② 교외, 하울링

  • 2021년 겨울호 (통권 82호)
② 교외, 하울링

그 집이 허물어진 지는 오래다. 그런데 가끔 거기 걸려있던 그림이 생각나고, 그림 속 세세한 풍경들이 생각나고, 그 액자의 행방이 새삼 궁금하기도 하다. 그런 일이 요즘 잦다. 지금껏 전혀 관심도 없던 것들이 이제 와서 내게 새로운 이야기를 들려주는 이유는 무엇일까.

교외

읍내에서 기다린다고 했다.
알겠다고는 했지만 거기가 어딘지 알고 말한건 아니었다.

도대체 어디가 읍내일까 생각하면서 걸었다.
밀려간 것들이 모인 곳에 젖은 몸을 말리다 빛에 탄 흔적이 있었고
그것은 빛바랜 사물의 표면과 구별되지 않았다.

천막 밖으로 뻗은 누군가의 손을 보았는데 오라거나 가라는 의미는 아니었고
긴 손가락 모양이 문자표에서 본 이상한 유니코드를 닮았다고 생각했다.

모두 다른 생각을 하며 이 길을 지나갔을 것이지만
다른 길에서는 같은 것을 떠올리고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나도 모르게 주머니 안에서 계속 그 손가락을 흉내 내고 다니느라 읍의 경계가 어딘지 눈치채지 못했는데
정류장과 정류장 사이 어디쯤이겠지 하고는 그 생각은 이제 그만두기로 했다.

다만 애매한 기호의 잔상이 이 읍내의 중요한 한 부분을 표시하고 있다고 기록해 두었다.

문이 열린 작은 가게를 지나고 있었다.
미리 녹음된 웃음에 맞춰 같이 웃는 걸 좋아하는 남자가 텔레비전 불빛을 쬐고 있었는데
문 앞에 내가 컴컴하게 서 있어도 의자에 눌어붙은 그는 알아차리지 못했다.

헤매다가 지나는 사람에게 길을 물었을 때 그런 건물은 들어본 적 없다고 했고

아마 먼 외곽으로 이전한 지 오래된 것 같다고 말해 주었다.



하울링

이 굴다리를 지나면 농로가 나온다.
농로를 따라가다 보면 오른쪽에 비닐하우스가 있고 왼쪽엔 개울이 흐르는데 그 위치는 잘 변하지 않는다.

예전에는
왼쪽에 농막이 있고 오른쪽은 빈 들판이었는데 도중에 기억이 바뀐 게 무엇 때문인지 알 수 없고
그런 건 아무래도 상관없지. 저 밖은 언제든 수정할 수 있는 풍경처럼 여백이 많고 날은 아직도 무수히 많으니까.

그가 비닐하우스 근처에 누워있다. 그를 흔들어 깨우려면 어둡고 긴 굴다리를 지나야 하는데 입구에 항상 멈춰만 있는 내가 보인다.
그에게 색과 동작을 입히기 위해 서두르지 않으면 그의 모습이 훼손될지 모르는데

굴이 끝나는 곳에 개가 버티고 서 있다.
무력한 새순과 비닐하우스를 지키면서 이쪽의 한 사람을 멀리서 바라본다.

제 울음이 굴에 울려 퍼지는 게 무서운 개는 제 그림자가 점점 커져 숲을 뒤덮는 상상을 하고 그림자의 뱃속을 울리는 메아리를 따라 같이 울어보기도 하면서
굴 뒤쪽의 유일한 지배자가 되어있다.
뭔가 허락을 받으려던 건 아니지만 얼른 움직이지 못하는 것이
풍경이 오래 전 겁먹은 나를 기억하고 있기 때문.

저기 환한 곳에 춥고 메마른 농로가 있다.

누워 있는 그에게 물어볼 말이 있다.

김미령
시인, 1975년생
시집 『파도의 새로운 양상』 『우리가 동시에 여기 있다는 소문』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