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종로 청진동에서 발굴한 조선 전기 백자 항아리
- 종로 청진동에서 발굴한 조선 전기 백자 항아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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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는 지금까지 발굴한 유물 가운데 제일 비싼 것이 무엇이었냐는 질문을 자주 받는다. 대개는 발굴조사 현장에서 접하는 유물은 모두 귀중한 문화유산이라서 값을 매길 수 없다고만 답할 뿐이다. 실제 필자가 발굴 현장에서 조사하는 유물은 대부분 깨진 도자기 조각인지라 금전적 가치를 논하기 어려운 것들이다.
(사진 1)은 서울 종로 공평동에 자리하는 조선 시대 유적의 배수로 모습이다. 배수로의 구조를 확인하기 위해서 단면을 조사해 보니, 배수로 내부에 버려진 도자기와 기와 파편이 가득 차 있었다. 조선 사람들은 다양한 쓰레기를 배수로에 버렸을 것이지만, 도자기처럼 썩지 않는 것들 위주로 남아 유물이 된 것이다. 그렇다고 필자가 늘 버려진 도자기만 발굴하는 것은 아니다. 때로는 누군가 고이 파묻어 둔 귀한 유물을 마주할 때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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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청진동 출토 백자 항아리> 역시 누군가 훗날 다시 꺼내려고 땅속에 잘 숨겨두었던 그릇이다(사진 2). 세 점의 항아리는 거의 온전한 형태를 유지하고 있다(사진 3, 4, 5). 이렇게 위아래로 높이가 높고, 두툼한 주둥이가 밖으로 벌어져 있으며, 넓은 어깨에서 그릇 아래로 갈수록 동체가 좁아지는 모양의 백자 항아리는 15세기 말에서 16세기에 주로 유행했던 것으로 이해되고 있다.
백자 항아리들은 광화문 광장 동쪽의 청진동(淸進洞)에서 출토되었다(사진 6). 지금의 KT 빌딩을 짓기 전에 조선 시대 유적을 발굴했고, 그 과정에 유물을 확인한 것이다. 청진동은 경복궁의 남쪽에 자리한다. 서쪽으로는 육조(六曹)의 건물들이 들어선 행정의 중심지가 있었고, 남쪽으로는 전국 최대의 시장이었던 시전행랑(市廛行廊)이 동서로 길게 이어져 있었다. 청진동은 조선 시대 왕족과 양반 관료들이 주로 살던 곳으로 그야말로 한양의 핵심이었다. 지금도 KT 빌딩 주변에는 종로구청이 있고, 교보문고, 그랑서울, D-타워 등 많은 사람이 오가는 커다란 고층 건물들이 즐비하다.
백자 항아리들이 출토된 건물지는 형태를 온전하게 갖추지 못했었다. 20세기 이후 콘크리트 건물을 세우기 위해 지하를 파내다 보니 그 자리에 있던 조선 시대 집터는 대부분 사라져 버린 것이다. 다만, 백자 항아리들이 출토된 건물지가 17세기에서 18세기 사이에 만들어졌다는 점은 확인했다. 요컨대, 백자 항아리들은 16세기 무렵에 만들어졌지만, 출토된 건물지는 조선 후기에 해당한다는 것이다. 항아리들은 만든 이후 한참을 사용하다가 위급한 상황을 피하고자 땅속에 묻혔던 모양이다. 그리고 끝내 주인에게 되돌아가지 못했다.
백자 항아리들의 출토 상황을 감안해 보면, 누군가가 집 안마당에 구덩이를 판 후 그 속에 항아리들을 비스듬하게 세워두었던 상황을 짐작할 수 있다. 항아리 안쪽에는 고운 흙을 가득 채우고, 그 주변은 작은 기와 조각들과 나뭇재 등이 섞인 흙으로 메웠다. 항아리를 묻은 사람은 훗날 그릇을 다시 꺼내 쓰려고, 깨지지 않게 최대한 조심스럽게 묻었을 것이다.
조선 시대 항아리는 보통 음식을 담아두거나 옮기는 용도의 그릇이므로, 신분과 상관없이 다양한 계층의 일상에 꼭 필요했다. 항아리는 주로 질그릇으로 불린 도기(陶器)로 만들어 김치나 장을 발효하는데도 긴요하게 쓰였다. 일상에 두루 사용한 그릇인 만
큼 크기와 모양도 다양했다(사진 7, 8). 조선 전기에는 <서울 청진동 출토 백자 항아리>처럼 커다란 항아리를 순백의 견고한 백자로도 만들었다.
백자는 조선 시대를 대표하는 도자기다. 세종(世宗, 재위 1418~1450) 시절부터 백자는 왕실의 그릇으로 자리 잡았으며, 이후 조선 왕실과 사대부는 새하얗고 단단한 그릇인 백자에 매료되어 갔다. 그러나 백자를 제작하기 위해서는 고령토라 불리는 특별하고도 귀한 백토(白土)가 필요했다. 조선 왕실은 밥그릇과 술잔을 비롯하여 다양한 그릇을 백자로 만들려 했지만, 품질이 우수한 백토를 구하는 일은 힘이 들었다. 당시에는 질 좋은 백자를 얻는 일이 지금처럼 쉽지 않았다. 그러므로 백자 가운데서도 큼지막한 항아리는 더욱 소중한 물건으로 대접받았을 것이다.
백자 항아리는 보통 동체가 둥근 ‘원호(圓壺)’와 위아래로 길쭉한 ‘입호(立壺)’로 나뉜다. 달항아리가 원호라면, <서울 청진동 출토 백자 항아리>는 입호에 해당한다. 질그릇 항아리는 보통 둥근 밑판을 우선 만들고 그 위로 흙판이나 흙띠를 차곡차곡 이어 올리는 방식으로 몸통을 제작하지만, 백자 항아리는 물레에서 큰 사발 모양의 동체 윗부분과 아랫부분을 따로 빚어낸 다음에 이어 붙이는 방식으로 만든다. 이러한 제작 방식을 조선 후기 달항아리만의 특징이라고도 생각하지만, 위아래 동체를 따로 만든 다음에 이어 붙이는 방식은 조선 전기에도 활용했었고, 이웃 나라 중국에서도 오랫동안 같은 방식으로 항아리를 제작해왔다.
조선 시대에 질그릇이 아니라 새하얀 백자로 만든 커다란 항아리는 값비싼 그릇이었다. 이러한 백자를 만들려면 우수한 백토가 있어야만 했고, 그런 원료를 확보할 수 있었던 곳이 바로 경기도 광주에 자리했던 관요(官窯)였다. 관요에서 만든 준수한 품질의 백자는 주로 궁궐을 중심으로 한양에 살았던 일부 사대부 관료들이 사용했던 그릇이었다.
<서울 청진동 출토 백자 항아리> 역시 관요에서 만든 귀한 그릇이었던 만큼 한양에서도 한복판에 살던 누군가의 집에 오래도록 자리했다가, 난리를 피하고자 땅속에 묻혔던 것으로 추정해 볼 수 있다.
서울 시내에서 조선 시대 유적을 조사하다 보면 누군가 땅을 파고 여러 점의 그릇을 함께 묻어둔 유물을 종종 마주한다(사진 9). 이런 유물은 언제, 누가 땅에 묻은 것인지 정확하게 알 수 없지만 당시에도 가치 있는 물건이었으니까 땅에 묻어 두었던 것임은 짐작할 수 있다. 전란으로 급히 피난을 떠나는 사람에게 옮기기 어려운 물건은 마당에 묻는 것이 최선이었을 것이다. 조선 시대 양반 오희문(吳希文, 1539~1613)이 기록한 임진왜란(壬辰倭亂) 시절의 일기인 『쇄미록(瑣尾錄)』에도 왜적을 피해 급히 달아나기 전에 챙길 수 없던 세간살이를 땅에 파묻는 대목이 등장한다.
청진동에서 발굴한 항아리들과 똑같이 생긴 국립중앙박물관 소장의 <백자 항아리> 역시 서울 중구 남대문로에서 지하철 공사를 진행하던 중에 발견되었다고 한다. 이 항아리는 발굴조사로 파악한 것이 아니고 공사 중에 신고된 것이므로 정확한 출토 상황을 알 수 없지만, 조선 시대 한양에 살던 누군가가 땅속에 묻어둔 것일 가능성이 크다(사진 10).
국립중앙박물관의 <백자 항아리>처럼 여러 박물관이 소장한 대다수 조선 전기 백자 항아리는 어디서 쓰였던 물건인지 출처를 분명하게 파악할 수 없다. 그러나 청진동에서 발굴한 백자 항아리들은 출토지가 명확한 유물이다.
조선 전기 순백의 백자 항아리는 온전한 형태로 남아 있는 사례가 매우 적다. 청진동에서 발굴한 백자 항아리들처럼 유물의 예술적 완성도가 높은 경우는 더욱 희소하다. 이러한 상황을 종합적으로 고려한 결과, 청진동에서 발굴한 백자 항아리들은 출토지의 이름을 더해 <보물 제1905호 서울 청진동 출토 백자 항아리>라는 이름의 지정문화재가 된 것이다.
지금도 서울 시내 어딘가에는 조선 시대에 묻어둔 귀중한 유물들이 잠들어 있다. 그중에는 <서울 청진동 출토 백자 항아리>처럼 우리 시대 보물로 여겨질 만한 소중한 문화유산도 여럿일 것이다. 이러한 문화유산의 보전은 필자 같은 발굴조사 요원들이 오늘도 현장의 흙더미 속에서 꾸준히 연구를 이어가는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