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특집
④비평-가의 언어, 어떤 무기력을 응시하는 쓰기에 대해

  • 기획특집
  • 2021년 겨울호 (통권 82호)
④비평-가의 언어, 어떤 무기력을 응시하는 쓰기에 대해

‘한국문학과 정치적 상상력’이라는 주제로 글을 준비한 일이 이번을 포함하여 1년 사이 벌써 두 번이다. 그만큼 이 주제가 시기를 막론하고 중요하게 다뤄져왔다는 것을 방증하는 것일 텐데, 이는 한국에서 문학이 의미화되어온 일련의 역사적 과정에 의한 것이기도 하다. 요약건대 한국문학은 중국에 기원을 두는 사회과학적 담론을 포괄하는 의미의 문학과, 오늘날 ‘문학’의 의미 구성에 영향을 준 허구적 성격을 지닌 것으로서 literature와 분가쿠(ぶんがく, 文學)의 역어로서의 근대 문학이 서로 경합하고 영향을 주고받으며 그 의미를 형성해왔다. 때문에 한국문학은 사회적·정치적인 입장을 표명하고 그와 관련한 메시지를 전달하는 미디어로 작용해야 한다는 책임감을 부여받으면서도, 다만 내용의 사실적 전달만을 목적하지 않고 가장 문학적인 방식(달리 말하면 미학성을 추구한다고도 할 수 있을)으로 말할 것을 요구받았다.

정치성과 미학성이 문학 안에서 서로 대치되는 개념이 아니라 가장 미학적인 것이 정치적인 것이 될 수 있다는 가능성을 타진하는 논의는 진은영의 「감각적인 것의 분배: 2000년대의 시에 대하여」(《창작과비평》 142호, 2008)를 중심으로 전개된 바 있다. 진은영은 후속 연구(진은영, 「미학적 아방가르드의 모럴」, 《문학의 아토포스》, 그린비, 2014 )에서 관습적 규범에 대한 감각의 분배, 그리고 “정치와 삶에 대한 새로운 감각을 환기시키는 재현 방식을 발명”(138)하는 것으로서 문학의 모럴에 대한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요컨대 문학과 정치성의 문제는 이러한 방식으로 최근까지도 비평의 담론장 안에서 다뤄지고 있다.

그런데 정치성과 미학성을 대타적인 것으로 간주해온 역사1)의 변주 및 새 시대의 감각을 바탕으로 하는 성찰의 과정에서 비평은 그 논의의 대상에서 약간 비껴있지는 않았는가. 이러한 의문을 던지는 까닭은 비평 역시 문학인 한 ‘비평의 형식’에 대해 고민해야 한다는 의미에서만은 아니다. 그보다는 여느 때와 달리 쓰는 자의 자기 정체성이 글에 적극적으로 반영되는 이 시기에 비평 또한 냉철하고도 이성적인 판정자로서의 정체성을 고수하는 대신 쓰는 자의 입장을 좀 더 적극적으로 드러낼 필요가 있음에 착안하여 ‘비평이라는 발화 형식’에 접근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우선 이러한 질문을 던지는 이 글이 엄밀하게 말해 비평이 아니라 비평적 에세이로 쓰였다는 점을 다시금 짚고 간다. 비평에서 ‘나’를 드러내는 일은 비평이 그간 고수해왔던 엄정성 속에서 여전히 취하기 어려운 측면이 있다는 점을 고려하여 비평적 논의를 가져오되 ‘에세이’의 형식을 적극적으로 취해도 좋을 것이다. 다만 다른 문학 장르에 비해 비평이 ‘나’를 전면화하지 않았다고 할지라도, 해석과 분석의 기초적 틀이 되는 ‘관점’의 개인성2) 즉 비평적 언어를 택해 쓰는 ‘나’는 과연 누구이며 어떻게 구성되었는지에 대한 자기 해석에 기초한다는 점에서 이미 개인적인 것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개인적’이라는 표현은 한 명의 특수성에 매몰되지 않고 특정 시대 담론, 시대 감수성 등을 대변하는 개념일 수 있음은 물론이다. 이러한 전제 위에서 이 비평적 에세이에서는 비평적 관점에서의 진단이 아니라 비평가의 입장에서 비평을 쓰는 일 혹은 한국 문학을 하는 일에 대해 다뤄보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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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평가 중 적지 않은 수가 대학원을 겸하고 있다. 문학이 본래 박학(博學)을 뜻했다는 점과 더불어 근대 문학 장르로서의 비평이 이론을 겸비해 문학의 방향성을 타진해왔던 역사가 있어온 바, 비평이 제도 교육과 멀어지기 어려운 지점이 있겠으나 이 지면에서 이 이상으로 상술하지는 않을 것이다. 다만 제도 교육과 멀지 않은 비평임을 감안하여 비평과 연구가 동시적으로 수행되는 경우가 많다는 전제하에 이야기를 꺼내보려 한다. 나의 경우 비평과 연구(연구라도 해도 우선은 과정생인 데다 제도 교육을 중심으로 공부한다는 것에 국한되는 표현이겠다)의 영역 모두 관심사를 여성 문학으로 설정하고 있다. 각 영역에서 다루는 텍스트의 시기가 일치하지는 않지만, 여성 문학의 역사적 측면에서의 공부와 언젠가 오늘이 과거가 되는 날 하나의 자료로서 독해될 가능성을 가진 것으로서 현장 글쓰기(비평)가 같은 결에 있다고 생각하고 있다.

스스로의 입장을 이렇게 정리할 때 떠오르는 에피소드가 하나 있다. 몇 학기 전의 일이다. 1930년대 여성 작가들의 작품을 읽는 수업이 끝나갈 무렵 지금까지 검토해온 내용을 토대로 기말 레포트를 쓰고 발표하는 시간이 남아 있었다. 텍스트를 검토하고 어떻게 쓰면 좋을지 줄기도 얼추잡아놓았기에 내용을 전개하는 것에 난처함이 있었던 것은 아니지만 보다 직접적인(?) 차원의 문제가 발생했다. 그 무렵 쏟아져 나오던 성폭력과 관련한 뉴스를 보며 연구/비평하는 글쓰기를 하는 일과 공부하는 일에 무력감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당시 달에 한 번 주기로 쓰던 칼럼의 주제가 대부분 여성 폭력과 관련한 것이었고 원고를 위해 뉴스 사회면의 사건들을 살피며 쌓여온 정보가 있었다. 여성 폭행 및 살인 사건은 언제나 새로운 사건으로서 보도되었고 그것은 단지 정보만이 아니라 절망 또한 누적시켰다. 끊이지 않고 업데이트되는 보도된 폭행/살해 뉴스의 개수만큼은 객관적 사실로 존재했다. 매일, 매주, 매달 어떤 여성이 폭행에 시달리거나 죽어갔고 나는 그러한 사실에 압도되고 있었다.

그 무렵 꼭 칼럼 때문에 찾아본 기사가 아니더라도 전 국민이 주목할 만한 뉴스가 다수 보도되었다. 이를테면 성폭행 혐의가 제기된 전 서울 시장이 목숨을 끊어 해당 사안에 대해 수사가 종결되었다든지, 제자를 성폭행한 제주대 교수에게 피해자가 207번이나 싫다고 말하며 저항했다는 (그런데 왜 207번이나 말했어야만 했나? 불쾌 의사를 얼마나 더 ‘충분히’ ‘정확하게’ 해야 한다고 말하고 싶은가?) 헤드라인이 그러한 것이었다.

작품을 분석하는 것이 중요하지 않은 일이 아니며 과거의 작품을 오늘날의 관점에서 실증 연구하는 것이 의미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여성 문학을 공부한다는 것, 종래에는 그러한 작품에 대해 어떤 연구 담론의 의미를 부여하는 이 모든 행위에 종사하는 것이 당장 어제와 오늘 일어난 성폭행 및 여성 살해의 간극을 메우지 못하는 것처럼 느껴지자 맥이 빠지고야 말았고 끝내는 글을 더 진척시킬 수 없었다. 결국 레포트는 연구보고서의 꼴을 갖추지 못했고 왜 이러한 현실 속에서 연구하고 글을 써야 하는가에 대한 질문이 잔뜩 들어간 형식을 알 수 없는 글이 되었다. 아래는 그 정체 모를 글의 일부다.

 

문학론을 쓰는 자로서, 문학 연구를 하는 정체성을 의식하는 자로서, 연구라는 행위는 그저 자료를 수집하고 글을 쓰고 실적을 내는 것에 불과한 것이 아니라 그것을 하는 자신이 삶의 존재 이유를 거는 것이다. 누군가가 이러한 무게로 연구에 임하고 있을 때 우리는 과연 연구라는 영역에서 어떤 ‘윤리’를 묻고 또 가져가야 할까. (...)

윤리의 문제와 관련해서 이런 이야기를 길고도 길게 꺼내놓은 이유는 실은 작금의 문학계를 둘러싼 윤리 문제와, 하루가 멀다하고 터지는 한국 사회의 젠더 문제(성폭력) 때문이다. 거칠게 말해 지금 삶이 이런데, 여성 문학에 대해 자료를 찾아 레포트를 써내는 것으로 연구 성과는 과연 충분히 보증되는가 묻고 싶었고, 이런 삶에 대한 문제의식 없이 과연 여성 문학에 관련한 글을 쓰는 것만으로 충분한가 자문해야만 했으며, ‘쓸 수 있는 것’과 ‘써야만 하는 것’의 간극에 대해 스스로 생각해보아야만 했다.

지금 내 삶은 어떠한가. 우리는 왜 여성 문학을 공부하고 또 연구하는가. 이 연구의 목적을 밝히는 종류의 글쓰기가 내 삶과 어떻게 유리되지 않을 수 있나. 삶과 유리되지 않은 연구에의 필요성을 절감하는 바 이 글은 이번 학기를 통틀어 내가 스스로를 설득하기 위해 묻고 답해야 하는 질문과 답변서다.

 

이런 글을 질책하는 대신 머리와 마음을 맞대 고민에 동참해주었던 동학과 선생님께 감사하다는 인사를 그때는 미처 전하지 못했다. 실제 삶의 영역과 글쓰기에서 다루는 삶의 괴리가 결코 얕지 않은 시대에 공부를 하고 글을 쓴다는 것은 어떻게 그리고 왜 수행되어야 하는 것일까. 학계에 보탬이 되는 것 이상으로 쓰는 자가 자신의 삶을 어떻게 설득할 수 있고 또 쓰는 행위로서 세상이 조금이나마 변할 수 있을 거라는 믿음을 잃지 않을 수 있을까. 이 물음이 지금껏 쓰는 삶을 먼저 선택해온 이들의 길을 감히 무용하다고 결론 내리는 것이어서는 안 되며 그러고 싶지 않다는 두려움을 매만지면서 그들은 무엇을 믿고 계속 쓰기로 했는가를 묻고 싶었다. 그리고 그들의 삶의 궤적을 역사적 사료이자 스스로의 삶의 태도를 진단하는 하나의 지표로 살펴오면서 이 질문이 결국은 현대를 살고 있는 자신을 향하고 있음을 모르지 않았다.

위의 인용에서는 ‘연구자의 정체성’을 언급했지만, 앞서 연구와 비평의 연결되는 역사성의 지점에 대해서도 간략히 언급한 것과 같이 과거가 된 작품의 역사를 톺아보는 것으로서의 연구와 곧 과거가 되어 (불가피하게나마) 역사의 일부를 이루게 될 현장 비평의 거리가 그리 멀다고 생각지 않는다. 그러니 ‘연구자의 정체성’은 ‘쓰는 정체성’으로 확장해서 이해하는 편이 더 정확할 것이다. 비평이 일차적으로 자신의 관점으로 작품을 해석하는 일이고, 동시에 자신의 관점이 과연 무엇인가에 대한 메타 비평을 동반하는 일이며, 그러한 정체성의 이해와 해석 안에서 시대 윤리가 필연적으로 개입할 수밖에 없는 것이라면, 비평이 무엇을 어떻게 왜 말하는지에 대해 적어도 쓰는 자 스스로 설득하는 시간을 가질 필요가 있을 것이다.

예감해보건대 어쩌면 한동안 혹은 더 오랫동안 내 앞에 우뚝 선 이 질문을 오래 두고 씨름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무용하다는 회의감에 함몰되거나 무기력해지는 대신 앞으로 쓰는 일에 이 질문을 계속 투영시켜보겠다. 삶-정치와 문학 사이에 간극이 있다면 그것을 응시하면서 써보겠다. 이토록 개인적인 고민이 비평의 정치성의 한 부분만큼을 차지하게 될지 모를 일이다.

 


1) 예컨대 평론 장르를 독립적이고도 독보적으로 개척했다고 평가받는 1920~30년대 카프의 논쟁에서도 이에 대한 실마리를 얻을 수 있다. 김기진을 중심으로 전개된 ‘내용형식논쟁’은 문학이 프롤레타리아 각성이라고 하는 삶 정치 영역에서의 목표를 그저 전달만 하면 되는 것이 아니라 문학적인 꼴을 갖춰 성취해야 한다는 주장으로 요약할 수 있다.
2) 이때 개인성이란 독립적 개인의 특수성을 의미하지 않는다. 한 명의 개인이 어떤 관점을 제출하는 과정에서 반영된 역사적 맥락, 사회정치적 정체성 등을 모두 포괄하는 개념으로 이 글에서 사용하였다.

선우은실
평론가, 1991년생
평론 「기후 위기와 문학이라는 서사/시나리오」
「약자-되기로서의 개인적 정치성과 에세이라는 언어 형식」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