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문학의 순간들
해체시와 쇠죽가마의 혈투, 그리고 김종삼

  • 우리 문학의 순간들
  • 2022년 봄호 (통권 83호)
해체시와 쇠죽가마의 혈투, 그리고 김종삼

-코피가 터져서 살았네요.

응급실 의사가 그렇게 진단을 내렸다고 했다. 머릿속 내출혈이 아니라 머리 밖 외출혈이 되는 바람에 구사일생의 장본인이 되었다는 것이었다. 사지를 축 늘어뜨린 채로 동석했던 시인의 등에 업혀서, 당시에는 혜화동 로터리에 자리 잡았던 고려대학교 병원 응급실로 옮겨진 김영승 시인은 그렇게 격렬한 생의 고비를 넘어서고 있었다.

그로부터 며칠 후 어느 일간지의 문화면에는 문인 폭력사건의 전말이 대서특필되었으며, 1990년대 초반에 벌어진 ‘쇠죽가마의 혈투’는 문단뿐만 아니라 세상에 널리 회자되었다. 그런데 사회면이 아니라 문화면이라니, 그런 시절이었다. 문화예술계의 웬만한 사건사고가 기담이나 미담으로 둔갑하거나 사적인 고소고발은 좀처럼 성립이 되지 않던 오랜 관행 탓이었다. 맥주병으로 머리를 가격한 폭력사건의 가해자는 선배시인인 박남철이었는데, 두 사람 사이의 악연은 몇 년의 세월을 관통하고 있었다. 그 모든 악연이 1980년대의 시단을 휩쓸었던 ‘해체시’의 영향이라고 판단할 수도 있었다.

박남철은 1980년대 전반기에 개화한 해체시의 1세대 대표주자였다. 서구의 후기구조주의를 특징짓는 철학적 개념인 ‘해체’라는 용어는 뜬금없이 어색한 옷을 걸쳐 입은 한국 시학사의 명칭으로 둔갑하여 정치적인 억압이 가장 혹독했던 시대를 우회적으로 풍자하는 효과를 발휘하며 시단과 독자들의 관심을 이끌어냈다. 그런데 황지우, 이성복과 함께 늘 해체시의 선발주자로 거론되었던 박남철은 유감스럽게도 본인이 기대했던 만큼의 시적 성과를 인정받지 못해서인지 늘 불만스런 언행으로 문단을 들썩이게 만들었다. 그는 선후배를 가리지 않고 심야에 불쑥 전화를 넣어서 답변하기 난처한 질문을 던지거나 얼토당토않은 이유를 들먹이며 시비를 걸곤 해서 문단의 기피인물 1호로 낙인이 찍혀버린 ‘만행(蠻行)’의 시인이었다. 그는 마치 “내 시에 대하여 의아해하는 구시대의 독자 놈들에게→차렷, 열중 쉬엇, 차렷”(「독자놈들 길들이기」, 『지상의 인간』)하며 얼차려를 시키듯이 동료 시인들은 물론이거니와 선후배 시인들까지 괴롭혀댔다.

그런 얼차려의 사정권에 김영승이 들어선 것은 1980년대 후반에 「반성」이라는 연작시를 발표하며 그가 1980년대 후반기 해체시의 대표주자로 주목을 받으면서부터였다. 요설은 물론이거니와 과감한 욕설까지 마다하지 않는 어법으로 현실을 풍자하는 김영승의 시적 표현은 박남철의 시적 개성과 공통점을 간직하고 있었는데, 바로 그 점이 박남철의 신경을 곤두서게 만들었던 듯하다. 어쩌면 박남철은 자신이 개척해놓은 시의 영역을 후배시인이 기웃거리며 잠식해 들어온다고 판단했을지도 모른다.

박남철은 일찍이 자신과 같은 이름으로 등단한 강릉 출신의 동갑내기이면서 문단 후배이기도 했던 시인에게 전화를 넣어 다짜고짜로 필명을 바꾸라고 으름장을 넣어서 관철시켰던 전력을 갖고 있었다. 그 바람에 박남철이 본명이었던 그 강릉시인은 졸지에 박세현이라는 필명을 선보이게 되었다. 박남철은 김영승에게도 비록 이름은 상이하나 시세계는 공통점이 많으니 텃세 같은 선배시인의 대접을 요구했을 법하다. 문제는 김영승이 그다지 고분고분한 자세로 박남철의 막무가내식 선배 대접을 수락하지 않은 점이다. 철학을 전공한 영향 탓인지 현학적인 어휘를 동원해가며 오연한 자세로 되받아치는 김영승의 반박은 여지없이 박남철의 부아를 돋우었으니 그로부터 두 시인의 악연은 오랜 기간 동안 지속되었다. 그 악연은 대체로는 전화 통화 수준으로 정리될 때가 많았으나 때로는 함께 참석한 문단의 모임에서 팽팽한 기 싸움으로 전개되어 좌중의 문인들을 긴장하게 만들 때도 있었다. 혜화동 로터리에 자리 잡은 카페 쇠죽가마에서 벌어진 혈투는 그런 기 싸움이 알코올의 상승효과로 절정에 이른 사건이었다.

혈투의 장소가 혜화동이라는 점도 이채롭긴 했다. 1980년대까지 문학인들을 비롯한 예술계 인사들의 모임이나 뒤풀이는 대체로 인사동이나 광화문 인근에서 이루어지는 것이 관례였다. 그런데 1990년대로 접어들면서 젊은 예술가들을 주축으로 동숭동 부근에서 모임을 갖는 일이 잦아지기 시작했다. 동숭동이 문화의 거리로 지정이 되고 많은 문화 소공간들이 탄생하면서 생겨난 부수적 효과였을 것이다. 젊은 문인들이 자주 모임을 갖는 동숭동의 ‘겨울-나무로부터 봄-나무에로’와 혜화동 로터리의 ‘쇠죽가마’라는 카페도 그런 소공간들 중의 하나였다.

쇠죽가마는 출가했다가 환속한 스님 출신 시인인 박중식이 길음동 시장골목에 처음으로 마련했던 ‘함부르크’라는 작은 카페가 확장된 성공사례였다. 길음 시장은 박중식에게 시창작의 이정표를 마련해준 원로시인과의 인연이 비롯된 곳이기도 했었다. 길음 시장에서 마주친 김종삼의 불우와 주취와 여백이 넓은 시세계는 ‘만행(萬行)’을 즐기지 않아서 환속해버린 스님 시인에게 압도적인 영향력을 행사했다. 김종삼 시인이 작고하자 그는 부지런히 발품을 팔아서 경기도 포천 인근에 그 당시로는 흔하지 않던, 제대로 모양을 갖춘 김종삼 시비를 건립하는 일에 혼신의 노력을 경주했으며, 마치 신전을 차리듯 카페 쇠죽가마의 한쪽 벽에는 김종삼의 시작품을 커다란 액자로 표구해서 걸어놓고, 액자 모퉁이에는 김종삼으로부터 하사받은 벙거지 모자를 걸어놓았다.

김종삼의 신전이 차려진 그 자리가 카페 쇠죽가마의 로열박스였는데 바로 그곳에서 박남철과 김영승의 혈투가 벌어졌던 것이다. 맥주병으로 저지른 박남철의 만행을 내려다보는 자리에 걸려있던 김종삼의 작품은 「민간인」이었다. “1947년 봄/심야/황해도 해주의 바다/이남과 이북의 경계선 용당포”, 월남하던 가족의 “울음을 터뜨린 한 영아(嬰兒)를 삼킨 곳”의 “수심(水心)을 모른다”고 탄식한 황해도 출신 실향민 김종삼은 마치 깊이를 헤아릴 수 없는 용당포의 슬픔과 절망을 견디기 위한 듯한 ‘기행(奇行)’을 저지르고 다녔다. 모처럼 어린 딸을 따라간 소풍 길에서 외딴 곳으로 들어가 가슴 위에 돌을 얹어놓고 누워있던 김종삼. 사라진 아버지를 찾아 나선 딸이 납득할 수 없는 그의 자태를 궁금해하자 “몸이 하늘로 날아올라갈 것 같아서”라며 주절거렸던 김종삼. 가슴에 얹었던 그 돌은 분단이 초래한 용당포의 수심 모를 절망과 슬픔의 분신이었을까? 고향에 대한 상실감과 삶의 고독과 가난을 음악과 자신의 몸을 짓누르는 돌멩이의 ‘기행’으로 감당해냈던 그는 자신의 신전 밑에서 남의 몸을 가격하는 후배시인의 맥주병 ‘만행’을 어떻게 받아들였을까? 유감스럽게도 만행의 현장이었던 카페 쇠죽가마는 그로부터 얼마 후에 화재가 나서 해체되어 버렸으며 박남철은 김종삼보다 두 살 아래인 61세의 나이에 세상을 등지고 말았다.

이경호
평론가, 1955년생
저서 『문학과 현실의 원근법』 『문학의 현기증』 『상처학교의 시인』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