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특집
①정치와 삶

- 정치 이념, 감각 현실, 문학의 보편성

  • 기획특집
  • 2021년 겨울호 (통권 82호)
①정치와 삶

- 정치 이념, 감각 현실, 문학의 보편성

마침 정치와 삶과의 관계에 대한 이 글을 청탁 받았을 무렵에 이상(李箱)의 시에 관한 흥미로운 분석에 관한 보도가 신문에 실렸다. 이 보도에 언급된 사실에 대한 간단한 관찰로써 과제를 대신할까 한다.

이상의 여러 시는 추상적인 구도를 가지고 있고, 또 삶을 그러한 구도로 해석하려는 의도를 포함하는 경우가 많다. 이상의 시 가운데 가장 잘 알려졌다고 할 수 있는 「오감도(烏瞰圖)」 시 제1호는 도로를 달리는 아이들의 모습을 하나의 구도 속에 보여준다. 아이들이 그 전체적인 구도―새가 내려 보는 전체 구도에 또는 새가 아니라 어두운 색깔의 까마귀의 눈으로 내리 보는 전체 구도에 포착된다.

「오감도」(제1호)의 첫 부분에서 열셋의 아이들이 길을 달리고 또 그들이 무슨 이유로인가 무서워하기도 한다. 시의 끝에서는 앞에 말한 사실 전부를 부정하는 말이 나온다. “十三의兒孩가道路를질주하지아니하여도좋소.” 이 모순된 진술은 정당한가? 논리적 진술이라는 관점에서는 부당하지만, 현실에서는 볼 수 있는 것이라고 할 것이다. 집약적 관망 안에서 세부 사항의 들고 남, 또 전체의 긍정이나 부정은 사회적, 정치적 관찰에서 흔히 보는 일이다. 그것은 사회적 인식의 전형적 방법을 나타낸다. 사회적 현실을 말하면서, 그 사실성을 뒷받침하기 위하여 통계 숫자가 인용되는 것은 지금에 와서 하나의 관용(慣用)이 되었다. 코로나바이러스와 관련하여, 접종자가 53.0%인가 77.4%인가는 사태의 심각성을 파악하는 데에 초미의 관심사가 되어 있다. 여기서 숫자는 불안감 또는 안심의 정도를 나타낸다. 그것은 전체적인 관점에서의 이야기이다. 감염되고 사망하고 하는 개체의 경우는 어떻게 할 것인가? 일반적인 안정을 추구하는 마음에는 그러한 것은 생각하여야 할 사항이 아니다. 전쟁에서 전사가 많이 나오지 않았다고 다행스럽게 생각하는 지휘자의 마음가짐도 여기에 해당한다.

다시 작품으로 돌아가서, 달리기를 하는 13 아이는 조선 반도의 13도를 말하는 것일 수 있다. 그리고 아이들이 무서운 아이들과 무서워하는 아이들로 나뉜 것은 어떤 정부 정책에 대한 반응이 찬반(贊反)으로 갈린다는 것을 말하는 것일 수 있다. 정책이 그 대상자에게는 무엇을 의미하든지, 정책 당국자로서는 그러한 추상화된 집계가 중요하다.

 

앞에 언급했던 신문 보도는 이상의 작품 중, 「三次角設計圖」와 「建築無限六面角體」의 제목과 시 내용에 나오는 기하학 도형이 일정한 과학적 해명으로 해독되었다는 내용이었다(한국일보, 2021.10.6.). 이것을 다룬 논문은, 문학작품을 과학적으로 접근하여 어떤 해결을 찾았다는 점에서도 읽어볼 만한 글로 생각된다. 필자는 이 논문을 아직 읽어볼 기회를 갖지 못했다. 그러나 한 가지 알고 싶은 것은 기하학적으로 해명될 수 있는 이 시들이 인간 현실에 대하여 무엇을 묻고, 해명하고 있는가 하는 것이다.

「建築無限六面角體」의 예를 들면, 그것을 미쓰코시 백화점의 천정의 모습으로 읽어 볼 수 있다는 설명도 있지만, 시의 주제 파악은 더 넓은 질문의 지평에서 제기되어야 한다. 그래야 시의 현실성이 보인다. 이 시의 ‘무한육면각체’는 삶의 현실을 총체적으로 도형화하려 한다. 이상 시 해석에서 흔히 이야기되듯이 건축설계사의 수련을 받은 전문가로서 그는 하나의 설계도가 다양하고 복합적인 건축 현실을 집약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을 것이고, 그것이 삶의 현실—다기다양(多技多樣)한 삶의 현실이 하나의 기본구도 속에 수용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을 것이다.

이 시에서 현실을 상징하는 것은 상품화된 세계에서의 모조 상품이다. 그것은 물론 인간의 됨됨이에도 나타난다. 이상이 이 시에서 생각하는 것은 근대화가 가져온 모조(模造) 문화로 보인다. 그것은 일본 문화를 지칭하는 것이라고 할 수도 있고, 그보다는 서양이나 일본을 모방하고자 하는 조선의 문화, 조선 사회를 염두에 둔 것으로 말할 수도 있다. 이 시에서 모조 문화를 대표하는 것은 인간, 그 중에도 여성이다. 그것이 여성의 의상이나 화장에 나타난다. 동양 여성이 프랑스의 코티 항수를 쓰지만, 그것은 동양의 계절에는 맞지 아니 한다. “마르세이유의봄을解纜한코티의향수의마지한東洋의가을”--이와 같이 봄과 가을이 뒤바뀌는 것이다. 이러한 모습은 여성의 치장 전체에도 나타난다. 날씬한 또는 마른 모습의 현대 여성이 그것을 보여준다. 신고 있는 양말도 ‘去勢’된 듯하고, 얼굴에 쓰고 있는 ‘년포’도 ‘貧血’상을 하고 있고, 얼굴빛도 하나가 되어, ‘참새다리’ 같다. 의상을 한 전체 모습은 날씬함을 강조하여, 남자와 여자의 상하체를 교환한 듯하다. 이것은 여성 신체의 하위 부분의 날씬함으로 강조하여, 치마나 기모노에서 보는 바와 같은 풍성한 모습과 대조된다. 그리고 남녀 관계도 지속되지 못하는 단기적인 것이 된다. 관찰자는 “食堂門깐에方今到達한雌雄과같은朋友가 헤어진다”고 한다.

이러한 부조화는 비유적으로는 거대한 Z伯號 (체펠린[백작]의 비행선) 위에 (날씬한 몸매를 위하여 사용할 수 있는) 회충체 광고를 보는 것 같기도 하고, 고층의 빌딩 위에 만드는 정원 같기도 하다. 이러한 외래문화가 가져오는 문화적 부조화는, 시의 제목을 포함하여, 더 일반화된 추상적 개념으로 표현되기도 한다. 가령, 시에 나오는 설명, “平行四邊形對角線方向을推進하는莫大한重量”은 모방 또는 모조 문화의 모순을 나타낸다. ‘평형사변’의 구도 안에서 대각선을 그리면서 앞으로 나가려고 하는 운동이 얼마나 힘든 것일까, 여기의 표현은 모조 문화의 이러한 모순을 말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기하학적 상상력을 종합하는 비유에서는, 그 모순을 넘어갈 수 있는 가능성을 시사하는 것도 있다. 시에 나오는 거창한 표현, “地球를模型으로만들어진地球儀를模型으로만들어진地球”는 그러한 가능성을 인정하는 표현이다. 사람의 지각에서 출발하는 사물 판단은 일반개념을 매개로 하여 행해진다, 우리의 지각에서 실재하는 말(馬)로 판단되는 말은 말(馬)이라는 일반 개념에 의존함으로써 그렇게 지각되고 판단된다. 이러한 과정은, 사물의 세계에 대하여, 별도로 ‘이데아’의 세계가 따로 존재한다는 플라톤적인 생각에 이를 수도 있다. 지구의(地球儀)는 지구를 모방하고 추상화한 것이지만, 지구의 원형(原形)은 어떻게 하여 존재하는 것일까? 건축설계자는, 우주의 창조주와 비슷하게, 추상적인 구도를 만들고, 그것에 기초하여 현실의 건축물을 만들 수 있게 하는 사물의 원형, 템플레이트(template)를 만드는 사람이다. 이상은 건축설계자의 모델로서 당대의 문화 현상을 설명하려 하였다고 할 수 있다.

 

이상이 관심을 가졌던 것은, 되풀이 하건대, 문화 현상의 도형인데, 여기에서 문화현상은 주로 ‘근대화 Modernization’에 관련된 문화 현상이다. “마르세이유의 봄”이 “동양의 가을”을 맞이하게 되는 것은 그러한 문화 현상, 문화 변화의 일부가 아니겠는가? 다만 그것이 조선/한국에 관계될 때, 그것은 “식민지근대성”을 말한다고 할 수 있다(Gi-Wook Shin and Michael Robinson(1999), 「Colonial Modernity in Korea」 참조). 다만 ‘식민지’는 부정되어야 할 현실이고 ‘근대성’은 조금 더 복합적인 의의를 가진 현실이다. 19세기 말부터 조선 정부와 국가 일반이 지향하였던 것은 근대화였다. 이 관점에서 일본의 선진적인 근대화는 하나의 모범이 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일본의 식민지 통치는 모범으로서의 일본의 의미를 부정적인 것이 되게 한다. 1920년 이후 식민 통치의 기본이 “무단통치(武斷統治)”로부터 소위 “문화통치(文化統治)”로 바뀜에 따라, 조선인의 관점에서 근대화와 일본의 관계는 더욱 모호한 것이 되었을 것이다. 근대화의 한 형태를 보여주는 일본이 식민 통치의 원흉이 된 것이다. 이러한 모호함은 근대화와 관련하여 생각할 수밖에 없는 현실이다. 서방세계에서 조성된 동방세계에 대한 허상(虛像)을 밝히고자 한 에드워드 사이드(Edward Said)의 <동방세계론(Orientalism)> 이후 번성하게 된, ‘식민주의’와 ‘식민주의 이후’에 대한 연구들에서 밝히는 사실도 이와 비슷하다.

 

근대성 또는 근대화는 서양의 문화적 창조물이고, 그것은, 많은 경우, 제국주의 또는 식민주의 이데올로기의 일부이다. 그렇기는 하나 그것은 역사의 현시점에서 인간 문명의 한 단계—진보하는 한 단계를 나타낸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그것은 인간성에 내재하는 어떤 속성—자유의지, 그 의지의 이성 지향을 나타내고 거기에 기초한 문명의 총체적 구조를 나타낸다. 다만 그 근대성의 문명이 인간의 보편적 가능성을 완전히 구현한다고 할 수는 없다. 그것은 다른 문명적 가능성의 관점에서 비교 비판되고 분석되어야 한다.

 

식민지 근대성의 시기가 지난 다음에도 정치와 문화 그리고 정치와 문학의 관계는 비슷한 변증법 속에 있다고 할 수 있다. 어떤 시기에도 정치 이데올로기가 정치와 사회, 정신 생활 그리고 감각과 지각의 표현—이 모든 것을 지배한다고 할 수는 없다. 그러면서도 정치와 정치가 내거는 이데올로기가 사회질서의 향방에 크게 작용하는 것은 사실이다. 식민지 지배가 사라진 다음에도 좌우 대립의 지배적인 이데올로기가 문학과 우리 마음을 떠나지 않았다.

그러나 문화와 문학은, 그 본질에 있어서 사람의 일상적 삶 그리고 그것의 토대가 되는 감각과 지각에 호소하는 것이기 때문에, 집단의 삶의 향방에 관계되는 이데올로기에 완전히 종속할 수는 없다. 문화와 문학은 감각적인 삶의 심미적 구성을 지향한다. 그러면서도 그 구성을 위한 현실 재현의 활동은 사회 그리고 삶의 전체를 하나로 아우르는 지배 이데올로기를 피해갈 수 없다. 문화적 그리고 예술의 심미적 표현에 있어서 편리한 방편이 이데올로기이다. 그리고 그것을 통하여 예술은 사회적 정당성을 얻는다. 그러니 삶의 예술적 표현은 사회를 관통하는 1)지배적 생각의 흐름을 나타내는 추상적 이념 2) 개체의 나날의 삶과 지향 3) 삶의 심미적 형상화—이러한 것들을 하나로 수용하게 된다.

김우창
평론가, 고려대학교 명예교수, 1937년생
저서 『김우창 전집』 『김우창 평론선집』 『지상의 척도』 『심미적 이성의 탐구』 『자유와 인간적인 삶』 『정의와 정의의 조건』 『깊은 마음의 생태학』 『체념의 조형』 『보편 이념과 나날의 삶』,
역서 『미메시스』(공역) 『가을에 부쳐』 『나, 후안 데 파레하』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