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밭단상
①책상들

  • 글밭단상
  • 2021년 여름호 (통권 80호)
①책상들

청탁 받은 이런저런 원고를 마감하느라 밤늦게까지 컴퓨터 앞에 앉았다가 잠시 차 한 잔을 마시는데 문득 흩어진 볼펜들과 봉투도 뜯지 않은 채 쌓아둔 우편물들, 빈 커피 잔들, 구겨진 메모지로 어지러운 책상이 보였다. 그리고 새삼 ‘이 책상이 내 생의 몇 번째 책상일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먼 기억의 저편에 접혀 있던 자잘한 기억들이 잔꽃처럼 피어나기 시작했다. 내가 처음 나의 소유로 받은 책상은 초등학교 일학년에 막 입학했을 때 할머니가 목공소에서 짜다 주신 작은 앉은뱅이 책상이었다. 일곱 살의 앉은키에는 높이가 조금 안 맞았으나 그것은 처음으로 가진 나만의 책상이었다. 그 나이의 아이들에게 가장 설레는 일은 취학통지서를 받고 입학 날을 기다리는 일이었다. 엄청나게 큰 학교 운동장 주위로 흐드러지게 피어있는 벚꽃들, 그 사이로 보이는 기차처럼 기다란 교실들, 그 속에서 흘러나오던 합창소리…… 그것들은 일곱 살 아이에게는 꿈속 같은 공간이었다. 이따금 언니들을 따라가 창밖에서 깡충깡충 뛰며 넘겨다 본 교실에는 검은 책상 앞에 학생들이 근엄하게 앉아 있었고 그 사이로 키가 훤칠한 남자 선생님이 뒷짐을 지고 왔다 갔다 하는 것이 보였다. 그 풍경은 뭐라 설명할 수 없는 위엄과 광휘에 싸여 아득하고도 신비로웠다. 오전의 뽀얀 봄 햇살 속에 꿈처럼 앉아 있는 그 아이들은 어딘가 눈부신 시간 속으로 미끄러져 가고 있는 것 같기도 했다. 그러나 막상 입학을 하고 보니 3학년까지는 책상이 없었다. 전쟁 이후의 열악한 재정난 때문이었을 것이다. 달랑 교탁 하나가 놓여 있을 뿐인 휑한 교실 바닥에 앉아 우리는 영이야 놀자, 철수야 놀자를 읽고 썼다. 입학한 지 며칠 안 된 어느 날. 선생님은 칠판에 가로 세로 높이가 정해진 책상을 그려 보이며 그와 같은 자신의 책상을 만들어오라 하셨다. 그리고 며칠 후, 선생님의 그림과는 조금씩 다른 색깔과 모양의 책상들을 이고 들고 엄마, 아버지들의 학교에 오셨다. 아이들은 서둘러 자기 책상에 이름을 쓰고 자랑하느라 시끌벅적 한데 한참이 지나도 나의 책상은 도착하지 않았다. 내가 무리에서 밀려난 어린 짐승처럼 울음이 터질 것 같은 것을 가까스로 누르고 있을 때 한 아이가 소리쳤다.

‘저기 너그 할매 오신다.’ 아아, 그리고 나는 보았다. 허리가 꼿꼿하고 키가 훤칠하고 언제나 늠름한 나의 할매가 목공소에서 갓 짠 미색 책상을 이고 흰 광목치마를 펄럭이며 복도를 가로질러 오는 것을! 그 후 그 장면은 조금씩 변형되며 늘 어지러운 나의 꿈속을 잠깐씩 밝히기도 했다.

두 번째 나의 책상이 된 것은 중1 자취방에 몇 가지 살림살이로 어머니가 사 주셨던 4인용 밥상이었다. 그때 그것은 책상이며 밥상이며 상황에 따라 다른 용도로도 쓰이는 만능 태불 이었다. 생전 처음 부모 품을 벗어난 열세 살 소녀는 그 앞에서 더듬더듬 낯선 이국의 언어를 익혔고 테스라는 순결한 이방의 여인을 만나기도 하고 『사랑할 때와 죽을 때』라는 제목의 이름이 생각나지 않는 외국 작가의 소설을 읽으며 사랑이라는 이상한 감정에 눈을 뜨기도 했다. 사라호라는 이름의 태풍이 지나가던 추석 날, 판자로 덧댄 자취방 부엌이 날아가고 솥이며 부엌 집기들이 날아가는 소리를 들으며 외로움과 공포에 떨며 빈 책상 앞에 앉아 울던 기억도 있다. 서울로 이사한 우리 가족이 안암동 목사관에 세 들었을 때의 기억이다. 단칸 월세방에 일곱 식구가 이리저리 비집고 먹고 잠자던 때라 책상 같은 것은 생각할 수도 없었다. 그때 나는 고3이었는데 교회 뒤 언덕에 교인들과 목사님이 함께 파 놓은 토굴 기도실에서 매일 도둑 공부를 하곤 했다. 30촉 전구가 덜렁거리는 천장에서는 물방울이 뚝뚝 떨어져 내렸다. 나는 그 밑에 놓인 서너 개의 긴 의자 중 하나에 앉았다 엎드렸다 하며 어부사시사를 외고 미적분을 풀었다. 어떤 날은 새벽 기도 나온 목사님이 ‘기도 그만하고 들어가 자거라’ 하고 흔들어 깨울 때까지 잠들어 있다 화들짝 깨어 도망치듯 그곳을 빠져나오기도 했다. 목사님은 그런 내가 딱했던지 결혼한 아드님이 쓰던 방을 공부방으로 쓸 수 있도록 배려해 주셨고. 나는 복권 당첨 같은 그 행운과 함께 반들반들 길이 난 품위 있는 책상에서 고3 후반기를 보낼 수 있었다.

어쩌면 生은 어떤 신의 광대무변한 책상 위에 놓인 한 권의 책 속에 어른거리는 모호한 이미지들이 아닐까? 아니 그 아득한 책상에 엎드려 잠깐 잠에 든 그 신의 꿈속인지도 모르겠다.

이경림
시인, 1947년생
시집 『상자들』 『내 몸속에 푸른 호랑이가 있다』 『급! 고독』, 산문집 『나만 아는 정원이 있다』 『언제부턴가 우는 것을 잊어버렸다』, 시론집 『사유의 깊이』 『관찰의 깊이』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