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중 작가 온라인 대화
④이야기

  • 한중 작가 온라인 대화
  • 2021년 가을호 (통권 81호)
④이야기

중국작가협회의 친구 하나가 우리가 이번에 참가하는 중한 작가 대화의 주제가 ‘문학의 온도’라고 알려주면서 발제원고를 준비해야 한다고 말했다. 나는 즉시 이런 주제의 발제원고라면 이미 써놓은 것이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10년 전에 썼다가 2년 전에 수정한 짧은 글로서 작년 말에 베이징 10월문예출판사에서 출판된 산문집 『구름 가의 길(雲邊路)』에 수록되어 있다. 이 글의 제목은 ‘이야기’이다.

내게 가장 먼저 이야기를 들려주던 사람은 할머니였다. 내가 태어나고 1년이 지나 남동생이 뒤따라 세상에 나왔다. 동시에 아이 둘을 돌보기 힘들었던 엄마는 나를 할머니에게 보내는 수밖에 없었다. 당시 할머니는 연세가 예순이 넘은 터였지만 내 인상 속에서는 여든이 되신 지금과 큰 차이가 없었다. 할머니는 짙은 회색 털실로 짠 모자를 쓰고 계셨다. 얼굴에는 주름이 가득했고 허리는 약간 굽어 있었다. 발이 전족을 하느라 싸맸다가 다시 푼 ‘해방각(解放脚)’이었기 때문에 길을 걸을 때면 뒷짐을 지고 머리를 앞으로 숙여야 했다. 뭔가를 들이받으려는 것 같은 모습이었다. 할머니는 위층에 거주하셨고 우리는 침대 하나에서 같이 잤다. 지금은 그 긴 세월에 대해 기억할 수 있는 디테일이 극히 드물다. 기억나는 것이라고는 당시에 걸핏하면 정전이 됐고 인테리어를 하지 않은 위층은 항상 휑하고 어두웠다는 것뿐이다. 쥐들이 지붕 위를 마구 뛰어 다니는 소리와 찍찍대며 다투는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할머니가 기름등을 켜면 콩알만 한 등불이 어둠에 마구 찌그러지면서 이리저리 몰려다녔다. 할머니는 나를 안고 이불 속에 들어가 이야기를 들려주셨고 나는 이야기 속에서 나도 모르는 사이에 잠이 들곤 했다. 때로는 아침에 집 뒤 대나무 숲에서 들리는 새 울음소리나 어린아이들이 큰 소리로 떠들면서 대나무숲 옆 오솔길을 지나가는 소리를 듣고 일찍 잠에서 깨기도 했다. 선잠을 주무시던 할머니도 깼다. 날이 아직 밝지 않은 터라 잠자리에서 일어나도 딱히 할 일이 없던 할머니는 또 다시 이야기를 들려주셨다.

할머니는 아주 많은 얘기를 들려주셨지만 중복되는 것은 거의 없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 이야기들은 크게 두 가지 유형으로 나눌 수 있었다. 그중 하나는 웃기는 코미디 이야기에 가까웠다. 그 많은 이야기들 가운데 가장 간단한 것은 할머니가 가장 자주 들려주셨던 것이기도 했다. 다름 아니라 사위가 장인어른 댁으로 쟁기를 빌리러 간 얘기다. 뜻밖에도 다른 사위 둘도 쟁기를 빌리러 장인어른 댁을 찾아갔지만 쟁기는 하나뿐이라 단 한 명만 쟁기를 빌릴 수 있었다. 장인어른은 하는 수 없이 과제를 제시했다. 사위들에게 뜨거운 죽을 먹게 한 것이다. 죽은 너무나 뜨거웠다. 다른 두 사위는 목구멍이 데어 하얗게 변했는데도 아랑곳하지 않고 한 입 또 한 입 뜨거운 죽을 목구멍으로 넘겼다. 한편 우리의 주인공은 느긋한 자세로 젓가락으로 죽을 휘젓고 죽 그릇에 입김을 불어대면서 중얼거리듯이 말했다. “빌릴 수 있으면 빌리고 못 빌리면 마는 거지 뭐” 결과는 자연스럽게 알 수 있었다. 다른 두 사위는 결국 덴 목구멍이 너무 아파 더 이상 죽을 넘길 수 없었지만 우리의 주인공은 식은 죽 그릇을 받쳐 들고 후루룩 단번에 뱃속으로 털어 넣었다.

할머니에게서 이런 얘기를 들을 때마다 한동안 즐거움이 지속됐다. 나와 남동생도 죽을 먹을 때면 항상 젓가락으로 저으며 먹곤 했다. 그러면서 “빌릴 수 있으면 빌리고 못 빌리면 마는 거지 뭐”라고 중얼거렸다……. 하지만 이러한 이야기들은 할머니가 나중에 들려주신 이야기들 가운데 아주 작은 부분에 지나지 않는다. 할머니가 들려주신 대부분의 이야기는 대단히 무섭고 놀라운 것들이었다. 어쩌면 할머니는 지금까지도 당신이 내게 들려주신 이야기들이 내 머릿속에 어떤 낙인을 남겼는지 생각하지 못하실 것이다. 내 머릿속에 남은 낙인은 귀신이나 도깨비 같은 것이라 수시로 이 세상에 대한 알 수 없는 두려움을 환기시키곤 했다.

이런 이야기도 있었던 걸로 기억한다. 곰 한 마리가 여자를 잡아먹었다. 그런 다음 곰은 여자로 변장해 여자 집에 잠입한다. 여자의 세 아이를 하나하나 다 잡아먹으려는 속셈이었다. 할머니는 곰이 어떻게 여자로 변장했는지, 곰이 어떻게 아이들의 의심을 사지 않았는지는 얘기해주지 않았다. 아이들은 그렇게 자기 엄마를 잡아먹은 곰과 함께 잠을 자게 된다. 할머니가 이 대목을 얘기할 때의 무서움을 나는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다. 그때 나는 여자의 세 아이들이 곧 곰의 진짜 모습을 발견하고는 함께 힘을 모아 엄마의 원수를 갚게 될 거라고 생각했다. 이치대로 말하자면 이는 동화 이야기로 독일 그림 형제의 「빨간 모자와 늑대 이야기」와 유사한 것 같았다. 하지만 두 이야기의 차이는 아주 컸다. 아이들은 누구도 곰의 진짜 모습을 발견하지 못했다. 첫날밤, 아이들은 곰이 밤중에 우적우적 뭔가 씹어 먹는 소리를 들었다. 세 아이가 곰에게 물었다. “엄마 뭘 그렇게 드세요?” 곰이 말했다. “누에콩이야. 너희들도 먹을래?” 아이들이 먹겠다고 하자 곰은 손가락 마디 몇 개를 아이들에게 내밀었다. 아이들은…… 뜻밖에도 엄마의 손가락을 먹은 것이었다. 다음 날, 곰은 또 누에콩을 우적우적 씹어 먹었다. 이번에 곰이 먹은 것은 첫 번째로 죽은 아이의 손가락 마디였다. 셋째 날에도 똑같은 상황이 벌어졌다. 두 아이는 엄마의 손가락을 먹은 데 이어 이번에는 또 형제자매의 손가락을 먹게 되었다. 두 번째 아이도 죽고 나자, 마지막 남은 아이가 마침내 진상을 알아차리고는 곰을 죽일 계획을 짜게 된다. 하지만 그 결과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았다. 내게는 손가락 마디를 먹는 부분의 디테일이 이미 머릿속 공간을 전부 차지했기 때문이다. 우적우적…… 우적우적…… 이 소리는 어두운 밤에 위층에서 전혀 막힘이 없이 은은하게 들려 왔다. 때때로 할머니가 먼저 잠에 드시고 나는 아직 깨어 있을 때, 할머니가 꿈속에서 뭔가를 먹는 것처럼 입을 움직이는 소리를 들을 때면 모골이 송연해지곤 했다. 이처럼 무서운 이야기들 가운데 상당 부분이 귀신 이야기였다. 할머니는 맨발의 의사였다. 농촌에서는 대부분 의사와 무속인의 구별이 분명하지 않았다. 할머니가 얼마나 많은 주문(呪文)에 정통해 있고 얼마나 많은 귀신 이야기를 알고 있었는지는 모르지만 할머니가 들려주는 귀신 이야기는 항상 역사적으로 고증이 가능한 것이었다. 이야기에 등장하는 누구는 마을의 아무개이고 또 누구는 이웃마을의 아무개라고 했다. 마치 장부에 기록되어 있는 것처럼 분명했다. 나는 항상 그 어둠 속에 무언가 무서운 것들이 숨어 있으리라는 상상을 억제하지 못했다. 하루 또 하루 반복되는 밤은 어둠 속에서 두려움을 곱씹어야 하는 고통의 열매였다. 하지만 나는 또 항상 할머니에게 이야기를 해달라고 졸랐다. 일단 두려움의 썰물이 물러가고 나면 항상 현실의 따스함을 느낄 수 있었고 아주 편안하게 잠을 잘 수 있었다. 다 자란 뒤에도 나는 이것이 정말 해석하기 어려운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학교에 들어가게 되어서야 나는 다시 엄마 아빠 곁으로 돌아왔다. 변별하기 어려운 그 귀신들의 세계에서 멀어진 셈이다. 엄마 아빠도 가끔씩 나와 동생에게 이야기를 들려주곤 했지만 전부 현실에 관한 이야기였다. 아빠는 목공 장인이면서도 책 읽는 것을 좋아했고 똑똑한 데다 기억력도 아주 좋았다. 어느 날 저녁, 아빠가 막 소설 한 권을 다 읽고 나서 흥이 다하지 않았는지 우리에게 그 소설 얘기를 들려주었다. 당시 나랑 동생은 아직 숙제를 하고 있었다. 아빠가 말했다. 숙제는 안 해도 돼. 아빠가 너희들에게 얘기 하나 해줄게. 숙제에서 벗어나게 된 우리는 더 없이 즐거웠다. 엄마도 흥미진진한 얼굴로 다가와 우리 옆에 앉아서 함께 이야기를 들었다. 아빠의 이야기는 우리가 상상했던 것보다 훨씬 재미있었다.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우리는 이야기에 빠져 들어갔다. 아빠의 이야기는 서너 시간이 지났는데도 끝이 나지 않았다. 다음 날 저녁에도 서너 시간이나 이어지고 나서야 이야기가 마무리되었다. 여러 해가 지나 대략적인 스토리는 거의 다 잊었지만 시종 그 이야기에 나오는 대단한 역사(力士)가 ‘소 아홉 마리와 호랑이 두 마리, 코끼리 네 마리, 낙타 여덟 마리’로 만든 고기만두를 먹었다는 대목은 잊히지 않았다. 나중에 아주 우연한 기회에 『수당연의(隋唐演義)』를 읽게 되었다. 설인귀(薛仁貴)의 이야기를 다룬 책이었다. 알고 보니 아빠는 이야기를 하면서 적지 않은 내용을 첨가했던 것이었다. 아빠는 또 ‘돌 하나가 물속의 하늘을 깨뜨리는’ 이야기도 해주었지만 나중에서야 그 이야기가 소식(蘇軾)의 여동생 ‘소소매(蘇小妹)’의 이야기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아빠의 이야기는 대부분 책에서 읽은 것들이었고 엄마의 이야기는 거의 대부분 생활 속에서 나온 것들이었다. 엄마는 나와 동생에게 엄마의 어린 시절에 겪었던 많은 이야기들을 들려주었다. 하나뿐인 귀신 이야기도 엄마가 어렸을 때 외할머니에게서 들은 것이었다. 이 이야기는 나중에 나의 개조를 거쳐 소설 『빨간 말(紅馬)』로 완성되었다. 푸단(復旦)대학 박사 장쟈오빙(張昭兵) 선생은 이 작품을 읽고 나서 지금까지 발표된 나의 작품들 가운데 가장 훌륭한 작품 가운데 하나라고 말했다. 이런 평가에 대해 나는 무척 의아했다. 이 작품을 나는 그다지 중시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상당한 시간이 지나서야 나는 이 소설이 수십 년을 떠돌던 이야기를 재현한 것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이 이야기가 널리 유전될 수 있었던 것은 틀림없이 계속 유전될 수 있는 어떤 요소를 지니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우리가 순수하게 개조해내는 소설은 대부분 널리 유전될 수 있는 요소를 지니고 있지 못하다.

어쩌면 엄마 아빠가 들려주던 그 이야기들, 할머니가 들려주시던 그 이야기들을 다시 들어야 할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매년 고향집에 돌아가 보내는 그 며칠은 너무나 바쁘다 보니 그런 생각을 완전히 잊고 만다. 매번 상하이로 돌아올 때마다 또 생각을 한다. 다음에 고향집에 내려가면 꼭 엄마 아빠와 할머니의 이야기를 다시 들어봐야지. 하지만 그 다음에도 고향집에 내려가면 아무리 한가해도 그분들께 이야기를 다시 들려달라고 요구할 구실을 찾지 못한다. 필경 나는 이미 오래전부터 간단한 이야기에 속아 넘어갈 아이가 아니고, 그분들도 당시에 그 이야기를 들려주시던 분들이 아니기 때문이다. 알고 보니 이야기를 하고 이야기를 듣는 행위에도 나이와 심경의 제한이 있는 것이었다. 우리 할머니와 엄마 아빠의 눈에 나는 이미 ‘학문을 갖춘’ 어른이다. 그분들이 어떻게 또 다시 그 ‘유치한’ 이야기들로 나를 대충 얼러 넘길 수 있겠는가?

이렇게 계속 뒤로 미루다가 한 해 전에 고향집에 돌아가서야 할머니가 노인치매를 앓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내가 집으로 돌아가기 열흘쯤 전에 할머니가 갑자기 노인치매 증상을 보이기 시작한 것이다. 할머니는 정말로 당신이 우리에게 들려주시던 이야기의 세계로 돌아가서 신(神)과 귀(鬼), 음과 양을 구분하기 어렵게 되었다. 할머니는 수많은 지인들을 기억하지 못했고 내게 들려주셨던 그 이야기들도 기억하지 못했다……. 할머니는 아무 것도 기억하지 못하셨지만 나는 기억하셨다. 할머니는 평소에 항상 무언가로부터 위협을 받고 있다고 느끼셨고 수시로 칼이나 막대기를 휘두르면서 누구누구가 당신을 해치려 한다고 말씀하곤 하신다. 하지만 할머니가 말하는 그 누구누구는 이미 전부 몇 해 전에 세상을 떠난 분들이다. 할머니와 할머니의 이야기를 듣던 내가 이제 같은 처지에 놓인 것 같아 깊은 두려움과 불안을 느낀다. 이런 상황은 주위에 있는 담이 작은 사람들에게 알 수 없는 두려움을 느끼게 한다. 하지만 할머니는 나를 보기만 하면 얼굴에 항상 미소를 지으신다. 나를 기억하고 계신 것이다. 주름 가득한 할머니의 얼굴에 미소가 번지는 것을 보면 나는 할머니가 어째서 내게 그 무서운 이야기들을 들려주었던 것인지 어렴풋이나마 알 수 있을 것 같다. 그 이야기들은 무섭기는 하지만 반대로 현실세계의 따스함과 부드러움을 드러내주기 때문이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무서움은 이미 사라지고 없다. 남은 것은 따스함뿐이다.

‘이야기’라는 제목의 산문은 이렇게 끝나지만 하고 싶은 말이 몇 마디 더 있다. 이야기는 최초의 문학이라고 할 수 있다. 이야기가 사람들에게 가져다주는 따스함이 바로 문학이 인간에게 가져다주는 최초의 따스함이다. 문학은 어떤 온도일까? 물론 차가울 수도 있고 뜨거울 수도 있다. 하지만 대체로 문학은 따스한 것이어야 하지 않을까?

모옌(莫言) 선생이 노벨문학상 시상식에서 했던 연설의 제목은 ‘이야기 들려주는 사람(講故事的人)’이었다. 문학 후배로서 나도 일정한 수준과 능력을 갖춘 ‘이야기 들려주는 사람’이 되고 싶다.

 

번역 : 김태성

푸웨후이(甫躍輝)
소설가, 1984년생
장편소설 『각주기(刻舟記)』 『금상(錦上)』, 소설집 『소년유(少年遊)』 『동물원』 『물고기왕』 『만겹의 산』, 산문집 『구름 옆의 길』, 시집 『대지로 가는 길』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