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편소설
해피 프라이스 데이

  • 단편소설
  • 2024년 봄호 (통권 91호)
해피 프라이스 데이

그해 가을 우리는 놀이터에서 불장난을 하곤 했다. 아이들은 모래바닥에 둘러앉아 손으로 흙을 파서 홈을 만들었다. 그런 다음 좁고 깊은 구멍 속에 불에 잘 타는 것들을 채워 넣었다. 이를테면 신문지와 낙엽, 나뭇가지, 그리고 비밀스럽게 접힌 쪽지 같은 것들을. 구멍 속을 들여다보고 있으면 잉크냄새와 젖은 흙냄새가 뒤섞여 코끝이 시큰했다. 나는 이름도 모르는 아이들과 잘 어울려 놀았다. 저녁 시간을 함께 때울 친구들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불 있는 사람?”

그중 가장 나이가 많은 중학생 언니가 가방을 뒤적거리며 말했다. 우리는 암묵적으로 서로를 별명으로 불렀는데 언니는 형아라는 이름 때문에 모두에게 형이라고 불렸다. 형은 자연스레 무리의 우두머리 역할을 했다. 형 빼고는 대부분 나보다 어린애들이었다.

“불.”

대답을 구하듯 형이 우리의 얼굴을 하나씩 살피며 말했다. 나를 포함한 아이들 대부분이 고개를 저었다. 형이 한숨을 내쉬자 아이들 사이에서 묘한 긴장감이 돌았다.

그때 누군가 주머니에서 꺼낸 라이터를 홈 안으로 던졌다. 나이스. 라이터를 던진 아이는 자신을 추켜세우는 말에 어깨를 한번 으쓱였다. 신문지 귀퉁이에 불이 붙자 순식간에 종이가 우그러지며 그을음이 생겼다. 활자들은 곧 사라졌다. 불이 다른 곳으로 옮겨 붙기까지는 약간의 시간이 걸렸다. 습기 찬 나뭇가지가 섞여 있는 부분에는 불이 잘 붙지 않았다. 아이들은 긴 나뭇가지를 불쏘시개 삼아 구덩이를 들쑤셨다. 그러다 입고 있던 외투에 불티가 튀어 손쓸 새도 없이 구멍이 생기기도 했다.

아이들은 얼굴이 뜨거워지는지도 몰랐다. 나중에 밝은 곳에서 보면 빨갛게 달아오른 얼굴 군데군데가 거뭇했다. 옷과 머리카락에 밴 불 냄새는 물로 씻어도 잘 지워지지 않았다. 불은 잠시간 크게 타오르다 곧 사그라졌다. 어설프게 모아온 태울 거리들이 금방 동이 났기 때문이다. 싫증이 난 아이들은 먼저 집에 갔다. 곧 부모가 집에 올 시간이라며 가방을 챙기는 아이들도 있었다. 더 놀고 싶은데 어쩔 수 없다는 듯 욕을 중얼거렸지만 나는 무리를 빠져나가는 애들의 표정에서 일종의 안도를 보았다. 그러나 나는 끝까지 남아있었다. 형과 함께였다. 나는 용기를 내어 형에게 말을 걸었다.

“형은 집에 안 가요?”

“안 가. 지들이나 체육관에서 자라고 해.”

뜻밖의 대답에 나는 곧바로 사과했다. 여름이 끝나갈 무렵 동네에 태풍이 덮쳤다. 아파트에 사는 애들은 괜찮았지만 바로 옆 동네의 낮은 지대 주택 단지는 하루아침에 물에 잠겼다. 정부의 보상을 기다리며 체육관에서 임시로 지내는 집들이 있었는데 형도 그중 하나인 것 같았다.

“넌 사과할 때만 말이 빨라진다.”

형은 주눅이 든 나를 툭 치며 웃었다. 나는 다시 입을 꾹 다물었다. 다음에 해야 할 말이 생각나지 않았다. 나는 어릴 때부터 또래보다 말이 느리다는 이야기를 자주 들었다. 무언가 말해야 한다고 생각하면 그때부터 심장이 뛰어 말할 타이밍을 놓치고 말았다. 학년이 바뀔 때마다 선생님들은 나의 그런 성격을 잘 포장해 부모에게 전달해 주었다. 조심성이 많은 아이. 내향적인 아이. 생각이 깊은 아이. 하지만 조금 더 적극적인 표현능력을 요함.

형은 재밌는 걸 보여주겠다며 엉덩이에 묻은 모래를 털며 일어났다. 다 타버린 재가 풀썩 피어올라 공중에 흩날렸다. 나는 앞으로 성큼성큼 걸어가는 형의 뒤를 쫓았다. 놀이터를 빠져나와 어둑한 길가를 조용히 걷다 보니 비가 한두 방울씩 떨어져 내렸다. 비에 젖어 축 가라앉은 형의 짧은 머리카락이 바람을 타고 흔들렸다. 어디로 가는 걸까. 나는 형의 옆얼굴을 힐끔 쳐다보았다. 어딘가 비밀스럽고 휑한 얼굴을.

도착한 곳은 어린이집 앞이었다. 앞문이 굳게 잠겨 있었다. 불투명한 창문 너머로 보이는 복도는 어둡고 고요했다. 형은 건물 뒤편으로 향하더니 허술하게 잠긴 철제 대문을 손쉽게 열곤 안으로 들어갔다. 나는 주위를 살피며 형이 열어둔 문틈에 조심스레 발을 집어넣었다. 형은 여기 봐, 하고 나를 향해 손짓했다.

돌로 만든 커다란 연못이었다. 연못 안에는 여러 마리의 작은 금붕어들이 헤엄치고 있었다. 물이 검어 깊이를 가늠하기는 어려웠다. 수면에는 이끼인지 모를 푸른 찌꺼기들이 떠다녔다. 형은 배를 보인 채 거꾸로 떠 있는 금붕어 몇 마리를 손가락으로 툭 건드렸다. 물에 작은 파문이 일었다. 그러곤 손 우물을 만들어 뒤집힌 채 떠다니고 있던 금붕어 한 마리를 물속에서 꺼냈으나 곧바로 놓쳤다. 바닥에 떨어져 파득거리는 금붕어를 보고 놀란 나머지 뒷걸음질 쳤다. 금붕어는 아가미로 가쁘게 호흡하며 몸을 이리저리 비틀었다.

“이미 죽어가는 애들이야. 너도 하나 꺼내 봐.”

바닥에 쪼그려 앉은 형이 말했다. 형은 금붕어 한 마리를 연못에서 꺼냈다. 나도 무언가에 이끌리듯 형 옆에 섰다. 무서워? 형이 물었다. 나는 그 말에 눈을 질끈 감고 금붕어 한 마리를 물속에서 꺼냈다. 생각보다 차가운 물에 손톱 아래가 시렸다. 손바닥 안에서 아가미의 호흡이 느껴질 때마다 나는 손을 움찔거렸다. 거봐, 형이 잘했다는 듯 웃었다. 너 그러다 놓친다. 그 말에 나는 조금 더 힘을 주어 금붕어를 쥐었다.

“느낌이 어때?”

“터질 것 같아요.”

“우리가 돕는 거야.”

“도와요?”

편하게 죽을 수 있도록 돕는 거지. 여기 있는 애들은 죄다 병 걸린 애들이야. 형은 그렇게 말하곤 손바닥 안에 있는 금붕어를 단번에 그러쥐었다. 팽창해 있던 무언가가 사방으로 터져나가는 소리가 났다. 형은 손바닥을 펴서 금붕어의 사체를 내게 보여주었다. 나는 뒷걸음질 치다 쥐고 있던 금붕어를 다시 연못 안에 빠트렸다. 금붕어는 아래로 가라앉았다가 잠시 후 다시 수면 위로 떠오르며 무리에 섞여들었다. 연못 안의 금붕어들은 대부분 원을 그리며 빙글빙글 돌고 있었다. 죽었는지 살았는지 확인해 보기 두려웠다.

“멍청해.”

형이 뒤에서 속삭였고 나는 그 말을 듣자마자 얼굴이 뜨거워졌다. 그대로 대문을 박차고 나와 아파트 단지를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어둠을 지나 단지 안에 들어서자 주변이 환해졌다. 조금만 더 걸으면 집이 나올 것이고 엄마 아빠는 화난 얼굴로 거실을 서성거리며 나를 기다리고 있을 것이었다. 그 사실을 떠올리자 울음이 났다. 가로등 아래 멈춰 서서 참았던 숨을 내뱉었다. 형은 연못이 거기에 있다는 걸 어떻게 알았을까? 또 누구를 데려갔을까. 나는 그날 밤늦게 집으로 돌아가 종아리를 맞고 울다 지쳐 잠들었다. 그날이 내가 기억하는 형의 마지막 모습이었다.


그즈음 동네 아이들 사이에서는 흉흉한 소문이 돌았다.

“어떤 아저씨가 자전거 타고 동네를 돌아다니면서 자위를 한대.”

바지를 내리고 성기를 문지르는 걸 봤다는 애들도 있고, 자전거를 타고 자기를 쫓아와서 신고했다는 애들도 있었다. 어떤 애는 아예 발가벗고 자전거를 타는 걸 본 적도 있다고 했다. 나는 이야기를 들으면서 그 아저씨를 한번 만나보고 싶다고 생각했다. 그런 다음 애들에게 말해주고 싶었다. 그런 변태 아저씨 정도는 별 거 아니라고.

얼마 뒤 집에 가는 중에 누군가 따라오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뒤를 돌아보자 저 멀리 자전거를 타고 있는 사람이 보였다. 직감적으로 그 아저씨구나 했다. 아파트 주차장이었다. 나는 일부러 의식하지 않는 척 천천히 걸었다. 페달 밟는 소리가 점점 가까워질 때쯤 고개를 돌렸다. 야구 모자를 쓴 남자가 자전거를 멈춰 세우고 나를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나는 언제든 뛸 기세로 다리에 힘을 주었지만 시선만은 피하지 않았다. 남자는 나를 보며 허벅지 쪽으로 손을 가져다 대더니 무언가를 움켜쥐었다. 어두운 데다 거리가 있어 정확한 동작이 보이지는 않았다. 잘못 본 걸지도 몰라.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그저 허벅지 사이가 간지러워 멈춰 서서 긁는 걸 수도 있었다. 어쩌면 전부 겁먹은 아이들이 만들어낸 헛소문일지도 모르지. 긴장이 풀리자 웃음이 나왔다.

그 순간 자전거 바퀴의 휠이 돌아가는 소리가 들렸다. 남자가 내 쪽을 향해 페달을 밟았다. 나는 소리를 내지르며 아파트를 향해 전속력으로 달렸다. 집에 도착해 문을 걸어 잠갔는데도 페달 소리가 귓가에 들려오는 듯했다.

그 일이 있고 나는 한동안 비슷한 소리라도 들려오면 흠칫 놀라 뒤를 돌아보았다. 엄마 아빠에게 말하자 너도 드디어 바바리맨을 만난 모양이라며 학창시절 학교 앞을 서성이던 변태 아저씨 얘기를 들려주며 웃었다. 나는 하나도 웃기지 않았다.

중학교 진학을 앞두고 다른 동네로 이사를 가게 되면서 그 일은 차츰 잊혀졌다. 새로 살게 된 곳은 대규모 아파트 단지가 있는 신도시로 전에 살던 곳보다 건물들이 훨씬 높고 깨끗했다. 이사를 가고 나서는 더 이상 동네 애들과 놀이터에서 어울려 놀지 않았다. 그곳엔 놀이터 대신 잘 조성된 공원이 있었기 때문이다. 아이들은 저녁마다 분수대에서 터지는 물줄기 사이사이를 피해 뛰어다니며 놀았다. 엄마는 나를 데리고 까르푸에 갔다. 생긴 지 얼마 안 된 대형할인마트라서 늘 사람들로 붐볐다. 식품매장부터 푸드 코트, 문구 완구 매장이 한데 모여 있는 지하 2층에 가면 여기저기서 내 또래의 아이들이 튀어나왔다. 부모의 쇼핑이 끝날 때까지 아이들은 책장 아래에 붙어 있는 낮은 간이 의자에 허리를 구부리고 앉아 책을 읽었다. 공포 만화책이나 로맨스 소설은 약간의 경쟁이 붙을 정도로 인기가 많았다. 나는 비교적 사람이 없는 세계문학 코너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바로 앞에 애완동물 코너가 있어 동물들을 마음껏 구경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진열장에는 거북이와 햄스터, 도마뱀, 물고기 같은 작은 동물들이 전시되어 있었다.

“다녀올게.”

엄마가 그렇게 말하고 떠나면 나는 혼자가 되었다. 엄마는 볼일을 보러 갔다가 저녁 무렵 나를 데리러 왔다. 엄마가 올 때까지 나는 애완동물 코너를 몇 바퀴 돌면서 유리진열장 속 동물들에게 말을 걸었다. 너무 가까이 가면 안 된다고 적혀 있는 걸 알면서도 직원이 보고 있지 않을 때마다 몰래 유리창을 두드리거나 케이지 안에 손을 넣어 햄스터를 쓰다듬었다. 친해지고 싶었다. 그러나 동물들은 반응이 없었다. 몇 시간이고 잠만 잤다. 지하에서는 바깥의 시간을 알 수 없었으므로 나는 엄마가 얼마나 오랜 시간 그곳에 나를 내버려두는지, 또 어디에 다녀오는 건지 헤아릴 수 없었다. 엄마가 평소보다 늦는 날에는 까르푸의 불이 모두 꺼질 때까지 아무도 나를 데리러 오지 않는 것을 상상해보기도 했다. 이상하게 그러고 있으면 마음이 놓였다.

어느 날 햄스터를 사러 온 손님이 직원과 한참 이야기를 나누는 바람에 나는 주위를 얼쩡거리다가 다시 세계문학 책장 아래로 가서 앉았다. 아무 책이나 읽어볼까 하는 마음에 가장 눈에 잘 띄는 곳에 꽂혀있는 두꺼운 책 한 권을 꺼내들었다. 내가 집어든 책은 파트리크 쥐스킨트의 『향수』였다. 머나먼 외국을 배경으로 하는 소설이라 첫 장부터 이해할 수 없는 말들이 가득했는데 더러운 냄새에 대한 묘사만큼은 생생하게 느껴졌다. 나는 앉아서 천천히 책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주인공 그루누이가 태어났을 때, 그를 내려다보며 유모는 말한다.

“이 아인 도대체 냄새라는 게 없어요.”1)

나는 엄청난 구절을 발견한 것처럼 가슴이 두근거렸다. 서가 아래에 앉아 그 문장을 소리 내어 조용히 읽어보았다.

“도대체 냄새라는 게 없어요.”


때때로 엄마는 자신이 무언가를 물어볼 때마다 느릿느릿 대답하는 나를 답답하다는 듯 내려다보았다. 이사 오고 나서 엄마가 가장 먼저 한 일은 동네 엄마들끼리 만든 스피치 팀에 나를 가입시킨 것이었다. 우리는 일주일에 한 번씩 집을 오가며 모임을 가졌고 그때마다 스피치 아저씨가 왔다. 엄마는 스피치 수업이 있는 날마다 내 손톱을 바짝 깎아주고는 치렁하게 내려온 긴 머리를 하나로 묶어 핀으로 고정시켰다. 잘 입지 않아 새것처럼 빳빳한 청원피스까지 입고 나가는 날에는 종일 배가 살살 아팠다. 아이들은 제 엄마의 옆에 붙어 앉아 손장난을 치고 있다가 아저씨가 오면 긴장해 자세를 고쳐 앉았다. 아저씨는 항상 멀쑥한 정장 차림에 네모난 가죽 가방을 들고 와서 사람 좋은 얼굴로 웃어 보였지만, 왠지 거리감이 느껴졌다. 엄마들이 보고 있어서인지 아저씨는 수업 이외의 잡담은 일절 하지 않았다. 엄마는 아저씨의 그런 점을 마음에 들어 했다. 아저씨가 나누어 준 종이에는 매시간 우리가 해야 하는 역할이 적혀 있었다. 어느 날에는 기자가 되었고 어느 날에는 학급 반장이 되어 앞에 나가 발표를 했다. 아저씨는 아이들이 자신감 있게 말하지 못할 때마다 이렇게 외쳤다.

“감정을 더 실어서!”

“끊어 읽기!”

“제스처!”

우리는 고장 난 사물들처럼 말을 하고 또 말을 했다. 나는 유독 감정을 실어서 말하는 것이 어려웠는데, 아저씨는 진정성 있는 사람이 되려면 말에서도 감정이 느껴져야 한다고 했다. 그래서 나는 감정을 연기하기 시작했다. 엄마는 아저씨가 시키는 걸 곧잘 따라하며 조금씩 나아지는 나를 보며 안심한 표정으로 다른 엄마들과 함께 앉아 있었다. 그러나 그 시간이 끝나면 나는 긴장이 풀려 화장실로 달려가 먹은 것을 다 게워냈다. 나중에는 웬만해선 입을 열고 싶지 않아졌다. 특히 사람들 앞에서 말해야 하는 상황이 오면 손발이 차가워지고 입술이 바싹 말랐다.

그맘때쯤 나는 같은 반 남자애에게 공개적으로 고백을 받았다. 짝을 정하는 날이었다. 우리 반은 달에 한 번 짝을 바꾸어 앉았다. 보통 제비뽑기로 짝을 정했지만 담임선생님의 재량으로 뽑기가 시작되기 전 추천을 받았다. 선착순으로 손을 들고 누구랑 짝을 해보고 싶다고 말하면 되었다. 용기가 없으면 말할 수 없는 순간이었다. 나는 잠자코 앉아 있었다.

“아무도 없어요?”

선생님은 없으면 곧바로 추첨을 시작하겠다고 했다. 그때 한 남자애가 손을 들었고 내 이름이 호명되었다. 선생님이 짓궂게 웃으며 나를 지목한 이유를 묻자 남자애는 망설임 없이 좋아서요, 라고 대답하며 내가 있는 쪽을 쳐다보았다. 애들 사이에서 야유와 환호성이 동시에 터져 나왔다. 누군가는 박수를 쳤다. 모두의 시선이 나에게로 쏠렸다. 나와 가까이 앉아 있는 애들은 1일이다 1일, 하며 장난을 걸었다. 나는 담임선생님을 바라보았다. 여기서 나를 도와줄 수 있는 사람은 선생님뿐이었다. 선생님은 난처해하는 내 표정을 보더니 너희는 저번에 짝을 하지 않았느냐며 상황을 무마시켰다. 애들은 선생님의 말에 한 번 더 야유를 보냈다. 나에게 고백을 한 남자애는 고개를 빳빳이 세운 채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어서 자신의 옆자리로 오라는 듯. 거기서 멍청하게 느껴지는 건 나뿐이었다. 결국 빨개진 얼굴을 숨긴 채 수업이 다 끝날 때까지 자리에 엎드려있었다. 나는 바닥을 내려다보면서 스피치 시간에 배운 ‘진정성’이라는 단어를 떠올렸다.

 

 

* 계간 <대산문화> 2024 봄호(통권 91호)에 전문이 수록되어 있습니다.

이재은
소설가, 1996년생
소설 「기르는 사람들」 「마음과 생활」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