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식당
나의 짧은 냉면 연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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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1년 겨울호 (통권 82호)
나의 짧은 냉면 연대기

해방 직후 속초에서 월남한 우리 가족이 강원도 장성(태백)을 거쳐 정착한 곳은 경북 봉화군 춘양이었다.

식구 열 명의 생계는 마흔을 갓 넘긴 아버지 한 사람의 어깨에 지워졌다. 그런데 아버지는 천생의 장사꾼이었다. 이것저것 손대다가 마침내 시작한 것은 냉면 장사였다. 학교에서 돌아오면 나는 커다란 솥에서 힘차게 솟아오르는 김과 국수틀에서 밀려 내려오는 면발의 모양을 낯선 눈으로 바라보곤 했다. 하지만 별로 먹고 싶은 마음이 들지는 않았다. 엄마가 열무김치에 참기름 떨어트려 비벼주는 밥이 내게는 최고였다. 그래도 어쨌든 장사는 성업이었다.

오랜 세월이 지나서 가끔 그 시절을 돌아본다. 북한 음식인 냉면이 어떻게 경상도 산촌에서 성공할 수 있었을까. 대부분 농민인 당시의 춘양 주민들에게 외식문화가 있었을 리 없다. 그들에게 냉면은 허술한 외지 음식일 뿐이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이 의문은 춘양을 지나는 철도 공사가 그 무렵 시작됐다는 사실을 알고서 답을 얻었다. 기록에 따르면 탄광지대인 철암에서 동해의 묵호항을 잇는 초기 영동선은 이미 1940년경에 개통되었고, 중앙선 영주에서 철암까지를 연결하는 영암선 공사는 1949년 4월에 착공되었다. 그러니까 그 무렵 철로 공사장에 모여든 노동자들의 일당 품삯이 우리 집 성업의 원천이었던 것이다. 변변한 일자리가 없던 시절이니 공사 소식을 들은 월남 동포들이 많이 모여들었고, 그들에게 냉면은 떠나온 고향 그 자체였을 것이다. 하지만 전쟁이 나서 공사가 중단된 데다 폭격으로 우리 집이 불타는 바람에 모든 것은 끝장나고 말았다.

 

개성 민속식당   

 

개성 민속식당에 차려진 오곡밥과 반찬  

 

오랫동안 데면데면했던 냉면을 본격 만난 건 1970년 봄부터 여름까지 샘터사에 근무한 덕이었다. 《샘터》를 창간한 분은 널리 알려진 정치가 김재순(金在淳)인데, 그는 평양 출신답게 무척이나 냉면을 좋아했다. 당시 그는 국회 재경위원장이라는 바쁜 직책에도 불구하고 수시로 직원들을 끌고 냉면집을 찾았다. 그렇게 우래옥, 을지면옥, 강서면옥 등을 순례하지 않았나 싶다.

불고기를 좀 먹고 나서 냉면이 나오는 게 정해진 순서였다. 아직 냉면의 진수에 들어서지 못한 나 같은 젊은 직원들은 메밀면의 까슬한 느낌과 육수의 불가해한 풍미를 음미할 겨를도 없이 후루룩 먹어 치우기 마련이었다. 그러면 김재순 선생은 냉면에 대한 예의가 아니라며 일장 강의를 설하기도 했다. 하지만 샘터사를 그만두면서 나의 냉면 학습도 입문만 한 채 더 깊이 들어가지 못했다.

그로부터 한참 지나 우연히 발견한 냉면집이 ‘을밀대’였다.

우연이라고 했지만, 생각해보면 우연이 아니다. 박정희 유신체제가 무너진 뒤 나는 다시 대학에 자리를 얻어 대구로 이사를 했는데, 그래도 한 달에 한 번은 서울에 왔다. 아버지 문안드린다는 명분 아래 사실은 문우들 만나고 창비에 들르는 것이 목적이었다. 그런데 1980년대 중반 창비 사무실이 마포구 용강동에 자리 잡았고 실천문학사도 한동안 사무실을 염리동 큰길가에 두었다. 친하게 지내는 극작가 안종관 형의 근무처 숭문고교도 멀지 않았다. 그러니까 을밀대를 찾게 된 것은 순전히 지리적인 이유였다.

당시에는 을밀대가 아직 소문난 집이 아니었다. 무엇보다 내 발길을 당긴 것은 을밀대라는 낱말이 주는 아련한 향수였다. 들어서면 바로 오른쪽 계산대 앞에 마른 몸집의 중늙은이가 앉아 있었다. 여러 번 들르는 동안 서로 낯이 익고 말을 나누는 사이가 되었고, 그를 통해 메밀 맛의 진국을 배우게 되었다. 어느 날은 그가 커다란 스크랩북을 내밀며 한마디 적어 달라고 했다. 그 스크랩북이 아직 보관되어 있다면 나의 감상적인 잠언도 남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영감님이 작고한 뒤 내 발길은 어쩐지 을밀대에서 멀어졌다. 서울의 명소 중 하나로 점점 이름이 나고 가게도 확장되었지만 내 혀는 그 성세(聲勢)에 동의하기를 거부했다.

 

을밀대의 평양냉면   

 

한반도 주민 누구나가 맛보기를 소원하는 평양의 옥류관 냉면을 나는 두 번 먹어 보았다. 첫 번째는 2005년 7월 남북작가대회에 남쪽 대표단의 일원으로 방북했을 때였고, 두 번째는 2018년 9월 대통령 방북 특별수행단에 끼여 갔을 때였다. 엄격한 안내에 따라 단체로 식탁에 앉은 것이었지만, 냉면 맛은 명불허전 훌륭했다.

 

평양 옥류관 오찬이 차려진 모습. 냉면이 나오기 전.    

 

평양 옥류관에서 점심을 마치고 나와서(2018.9.19.)  

그러나 옥류관 냉면만 훌륭한 것은 아니었다. 안내원을 따라 들어간 옥호 미상의 음식점에서 먹은 다른 냉면도 옥류관 못지않았다. 아니, 냉면 이외의 다른 음식들도 들르는 곳에서마다 감탄을 자아냈다. 알맞게 연하면서 부드럽게 혀를 자극하는 ‘단고기’ 스테이크는 너무도 황홀한 맛이어서 가축 식육에 대한 군소리를 닫게 했다. 2007년 5월 개성에서 맛본 전통음식도 나로서는 최고급이었다. 그러나 맛에 감탄할 때마다 내게는 불편한 감정이 일었다. 거리에서 스쳐본 북한 주민들의 수척한 모습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생각해보면 음식 맛이란 지극히 주관적이다. 어떤 음식이 특정인에게 맛있게 느껴진다는 것은 평생에 걸친 그의 미각 경험의 반영일 뿐이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내가 늘 새기는 격언이 있다. 모든 죄악은 궁극적으로는 인간이 미각의 노예가 된 데서 비롯되었다는 간디의 말씀이다.(『마음을 다스리는 간디의 건강 철학』, 김남주 옮김, 뜨란, 2000)

염무웅
평론가, 국립한국문학관 관장, 겨레말큰사전남북공동편찬사업회 이사장, 1941년생
저서 『민중시대의 문학』 『문학과 시대현실』 『살아 있는 과거』 『자유의 역설』 『문학과의 동행』 『지옥에 이르지 않기 위하여』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