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산칼럼
5년 만의 답장

  • 대산칼럼
  • 2021년 여름호 (통권 80호)
5년 만의 답장

문학 평론가로 글을 쓰는 일이 쉽지 않은 이유 중 하나는 ‘혹시 내 해석과 판단이 잘못된 것 아닐까’하는 불안 때문이다. 자기 글에 항상 자신이 있는 평론가라면 모르겠지만 적어도 자기 확신이 10%는 늘 부족한 나 같은 평론가는 저 불안 때문에 자주 괴롭다. 쓰기 전에도 힘들고 쓰고 난 다음에도 자꾸 뒤를 돌아보게 된다. 범인은 항상 자신의 범죄 현장으로 돌아온다는 말이 떠오를 지경이다. 내가 뭘 잘못한 거 같은데……, 끊임없이 쓴 글을 또 읽고 또 읽는다.

그런 의미에서 제일 어려운 글쓰기 중 하나가 첫 시집 해설이다.

첫 시집 원고는 대체로 아직 누구도 본격적으로 읽어낸 흔적이 없기에 참고할 기준이 없다. 기준이 없으면 아주 편할 것 같지만 그렇지 않다. 왜냐하면 ‘기준’은 이렇게 읽어도 되지만 저렇게 읽어도 된다는 갈림길 표지판 같은 것이기 때문이다. 뭐야, 이 사람. 이걸 언급 안 했네! 쾌재를 부르며 새로 갈림길을 만들어본다. 하지만 첫 시집 해설은 표지판 없는 길을 가야 하는 고된 작업이다. 더 큰 고민은 해설이 시집 뒤에 거의 평생 붙어 있다는 점이다. 세상에. 평생 붙어 있는 글이라니. 그래서 고민이 더 깊어진다. 시집 해설이 시를 압도해서는 절대 안 된다. 시인과 시가 돋보여야지 해설자가 무쇠주먹을 휘두르며 빛나면 주객이 전도된 것이다. 첫 시집 해설의 경우, 시인으로서는 처음 받아보는 자기 작품에 대한 본격적인 글이다. 시인이 생각한 어떤 지점을 충분히 부각시키거나, 혹은 생각지 못한 어떤 지점까지 나아가서 조명해주지 못한 글은 시인에게 얼마나 큰 실망을 주겠는가. 한번 비끗한 해설은 아무리 부끄러워도 잘라내서 어디 버릴 수도 없다. 평생 나의 빈약한 안목을 깔깔거리며 손가락질할 사람들 얼굴이 떠오른다. 자다가도 눈을 번쩍 뜨게 되고 식은땀이 난다.

물론 수줍음 많고 낯을 많이 가리는 대다수 시인들은 평론가의 해설에 대해 가타부타 직접적인 말을 잘 안 한다. 나로서는 해설을 쓴 뒤에 한 통의 감사 메일을 받으면 행복한 것이고 특별히 얼굴 보고 차라도 한잔할 수 있다면 정말 고마운 일이다. 때로는 시인들이 별 표현을 안 해서 여러 신호들을 포착, 상상 속에서 시인들의 만족도를 평가해보기도 하는데 그중 하나가 사인본을 보내올 때 시인이 쓴 감사 글의 ‘뉘앙스’이다. 한번은 첫 시집 해설을 쓰고 시인에게 이런 사인본을 받기도 했다. <박상수 선생님께. 〇〇〇 드림> 뒷장에 뭐가 더 있지 않을까? 그런데 이게 끝이었다. 본능적으로 ‘아, 이번 해설 망했구나’싶었다. 시인에게 너무 미안했다. 시집 뒤에 붙는 해설을 쓰는 자의 속절없는 운명이라는 게 이렇다.

그런데 얼마 전에 바로 그 시인이 쓴 산문집을 받아보게 되었다. 반가운 마음에 처음부터 끝까지 통독했다. 서울 생활을 접고 남편, 동생과 함께 제주도에서 살아가게 된 5년의 우여곡절이 거기 담겨 있었다. 온갖 시행착오도 있었고 진땀나는 위기의 순간도 많았다. 특히나 눈에 띄는 것은 아이를 키우고, 래브라도 리트리버와 같이 살며, 낮에는 일을 하고 밤에는 글을 쓰는 ‘여성 예술가’로서, 제주라는 지역에서 어떻게 스스로를 잃지 않고 자신의 기회를 직접 만들어내며 살아갈 것인가에 대한 구체적이면서도 생생한 삶의 시도들이었다. 누군가 인생에서 가장 잘한 일이 무엇이냐고 물었을 때 작업실을 얻은 것을 꼽으며 “아이가 있는 여성 창작자라면 작업실을 가지길 추천합니다. 반드시요!”라고 말할 때는, 누구보다 깊은 우애의 마음으로 저 말을 하기까지의 고된 시간과 저 말을 할 때의 기쁨에 최대한 다가가 보기도 했다. 다행인 것은 이 책의 어느 대목에 첫 시집 나올 때를 회상하며, “고백하자면 해설을 처음 읽고 조금 울었다. (…) 누군가 내 시집을 읽고 내 시를, 나를, 토닥여 주다니. 오롯이 글로 소통하는 것, 처음 경험해보는 감정이었다”는 구절이 들어 있었다는 점이다. 야속한 시인이여. 해설을 쓰고 5년 만에 답장을 받은 기분이었다. ‘쓰는 사람’이라는 확신을 가지고 제주의 큰 바람 사이를 씩씩하게 걸어가는 시인의 모습. 그리고 긴 여운. 이번에는 시인이 나를 토닥여주고 있었다.

박상수
시인, 평론가, 동덕여자대학교 문예창작과 교수, 계간 《대산문화》 편집자문위원, 1974년생
시집 『후르츠 캔디 버스』 『숙녀의 기분』 『오늘 같이 있어』, 평론집 『귀족 예절론』 『너의 수만 가지 아름다운 이름을 불러줄게』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