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문학의 순간들
너무도 자유분방한 미래

- 도종환 시집 『접시꽃 당신』

  • 우리 문학의 순간들
  • 2024년 봄호 (통권 91호)
너무도 자유분방한 미래

- 도종환 시집 『접시꽃 당신』

1.

시를 쓰는 친구 중에 자칭 명리학의 고수가 있었다. 1990년대 초의 어느 날이었다. 그 친구가 내게 거듭 사주를 봐주겠다고 말했다. 30대 말의 나이였다.

“재미로 보는 사주야. 너무 심각하게 생각하지 말고. 사주를 좀 알려 줘 봐!”

“내 사주를? 알려주기 싫은데……”

그 친구는 이즈음 명리학 공부에 한참 들떠 있었다. 나는 그 친구에게 구태여 내 운명을 알려 주고 싶지 않았다. 아니, 나 자신이 내 운명을 별로 알고 싶지 않았다. 그때만 해도 내 운명이, 내가 하려는 일이 뻔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를 찾아오는 미래는 도무지 질서가 없었다. 그것은 늘 제멋대로이거나 마구잡이였다. 너무도 자유분방했다. 시를 쓰는 사람, 곧 시인, 이것이 내 삶의 방향이었다. 하지만 시를 쓰는 일로 밥을 먹고 살 수는 없었다. 밥을 먹고 사는 방법으로는 중고교 선생을 하는 것이 좋았다. 그러나 그 일을 계속하기는 어려웠다. 1970년대 중고교에는 비리가 아주 많았는데, 비리와 싸우다가 이 학교, 저 학교에서 해직되기 일쑤였기 때문이다.

1984년 5월 초였다. 막 결혼을 했을 때였다. 대전에서는 살길이 막막해 아내를 따라 거주지를 서울로 옮겼다. 자연스럽게 전국의 많은 시인과 알게 되었다.


2.

도종환 시인을 처음 만난 것도 이 무렵인 듯싶다. 국어국문학회가 열리고 있는 충남대학교에서였다. 그때는 그냥 통성명만 하고 헤어졌다. 내가 《삶의문학》(인간사랑, 1983)을 만들고, 『마침내 시인이여』(창작과비평사, 1984)에 시를 발표할 무렵이었다.

오래 지나지 않아서였다. 청주·대구의 문학동인 모임인 《분단시대》에 초대되어 청주에 가게 되었다. 《분단시대》 문학동인 모임의 장소는 청주의 도종환 시인 집이었다. 어둡고 컴컴한 도종환 시인의 방은 한 면이 전부 책으로 가득했다.

이 방에 모여 무슨 얘기를 나누었을까. 잘 기억나지 않는다. 무슨 얘기인가를 떠들고 있는데, 도종환 시인의 부인이 음료수, 과일 등을 들고 방 안으로 들어섰다. 어둡고 컴컴하던 방이 갑자기 환해졌다. 밝고 화사한 보름달이 방 안으로 들어오는 듯했다. 느닷없이 가슴이 덜컥했다.

도종환 시인이 함께하던 문학동인 모임 《분단시대》는 내가 함께하던 문학동인 모임 《삶의문학》과 늘 더불어 언급되고는 했다. 당시에 함께 언급되던 문학동인 모임으로는 《시와경제》, 《오월시》, 《마산문화》 등이 더 있었다.

도종환 시인의 시집 『접시꽃 당신』이 실천문학사에서 간행된 것은 1986년 12월의 일이었다. 그의 ‘접시꽃 당신’, 그러니까 앞에서 말한 밝고 화사한 ‘보름달’이 이승을 하직한 것은 1986년 여름이었다. ‘보름달’이 태릉의 원자력 병원에 입원해 있을 때는 병문안을 간 적이 있다. 도종환 시인이 자리에 없어 만나지는 못하고 돌아왔지만 말이다.

아내와 끝내 사별했다는 도종환 시인의 소식을 듣자 가슴이 다시 또 덜컥했다. 나는 하종오 시인과 함께 몇몇 시인들의 조의금을 모아 청주의 장례식장으로 향했다. 조문을 마친 뒤에도 하 시인과 나는 하루를 더 청주에서 묵었다. 장지에까지 함께 가 볼 생각이었다.

장지는 청주 근교의 천주교 공원묘지였다. 가랑비가 흩날렸다. 나는 김용락, 김창규, 김희식, 배창완, 김종인 등 《분단시대》 동인들과 함께 봉분이 이루어지는 과정을 묵묵히 지켜보았다. 봉분이 완성되고 모든 장례 절차가 끝나자 도종환 시인이 우리를 한 곳으로 불러 모았다. 우리는 그곳에 둘러서서 둥그렇게 원을 만들었다. 이내 그가 상복 안주머니에서 종이 두어 장을 꺼내 들었다. 종이에는 아내를 저승으로 보내며 쓴 시가 빽빽하게 적혀 있었다. 그는 엄숙한 마음으로 시를 소리 내어 읽었고, 우리는 엄숙한 마음으로 시를 두 귀로 들었다.

나는 지금 그때 그가 읽은 시의 내용을 잘 기억하지 못한다. 시가 아주 길었던 것으로 미루어 「접시꽃 당신」이 아니었을까 짐작만 할 뿐이다.

장례를 마친 후 그는 이런저런 매체에 아내를 추모하는 시를 발표하고는 했다. 동인지 《분단시대》에는 무더기로 추모 시를 발표하기도 했는데, 그때의 여린 내 감성에게는 편편이 큰 울림을 주었다.

그의 시집 『접시꽃 당신』을 간행한 실천문학사의 위치는 서대문의 인창고등학교 근처였다. 내 첫 시집 『좋은 세상』(1986년 4월)도 실천문학사에서 간행되어 자주 그곳으로 오고 가던 참이었다. 당시 실천문학사의 편집장은 김사인 시인이었다. 김사인 편집장에게 내가 말했다.

“도종환 시인이 요즈음 발표하고 있는 시들, 읽어 보았소? 사별한 아내를 추모하는 시들 말이에요.”

“그럼요. 여러 편 읽어 보았지요.”

“아내를 추모하는 도종환 시인의 시를 모아 실천문학사에서 시집으로 내지요. 크게 히트할 것 같은데……”

“아직 추모 시가 시집 한 권 분량은 안 될 것 같은데요.”

“첫 시집 『고두미 마을에서』 이후에 쓴 다른 시들, 아내와 사별하기 이전에 쓴 시들도 꽤 있어요. 함께 간행하면 충분히 한 권 분량이 될 거요.”

이런 얘기를 주고받기는 했으나 김사인 편집장이 구체적으로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는 몰랐다. 도종환 시인을 만나면 나는 그저 아직 어린 아들과 딸을 키우는 일이 얼마나 힘든가나 걱정하고는 했다. ‘저 어린 아들과 딸을 어떻게 하지. 어린 아들과 딸을 키우고 돌볼 여자가 필요한데……’

물론 당시에 지금의 나나 도종환 시인의 모습은 상상도 하지 못했다. 운명이라는 것이 얼마나 자유분방한지를 그때는 짐작도 하지 못했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잘 아는 어른으로부터 여자 한 분을 부탁받게 되었다. 아이를 낳지 못하는 젊고 예쁜 미혼의 여자가 있는데, 아이가 있는 사별한 남자를 소개해달라는 것이었다. 얘기를 듣고 보니 나도 잘 아는 좋은 여자분이었다. 시집을 가고는 싶은데, 아이를 기르고는 싶은데, 아이를 못 낳는 여자…… 그 얘기를 듣자마자 도종환 시인이 떠올랐다.

서둘러 나는 도종환 시인에게 전화했다. 함께 아이를 기를 수 있는 좋은 여자가 있으니 한번 만나보는 것이 어떻겠냐는 것이 요점이었다. 얘기의 끝에 보름 후 조치원역 근처 다방에서 한번 만나 보기로 했다.

이 보름 사이에 그의 시집 『접시꽃 당신』이 출간되었고, 출간되자마자 그는 일약 스타가 되었다. 석간 중앙일보와 조간 조선일보의 박스 기사가 그를 금세 바쁘고 분주한 유명 인사로 만들었다. 당연히 조치원역 근처의 다방에서 만나기로 한 약속은 연기되고, 또 연기되었다. 그러다가 자연스럽게 약속 자체가 사라지고 말았다.

도종환의 시집 『접시꽃 당신』이 베스트셀러가 되자 덩달아 실천문학사의 다른 시집들도 좀 팔리기 시작했다. 실천문학사의 다른 시집 중에는 물론 내 시집도 들어 있었다. 하지만 실천문학사의 송기원 사장이 그에 따른 인세를 챙겨주지는 않았다. 경제적인 여유가 생긴 덕분에 『삶의문학시선집』이 실천문학사에서 간행되기는 했지만 말이다.

 

3.

지금도 나는 앞에서 말한 시를 쓰는 명리학의 고수를 만나고는 한다. 내가 대전문학관의 관장으로 임명되었을 때였다. 그 친구는 내게 관운(官運)이 있다며 다시 또 사주가 어쩌고저쩌고했다. 많은 사람이 사주를 알면 한 사람의 미래도 알 수 있고, 운명도 알 수 있다고 생각한다. 내가 내 미래를 알고, 운명을 알면 얼마나 재미없는 인생을 살아야 할까.

나이 70이 넘었으니 사주나 관상으로 알 수 있는 내 미래나 운명은 거의 다 끝나가고 있으리라. 물론 앞으로도 내게 주어진 사회적이고 공적인 일이 남아있을 수도 있다.

돌이켜 보면 나는 내가 예상했던 내 미래, 내 운명과 대충은 잘 더불어 살아온 듯도 싶다. 하지만 내가 예상했던 내 미래가, 내 운명이 아주 자유분방하고 제멋대로였던 것은 분명하다. 아무렇게나 지랄을 떨어대는 것이 미래고, 운명이라고 하더라도 나날의 삶이라는 것이 대강은 노력만큼, 정성만큼 살아지기 마련 아닌가.

한 개인의 역사는 한 국가의 역사와 늘 맞물려 있기 마련이다.

이은봉
시인, 광주대학교 명예교수, 1953년생
시집 『걸어 다니는 별』, 『뒤뚱거리는 마을』 등, 평론집 『시와 깨달음의 형식』, 『시의 깊이, 정신의 깊이』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