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에세이 - 길을 묻다
‘리터러시’의 사전 밖 정의

- 제대로 읽고 쓰는 사람들

  • 인문에세이 - 길을 묻다
  • 2021년 여름호 (통권 80호)
‘리터러시’의 사전 밖 정의

- 제대로 읽고 쓰는 사람들

1. 유의어

‘낫 놓고 기역자도 모른다’는 말이 있습니다. 기역처럼 생긴 낫을 보고서도 기역이라는 글자의 모양을 떠올리지 못할 정도로 무지하다는 뜻의 속담입니다. 하지만 그 이면에 낫을 눈앞에 두고도 기역을 떠올리기 위해 필요한 최소한의 글자 지식을 갖추지 못한 자의 억울함 같은 것도 추론해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낫 놓고 기역자도 모르는 사람이면, 글 읽기의 시작이자 기초인 글자 읽는 법을 제대로 배우지 못한 문맹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문맹을 있는 그대로 풀이하면 ‘글(文)을 보지 못하는(盲) 상태’입니다. 일반적으로 글이라는 것이 문자라는 시각적 기호로 표현된다는 점에서 보면, 글을 보지 못한다는 말이 문자를 읽지 못한다는 뜻임을 쉽게 짐작할 수 있습니다. 문맹이라는 말에 비추어 볼 때 글을 읽는다는 것은 ‘탈문맹’입니다. 즉, 문맹의 상태를 벗어나는 일입니다. 문맹을 벗어나기 위해서 가장 먼저 완수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글자를 정확하게 보고 읽고 쓰기 위해 필요한 기초 지식과 능력을 습득하는 것입니다. 낱글자 하나하나의 이름, 모양, 소리를 알아야 하고, 그것들을 자유자재로 조합하고 분해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렇게 해서 단어를 읽고 문장을 읽을 수 있습니다.

글자 자체를 읽고 쓰는 일이 그다지 문제가 되지 않는 요즘-정말 그러한가 새삼 질문해 볼 일이지만-에는 ‘문해력’이라는 말을 더 자주 쓰는 것 같습니다. 사람들은 이 말을 주로 ‘글(文)을 풀어내는(解) 힘(力)’ 정도의 의미로 사용하는 듯합니다. 인터넷에 찾아보면 문해력이라는 말을 표제어로 한 신문 기사들이 꽤 많고, 문해력이라는 용어가 등장하는 방송 자료와 동영상도 심심찮게 찾아 볼 수 있습니다. 저도 문해력 방송 프로그램에 몇 개 출연했습니다.
신문이나 방송 같은 미디어들은 대부분 ‘우리 아이들 문해력이 떨어진다, 어른들 문해력이 약하다, 잘 못 읽는다’ 등 각계각층(?)의 걱정 가득한 목소리, 대개는 학교 공부로 귀결되는 이야기들을 담고 있습니다. 실제로 국내 대형 서점의 웹사이트에서 문해력을 키워드로 검색하면 대강 120여 권의 우리말로 출판된 단행본 목록도 얻을 수 있습니다. 이 목록은 “뼛속까지 문과인 서울대 출신 아빠 둘이 아들을 영재원 과학고에 보낸 성공담과 전략”을 담은 공부법 책으로 시작해서, 어린 자녀를 둔 학부모들이라면 쉽게 외면하기 어려울 “초등학생을 위한 문해력 추천 필독서 세트”로 마무리 됩니다.

읽기와 쓰기를 과학적으로 연구하는 학계에서는 ‘문식성’이라는 말을 애용해 왔습니다. 미디어나 대중들에게 익숙한 문해력이라는 말보다는 조금 더 학술적 느낌이 드는, 무슨 뜻인지 얼른 알아채기 어려운 표현입니다. 문식성이란 말은 가만 잘 뜯어보면 그 의미가 중의적입니다. 글(文)을 안다(識)는 의미도 되지만, ‘글로써 안다’는 뜻도 됩니다. 글을 안다는 것은 어떤 내용을 글로 이해하거나 표현하는 방식을 안다는 것입니다. ‘읽고 쓰기 위한 배움’입니다. 글로써 안다는 것은 글을 통해서 어떤 내용을 배운다는 것입니다. 다른 말로 ‘배움을 위한 읽기와 쓰기’입니다. 학자들이 쓰는 말이라 그런지 용어 정의에 필요한 두 가지 의미가 꽤 절묘하게 중첩되어 있습니다. 문식성의 마지막 글자(性)는 이 두 가지 배움을 따로따로 또는 함께 기능하게 하는 성질, 상태, 원리 등을 표현한 것 같습니다.

2. 제한점

문해력이든 문식성이든 또는 (탈)문맹이든, 이 말들은 모두 literacy라는 영어 단어에서 왔습니다. 이것을 한국말로는 ‘리터러시’라고 읽고 씁니다. 그런데 리터러시는 번역어인 문해력이나 문식성, 탈문맹을 아우르고 남을 정도로 그 의미가 다층적이고 복합적이며 포괄적입니다. 그래서 ‘리터러시란 무엇이다’라고 한 줄로 요약하는 일은 그리 만만한 과제가 아닙니다.

저 역시 미국에서 15년 동안 리터러시를 연구하고 가르쳐 왔지만, 아직도 이 말을 한 문장으로 적는 일에 애를 먹습니다. 리터러시는 문명 시대의 삶을 규정할 때 절대 빼 놓을 수 없는 인간 경험이기 때문에 다양한 관점과 방식으로 그 의미와 함의, 쓰임과 가치를 설명해야 하는데, 제가 아직 그것들을 다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불행 중 다행으로, 제 스스로 앎의 한계를 잘 알고 있기에 이 말의 의미를 딱 잘라 정의하는 일에 마음 깊이 주저하고 망설입니다. 이런 일은 늘 어렵고, 앞으로도 그럴 것 같습니다.

인간이, 그것도 수많은 인간이, 심지어 각기 서로 다른 방식으로 살아가는 다양한 인간들이 직간접적으로 상호작용하면서 실천하는 개인적 또는 집합적 리터러시의 경험을 어느 하나의 이론과 학문의 틀(가령, 언어학, 문학, 철학, 심리학, 사회학, 기호학, 인류학, 교육학, 언론학, 컴퓨터공학, 학습과학, 뇌과학, 인지과학 등)로 설명하기란 참으로 난망한 일입니다. 인간의 그 어떤 경험도 양파 껍질처럼 켜켜이 둘러싸여 있는 크고 작은 사회적, 문화적, 정치적, 이념적 시공간을 벗어나서 온전하게 설명하기 어렵습니다. 학교에서, 직장에서, 생활세계에서 작용하는 다층적이고 복합적인 맥락을 고려한다면, 리터러시라는 말의 개념을 명징하게 어떤 알맹이 같은 것으로 서술하는 일 자체가 무의미해 보이기도 합니다. 사실 양파 껍질도 모두 까고 나면 남는 게 없습니다.

리터러시란, 모르긴 몰라도 지구인의 수보다 몇 곱절은 더 많을 ‘텍스트(text) 은하계’를 다루는 일이기에 더욱 정의하기 어렵습니다. 더욱이 특정한 인간 경험을 설명하는 언어가 외부에서 들어온 것이라면, 번역의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탈락되는 의미를 수소문하기 어렵고, 불필요하게 개입되는 오해와 모호성도 배제하기 어렵습니다. 이런저런 이유들을 핑계로, 저는 ‘리터러시’라는 말을 있는 그대로 사용하고 싶습니다. 문해력이나 문식성이라는 말도 좋아하지만, 사람들에게 알리고 싶은 그 말의 의미를 가능하다면 넓게 담고 싶어서 입니다. 동시에 적어도 번역의 난제는 좀 해결할 수 있지 않을까라는 희망 때문이기도 합니다.

그래도 한 가지 분명한 것은 리터러시의 경험이 글자라는 추상적인 기호를 읽고 쓰는 것에 국한되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리터러시의 경험은 글을 읽고 쓰는 사람들, 수많은 독자들과 저자들이 지금 바로 거기에서 살아가고 있는 어떤 세상과 늘 결부되어 있습니다. 비판교육학의 큰 스승인 브라질의 지성 파올로 프레이리는 리터러시를 정의할 때 늘 ‘단어 읽기와 세상 읽기(reading the word and reading the world)’라는 구절을 사용했습니다. 세상을 읽기 위해서는 첫째로 글을 읽을 수 있어야 하지만, 글을 읽는 일(수단)은 늘 세상을 읽는 일(목적)에 종사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3. 용례 (1)

21세기는 혼재의 시대입니다. 하이브리드, 통섭, 융복합이라는 말들이 귀에 익숙한 세상입니다. 다양한 개인과 공동체가 실천하는 다양한 형식과 방식의 읽기와 쓰기를 통해서 생성된 다채로운 지식과 관점들이 때로는 경쟁하고 때로는 융화되면서 공존하는 요즘입니다. 다양한 방식으로 텍스트를 읽고 다양한 방식으로 세상을 읽는 시대입니다.

다양성의 리터러시 환경이 조성되고 있는 데에는 몇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디지털 사회로 전환하면서 읽고 쓰는 일들이 더 이상 특정 집단에 점유되는 인쇄 출판 환경에 국한되지 않습니다. 인터넷을 통해서 누구나 텍스트를 생산하고 유통하고 소비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디지털 기술의 발달은 텍스트의 공유 과정을 훨씬 쉽고 빠르게 해 줍니다. 문자 언어와 함께 이미지, 그래픽, 동영상 등의 시각 언어가 간편하게 쓰입니다. 소리, 몸짓, 공간의 언어들이 이미지나 문자와 어우러져 다채로운 텍스트로 창안됩니다. 특별한 전문성, 권위, 자본, 인맥이 없어도 인터넷만 연결되면 누구나 저자와 독자가 될 수 있습니다. 나의 텍스트를 읽고 보고 소비할 사람들을 다양한 플랫폼을 통해서 확보하고 그들과 교류합니다.

조금 팬시한 말로 표현하자면, 리터러시는 ‘디자인 경험’입니다. 21세기 디지털 사회의 리터러시는 서로 다른 정체성들이, 복수의 채널을 통해서, 저마다의 의미를, 다채로운 형식의 텍스트로 설계하는 경험입니다. 이런 경험을 충실하게 설명하려면 단수 명사 literacy가 아니라 복수 명사 literacies가 필요합니다. 그래서 요즘에는 복합적으로 실천되는 리터러시라는 의미로 멀티플 리터러시(multiple literacies)라는 말을 씁니다. 뉴런던그룹이라는 서구 석학들의 모임-이들은 미국 뉴잉글랜드 지역의 뉴런던이라는 곳에 모여서 새로운 리터러시의 관점을 논의했습니다-은 이 말을 또 줄여서 멀티리터러시(multiliteracies)라는 개념으로 제안하였습니다.

멀티리터러시라고 하니까 언뜻 떠오르는 말들이 몇 개 있습니다. 프린트 리터러시, 디지털 리터러시, 인포메이션 리터러시, 미디어 리터러시, 뉴스 리터러시, 데이터 리터러시, 컴퓨터 리터러시, 컴퓨테이셔널 리터러시, 코딩 리터러시, ICT 리터러시, 디자인 리터러시, 비주얼 리터러시, 멀티모덜 리터러시, 인터넷 리터러시, 웹 리터러시, 게임 리터러시, 비디오 리터러시, 필름 리터러시, 애니메이션 리터러시. 소셜 리터러시, 컬처럴 리터러시, 파이낸셜 리터러시, 헬쓰 리터러시, 이모셔널 리터러시, 아카데믹 리터러시, 시민적 리터러시, 윤리적 리터러시, 학문적 리터러시, 교육과정 리터러시, 평가 리터러시, 과학 리터러시, 역사 리터러시, 문학 리터러시, 수학 리터러시, 공학 리터러시, 통계 리터러시, 심미적 리터러시, 음악 리터러시, 건축 리터러시 등등.

딱 몇 개만 나열했습니다. 이 말들에서 중요한 것은 뒤가 아니라 앞입니다. 그러니까 프린트, 디지털, 미디어, 뉴스, 게임, 사회적, 문화적, 재정적, 과학, 역사, 건축 등입니다. 각각이 모두 엄밀한 의미를 지니고 있겠지만, 리터러시 앞에 붙은 이 말들은 대강 특정한 영역의 읽고 쓰는 대상, 내용, 방식을 의미한다고 보면 됩니다. 프린트 리터러시는 인쇄물을 읽고 쓰는 것이고, 뉴스는 뉴스를 읽고 제작하는 것입니다. 시민적 리터러시는 시민에게 필요한 관점, 역량, 태도 등에 대하여 읽고 쓰는 것이며, 역사나 과학 리터러시는 역사나 과학을 ‘하기’ 위해 필요한 사례, 맥락, 원리, 해석, 논증 등에 관하여 읽고 쓰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들은 모두 다양한 형식과 맥락의 텍스트를 통해서 표현, 이해, 매개됩니다. 그러니까 시민적 리터러시는 시민에게 필요한 지식, 역량, 태도를 갖추기 위하여 그것들이 잘 드러난 텍스트, 그래서 그것들을 잘 기를 수 있는 텍스트를 읽고 쓰는 것입니다.

 

4. 용례(2)

서로 다른 형식과 맥락의 리터러시들은 융합도 되지만 서로 경쟁도 합니다. 디지털과 독서의 경쟁이 대표적입니다. 스마트폰으로 대표되는 비디오 게임, SNS, 유튜브 등은 늘 종이책 독서의 원흉으로 지목되어 왔습니다. 세 줄 인터넷 글 읽기에 익숙하지만 긴 줄글을 읽는 것에 어려움을 겪는 사람들을 보고 ‘실질적 문맹'이라는 말도 합니다. 글을 읽는 것은 그 내용을 이해하고 의미를 파악하는 것인데, 이런 수준의 읽기를 제대로 할 줄 아는 사람들이 의외로 많지 않다는 걱정입니다.

디지털이라는 공공의 적이 생겨서 의도치 않게 리터러시라는 말이 부각된 경우입니다. 이런 담론의 긍정적인 면이라면, 대중의 염려가 글 깨치기를 넘어서 글 내용 이해 수준으로 확장된 것입니다. 감히 말하면, 리터러시 개념의 ’문맹 탈출‘이자, 탈산업적 전진이라고 부를 수 있습니다. 글을 읽고 의미를 구성하는 인지 능력은 리터러시를 설명하는 가장 실용적이고 설득력 있는 개념 중의 하나이기 때문입니다.

디지털 시대의 ‘책맹’이라는 유행어도 생겼습니다. 어떤 대중 시사 잡지에 보니 “책맹 사회를 추방하자”라는 칼럼도 있습니다. 책맹이라는 말을 처음 쓴 이의 의도는 모르겠으나, 언뜻 보기에 ‘책’이라는 특별한 매체를 멀리하거나 안중에 없는 사람들을 꼬집어 부르는 말인 듯합니다. 이 말을 리터러시의 유관 개념으로 굳이 풀어보자면, aliteracy 정도로 설명할 수 있습니다. 이 단어에는 literacy라는 원래 말 앞에 ‘냉담’ 또는 ‘무관심’의 뜻을 더하는 접두사 a-가 붙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책맹이란 책에 대한 냉담자, 책에 무관심한 사람, 삶의 공간에 책이 끼어 들어갈 틈을 주지 않는 사람, 책이라는 존재가 생활 반경 안에 더 이상 없는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책맹이 늘어나는 원인으로 역시 디지털이 지목됩니다. 여러분을 포함한 많은 사람들이 이런 종류의 경쟁 구도에 익숙해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경쟁의 눈으로 보게 되면 극단적인 경우 종이책을 읽고 쓰는 일의 존폐 위기라는 실체 없는 현상에 대한 심리적 공황에 빠질 수도 있습니다. 물론, 디지털 기기를 많이 사용하면 독서 시간과 독서량에 영향을 미칩니다. 이건 사실 매우 당연한 이치입니다. 하루는 24시간 정해져 있기에 내 몸이 둘이 아닌 이상 어떤 일을 오래 하면 다른 일을 위한 시간은 반드시 줄어들게 마련입니다. 그러나 모든 디지털적인 것들이 리터러시와 전혀 상관없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디지털 기기와 기술을 활용하여 디지털 공간에서 수행하는 일들의 대부분이 읽고 쓰고 생각하고 소통할 것을 요구합니다. 많은 경우에, 인쇄 글 읽기가 디지털 글 읽기에 선한 영향을 주고, 디지털 읽기가 인쇄 글 읽기를 자극하기도 합니다.

적절한 수준의 염려는 텍스트를 읽고 쓰는 일로서 리터러시가 가지는 의미와 가치를 환기시킨다는 점에서 긍정적입니다. 그러나 디지털과 독서를 분리하는 무리한 이분법적 접근은 오늘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디지털 전환 시대의 다원적 리터러시 환경을 애써 외면하는 것입니다. 스마트폰을 압수하고 책만 던져줄 수 없습니다. 책을 치워버리고 디지털로 모든 걸 대체하기도 어렵습니다. 그러니 어느 하나를 버릴 것이 아니라, 이 둘 모두 어우러져 가는 것이 훨씬 생산적인 접근법일 것입니다. 디지털이냐 종이책이냐의 문제가 아니라, 그것으로 우리는 정작 무엇을 하는지 그 내용을 면밀하게 분석하고 이해하는 일이 더욱 중요합니다. 디지털 읽기와 종이책 읽기 모두 세상을 읽는 방법이자 맥락입니다. 종이책으로 표현된 세상, 디지털적으로 표현된 세상, 이 둘이 교차하고 수렴하는 세상 말입니다.

 

 

5. 정의

파올로 프레이는 일상에서 글을 읽을 때 ‘정신의 관료화’를 경계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이는 행정기관의 공무원들이 자신들의 업무에 지나치게 익숙해진 나머지 마치 모든 일이 원래 그렇게 되기로 했던 것인 양 서류를 처리하는 ‘경직된 마음’입니다. 다시 말하면, 그대로 눈앞에 보이는 것을 기계적으로 처리하는 구태의연한 독자가 되지 말라는 조언입니다. 누군가가 정해준 방식으로 읽는 것, 영혼과 의식이 부재한 상태에서 읽는 것에 익숙해지지 말라는 충고입니다. 정신이 굳어 있는 관료적 읽기에는 날카로운 문제의식이 스며들 틈이 없고, 비판적으로 질문하는 유연성이 발휘될 여유도 없습니다.

리터러시는 글자 읽기에서 출발하여 세상 읽기로 진행합니다. 텍스트는 이러한 지적, 정서적, 사회적 경험과 참여를 매개합니다. 리터러시란 결국 다양한 형식, 내용, 표현, 양식, 출처, 쓸모와 가치를 담고 있는 텍스트를 다루는 일입니다. 텍스트는 세상을 거울처럼 ‘반영’하지만, 동시에 세상을 그림처럼 ‘표상’합니다. 우리가 세상을 조금 더 엄밀하면서 폭넓게 알 수 있는 것은, 세상을 반영하고 표상하는 텍스트를 조금 더 엄밀하고 폭넓게 찾아 읽고, 그 의미를 서로 공유하며 새로운 텍스트로 창안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텍스트가 세상을 반영하고 표상하는 것일 때, 그것이 항상 저마다 추구하는 진리나 진실의 방식을 따르지는 않습니다. 텍스트도 사람이 만든 사회적 결과물입니다. 따라서 좋고 싫음이나 옳고 그름에 상관없이 텍스트는 늘 언제나 예외 없이 편향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텍스트를 읽고 쓰는 리터러시의 과정은 마치 살얼음판 위를 걷는 것처럼 늘 주의와 경계를 요구하며, 민첩한 판단력과 명민한 대응전략을 필요로 합니다.

글로 이루어진 교과서를 잘 읽어서 학교 성적을 올리고 좋은 학교에 진학할 수 있다면 더할 나위 없이 좋겠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것이 우리가 리터러시를 잘 배우고 실천하여 궁극적으로 얻고자 하는 성취의 전부는 아닐 것입니다. 다양성 시대의 리터러시를 실천하는 사람들은 글자를 깨치고 글 내용을 이해하는 것을 넘어서서, 그것으로 삶을 배우고 앎을 다집니다. 그들은 능동적으로 텍스트를 탐색하고, 그것으로 세상을 읽고 쓰면서 당면한 생활의 문제들을 해결합니다. 중대한 사회적 숙의 과정에 참여하고, 생산적인 토론의 과정에도 기여합니다. 자신과 공동체의 삶을 좋게 만들기 위해서 ‘읽기와 쓰기’라는 행위를 적극적으로 수행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모든 것들을 자발적이고 지속 가능한 방식으로 실천합니다. 이렇게 그들은 ‘제대로 읽고 쓰는 사람들(being literate)’이 되어갑니다.

조병영
한양대학교 국어교육과 및 러닝사이언스학과 교수, 1975년생
저서 『리터러시』(출간 예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