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트 위 패스포트
휴일의 길목, 여유와 공존의 도시 브리즈번

  • 노트 위 패스포트
  • 2024년 봄호 (통권 91호)
휴일의 길목, 여유와 공존의 도시 브리즈번

브리즈번 인근 골드코스트 전경  

 

운 좋은 날 동네 공원 산책로의 유칼립투스 나무를 올려다보면 저 높이서 자고 있는 코알라의 엉덩이를 볼 수 있다. 가까이 안거나 만지기는 힘들지만 그 덕에 코알라는 하루 종일 한자리에서 잠을 잘 수 있을 것이다. 쿰바바 공원의 캥거루는 자기네가 싼 똥을 피할지언정 사람을 피하지는 않겠다는 듯하다. 자기를 보러 온 사람들 앞에서 주머니 밖으로 고개를 내민 새끼와 함께 풀을 뜯어 먹는다. 퀸즐랜드대학 연못가의 이구아나들은 사람이 쓰다듬어도 아랑곳하지 않은 채 평안히 볕을 쬔다. 느리게 고개를 돌리거나 발걸음을 옮기면 시간도 함께 늘어지는 듯하다. 밤마다 지붕을 뛰어다니는 꼬리 긴 포섬이 전봇대를 건드려 마을의 전기를 꺼트린 날, 길가에 나와 복구공사를 지켜보는 주민들은 다들 별일 아니라는 듯한 표정이다. 무슨 일이냐고 이웃 엘레나에게 물어보니 이번에도 ‘작고 귀여운’ 포섬이란다. 동네는 온통 컴컴한데 ‘귀여운’이라는 수식어를 듣고 적개심은 누그러질 수밖에 없다. 그들이 창문 밖 난간에서 눈이 마주쳐도, 뒷마당 나뭇가지에 종일 자고 있어도 이제는 대수롭지 않은 일이 되어버린다. 휴일처럼 고요한 날들이 이어진다.

 

동네 공원 산책로의 코알라 

 

브리즈번 전경  

 

“브리즈번 많이 심심하다고 하던데요” 출국 전 역사 전공 선생님이 인사를 건네셨다. 그런 곳을 찾고 있었기에 내심 기대가 커졌다. 삶의 형태가 단순한 곳, 계획한 일을 순조롭게 진행할 수 있는 곳, 연구년 1년을 보낼 장소를 고르는 기회가 주어지자 나는 서울의 삶과 다른 곳을 찾았다. 한국이 밤일 때 낮인 곳을 막연하게 생각했으나, 여러 인연 끝에 호주 브리즈번에 있는 퀸즐랜드대학(UQ)의 초대를 받게 되었다. 시차는 한 시간뿐이지만 밤하늘에는 북두칠성 대신 남십자성이 빛나고 겨울에도 여름에도 반팔, 반바지를 입는 곳이었다. 브리즈번은 호주의 대표 도시 시드니나 멜버른처럼 대륙의 동쪽에 있지만 두 도시보다 적도에 가까워 호주의 겨울인 7~8월에도 따뜻했다. 실제 우리가 도착한 7월 이례적으로 아침 기온이 10℃ 밑으로 떨어졌다고 뉴스가 시끄러웠다. 은퇴자들이 살고 싶은 도시 순위에 꾸준히 이름이 오르는 것도 그런 이유일 것이다.

호주의 봄꽃 자카란다   

브리즈번은 남한보다 18배 큰 퀸즐랜드주의 주도이며, 2032년 올림픽 개최지이기도 하다. 상당히 규모가 큰 도시처럼 보이지만 한국의 절반 조금 넘는 인구를 가진 호주에서 브리즈번의 인구는 서울의 절반의 절반도 안 된다. 구절양장(九折羊腸)처럼 생긴 브리즈번 강 한 굽이에 고층 빌딩과 오래된 건물이 섞여 도심을 이루었는데 그 규모도 그리 큰 편은 아니다. 최근에 건축된 고층 건물 안쪽으로 백 년 정도 지난 키 낮은 시청, 카지노 등이 보인다. 이곳 사람들은 오래된 건물에 ‘헤리티지(Heritage)’라는 이름을 붙여 짧은 역사를 보존하려 하는데, 오래된 병원, 학교, 주점 등도 예외가 아니다. 강 건너 사우스뱅크에는 박물관과 공연장과 도서관이 이어져 있고 그 끝에 인근 바다에서 가져온 모래로 조성한 수영장이 개방되어 있다. 걸어서 강 위아래를 보는 데 한나절이면 충분하다. 이 작은 도심을 제외한 곳에서 고층 건물을 찾는 일은 쉽지 않다. 서울의 모습과 다른 모습을 기대했다면 어느 정도 성공한 듯했다.

 

브리즈번 강   

 

클리블랜드 해안가   

 

 

우리는 도심과 멀지 않은 거주지역 맥그리거(MacGregor)에 숙소를 정했다. 오래된 동네라고 했다. 과연 나무들이 굵고 높았다. 보라색 꽃이 화려하게 피는 자카란다라는 나무도 있었다. 나무를 배경으로 한층 키를 낮춘 구름과 한층 색이 뚜렷한 하늘이 인간을 육박했다. 인간이 자연의 일부라는 것을 새삼 느끼게 하는 넓은 하늘이다. 좁은 하늘과 인간 사이를 가르며 새들이 날았다. 새장 속에서만 보았던 유황앵무나 구관조가 나무를 바꿔가며 지저귀었다. 해가 질 무렵에는 잘 곳을 고르느라, 새벽녘에는 먹이를 찾느라 거리에는 새들의 울음이 가득 찬다. 호주인의 자연에 대한 애정은 곳곳에서 확인할 수 있다. 입국할 때 흙 묻은 신발까지 단속한다고 비행기 안에서 엄포를 놓더니 새들 또한 한 번도 위협을 받은 적이 없다는 듯 사람에게 무관심했다. 한국에서 찾기 힘든 따오기가 서울의 비둘기처럼 먹이를 찾아 도시 골목을 어슬렁거리고 칠면조가 노점 테이블에 앉은 사람들 사이를 비집고 다닌다. 심지어 파리나 모기 등의 곤충까지도 동작이 굼떴다.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니 특히 역사학자에게는 브리즈번이 심심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18세기 후반 유럽에서 사람들이 이주하기 전까지 원주민이 이곳에 자연과 어울리며 살았다 한다. 현재 원주민의 문화는 박물관 전시의 많은 부분을 차지하고 건물 벽화나 문화 상품으로 재현될 만큼 보호와 존중의 대상이지만 역사의 일부분이라기보다는 자연의 일부분으로 대우를 받는 것 같았다. 많은 곳에서 역사의 시간이 여기에서는 자연의 시간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골드코스트 해안    

 

브리즈번을 대표하는 자연은 무엇보다 바다다. 브리즈번은 웰링턴 포인트나 클리블랜드 등의 곶과 만이 있어 평화로운 분위기의 바다를 곳곳에서 볼 수 있다. 사람들은 커다란 고무나무 밑 의자에서 책을 읽거나 개와 산책하거나 바다에서 수영을 한다. 또한 브리즈번을 둘러싼 두 개의 큰 섬 모레톤과 노스 스트래드브로크는 명사십리보다 더 긴 백사장을 지니고 있어 지역 사람들이 페리를 타고 자주 들르는 명소이다. 모레톤 해안가에는 수 척의 난파선까지 있어 스노클링하는 데에도 적합하다. 무엇보다 마라톤 코스만큼 긴 백사장에 끊임없이 파도가 밀려와 ‘서퍼스 파라다이스’라 이름 붙여진 골드코스트와 백사장이 골드코스트보다 두 배 더 긴 선샤인코스트가 브리즈번 위아래로 펼쳐져 있다. 모두에게 브리즈번은 휴일의 길목이 된다.

레드클리프도 브리즈번의 해안가 마을 중 하나이다. 물이 탁하고 거세지만 전형적인 관광지의 모습을 하고 있다. 보행로에는 1970년대 활동한 세계적인 밴드 비지스를 기리는 악보, 기타, 인물 형상의 조형물이 여기저기 설치되어 있다. , , 등 당대 유행을 정확히 파악하고 빠르게 반영한 삼형제 밴드 비지스가 바로 여기에서 결성되었다는 것이다. 사실 이들은 영국 출신이다. 유명세를 얻은 것도 다시 영국으로 건너간 뒤였다. 관광 상품화를 위해 작은 인연이 부풀려졌다는 생각이 들지는 않았다. 소박하게 조성된 이 거리도 브리즈번의 삶을 반영하는 듯했다. 호주 이민의 역사는 2차 세계 대전 이후 정점을 찍었고 비지스 삼형제 가족도 이때 호주로 이민왔다가 가능성을 찾아 다시 떠났던 것이다. 호주의 또 다른 전설적인 밴드 AC/DC도 스코틀랜드 출신인 점을 떠올려보면 이와 같은 특성은 더욱 명확해진다. 호주의 역사 자체가 이민의 역사인 점을 고려하면 이들은 행보는 오히려 전형적인 호주의 삶을 떠올리게 한다.

 

비지스와 레드클리프    

 

예전에는 호주의 연관어로 ‘백호주의(白濠主義)’가 있었다. 실제 호주에서 실시했던 비백인(非白人) 이민 제한 정책으로 유색 인종에 대한 편견을 상징하는 말이었다. 브리즈번보다 더 작은 지역에서는 그 잔재를 찾을 수 있을지 모르겠다. 그러나 적어도 브리즈번의 경우 그런 태도를 보이면 큰일 날 정도로 사람들의 인종, 외양, 국적이 다양하다. 우리 동네만 해도 그렇다. 우리가 빌린 집의 전 주인은 프랑스 출신의 크리스틴이고, 한 번도 보지 못한 지금 집주인은 왕 씨 성을 가진 중국인이다. 앞집에는 여든 넘은 벨 할머니가 홀로 산다. 문패 다는 위치에 ‘Kythera(키티라)’라 적혀 있는데, 그녀의 그리스 고향 섬 이름이었다. 남편을 하늘로 보내고 혼자 씩씩하게 살아가는 그녀의 자녀들은 호주 여기저기에 산다. 우리 옆집은 뉴질랜드에서 이사 온 치과의사 제프리 가족이다. 노모와 함께 사는 그들은 ‘사람보다 양이 더 많이 보인다’는 뉴질랜드와 ‘연금 보험 신청 절차가 까다로운’ 호주의 차이에 대해 유쾌하게 늘어놓는다. 그 옆집에 사는 독일 출신 엘레나는 주로 가드닝 옷을 입고 다니며 마을 여기저기 마치 통장처럼 바쁘다. 건너편 집은 중국인 가족이 사는데 인사하면 수줍은 듯 집으로 들어가 아직 통성명을 못 했다. 그 옆집은 인도인들이 바쁘게 오가며 산다. 호주에서 태어난 사람은 없다. 같은 나라 사람도 없다. 이들은 이 평화로운 거리를 유지하며 마을을 공유한다.

 

유니섹스 화장실    

브리즈번 사람들은 서로의 다름을 존중하며 삶을 꾸려가는 듯했다. 여유를 가지고 서로 존중하는 모습 자체가 도시의 특성처럼 여겨질 정도이다. 건널목 앞에서는 사람이 서 있기만 하더라도 차가 멈춘다. 차를 보내고 건너려는 사람에게는 사실 당혹스럽다. 그렇게 멈추는 게 부담되어 한 걸음 물러나 딴청을 피워도 사정은 마찬가지다. 처음에는 낯설었는데 이제는 그러려니 하고 운전자에게 인사하며 길을 건넌다. 곳곳에 보이는 수많은 장애인은 어떤가. 세기 바쁠 정도로 그 수가 많다. 이 나라만 장애인이 유독 많은 것은 아닐 것이다. 휠체어를 탄 사람

이 버스를 타려 하면 기사는 운전석에서 나와 버스 앞문과 보도 연석 사이를 널빤지 통로로 잇는다. 거동이 불편한 사람 옆에는 가족이 아닌 그 역할을 전문적으로 수행하는 듯한 이가 함께 쇼핑을 하고 있다. 곳곳에 NDIS(National Disability Insurance Scheme, 국가장애보험제도) 사무실과 마크가 보인다. 익숙할 만큼 장애인을 지원하고 함께 살아가는 일이 여기선 중요하다. 일주일에 한 번씩 정해진 시간 일군의 장애인이 공립 수영장에서 레인 두 줄을 빌려 수영 수업을 받는다.

브리즈번 도심의 어느 중고서점

차별이 없는 것은 공공 화장실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예전에 서울 시장 선거에 나온 한 후보자가 공공 화장실에 성소수자 공간을 만들겠다는 공약을 내걸어 웃음거리가 된 적이 있다. 조롱에는 성향별로 만들면 끝이 없지 않겠냐는 뜻이 담겼을 것이다. 이곳에서는 ‘가족’ ‘장애인’ 공간에 ‘유니섹스’가 병기되어 이미 운용되고 있었다. 공존의 문화가 브리즈번 그리고 호주의 역사를 형성하는 중이었다.

전쟁 전 기회가 생겨 우크라이나에 방문했을 때 공원에서 현지 학생들이 한국 아이돌 그룹의 음악을 틀고 춤 연습하는 것을 보며 속으로 놀랐었다. 지금은 BTS, 블랙핑크뿐만 아니라 세븐틴, 뉴진스 등이 가세하며 그때보다 한국대중문화의 영향력이 더 커졌다고 할 수 있다. 한국은 잘 모른다는 표정을 짓거나 뉴스에서 북한 소식만 접했다는 호주 이웃의 말을 들었을 때 당황했던 것도 그때의 기억 때문이다. 물론 대형 쇼핑몰에서는 자주 한국 노래를 들을 수 있다. 내가 방문학자라는 이름으로 연구를 진행하는 퀸즐랜드대학에서도 한국어 수업은 코비드 이전보다는 수가 줄었지만 관심을 가지고 수강하는 학생이 많다고 한다. 하지만 내 둘레에서 확인할 수 있는 한국에 대한 관심은 차분한 편이다. 대체로 이들은 유행에 둔감해 보인다. 부직포 장바구니를 가방 대신 들고 다니고 형광색 작업복을 휴일에도 입고 다닌다. 도색이 벗겨진 오래된 차를 보는 것은 늘 있는 일이다. 이를 촌스럽다고 여길 수 있으나 나는 거기에서 일종의 여유를 느낀다. 풍족한 자연환경과 모든 직업에 대한 존중에서 비롯된 여유. 적어도 내게는 이러한 점이 자신과 가족 그리고 이웃에게 집중하는 모습의 한 단면으로 다가왔다.

처음에는 풍경에 감탄하고, 이후에는 낯선 동물과 식물에 빠져들고, 조금 더 지나서는 사람에 관심이 갔던 것 같다. 드넓은 하늘과 끊임없이 밀려오는 파도, 굼뜨고 평화로운 동물들, 다양한 나라 출신의 이웃들, 그리고 장애인들, 성소수자들이 공존하는 곳에 끼어들어 얼마간 시간을 보내면서 나도 그 속의 일원이 된 듯했다. 착각이라는 생각이 든 것은 내가 돌보는 잔디밭 위에서였다. 막 이곳에 도착해서 집을 빌릴 때 부동산 관리인은 주거인에게 마당 잔디밭을 깨끗하게 유지할 책임과 의무가 있다고 강조했다. 주로 아파트에서 살았던지라 꽤나 부담스러웠다. 고장이 나면 감당을 못하는 전동 말고 어디가 고장 났는지 살펴볼 수 있는 수동 잔디 깎기를 들였다. 전동만큼 짧게 깎지 못하기 때문에 자주 깎을 수밖에 없었다. 덕분에 마당을 자주 살피게 되었다.

잔디가 죽어 구멍이 생기면 다른 잔디가 발을 뻗도록 주위의 잡초를 뽑는다. 미덥지 못하면 잔디 씨를 구해 뿌렸다. 가문 날에는 빗물 저장 탱크가 바닥나도록 물을 뿌리고 바람 부는 날에는 떨어진 낙엽을 주웠다. 잔디밭은 잔디와 잡초가 영역 싸움을 하고, 개미와 지렁이가 치열하게 터전을 일구고, 매일 새들이 날아와 이들을 쪼아 먹는 전장이었다. 그러다 장맛비가 그친 날 아침 어느 정도 구멍이 메꿔진 잔디밭을 보니 휴일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평일이 지나고 주말이 찾아온 듯했다. 전쟁이 끝나고 평화가 찾아온 듯했다. 평화를 이끈 데에 나의 몫이 있는 것 같았다. 처음의 부담감은 점차 자신감으로 바뀌었다.

이런 생각이 오만하다고 느낀 것은 얼마 지나지 않아서였다. 비 온 다음 날 아침 잔디밭 한쪽 구석에 파리가 들끓는 것이 보였다. 하얀 배를 드러낸 두꺼비가 멀리서 보였고 악취를 희미하게 맡을 수 있었다. 냄새도 그렇고 물컹한 촉감도 그렇고 바로 치우기가 꺼려졌다. 말라비틀어질 때까지 며칠을 기다렸다가 주검을 수습한 뒤에 보니 그 자리의 잔디가 죽어 새로운 구멍이 생겼다. 다음 차례는 블루텅 도마뱀이었다. 한 달 정도 뒤 잔디밭의 다른 구석에 팔뚝만 한 도마뱀이 미동도 없이 누워 있었다. 또 며칠을 기다려 수습하러 가보니 이번에는 자취도 없이 사라졌다. 큰 새가 먹이로 집어 갔나. 아니면 탈피하고 남은 껍질이었나. 그 자리에도 여지없이 구멍이 났다. 마음 한 곳에 있을 수밖에 없는 어쩌지 못하는 구멍을 확인하면서 나는 다시 한시적 방문객의 삶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

김종훈
시인, 평론가, 고려대학교 국어국문학과 교수, 1972년생
저서 『시적인 것의 귀환』 『정밀한 시 읽기』 『미래의 서정에게』 『한국 근대 서정시의 기원과 형성』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