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작후기
여름의 암호

- 시집 『투명이 우리를 가려준다는 믿음』

  • 창작후기
  • 2024년 봄호 (통권 91호)
여름의 암호

- 시집 『투명이 우리를 가려준다는 믿음』

 

여름은 어떻게 기억되는가. 지난 몇 년을 돌아보면 나에게 여름은 시집을 묶고 출판을 하고 행사를 하는 것들로 이루어진다. 알 수 없는 이유로 시를 썼고 묶고 보니 온통 서늘하고 습한 여름이었다. 이 알 수 없음을 장황하게 글로 써 본 적이 있다. 왜 여름인지, 왜 시인지. 제법 깊숙이 내려가 쓴 글이었다. 나름 이번 시집을 낸 마음이 담겨 있는 것 같아 문서를 찾아 열어보려 했지만 무슨 까닭인지 나는 그 문서에 암호를 걸어놓았고 지금 나는 그 암호를 몰라 닫힌 문 앞에 서 있다.

생년월일이나 도어록 번호 같은 것들을 넣어 보았지만 열리지 않는다. 누가 본다고, 누가 보면 또 어떻다고 나는 암호로 그 글을 가두려고 했을까. 조바심이 일어 암호 창에 이런저런 단어를 넣어 본다. 청량이나 망우 같은 혹은 간유리나 사이클, 밤 같은 이번 시집의 키워드를 넣어 보지만 문서는 열리지 않는다. 나는 나의 여름에 들어가지 못한다. 들어갈 수 없다. 어떤 여름이었을까. 내가 가두어 놓은 여름은. 여름을 되짚다 보면 암호의 힌트가 나오지 않을까. 천천히 가장 강력했던 여름의 기억을 찾아본다.

남들이 모두 가장 더운 여름이었다고 말하는 94년 여름이 내겐 가장 추운 여름이었다. 마음이 추웠다거나 그런 이야기는 아니고 진짜 추웠다. 대형 에어컨 아래서 오들오들 떨며 강의를 듣고 도시락을 먹고 자율학습을 하고 11시 넘어 더 추운 독서실로 이동하는 재수생이었기 때문이다. 이 과정에서 실제 온도에 접하는 시간이 얼마 되지 않아 도대체 얼마나 덥다는 것인지 우리만 실감을 못하고 있었다. 우리가 얼마나 추운지 절대로 알 수 없는 곳에서, 정확히는 제기동 대우학원 종합반에서 보낸 1994년 여름은 정말 추웠다.

대우학원 종합반 302호에는 재수생뿐만 아니라 삼수 사수에 예비역까지 다양한 수험생들로 가득했다. 사수생 혜령 언니는 상담 선생님보다 입시에 밝았다. 대우학원 지박령이란 별명처럼 재수와 삼수 시절을 대우학원에서 보냈기에 입시상담 말고도 자잘한 팁들을 알려주며 입시생을 돌봐주었는데 정작 자기 입시에는 별 뜻이 없어 보였다. 그냥 있다 보면 있게 되는 시간들을 견디듯 혜령 언니는 공부를 안 하는 것도 아니고 하는 것도 아닌 이상한 경지에서, 조바심치는 어린 재수생들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여름엔 춥고 겨울엔 더운, 세상과는 다른 질서로 움직이면서 세상의 질서에 들어가려 준비 중인 곳에서 무엇이든 되려고 이를 악무는 사람들과 아니 뭐 그렇게까지? 기우뚱하는 사람들이 섞여 만들어내던 묘한 청량감이 대우학원엔 있었다. 소속감 없는 상태가 오래 지속되지는 않을 거란 낙관이 있었다. 어리거나 젊었기 때문에. 그 여름을 나는 내내 필사했다. 공부하는 틈틈이 좋아하는 시들을 읽고 필사하고 필사한 원고지를 문제집 커버로 썼다. 마음을 잡기 위한 나름의 방식이었는데 매우 좋지 않은 방식이었다. 시는 마음을 이리저리 데리고 다니다 이상한 곳에 내다 버렸다. 나는 마구 흔들리며, 극단의 선택을 오가며 그 시절을 견디고 있었는데 생각해보면 그때가 가장 시와 가까이 있던 여름이 아니었나 싶다.

어느 한 시절이 표백되고 냉동된 채로 머물러 있기를 바라는 것은 아니다. 기억은 그냥 냉동실 문을 열었는데 마침 냉동 피자가 있어 데워 먹는 것처럼, 왜인지 모르게 찾아오는 것이기에. 오늘은 대우학원이 찾아왔을 뿐. 명랑하게 반짝이는 커서, 혹시 302호인가 싶어 넣어 보지만 아니다. 대우학원도 아니다. 그럼 무엇일까. 들어가 볼 수 없는, 열어볼 수 없는 마음 앞에서 오래 좌절했던 기억이 있다.

내가 쓴 암호도 기억하지 못하면서 다른 사람의 암호를 풀어 들여다보려 했던 마음이 우습기도 하지만 그 알 수 없음에 다가가는 것이 시 쓰기가 아닐까. 매번의 여름이 아닐까. 풀 수 없는 여름 속으로 셔츠가 등에 달라붙도록 땀을 흘리며 걸어 들어갔다. 돌아보면 돌연 서늘해져 부르르 몸을 떨었다.

 

이번 시집을 내고 그랬다.

※ 필자의 시집 『투명이 우리를 가려준다는 믿음』은 재단의 대산창작기금을 받아 2023년 아침달 출판사에서 출판되었다.

김영미
시인, 1975년생
시집 『투명이 우리를 가려준다는 믿음』 『맑고 높은 나의 이마』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