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글쓰기의 스승
여시아문

  • 내 글쓰기의 스승
  • 2022년 봄호 (통권 83호)
여시아문

비로소 레오가 탈출했다. 레오는 사람으로 치면 다섯 살의 소녀였다. 수줍음이 많은 잠꾸러기였으며, 완벽한 채식주의자로 짧은 생을 살다갔다. 집게손가락만 할 때 나에게 와서 한 뼘보다 더 커진 후에야 지구별을 탈출할 수 있었다.

레오의 고향은 아프리카였다. 정확히 말하면 해적으로 유명한 아프리카 북동쪽에 위치한 소말리아였다. 그가 나를 선택했는지, 나의 강력한 자기장이 그를 이역만리 먼 여행길에 오르게 했는지는 잘 모르겠다. 수년 전, 한남동 재개발지역의 허물어가던 단독주택에 자리를 잡으면서 레오는 나와 동거를 시작하게 되었다. 오래된 옛집은 젊은 예술가들의 작업실로 사용되었기에 난방도 잘 되지 않는 열악한 공간이었다.

레오는 근 일 년 동안 잠만 자는 것 같았다. 하루 중에 대략 한 시간 정도만 치커리나 애호박 따위를 먹고 석 자가 약간 넘는 사육장을 몇 바퀴 도는 정도였다. 손바닥에 올려놓고 머리를 쓰다듬으려고 하면 까만 눈을 질끈 감고 고개를 갑장 안으로 집어넣는 겁이 많은 소녀였다. 가끔은 장난을 치려고 몸을 뒤집는 짓궂은 행동을 했는데 그럴 때면, 허공에서 팔다리를 허우적거리며 필사적으로 몸을 세우려고 노력했다. 나에게는 장난이었으나 레오에게는 신체적, 정신적, 스트레스가 된다는 것을 다큐를 보고 알았다. 야생의 자연에서 웅덩이나 허방에 빠져 몸이 뒤집어지면 제힘으로는 다시 뒤집을 수가 없어서 직사광선에 말라죽은 경우가 많다는 것을 보고 나는 그 장난을 멈추게 되었다.

나의 레오   

레오에게 싱싱한 채소를 먹여주고 싶었다. 두 평 남짓의 텃밭에 얼갈이, 치커리, 민들레, 딸기 등의 모종을 심었다. 볕이 잘 들고 따뜻한 날에는 텃밭에 레오를 풀어주고 자연식을 즐기게 했다. 겁이 많은 레오는 낯선 환경에 어리둥절했지만 이내 적응을 하고 채소를 맘껏 물어뜯거나 흙무더기 위에서 잠을 자곤 했다.

한 해 두 해, 레오는 무럭무럭 자랐다. 나는 그런 레오를 보며 밤새 오래된 노트북 자판을 두드리곤 했다. 때론 시상이 떠오르지 않으면 고개를 돌려 레오의 사육장을 바라보곤 했다. 대부분은 쿨쿨 잠을 자곤 했는데 가끔은 시를 쓰는 나와 눈이 마주치기도 했다. 머리를 주억거리며 흡사 “왜, 시가 안 되니?” 묻는 것만 같았다. 그럴 때면 나는 “네가 대신 좀 써줄래?”라고 웃으며 받아쳤다. 참 싱거운 녀석을 본다는 듯 몸을 웅크리고 잠을 자던 레오. 나는 알고 있다. 레오가 자는 것이 아니라 잠자는 척을 하고 있다는 것을. 나는 그런 레오를 보며 차마 무정하다고 욕을 할 수 없었다. 이십 년이 넘게 시만 써왔다고 자부했지만 어쩌면 시를 쓰는 척만 한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시를 너무 사랑해서 기꺼이 이십 대와 삼십 대를 탕진했지만 언젠가부터 시가 아닌 시인의 외투를 쓰고 ‘척’을 하며 살아가는 것은 아닐까, 하는 의구심이 들곤 했다.

몇 해가 흘러 한남동 재개발지역에 철거 명령이 떨어지면서 이사를 가야 할 처지가 되었다. 곧, 추운 겨울이 올 것이고 난방도 잘 되지 않는 곳에서 살면서 나의 건강도 좋지 못했다. 무엇보다, 레오가 밥을 잘 먹지 않고 움직임이 둔하다는 것을 느끼면서 좀 더 좋은 환경으로 이사를 서둘러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본가가 있는 인천 쪽으로 다시 돌아가기로 했고, 지인들의 도움으로 인천역 근처 ‘동화마을’의 집을 계약할 수 있었다. ‘동화마을’이라니? 이렇게 촌스러울 수가? 나는 그 촌스러운 마을 이름이 좋았다. 레오도 이곳이 참 마음에 들 것 같았다. 근거리에 차이나타운과 신포시장이 있고, 자유공원이 있으며 부둣가가 있는 이곳에서 레오와 함께 지낼 생각으로 내 머릿속은 요즘 아이들 말로 몹시 웅장해졌다.

입주를 열흘 정도 남기고 레오의 건강은 매우 좋지 않았다. 처음으로 특수동물 병원에 데려가 진료를 보았고 호전되는 듯 보였으나 다음날 밤, 줌으로 시수업을 하고 사육장을 보니 미동이 없었다. 잠을 자는 것이 아닌 뭔가 싸한 느낌이 들었기에 만져보지 않고도 알 수 있었다. ‘레오야, 드디어 탈출했구나?’ 마음으로 뜨겁게 축하하면서도 속에서 뜨거운 덩어리들이 목울대를 타고 울컥했다. 혹시나, 눈을 뜰까 싶어서 차가워진 레오와 하루를 더 있다가 특수동물 화장터로 향했다.

목불   


입적.

 

여시아문(如是我聞)! 사람들아, 여기 와서 보시오. 이 작은 종이유골함 속에 ‘거대한 책’ 한 권이 들어있다오. 오색찬란한 사리 따위는 없지만 다섯 평생, 잠으로 시공을 뛰어넘은 단단한 말씀을 들어보시오. 딱딱한 갑장을 짐이 아니라 기꺼이 혹으로 모시고 ‘붓다’로 살다 가신 거북(巨BOOK) 선생을 보시오. 육(肉)을 버리고 영(靈)을 얻어 대우주로 돌아가신 이 ‘시집’을 읽어보시오. 가만히 주먹을 꼭 그러쥐면 레오의 형상이 팔 끝에 매달린다. 손가락을 펴서 자판을 두들길 때마다 레오의 수줍은 얼굴이 시가 되어 가슴으로 북받친다. 비로소, 내 가슴에 ‘거대한 책’이 혹이 되어 오늘도 내일도 둥둥 울릴 것이다. 자고로 시는 쓰는 것이 아니다. 마음속의 그 무엇이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흘러넘칠 때 받아 적으면 그뿐. 시로 세상을 속이지 않겠소. 이 세계의 슬픔을 온몸으로 함께 울겠소. 그리하여, 나의 슬픔은 거북 선생의 혹처럼 단단하게 출렁거릴 것이오. 울고 있는 자, 웃고 있는 자, 걷고 있는 자, 잠을 자는 자, 춤을 추는 자, 노래하는 자, 주저앉은 자, 망설이는 자, 비틀거리는 자, 버림받은 자는 모두 시공을 초월해 빛날 것이오. 그것이 시오.

김산
시인, 1976년생
시집 『키키』 『치명』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