②사랑,상자 째 살기

  • 2021년 여름호 (통권 80호)
②사랑,상자 째 살기


사랑


수면을 지치고 가는
기억은 뱀 같은 것일까 꼬리를 보면 따라가게 되고 물리면
죽은 듯이 질문에 붙들리게 된다

기억하는 바가 있어
도달할 수 없는 수면이 깊다

뱀이 자는 동안 겨울이 온다고
뱀이 깨어나면 봄이라고 그러나
계속 잠들어 있는 뱀은 무엇이라 할까 취한 뱀이라 할래 겨울이라 할래 아니 이불을 돌돌 만 슬픔이라고 할래 일어나지 않아도 되니까 천국이라고 하자 그래 그러자 천국엔 무엇이 없을래 뱀을 재우는 천국에 무엇을 없앨래 출근이 없고 퇴근이 없는 깊은 잠에는 나비도 개구리도 자고 자면서 있으니 서로 방해하지 않고 없는 것처럼 평화롭고 들끓는 용암 불티 오르는 밤 한 밤도 잠들어 깊이깊이 잠들어 보이지 않는다 잠든 사람들의

심장

느리게 뛰는 천국

뱀 같다 차갑고 부드럽고 약해,
다른 사람 같았다

그 뱀의 먹이로 살던 새는
천국을 나느라
뱀을 앓게 된다

사랑의 학명은
겨울에 나는 새와 천국의 뱀


상자 째 살기


검은 새가 되는 것, 검은 밤으로 끝없이 빨려 들어가는 것
불빛도 온기도 없는 것
바람을 타는 것

어둠이 물었어 너에게,
우리 집에 왜 왔어요?

어둠은 손발이 닿지 않는 큰 상자
날아다니며, 날아다니며, 상자를 넓히면
넓어지는 것은 상자의 안인지 밖인지 나인지
상자를 늘리면 상자 안에 담을 수 있는 물건이 많아지는지
그런 걸 세상이라고 부르는지
나라고 소개하는지

아니 상자의 재질이 중요할 거야
물을 종이에 담을 수 없듯이
흔들려 쏟아진 물은 무엇이건 잘 먹을 거야 쇠도 나무도 바람마저도


그렇다면 너를
유속이 아주 빠른 물이라고 해 봐
미친 도로라고
바람을 담으려고 달린다고 해 봐
방향을 가졌다고 해 봐

그러나 너는 갑자기 서야 해
너는 물이 아니야 너는 상자로서 담을 바람의 양을
정해야 해
그만, 하고 말해야 해

바람이 물을 말리는 것은
물을 안아 나르는 것, 물을 멀리 데려가 잊어버리는 것
여러 날에 걸쳐
아주 아주 세상 느린 바람이 된다는 것
세차게 불지 않는 것

아무도 너를 느끼지 못한다 해도
너는 너를 바람이라고 해
숨이라고 회복이라고
어둠에게,
말해. 어둠이 필요하다고 말해.

너에게 새가 자꾸 날아들게 된다면
새가 자꾸
바람이라고 자신을 담고 가 달라고
너를 달라고 한다면

김복희
시인, 1986년생.
시집 『내가 사랑하는 나의 새 인간』 『희망은 사랑을 한다』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