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정적 순간
내게 첫 시가 왔던 순간

  • 결정적 순간
  • 2024년 봄호 (통권 91호)
내게 첫 시가 왔던 순간

편집자 주 ㅣ 이번호부터 ‘결정적 순간’ 코너를 새로 선보입니다. 이 코너는 필자의 인생에 결정적인 영향을 끼친 계기, 순간, 장면에 관한 이야기를 담고 있습니다. 문화예술계 전반에 걸친 다양한 필자의 소중한 기억과 경험을 소개하고자 합니다.

 

어린 시절 여름밤이면 머리 위에 뜬 별들을 하염없이 바라보곤 했다. 그 시절 한 가지 궁금한 것은 내가 어디에서 왔는가라는 것이다. 내가 하늘의 별들 중 하나에서 왔다고 믿었지만 확신할 수 없는 일이었다. 우주의 모든 것들, 즉 광자, 입자, 소립자는 물론이거니와 쇠기러기, 고양이, 밭쥐, 박새, 앵두나무, 바다, 사막, 별들, 성단, 은하계… 이것들은 상호 영향을 주고받으며 연결되어 있다. 우주 안에서 실재들은 상호 작용을 하며 존재한다고, 양자역학은 말한다. 나는 소년의 본능과 직관으로 그걸 어렴풋이 느꼈다. 나는 광활한 우주의 일부이고, 우주에서는 어떤 일도 우연히 발생하는 경우는 없다. 모든 일들은 우주의 기원에 그 뿌리가 닿아 있고, 하찮고 사소한 사건들조차도 어떤 필연성 속에서 일어난다는 뜻이다.

스물세 살 난 청년이 북해에 있는 헬골란트 섬의 바위에 서서 거칠게 뒤채는 바다를 바라보며 일출을 기다렸다.

1925년 여름의 일이다. “인류가 엿본 자연의 가장 아름다운 비밀 중 하나”를 엿보고 격렬한 기쁨과 흥분을 가라앉히던 그 청년이 훗날 양자역학을 발전시킨 공로로 노벨물리학상을 받은 베르너 하이젠베르크다. 이것은 하이젠베르크에게 운명의 변곡점이 될 만한 사건이 일어나는 순간이었으리라. 내가 우주의 먼지로 떠돌다가 한반도 중부의 어느 시골집 안방에서 어리둥절한 채로 첫울음을 터뜨리던 순간도 그중 하나일 테다. 내 탄생을 주관한 천사여, 침묵을 깨고 말하라, 과연 나는 기쁨과 웃음으로 만들어진 존재인가? 시골 국민학교 입학식 날 낯선 무리 속에서 소년은 초조하고 불안했다. 집에 돌아가고 싶었다. 그 뒤로 무수히 겪은 결정적 순간들이 나를 빚었을 테다. 그 순간들은 미지의 소용돌이 속으로 밀려들어간다는 예고이자 무서움의 시작이었을 테다.

15세 때 일어난 일이다. 우연히 「겨울」이란 제목으로 시를 써서 학생잡지 《학원》에 투고했다. 나는 왜 시를 쓰고, 이걸 잡지사에 보낼 생각을 했을까? 오래전 일이라 기억이 나지 않는다. 그 시가 뭐 대단한 것은 아니다. 평범한 중학생이 제 안에서 싹을 내민 시를 끄집어냈다는 게 놀랍다면 놀라운 일이다. 이 시가 활자화되어 잡지에 실렸다. 이것은 연약하고 순진무구한 나를 스쳐간 별들의 순간이 아니었을까? 그 잡지의 표지가 닳도록 읽고 또 읽었다. 그 뒤로 연이어 시를 발표하고, 이듬해 학원문학상 공모에서 우수작 1석을 수상했다. 미술반에서 데생을 하고 수채화를 그리면서도 재능에 대해 회의적이던 나는 학원문학상을 계기로 그림을 포기했다. 나는 자연스럽게 문학의 길로 들어섰다.

아마도 그날은 여느 날과 다를 게 없는 평범한 날이었을 테다. 종일 집안은 비어 있었다. 나는 지리부도를 들여다보며 세계 각국의 수도를 외는 일도 지루해 하품을 두어 번 했을 테다. 그리고 백지에 시라고 생각한 것을 끼적이었을 테다. 이렇듯 결정적인 순간은 평범한 날의 표면을 꿰뚫고 나온다. 재 속에서 불멸의 새가 솟구치듯이. 이것은 순수한 자립, 의지와 열망의 분출이다. 그 뒤로 시집을 찾아 읽고, 시 쓰기의 즐거움에 빠져들었다. 인생의 결정적 순간은 밋밋함과 숱한 실패의 누적을 뚫고 나온다. 어느 새벽 제 팔에 마약주사를 찌르고 사라지던 골목 안 남자의 뒷모습, 어린 새의 첫 날갯짓, 알알이 홍보석으로 꽉 차 있던 석류 열매, 뱀의 아가리에 몸통 반쯤이 삼켜진 개구리, 검은 구름들이 품은 벼락과 천둥들, 태풍 경보가 내려진 날 해안가 점포들을 집어삼킬 듯 거칠게 포효하며 부서지던 파도들, 낯선 여행지에서 스쳐간 젊은 여자의 미소… 그것들은 단 한 번만으로도 우리의 내면 형질을 통째로 바꾼다. 그 이전과 이후로 우리는 다른 사람이 되고 마는 것이다. 날마다 식후 혈당을 재고, 새벽에 사과 한 알을 먹으며, 계면활성제가 함유된 치약과 형광물질이 도포된 두루마리 휴지를 사용하는 보통의 인생은 막을 내린다. 그토록 흔한 존재 중 하나라도 이젠 남들과 같은 방식으로 생각하고, 남들과 같이 금리를 따지고 사유재산을 불리며 세속의 출세를 구하며 아등바등 살기는 글러버린 것이다.

첫 시가 왔을 때 그게 결정적 순간이었지만 내가 진짜 시인이라는 증거는 없다. 놀라운 촉으로 지구의 중력을 감지하고, 볼 수 없는 것을 보고, 가청 능력 밖에 있는 소리를 들으며, 한 송이 들꽃에서 우주의 파동을 느끼는 게 진짜 시인이 아닌가? 애초 기쁨과 웃음으로 만들어진 인간이라도 늙어 가면서 온갖 거짓말과 비열함으로 누추해진다. 그 누추함을 벗는 방식으로 시를 업으로 삼았지만 그건 인생에 보탬이 될 만한 일이었던가? 과연 내게 시간이 남아 있을까? 스물 몇 살 때 우이동 골짜기에 있는 무연고 묘지 근처에서 한나절을 뒹굴다가 돌아왔다. 시가 인생을 망쳤을 거라는 의심을 떨치지 못했다. 하지만 시가 내 정체성을 흔든 건 부정할 수가 없다. 시를 모르던 그 캄캄한 시간 이전으로 나를 되돌리는 일은 불가능하다. 나는 이미 늦어버린 것이다.

장석주
시인, 평론가, 1955년생
저서 『은유의 힘』 『나를 살리는 글쓰기』 『어느 날 니체가 내 삶을 흔들었다』, 시선집 『저게 저절로 붉어질 리는 없다』, 산문집 『가만히 혼자 웃고 싶은 오후』 『내 몫의 사랑을 탕진하고 지금 당신을 만나』 『호젓한 시간의 만에서』 『에밀 시오랑을 읽는 오후』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