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에세이 - 길을 묻다
‘탈가치’, 21세기의 시대정신인가?

  • 인문에세이 - 길을 묻다
  • 2021년 겨울호 (통권 82호)
‘탈가치’, 21세기의 시대정신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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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무주의가 문 앞에 서 있다. 모든 손님 중에서 가장 무시무시한 이 손님은 어디에서 우리에게 온 것인가?” 프리드리히 니체가 공포 영화처럼 묘사하고 있는 허무주의는 한때 가장 무서운 손님으로 여겨졌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가장 익숙하고 친밀한 장소는 두말할 나위 없이 집이다. 집을 나가면 고생한다는 말에는 이미 집 밖에는 악마와 같은 무서운 존재가 득실거린다는 전제가 깔려 있다. 세상을 배운다는 것은 언제나 낯설고 무서운 것들이 익숙해지고 친숙해진다는 것을 의미한다. ‘무시무시하다’, ‘무섭다’는 뜻의 독일어 낱말이 집을 뜻하는 낱말과 연관이 있다는 사실은 우연이 아니다. 우리에게 낯선 것은 언제나 무섭고 으스스한 기분을 느끼게 한다.

니체가 다음 두 세기의 역사로 예언했던 허무주의는 이제 진부한 용어가 되어 일상화되었다. 우리의 현실이 너무 급격하게 변화하여 과거에는 충격적이고 놀랍던 것이 이제는 더 이상 충격적이지 않게 되었는지도 모른다. 19세기 말 허무주의가 예고된 후 1세기 반이 지난 지금, 21세기에 허무주의는 일상화된 평범한 낱말이 되었다. 어떤 시대나 진지한 얼굴로 되묻는 철학자와 괴팍한 인문학자들이나 그 깊은 안에는 여전히 심오한 의미가 숨겨져 있는 듯 얘기하지만, 사람들은 이 말을 들으면 그 뜻이 무엇인지를 익히 알고 있다는 뜨악한 표정을 짓는다.

니체의 비유로 표현하자면 문밖에서 우리를 공포로 몰아넣던 가장 무시무시한 손님은 어느새 집 안으로 들어와 안방을 차지하고 있는 친숙한 존재가 된 것이다. 21세기는 허무주의의 경험과 정서가 보편화된 시대다. 허용되지 않는 것은 없다는 세계관으로 무장한 포스트모더니즘을 겪은 현대인들은 보편적이고 절대적인 가치는 존재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어떤 가치도 다른 가치보다 더 우월하다고 주장할 수 없다는 사실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인다. 모든 가치가 상대적이라는 사실을 당연하게 생각하면, 우리는 사실 객관적 진실보다 우리의 감정에 호소하는 ‘가짜 뉴스’(fake news)를 쉽게 비난할 수 없다. 21세기는 내가 진실이라고 느끼면 진실이 되는 허무주의 시대이다.

허무주의는 이제 평범한 일상이 되었다. 이런 허무주의를 왜 무시무시한 손님이라고 그랬던 것일까? 허무주의는 결코 우리의 삶 속에서 문득문득 찾아오는 쓸쓸한 감정을 말하지 않는다. 자신의 삶과 존재가 무가치하고 무의미하게 느껴져 매우 허전하고 외로운 감정을 한 번도 가져본 적이 없는 사람이 몇이나 되겠는가? 허무는 보편적인 실존의 감정이다. 그러므로 사회적 궁핍이나 생리적 퇴화가 허무주의의 원인은 아니다. 오늘날 우리가 겪고 있는 허무주의는 필연적으로 도래할 수밖에 없는 역사의 산물이기 때문에 무시무시한 것이다.

허무주의는 근본적으로 모든 가치의 ‘탈가치화’ 과정이다. 한때는 신이 우리의 삶에 의미를 부여하는 절대적 가치였다. 신은 길이고 진리였다. 신의 말씀대로 사는 것이 가치 있는 삶으로 여겨졌다. 언제부터인지 우리는 신을 의심하기 시작하였다. 신에 대한 믿음으로 내세의 피안으로 도피하려고 하였지만, 내세에 대한 믿음이 사라진 후 우리는 현실 속에서 천국을 세우려고 한다. ‘신은 죽었다’는 말은 신에 대한 믿음이 남아 있을 때만 도전적이고 충격적인 의미를 가질 뿐이다.

물론 신이라는 절대적 가치에 대한 믿음이 사라졌다고 해서 ‘가치’ 자체에 대한 믿음마저 사라진 것은 아니다. 세속화는 종종 신적인 것, 정신적인 것에 대한 믿음이 인간적인 것과 물질적인 것에 대한 믿음으로 대체되는 과정으로 묘사된다. 돈을 최고의 가치로 여기고 숭배하는 현대의 배금주의는 사실 ‘신’의 자리에 ‘물신(物神)’을 세웠을 뿐이다. 신은 사라졌지만, 가치는 여전히 그 자리에 있는 셈이다. 문제는 가치가 신이 아닌 인간에 의해 만들어진다는 사실을 인식하는 순간 어떤 가치도 보편적일 수 없다는 생각이 널리 퍼진다는 사실이다. ‘모든 것이 통용된다(anything goes)’는 포스트모더니즘은 가치의 상대화를 극단적으로 표명한다.

가치의 탈가치화 과정의 마지막 단계는 무엇일까? 니체의 말을 다시 한 번 들어보자. “이제까지의 인류의 이상주의 전체는 막 허무주의로 변하려 하고 있다. 절대적 무가치성, 다시 말해 무의미성에 대한 믿음으로 바뀌려 하고 있다.” 허무주의는 이상주의의 종말이다. 목표도 없다. 사람들은 종종 ‘왜 사는가?’라고 묻는데, 이 물음에 대해 대답할 수 없는 상태가 바로 허무주의다. ‘모든 것은 아무 의미가 없다.’ 사람들이 있지도 않은 의미를 온 곳에서 찾다가 의미를 찾을 용기를 잊어버린 심리적 상태가 허무주의다. 사람들이 이런 허무주의를 더 두려워하지도 않고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인다는 것은 무의미성에 대한 믿음이 보편화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탈가치화’의 허무주의 역사가 완성된 것이다. 우리는 어떤 가치도 믿지 않는다. 그런데 우리는 과연 이런 공허함과 무의미성의 심연을 가지고 잘 살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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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실은 철학자보다 훨씬 더 철학적이다. 미네르바의 부엉이는 황혼이 깃들 무렵에야 비로소 날기 시작한다는 헤겔의 말처럼 철학은 사건이 일어난 뒤에야 사건의 의미를 성찰하는 경향이 있다. 우리에게 지금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가를 알려주는 것은 다름 아닌 현실이다. 이런 점에서 ‘지금 그리고 여기’의 현실은 훨씬 더 위험하고 무시무시하다. 문밖에 있던 손님이 이미 안방을 꿰찬 지 오래되어 이미 친숙해진 것처럼, 평범하고 진부해진 허무주의가 더 무서운 까닭은 무엇일까?

허무주의를 다시 생각하게 만든 것은 바로 우리 사회에 만연한 여러 갈등 중 하나인 ‘세대 갈등’이다. 시대의 변화를 세대의 갈등으로 묘사하고 해석하는 것이 어제오늘의 일은 아니지만, 우리는 요즘 새로운 세대를 바라보는 시각에서 시대정신을 읽어낼 수 있다. 사람들은 종종 밀레니얼 세대, MZ 세대를 이해할 수 없다는 말을 듣는다. 물론 이전에도 베이비 부머, X 세대 등 새로운 세대를 지칭하는 용어는 많았지만 대부분 특정 세대가 공유하는 역사적, 사회적 경험을 이해할 수 있었다. 인터넷과 스마트폰과 함께 성장한 MZ 세대가 다른 세대들보다 디지털 문화에 익숙하다는 공통점을 갖고 있지만, 이것만으로는 새로운 세대가 대변하는 시대정신을 파악할 수 없다.

MZ 세대를 관통하는 시대정신은 ‘탈가치’다. 이러한 허무주의적 현상의 원인을 사회적 궁핍과 문화적 퇴폐에서 찾는 것은 오류이지만, 우선 이들이 처한 사회적 환경과 시대적 맥락을 살펴볼 필요는 있다. 일반적으로 밀레니얼 세대는 1980년부터 2000년까지 태어난 세대를 지칭한다. 미국에서는 레이건부터 조지 W. 부시의 재임 기간 동안 태어난 세대라면, 우리나라에서는 성장기에 IMF 경제 위기를 겪은 세대이다. 엄밀히 말해 세대를 가르는 자연적 경계선은 없다. 우리 사회에서는 『90년생이 온다』라는 어느 책의 제목처럼 90년대생은 현재의 20대와 30대 초반의 세대를 가리킨다. 이 세대는 과연 어떤 가치를 지향하는가? 이 물음에 대한 답이 바로 ‘탈가치’다.

‘요즘 애들, 요즘 어른들’이라는 말이 언제나 있었던 것처럼 세대 갈등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것이다. 18세기의 질풍과 노도 시대, 19세기의 청년 헤겔파, 20세기의 68 학생운동은 고유한 역사적 경험을 토대로 매우 특징적인 세대를 구성하였다. 괴테의 작품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질풍과 노도 시대’는 계몽주의적 합리주의에 대한 반동으로서 감성을 통한 개인의 자유로운 발전을 추구하였다. 19세기의 청년 헤겔파는 독일 관념론에 대한 반동으로서 사회적 변혁과 혁명을 통해 자유를 실현할 수 있는 사회적 제도를 모색하였다. 마찬가지로 ‘68세대’는 권위주의적 제도를 혁파하고자 하였다. 새로운 세대를 대변하는 과거의 모든 운동이 기존 세대와는 ‘다른 가치’를 추구하였지만, 그렇다고 가치 자체를 부정한 것은 결코 아니었다.

세대 갈등은 전통적으로 ‘가치 갈등’이었다. 68세대는 전후 물질주의적 가치에서 탈물질주의적 가치로 ‘조용한 혁명’이 일어나던 시대에서 성장하였다. 그들의 탈권위주의는 탈물질주의적 가치에 대한 선호로 정당화되었다. 어떤 가치가 더 우월한가? 어떤 삶이 더 가치가 있는가? 이 물음에 대한 대답이 세대를 갈라놓았다. 그렇다고 세대들의 가치관 차이가 심연처럼 극복할 수 없었던 것도 아니다. 그 차이는 처칠의 말이 암시하는 정도였다. “30세 밑의 사람이 자유주의자가 아니면 가슴이 없고, 30세 이상의 사람이 보수주의자가 아니면 머리가 없다.”

그렇다면 요즘 애들과 요즘 어른들의 차이도 가치 갈등에 불과한 것인가? 문제는 그렇게 간단하지 않다. 세대 차이는 역사적 변동의 현상일 뿐이다. 우리는 이러한 변화의 경향을 읽어내야 한다. 본질은 시대 변화다. 물론 시대 변화를 파악하려면, 새로운 세대가 출현하는 사회적 맥락을 이해해야 한다. 세대 구별은 언제나 세대를 갈라놓는 사회적 위기에 의해 규정되기 때문이다. 새로운 세대로 표출되는 우리 사회의 위기는 도대체 무엇인가? 90년대생들은 자신들이 처해 있는 사회적 환경을 어떻게 인식하는가?

90년대생이 맞닥뜨린 현실은 적나라한 경쟁이다. 경쟁은 어느 사회나 존재한다. 경쟁은 물론 좀 더 나은 사회를 만드는 동력이 되기도 하지만, 여기서 적나라하다는 것은 출구가 없다는 것을 뜻한다. 우리가 ‘K 콘텐츠’라고 자랑하는 〈오징어 게임〉이 보여주듯이 남을 죽여야 내가 살 수 있다는 정글의 법칙이 지배한다면, 그것은 파괴적 경쟁이다. 우리나라는 취준생 10명 중 4명이 공시족인 나라이다. ‘안정’이라는 가치가 지배적인 사회에서 ‘자유’를 실현할 수 있는 다양한 가치들이 실현될 리 없다. 아무리 노력해도 안정적인 일자리를 얻을 수 없는 사회에서 자신의 가치를 실현할 수 있는 직업을 원하는 것은 사치다. 사회의 도움을 기대할 수 없는 현실 속에서 믿을 수 있는 것은 결국 자기 자신밖에 없다. 이렇게 사회에는 기대도 하지 않고 관심도 없는 ‘위험한 개인들’이 탄생한다.

우리는 모두 개인으로서 자유롭게 자기 삶을 살아가길 원한다. 개인주의는 모든 삶의 자유와 의미의 토대가 개인이라는 세계관이다.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는 다른 사람을 이용하는 것도 마다하지 않는 이기주의와는 달리 개인주의는 모든 인격을 그 자체 목적으로 대우한다. 굳이 개인주의를 철학적으로 정당화하지 않더라도, 개인주의 자체가 하나의 가치라는 점은 분명하다. 그렇다면 90년대생은 진정한 개인주의를 추구하는가? 모든 가치의 기준이 개인에 있다는 개인주의를 수용하면, 우리는 다른 사람의 가치도 인정해야 한다. 개인주의는 필연적으로 가치 다원주의를 수반한다. 개인은 자신만의 가치를 찾고 실현하려 노력하지만 동시에 다른 사람들의 가치를 인정하면서 더불어 살아갈 수 있는 합의점을 모색한다. 그렇기 때문에 어떤 사람은 가치 다원주의 시대에 가장 보편적인 가치는 ‘관용’이라고 주장한다. 여기서 우리는 한국적 개인주의,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한국적으로 왜곡된 개인주의의 이중성을 엿볼 수 있다. 세대 갈등의 맥락에서 종종 등장하는 ‘꼰대’라는 말이 암시하는 것처럼 새로운 세대는 간섭을 싫어한다. 물론 나이가 많고 지위가 높다고 다 꼰대가 되는 것은 아니다. 90년대생이 젊은 꼰대를 더 싫어하는 것처럼, 자신의 관점에서 남을 가르치려 드는 사람은 모두 꼰대다. 역설적이지만 꼰대는 여전히 가치를 갖고 있다. 꼰대는 자신의 가치관을 남에게 강요하고, 오지랖이 넓어 자신의 관점에서 남의 일에 간섭하기를 좋아할 뿐이다.

90년대생이 다른 세대보다 개인화된 것은 분명해 보인다. 그들은 집단주의의 병폐를 거부하고, 권위주의를 증오한다. 그들은 분명 개인주의적이다. 그렇다면 유독 90년대생에게서 강하게 나타나는 혐오 문화는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밀레니얼 세대의 주요 활동 무대인 온라인 공간에서 벌어지는 공격적이고 상호 배타적인 젠더 갈등은 개인주의적이기보다는 집단주의적이다. 디지털 시대의 팬덤 문화는 극단적으로 개인화된 세대에게 일종의 집단주의적 안정감을 제공한다. 밀레니얼 세대는 자신이 소비하는 팬덤과 자신을 동일시함으로써 정체성을 얻는다. 그러나 팬덤은 지속적이지 않다. 빠른 속도로 변화하는 현대사회에서 팬덤은 궁극적으로 어떤 집단에도 소속될 수 없다는 의식을 보편화할 뿐이다. 어떤 공동체에도 속하지 않는 개인들이 공동체에 대한 의무와 책임 의식이 없는 것은 당연한 결과이다.

개인들이 서로 자유롭게 생활할 수 있는 공동체를 구성하는 것이 개인주의라고 한다면, 공동체에 소속되지 않은 개인들이 모든 간섭을 물리치면서 동시에 온갖 종류의 책임마저 거부하는 것이 ‘K 개인주의’처럼 보인다. 그들은 사회적으로 비록 개인화되었지만, 개인주의를 아직 내면화하지 못한 것이다. 그들에게 개인주의는 ‘아직’ 추구할만한 가치가 아니다. 어떤 가치도 의미가 없다고 느끼는 사회에서 개인주의는 단지 ‘각자도생’의 다른 표현일 뿐이다.

탈가치는 허무주의의 극단적 형태다. 우리는 과연 삶이 무의미하다고 생각하면서 잘 살아갈 수 있을까? 이 물음은 ‘탈가치도 과연 가치인가?’라는 물음으로 이어진다. 가치는 우리가 소중하게 생각하여 우리의 삶의 목적이 되는 것을 말한다. 우리는 삶의 목적을 생각하지 않고 각자도생을 강요하는 이 거친 삶을 극복할 수 있을까? 니체는 허무주의가 강한 정신력의 징후일 수 있다고 말한다. 그가 꿈꾸는 ‘능동적 허무주의’는 절대적 가치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실존의 조건으로 받아들이면서도 동시에 삶의 의미가 될 수 있는 새로운 가치를 창조한다.

우리는 지금 수동적 허무주의를 격렬하게 경험하고 있다. 생존 자체가 문제 되는 현실과 싸우면서 지칠 대로 지친 밀레니얼 세대는 기존의 목표와 가치들을 더 이상 신뢰하지 않는다. 지금의 삶에 만족하자는 ‘욜로’와 ‘소확행’은 내일은 없다는 90년대생의 좌절과 절망감을 표현할 뿐이다. 내일을 생각하지 않고서 가치를 창조할 수 없다. 개별적인 가치들이 서로 싸울 때는 그래도 우리가 내일을 꿈꾼다는 것을 의미한다. ‘탈가치’는 미래에 대한 희망의 부재다.

탈가치가 가치의 부재라는 부정적 상태가 되어서는 안 된다. 탈가치는 우리를 억압하는 가치로부터의 해방이 되어야 한다. 기존의 가치에서 벗어나 우리의 삶을 더욱 아름답게 만들 수 있는 새로운 가치를 창조해야 비로소 우리는 진정한 개인이 된다. 그래서 어느새 집 안으로 들어와 친숙해진 허무주의라는 손님이 더욱 무시무시하게 느껴진다. 허무주의를 너무 당연하게 여기는 현실이 두려운 이유다. 밀레니얼 세대가 더 이상 신세대가 아니게 될 먼 미래에 지금의 탈가치가 새로운 가치 창조를 위한 산통이기를 기대해 본다. 허무주의는 여전히 우리의 삶의 의미를 일깨워줄 문밖의 무시무시한 손님이어야 한다.

이진우
포스텍 명예교수, 1956년생
저서 『불공정사회』 『균형이라는 삶의 기술』 『한나 아렌트의 정치강의』 『의심의 철학』 『니체의 인생강의』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