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설 리뷰

  • 2024년 봄호 (통권 91호)
폭설 리뷰

(상)

크리스마스 영화를 보고 있다네, 너무 탓하진 말게, 난 이미 충분히 어리니까!

소년은 엄마가 모자에 새겨 준 요정의 나라 엘프헬름으로 가지, 믿어야만 보인다는 이상한 나라

그러나 엘프헬름에도 레지스탕스들이 있고, 저항하는 이들의 아지트가 있고 다락방 같은 공회당이 있다네

공회당 같은 다락방, 다락방 같은 공회당(궁금하신 분들은 영화를 볼 것)에 모여 춤추는 사람들
그들의 음악이, 율동이, 삶이고 축제고 시겠지

어떤 축제에 대한 기억, 그 기억만으로도 우리의 삶은 지속될 테니까

그런데 뜬금없지만, 엘프헬름의 신문 이름은 참으로 재미있구나, <흰 눈 일보>라니!(난 나중에 뭔가를 낸다면 ‘폭설 리뷰’로 할까 해)

오늘은 여기까지 쓰겠네, 나도 아직 뒷부분은 보지 못했거든

뒷부분을 마저 보고 나면 이 시를 마무리하겠네

흰 눈 위에 이 시를 발표하면

그대가 그때 마저 읽어주게


추운 날씨에 항상 건강하길, 안녕

 

(중)

소년은 엘프헬름 왕국의 인정을 받고

인간과 요정 세계를 화해시키고

요정 세계에서 가져온 선물들을 인간 세계에 나눠 주지


그리하여 인간들이 희망을 꿈꾸게 됐다는 블라블라, 뭐 그런 이야기, 해피엔딩으로 끝나는 것 같은 이야기(그런데 소년을 위해 희생한 소년의 아버지는 어떻게 되었을까?)

v (속편을 띡기 위해 끝까디 아바이 이야기를 하지 않는 고조, 속 보이는 녕화 아니같니, ‘크리스마스’라 불리는 아새끼 이야기였음네?


근데 ‘크리스마스’가 무스기 말임둥?


갱개, 지슬, 금감자랑 기냥 찐 감자 먹고 보기에 좋았음둥?)


뭐, 감자 몇 알 삶아 놓고 겨울밤에 보기에 좋았지

흰 눈 위에 시를 쓰기 좋은 밤이었지


(하)

흰 눈은 내려와 소복이 쌓였다

너의 이름을 무어라 부르랴

너는 딱히 뭐라 불러줄 이름이 없구나

이름 없는 것들아, 왜 내게로 오는 것이냐

그저 눈 위에 두 팔 벌리고 망연히 서 있을 뿐

나도 나의 이름을 잊었네라

늦게 온 눈송이여

네 이름을 무어라 부르랴

간밤에 너를 기다리다

나는 끝내 너를 잊고 너의 이름을 잊고

한 잔 술에 곤히 잠들었네라

아침이면 이렇게 불현듯 찾아와

불을 켠 듯 눈부시게 빛나는 너의 마음을

너의 살결을 무어라 부르랴

나는 너를 잊고

너의 이름을 잊고

끝내 우리의 이름을 잊었네라


홍적세의 하늘 아래


길은 사도행전처럼 펼쳐져 있다

아무도 가지 않은 길을 몇 개의 구름들이

흘러갔다, 열린 허공의 계단을 밟으며

새들은 수직으로 비상해

허공의 끝에서 죽는다


비늘을 다 털어 낸 겨울 산들이

게으른 용처럼 엎드려 있다

한 천년쯤 이무기로 더 산들 어떠랴

꿈을 덜어낸 산하가

바야흐로 홍적세로 접어들 무렵이다


누군가는 천천히 홍적세를 산책하고

누군가는 출출해 쌀을 씻어 안치고

누군가는 되새떼처럼 총총

날개를 파닥이며 퇴근하는


홍적세의 노을 무렵이다

박정대
시인, 1965년생
시집 『단편들』 『내 청춘의 격렬비열도엔 아직도 음악 같은 눈이 내리지』 『아무르 기타』 『사랑과 열병의 화학적 근원』 『삶이라는 직업』 『모든 가능성의 거리』 『체 게바라 만세』 『그녀에서 영원까지』 『불란서 고아의 지도』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