지 어딘가 나이가 들어보였다. 이리저리 몸을 비틀어 보던 중 집안의 적막이 깨졌다. 문소리와 함께 사람들이 들어오는 소리가 들렸다. 순식간에 일어난 일에 옷을 벗어야 할지 그냥 숨어야 할지 판단이 서지 않았다. 큰방은 현관문과 마주보고 있어 이대로라면 바로 들킬 것이었다. 나는 알면서도 그대로 굳은 채 서 있었다.

가장 먼저 집안으로 들어온 것은 아줌마였다. 문이 열리자 아줌마와 눈이 마주쳤다. 아줌마는 훤히 드러난 맨몸을 놀란 눈으로 훑더니 무어라 말할 틈도 없이 뒤따라 들어오는 아이들의 주위를 환기시키며 내게 얼른 문을 닫으라고 손짓했다. 뒤이어 손부터 씻으라며 아저씨를 화장실에 들여보내는 소리가 들렸다. 그사이 나는 빠르게 재킷을 벗어 옷장 안에 다시 걸어둔 뒤 벗어둔 티셔츠를 주워 입었다. 아줌마는 잠시 기다렸다가 방에 들어와 내 눈을 보지 않고 말했다.

“정리가 되었으면 나오렴.”

그것은 분명 아줌마가 내게 베푼 커다란 배려였다. 나는 그 상냥한 목소리를 듣자마자 죽어버려야겠다고 다짐했다. 도대체 어디서부터 잘못된 걸까 생각하면서.

 

그날 나는 아빠에게 공부방에 그만 다니고 싶다고 말했다. 아빠는 무슨 말이냐는 듯 나를 내려다보았다. 나는 최대한 자연스럽게 이야기했다.

“이제 혼자 지내도 괜찮은 나이니까요.”

아빠는 그 말에 실소를 터트리더니 말했다.

“그러지 않아도 좋은 소식이 있어.”

나는 더 나쁜 소식은 있어도 좋은 소식은 없을 거라고 속으로 생각했다. 아빠는 곧 집을 사게 될 거라 말했다. 더는 이사를 다니지 않아도 된다는 말이었다. 방이 세 개나 있는 크고 좋은 집이라고 했다.

“대신 그러려면 공장 근처로 가야 해. 정말 마지막 이사가 될 거야.”

내가 별 반응이 없자 아빠는 새로 살 집은 단독주택이어서 네가 좋아하는 강아지도 키울 수 있을 거라고 나를 달래듯 말했다. 그러곤 엄마도 크고 좋은 집을 보면 집으로 돌아오고 싶을 거라고 했다. 아빠는 엄마를 용서하기로 마음먹은 듯 보였다. 말은 그렇게 했지만 엄마를 만나러 가는 것은 우리였다.

얼마 뒤 우리는 외할머니 집에 갔다. 빈손으로 갈 수 없어 근처 꽃집에서 꽃다발을 샀다. 점원이 무슨 꽃을 드릴까요, 묻자 아빠는 내가 좋아하는 꽃을 골라 보라고 했다. 나는 진열장에 있는 빨간 장미꽃을 가리켰다. 언젠가 거리를 거닐다가 엄마와 본 덩굴장미가 떠올랐기 때문이다. 장미는 추위에 강한 편이라 가을에도 붉은 꽃을 피웠다. 외할머니 집에 도착해 아빠가 어른들과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 나는 마당에 있는 수돗가에 걸터앉았다. 얼지 말라고 열어둔 수도꼭지에서 물이 떨어졌다. 먼저 방에서 나온 것은 엄마였다. 나는 엄마에게 걸어가 들고 있던 꽃다발을 건넸다. 엄마는 꽃다발을 받아 들었다. 마침 엄마가 입고 있는 코트의 색이 진한 초록색이라 꽃과 잘 어울렸다. 택시를 타고 집에 돌아가는 동안 나는 가운데 자리에 앉아 엄마가 쥐고 있는 붉은 꽃을 곁눈질했다. 방지 턱을 넘을 때마다 흔들리는 꽃다발에서 엄마의 향수 냄새가 났다.

집 앞에 내려 아빠가 택시비를 계산하는 동안 엄마는 트렁크에서 자신의 짐을 꺼냈다. 나는 엄마를 돕기 위해 캐리어를 내 쪽으로 가져왔다. 엄마는 손에 들고 있는 꽃다발과 캐리어를 번갈아 바라보다가 캐리어를 자기 쪽으로 다시 끌고 왔다. 가벼운 것을 네가 들고 있으라면서 꽃다발을 건넸다. 긴장이 풀리자 점점 배가 고팠다. 외할머니가 내어준 팥죽은 너무 달았다. 나는 할머니의 눈치를 보며 두 입 정도 먹고 모두 남겼다. 엄마는 내가 남긴 팥죽을 가져가 먹었다.

“집에 먼저 들어가 있어.”

“엄마는요?”

뭔가 더 묻고 싶었지만 아빠가 내게 손짓하는 바람에 나는 집을 향해 걸었다. 내 얼굴만 한 꽃다발을 품고 걷자 앞이 잘 보이지 않았다. 꽃잎들이 상하지 않도록 중심을 잡아야 했다.

 

나는 집에 가자마자 꽃다발의 포장을 풀어서 줄기를 다듬은 뒤 화병에 꽂아두었다. 공부방 아줌마를 통해 건너 배운 것이었다. 두 아들이 대회에서 상을 받아온 날 공부방 아줌마는 받아온 꽃다발들을 풀어 테이블에 펼쳐놓았다. 그러곤 어울리는 꽃들을 섞어 도자기로 만든 긴 화병에 꽂았다. 내 방 침대 옆에 화병을 올려두고 나니 내가 받은 선물인 양 잠깐 기분이 좋았다. 나는 두 사람이 들어올 때까지 기다리려고 했지만 깜빡 잠이 들었고 새벽녘 눈을 떴을 때 집에는 여전히 아무도 없었다.

거실에서는 아까부터 켜져 있었는지 기억나지 않는 라디오 소리가 흘러나오고 있었고 진행자의 낮은 목소리 때문에 꿈결인지 아닌지 헷갈렸다. 나는 몸을 옆으로 돌려 누웠다. 벽을 향해 있는 커다란 인형을 뒤에서 끌어안았다. 인형은 내 몸집만 해서 안고 있으면 꼭 사람 같았다. 지금보다 더 어릴 때 엄마가 마트에서 사준 인형이었다.

그날도 나는 엄마를 기다리고 있었다. 왜 이렇게 늦게 왔냐고 불만을 쏟아내는 내게 엄마는 ‘해피 프라이스’라고 적힌 완구 코너로 데려가 선물을 골라보라고 했다. 그 후로 나는 사람들에게 미안한 일이 생길 때마다 용돈을 모아 선물을 샀다. 어쩌다 선물을 받으면 감사해요보다 먼저 괜찮다는 말이 튀어나왔다. 아주 오랜 시간이 흐른 뒤에도 나는 미안해서 선물을 고르는 어른이 되어 있을 것 같았다.

나는 인형에게 말을 걸었다. 외할머니는 자꾸 물건에게 이름을 붙여주고 말을 거는 내게 물건을 사람처럼 대하면 그것들을 정말 사람이라고 착각해서 망자가 붙는다고 했다. 그 말이 무서울 때도 있었다. 하지만 이제 그런 것은 중요하지 않았다.

 

 

 1) 파트리크 쥐스킨트, 『향수』, 강명순 옮김, 열린책들, 2000, 19쪽.

이재은
소설가, 1996년생
소설 「기르는 사람들」 「마음과 생활」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