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아버지
슬픈 9시

  • 나의 아버지
  • 2022년 봄호 (통권 83호)
슬픈 9시

가은 봉암사 계곡에서의 아버지   

 

학교 다닐 때 나는 한 번도 개근을 한 적이 없다. 일 년에 한두 번은 앓아누워 결석을 하곤 했는데 그럴 때 퇴근하는 아버지 손에는 꼭 복숭아 통조림이 들려 있곤 했다. 이건 아버지의 자상함이었다. 바깥에서 막 들어온 서늘한 손으로 이마를 누를 때 나는 조금 겸연쩍고 많이 좋았다. 아플 때면 은근히 기대하던 통조림, 이후 통조림이 기막힌 은유와 아이러니가 되고 있는 걸 그때는 몰랐다.

아버지의 과보호, 통조림처럼 아버지는 바깥세상으로부터 나를 닫아걸었다. 통조림 속의 복숭아는 복숭아일까 아닐까? 설탕물 속을 맴돌던 나의 시간들은 부유하듯 떠 있었다. 군(郡) 소재지에서 딸 여섯을 둔 아버지의 고충을 모르는 바 아니지만 갇혀 있었던 시간들, 아버지라는 통조림 속에서 내 생은 사육되는 순한 짐승 같았다. 딸자식의 평안을 우선했다지만 바꿔 말하면 그건 아버지의 평안이 아니었을까. 나가지 마라, 절대 남자를 만나지 마라, 허튼소리는 섞지도 마라, 동작을 절제해라. 나는 기질적으로 투쟁이나 전투에 소질이 없으므로 잘 순응하며 칭찬 받는 쪽을 택하고 있었는지 모른다. 그런데 마음 어딘가 아팠고 불편했고 의문스러웠다.

정체성이었을 것이다. 통조림 속의 복숭아처럼 막힌 출구 앞에서 자기를 잃어가고 있는 강박이었다. 명목상 안전을 빙자한 아버지의 과보호는 사랑이었으나 부당하였고 보호였으나 구속이었다는 걸 긍정도 부정도 하지 못한 채 출가를 했고 등단을 하였다. 신언서판(身言書判)을 강조하며 말과 생각과 행동의 중요성을 시시로 일깨운 아버지의 영향이 없었다고는 하지 못하겠으나 어느 날 발표된 시를 보여드렸을 때 아버지는 아무 말씀이 없으셨다. 이 시를 보여드린 건 두고두고 나의 불찰이었다. 그리고 아무 설명도 못 드린 사이 아버지가 돌아가셨다.

 

밤 9시엔 내 아버지가 서 있습니다. 칼로 내리쳐도 지워지지 않는 아버지 (……) 9시는 아버지의 세상이 문을 닫는 시각이지요. 책을 읽거나 밥을 먹거나 섹스를 할 때에도 나는 9시에서 멈추어야 합니다. 9시는 완성되는 시각이 아니라 중단되는 시각이지요. (……) 내가 9시만큼 짧아진 걸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 아버지, 은화식물은 가늘고 길게 자라지요. 내 몸이 자꾸 가늘어져요. 9시를 치워주세요.

- 「아직도 9시가 있다」 부분, 『앤디 워홀의 생각』

 

 

남성 중심 사회에서 봉건적인 사고를 가진 아버지가 딸 여섯을 키우기 위해 선택하였을 과보호는 아버지로선 지당하였고 확고했다. 전주이씨 성종대왕 28대손, 가문을 강조하던 아버지, 갑(甲)자 훈(勳)자, 장손이던 아버지가 딸을 내리 여섯을 낳고 끝으로 아들 하나를 두기까지의 역경은 어머니에게 더 고통이었지만 실인즉 아버지는 당신 나름의 정도를 지키신 분이었다. 할머니께서 여러 차례 은밀하게 다른 여성을 방에 들여 합방을 강요하였지만 그때마다 정중하게 거절하고 사례를 한 뒤 방을 나온 분이었다. 나는 가혹하게도 여섯째 딸이었다.

내가 중학교 때까지 식솔이 열세 명이었고 그 가족을 혼자 부양하셨다. 중학교를 나오신 아버지는 스스로 깨친 학문으로 20세 약관의 나이에 선산군 고아면장을 시작으로 법원서기를 거쳐 점촌중학교 교감으로 재직하면서 한문선생을 겸하셨다. 우리들을 저녁 식사 후 사랑채로 부르셔서 아주 재미있는 일화로써 한문을 가르쳐주셨는데 그때 들은 문구들은 아직도 생생하다. 이후 공직에서 나오신 후 문경에서 큰 주조회사 전무로 일하셨고 말년에는 산림조합장, 축산협동조합장을 거치셨는데 짧게 직장을 전전하신 이유인 즉 청렴하였기 때문이다. 그건 자타가 인정하는 부분이다. 아버지는 부정하지 않으셨다. 내가 본 사례도 많았다. 예로 한 산림업자가 귀한 송이버섯을 상자 째 배달해 왔는데 손도 못 대게하고는 고스란히 돌려주시는 장면을 목격한 적이 있다.

 

유일한 아들의 대학 졸업식에서 어머니와 함께    

나의 남편인 여섯 째 사위와 아버지   

 

 

아버지는 장남이자 가장으로서 도덕적이었고 책임감이 강하였으며 스스로 모범이었으니 사회적으로 존경의 대상이 되기에 손색이 없었다. 언행이 바르므로 실상 나는 그 아래서 반듯하고 질서 있는 언어와 태도를 배운 바 적지 않다. 차라리 거칠고 비신사적이었다면 대놓고 비난할 이유라도 되었을 테고 저항을 통하여 신랄한 힘을 터득하였을 테지만 그저 통조림 속에서 스스로의 사고에 경직되었던 내 한계를 슬퍼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 강직하시던 아버지, 당신이 외로워 보였다. 믿었던 사람들이 하나 둘 아버지 곁을 떠날 때, “내가 그들에게 나를 강요할 수가 없더구나.” 아버지의 한숨을 들으며, 가슴 한편이 쓰라리고 시렸다. 그것이 아버지를 비난하기보다 이해하는 계기가 되었을까. 자기원칙에 강하고 신념을 지키는 자의 고독 말이다. 결국 아버지의 9시는 나의 결혼으로 치워졌지만 그 9시는 다른 양태로 장소만 바뀌어 존재했다. 시대의 모순과 편견이 얼마나 단단한지 수차례 울고 난 뒤, 세상을 바꾸기보다 나는 차라리 빠른 방법으로 나를 바꾸는 쪽을 택하였다. 결국 9시를 치워준 건 문학이었다. 문학이 유일하게 선량한 가치로써 나의 저항을 지지해 주었다.

아버지의 생인 듯 얼마나 무거웠겠는가. 돌아가신 후 가장 마음이 아팠던 부분은 그를 더 못 보는 이유보다도 내 시 안에서의 ‘아버지’는 당신이 아니라 세상의 아버지, 즉 권력과 지배의 상징이었다는 걸 설명해 드리지 못한 점이었다. 이제 아버지가 그리운 나이, 갇힌 빛이 더 강하다는 말처럼 아버지의 과보호가 준 이면의 ‘간절함’이 또 다른 나의 재산일 거라는 유일한 긍정을 옹호하며 지금 여기 있다.

이규리
시인, 1955년생
시집 『당신은 첫눈입니까』 『최선은 그런 것이에요』 『뒷모습』 『앤디 워홀의 생각』, 산문집 『시의 인기척』 『돌려주시지 않아도 됩니다』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