①밤의 비닐하우스,밤의 채석장

  • 2021년 여름호 (통권 80호)
①밤의 비닐하우스,밤의 채석장


밤의 비닐하우스

붉은 안개 속에서 푸른 오토바이 나타난다 상향 헤드라이트 비춘 건물 기둥에 길게 붙들린 내 그림자 보이지 않는 아버지 얼굴에서 검은 숲 이파리 바람 불어온다 엔진 기척은 없는데 두 바퀴가 일정한 리듬으로 돌아가고 있다 일제히 건물 조명이 꺼진다 오토바이 형상이 내 손가락 사이 스친다 나는 밤의 흰 머리카락을 만진 것 같다

* 바람이 창문을 두드릴 때마다 일렁이는
인터체인지 불빛

밤의 비닐하우스

그 안에서 한 사람 걸어 나온다
검은 눈동자 가장 검은 빛으로 이동하는
시간

나에게 묻는다

나의 이름을

내가 사라지는 시간의 이름을

 

밤의 채석장

장막을 걷자 음악 없이 작은 예식이 집행되고 있었다 모두 앞을 향한 사람들의 등에서 종려나무 열매 향이 묻어나왔다 저 먼 곳으로부터 출발한 빛이 두 손 모은 어깨들 넘어 내 이마에서 고요히 부서졌다 어쩌면 당신이 가능한 멀리 머무를 수 있는 능력으로 거기 있었다는 듯이 눈이 부셨다 나는 앞으로 나아갔다 또 다른 장막이 앞을 반쯤 가렸다 거기서 뒤돌아보았다 아무도 아무것도 있지 않았다 앞에 크고 검은 바위가 밤의 장막 한가운데 푸르게 빛나고 있었다 음악 없이 나는 밤의 성소에서 울려 퍼지는 빛과 메아리의 소용돌이 속에 한참 서 있었다
*
가시금작화
딸기나무 사이

밤의 채석장

토사를 파내다 멈춘 포클레인이 서 있다

나는 나무 막대기로 흙을 파기 시작한다
막대기가 부러진다

나는 무릎을 꿇고 살갗을 맞댄다
거기 바위의 검음이 있다

송승환
시인, 1971년생
시집 『당신이 있다면 당신이 있기를』 『클로로포름』 『드라이아이스』, 비평집 『전체의 바깥』 『측위의 감각』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