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상인터뷰
물고기를 아는 지식, 나라를 다스리는 지식

- 영화 <자산어보>, 정약전과의 대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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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1년 가을호 (통권 81호)
물고기를 아는 지식, 나라를 다스리는 지식

- 영화 <자산어보>, 정약전과의 대화

손암(巽菴) 정약전 (1758-1816)
민중을 위한 실질적 지식이 무엇인가를 탐구했던 조선 후기의 학자. 1784년 호조좌랑이 된 부친을 따라 상경해 서학에 심취한 남인 인사들과 교류하기 시작했으며 관직으로 진출해 변조좌랑까지 역임하였다. 신유박해 때 흑산도로 유배되었으나 풀려나지 못하고 근방 우이도에서 숨을 거두었다. 정조의 총애를 받았으며 동생인 다산(茶山) 정약용과는 막역한 사이였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유배 중 『자산어보』,『송정사의』 등을 집필했다.


<자산어보>(감독 이준익)는 손암 정약전과 그가 유배지에서 만난 한 청년의 우정 어린 협업을 보여주는 작품이다. 대중들에게 정약용의 형으로만 알려져 있는 것이 안타까울 만큼 영화 속 손암은 인간적 매력이 크다. 그가 『자산어보』에 여러 번 언급한 ‘창대’라는 청년 또한 정약전과의 관계를 통해 큰 변화를 경험하는 캐릭터로 등장해 호기심을 자극한다. 기억은 낭만화되기 쉽고 역사 속 인물은 미화되기 쉽다는데, 과연 실제 손암과 창대는 영화 속 그들과 얼마나 닮아있을까?
영화 개봉 당시부터 정약전 선생과의 인터뷰를 시도했으나 폭염이 사그라들 무렵에야 그를 만날 수 있었다. 그는 직접 약속 장소로 택한 극장 앞 카페에 정시보다 조금 늦게 나타났다. 처음에는 그림으로만 보던 사람을 알아볼 수 있을까 염려했지만 여기저기 기웃거리며 카페 입구에 들어서는 모습이 예사롭지 않아 다행히 실례를 면할 수 있었다.

■ 윤성은(이하 윤) : 이곳 분위기가 불편하지는 않으신지요. 저는 인사동 쪽으로 모시려고 했습니다만. 창덕궁도 그리우실 듯했구요.


■ 정약전(이하 정) : 아니오. 나는 본래 호기심이 많은 성격이라오. 『자산어보』를 읽었다면 눈치챘을 텐데, 궁금한 것을 참지 못하는 편이지. 여기는 새로운 볼거리들이 많아 좋구려. 구경하다가 약속에 늦긴 했소만. 게다가 당초 영화 때문에 나를 찾은 것이니 우리가 만나기엔 극장전이 제격 아니겠소.

 

영화 <자산어보>(출처 : 메가박스중앙(주)플러스엠 


 윤  <자산어보>의 선생님과 상통하는 데가 있네요. 쉴 새 없이 질문을 던지다가 사람은 먹지 않았던 어류로 보릿고개를 나게 하시기도 했죠. 어쨌든 장소가 맘에 드신다니 다행입니다. 그런데 처음 인터뷰를 부탁드렸을 때 많이 놀라시는 눈치였어요. 거절도 여러 번 하셨었구요.

 정  동생한테 갈 연락이 나한테 왔나 했지. 그런 경우가 왕왕 있었거든. 섭섭지는 않아요. 동생이 나보다 뛰어나다는 건 모두 아는 사실 아니오? 내 앞이라고 입에 발린 말을 할 생각은 하지 마시오. 그래서 나를 주인공으로 한 영화가 나왔다는 얘기를 들었을 때도 의심할 수밖에 없었어요. 다산과 대비시켜 대역죄인의 비참한 최후, 뭐 그런 이야기면 어떡하나 싶기도 했고. 다행히 긍정적으로 그려줬더군. 무엇보다 내 역할을 맡은 배우의 인물이 훤해서 배려가 느껴졌어요. 여러모로 고마운 일이기는 하나 결과적으로 무리수였다는 건 흥행에서 드러나고 말았지요. 그러나 영화가 망한 게 솔직히 내 탓만은 아닐 것이오.

 윤  물론이지요. 아시다시피 개봉 시기가 좋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실관람객들이나 평자들의 반응은 뜨거웠습니다. 이준익 감독은 이 영화로 큰 상도 많이 받았어요. 다산에 가려져 있던 선생님의 삶을 조명한 것에 꽤나 보람을 느낄 것 같습니다.

『자산어보』(자료출처 : 『한국민족문화대백과 사전』, c한국학중앙연구원(원자료 소장 : 서 울대학교 규장각)

 정  내가 유배지에서 보낸 16년이란 시간이 전혀 헛되지 않았다면 다행이지요. 그런데 이준익 그 양반, 어디 이가(李家)인가? 전주 이씨 이성계의 후손들에 대해서는 나도 일가견이 있거든. 껄껄껄. 아무튼 이번에 그 감독의 영화를 다 봤어요. 제작한 것까지 줄잡아 20편이니 꽤 다작이더군. 아주 부지런한 사람이야. 게다가 작품마다 등락은 있어도 대체로 즐기기엔 무리가 없어 보였지요. 사극은 응당 몰입이 쉬웠는데 이감독의 사극은 현대극보다 오히려 더 날카롭고 깊은 데가 있어요. <황산벌>(2003)과 <사도>(2014)는 희극과 비극이라는 양극단에 있는 것 같지만 세간에 알려진 것과 다른 시각으로 접근하는 역사의식만큼은 닮아있거든. 이감독과 같은 시대에 살았다면 밤을 지새워 이야기꽃을 피우는 벗이 되었을 겁니다. 내가 영화는 잘 모르지만 촉은 뛰어나니 아마 맞을 거요.

 윤  네. 분명 그러셨을 겁니다. 아주 박학다식하신 분이거든요. 방금 하신 말씀에서는 학자로서의 집요함과 더불어 민중의 행복을 중시하는 선생님의 가치관도 잘 느껴지네요. <자산어보>는 어떻게 보셨는지요? 흡족하셨습니까?

 정  나한테 흡족이라는 건 잘 없지. 먹물 세례나 당할 만큼 헐렁해 봬도 완벽주의가 숨어 있다오. 개인적인 욕심이겠지만 일대기가 아니라 유배 이후의 삶만 그려져 있다는 건 솔직히 아쉬웠지요. 군주(정조)의 총애를 받던 전성기가 빠져 있었으니까. “정약전의 준걸한 풍채가 정약용의 아름다운 자태보다 낫다”(다산시문집 15권)라는 말까지 남기셨을 정도라오. 내가 동생에 앞선단 얘기는 물론 아니오. 내게도 관복이 어울리던 시절, 나랏일에 대한 열정이 있던 시절이 있었단 얘기지. 서양의 학문과 종교를 받아들인 것에는 후회가 없으나 한창 일할 나이에 유배된 것을 생각하면 아쉽기는 해요. 좀 더 큰일을 해냈을지도 모르는데 말이야. 이런, 내 자랑이 되어버렸구려. 천주께서 늘 겸손하라고 하셨건만. 아니, 혹시 망자의 신세한탄으로 들렸소?

 윤  아닙니다. 그런데 말씀을 들어보니 정치에 대한 욕구가 꽤 크셨나 보군요.

 정  어진 군주를 돕기 위한 유일한 선택지였으니까요. 그분의 개혁에 동참하며 안민(安民)을 이뤄내고 싶었소. 충분히 가능했던 일이지. 그런데 어찌 그리 갑자기 돌아가셨는지 지금도 애통하기가 이를 데 없소이다. 더욱이 정조대왕이 승하하신 후, 우리 형제들이 정치적 풍랑의 희생양이 되었던 기억을 떠올리면 눈물이 앞을 가립니다. 바로

윤성은

아래 동생 약종의 순교는 나와 약용을 살리기 위한 죽음이기도 했어요. 신유박해 이후로는 생존하기에 급급했으니 정치로 세상을 바꾸겠다는 생각은 사치가 되어버린 거지요. 흑산도에서도 다시 상경할 날을 고대하기는 했습니다마는 정조대왕 같은 군주 없이 내가 무슨 일을 할 수 있을까 의심이 들었던 것도 사실이오.

 윤  그래서 정조대왕의 죽음에 대해서는 현대에 드라마와 영화로도 여러 번 만들어졌습니다. 물론 상업적 조미료가 많이 들어가 있지만 그만큼 후손들도 조선왕조의 흐름을 완전히 바꿔 놓은 사건으로 인식하고 있다는 점은 분명합니다. 그러면 흑산도에서의 삶에 대해 더 말씀해 주실 수 있을까요?

 정  자랑이 부끄러워지니 <자산어보>에서 내가 미화된 측면과 곁들여 그곳 생활을 이야기해 보겠소. 영화에서는 내가 대체로 학식이 풍부하고 어질며 사리 분별을 잘하고 심리적으로도 안정감 있는 인물로 등장하는데 실상은 모자란 점이 많은 사람이라오. 앞서도 말했듯이 하나에 몰입하면 그것만 파고드는 성향이 있어. 여기에도 득실이 있는 법이지. 건강을 해친 것도 바로 그 못된 기질 아니겠소. 매일 밤 내 피를 말렸던 초조함, 불안감이 빠져 있는 것도 오류라면 오류요. 긍정적이고 서글서글한 사람으로 묘사하고자 한 의도는 고마우나 유배지의 생활이 평탄하고 즐거웠을 리 있겠소이까. 큰 걱정 없이 지내다가도 어떤 날은 상실감과 외로움이 온몸을 휘감아 한밤중에 바닷가로 뛰쳐나가기도 했지요. 사내는 눈물도 마음대로 흘릴 수 없던 시절이라 혼자 검은 파도에 대고 오열했던 적이 한두 번이 아니라오. 시구를 읊조리다 술에 취해 바다에 빠지는 장면은 낭만적으로 보일 지경이더군. 흑산에 그만큼 오래 살면서 정도 들었지만 유배라는 족쇄를 찬 채 내가 죽을 곳이라는 생각은 끝까지 안 들더군요. 오죽하면 동생의 유배가 풀리자 냉큼 우이도로 갔겠소. 나도 곧 불러주리라 기대했건만 결국 뭍으로 돌아가지는 못했지요.

 윤  그 시절의 복잡한 심경이 전해져옵니다. 하지만 선생님 같은 분이 흑산에서 민중들에게 선한 영향력을 끼치셨다는 게 위로가 되시지 않을까요. 우이도로 가신다고 했을 때, 선생님을 흠모한 섬사람들이 놓아주지 않았다는 일화는 유명합니다. 그만큼 덕망이 높고 본받을 점이 많은 어른이었다는 얘기지요. 무엇보다 한 우물을 깊게 파는 성격은 바다를 만나 우리나라 최초의 해양생물 학서라고 불리는 『자산어보』를 탄생시켰습니다.

 정  오, 『자산어보』 이야기를 꺼내주니 힘이 좀 나는구려. 수상 동식물 227종에 대해 듣고 보고 쓰느라 오랜 세월이 걸렸지. 가장 뿌듯한 것은 내가 그 생물들의 이름을 지어주었다는 점이라오. 영화에 그 부분이 잘 살아있어서 놀랍기도 하고 기쁘기도 했어요.

 윤  이름뿐이겠습니까. 종류도 일목요연하게 정리하셨고, 생태학적 특징, 해부학적 특성에다 조리법까지 기록해 놓으셔서 20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학자들에게 많은 도움이 되고 있답니다. 당시에 이렇게 실용적인 책을 쓸 생각을 하시다니 정말 대단하신 것 같습니다.

 정  그건 창대가 한 말 때문이었소. 어부는 물고기를 알아야 물고기를 잡는다고 했지. 그러니 글로 남겨놓으면 우리나라 어업에 많은 도움이 될 거라 생각했다오. 그리고 이 말은 창대가 내게 마음을 열고 가까워지는 데도 일조를 했소. 창대처럼 심성이 올곧고 품행이 방정한 사람일수록 남의 말에 흔들리지 않는 법이니 이제껏 공부한 것과 어긋나는 사상을 믿는 내게 마음을 쉬이 열 리가 있겠소. 그때 내가 서양에서 무엇을 배우는지 알지 못하면 그들을 따라잡지 못한다는 얘기를 흘리니까 논리적으로 반박하지 못했던 거요.

 윤  『자산어보』를 쓰는 데 창대라는 분의 역할은 어느 정도였습니까?

 정  내가 서문에 쓴 그대로요. 처음에는 자료를 수집하기 위해 섬사람들을 두루 만났는데 하는 말이 다 달랐어요. 배움은 부족해도 총명하기가 특출난 창대를 만나기 전까지는 헤매기를 많이 했지. 창대는 세밀한 관찰력을 가졌을 뿐 아니라 성실하기까지 해 여간 믿음직스러운 게 아니었소. 비록 유배당한 죄인이기는 했으나 관직을 지낸 내가 책 서문에 어부를 언급한 것은 아주 이례적인 일이었다오. 서학의 영향을 단단히 받은 게지. 천주가 인간은 모두 평등하다고 하지 않았소. 나도 신분고하의 벽을 두지 않고 사람들과 어울렸는데 그 덕을 많이 봤다오. 그래서 글은 내가 썼지만 창대를 『자산어보』의 공동 집필자처럼 느껴지도록 하고 싶었소. 이준익 감독이 그걸 간파한 거지. 그가 나와 잘 맞을 거라고 생각하는 것도 이 때문이오. 가치관이 닮아있단 얘기거든.
따지고 보면 <동주>(2015)나 <박열>(2017)도 그런 작품 아니오? 송몽규와 가네코 후미코처럼 위인들의 옆에는 반드시 훌륭한 조력자가 있다는 거지. 난 뭐 위인은 아니지만 만약 『자산어보』가 가치 있는 책이라면 나를 거들었던 창대도 함께 칭찬받아 마땅하오.

 윤  역시 영화를 읽는 눈도 탁월하십니다. 영화에서는 선생님과 창대와의 관계가 크게 두 번 정도 변하는데요, 창대는 본래 성리학을 따르는 청년이어서 선생님을 가까이하지 않지요. 그러다가 독학이 힘들어져서 선생님과 지식을 거래하기로 합니다.

 

 정  조건을 내건 것은 아니었으나 서로 아는 것을 가르쳐 준 것은 맞아요. 영화에서는 내가 창대를 ‘상놈의 자식’이라고 여러 번 부르던데 내 기억에 정말로 그런 적은 없었던 것 같소. 가난과 신분 때문에 열정과 재능이 있는 이들이 학업을 하지 못한다는 것은 얼마나 불행한 일인가 말이오. 늘 안타까워하던 차에 유배지에서 그런 이들을 여럿 만나게 되었는데 그중에서도 창대는 눈에 확 띄는 인재였지. 작은 마을에 살면서 가까워지다 보니 자연스럽게 나는 내가 책상머리에서 배운 것들을 알려주고 창대는 바다에서 자기가 체득한 것들을 알려주게 된 거요. 학자가 어부가 되고 어부가 학자가 되고, 스승이 제자이기도 하고 제자가 스승이기도 하니 이 얼마나 평등한 관계요. 영화에서 같이 있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우리가 닮아 가는 걸 못 느꼈소? 배에서 나는 노를 젓고 창대는 글을 읽었지요. 게다가 행색도 추레하고 가벼운 게 내가 영락없이 상놈의 자식같이 보이지 않았냐 말이오. 껄껄껄.


 윤  서로 자기가 더 많이 배우겠다고 아웅다웅하는 장면들은 웃음을 주더군요. 그래도 양반의 풍모는 숨길 수 없으셨어요. 부인도 ‘잘 생겼어라’ 하며 외모를 칭찬하는 대목이 나옵니다만. 그러나 창대는 결국 선생님을 떠나고 맙니다. 영화에서 강조한 ‘주자는 참 힘이 세다’라는 대사와 연결되는 대목이랄까요.

 정  주자의 힘 때문에 나도 역적이 되느니 배교를 하겠다는 대사를 하더군요. 물론 극화된 것이고, 창대의 뒷이야기도 그렇소. 그런데 지어내기를 참 잘했어. 시대를 정확히 읽었거든. 창대의 경우 관직에 나아가 그간 책에서 익힌 것들, 진정한 인(仁)과 예(禮)를 적용시키려 하지만 기성 권력과 구조적 문제를 혼자 해결하지는 못한 게지. 창대가 꿈을 펼치지 못하고 점차 좌절하는 모습에는 가슴이 아팠다오. 부정부패한 관리들과 절규하는 백성들의 모습은 또 어찌나 생생하게 묘사되어 있던지요. 내 보기에 실천적 지식의 중요성이야말로 『자산어보』의 정수라오. 외우기만 하는 공부가 나라를 망쳤다는 대사도 거기서 나온 거고.

 윤  정확하십니다. 안타깝게도 지금까지 그런 교육의 잔재들이 남아 있답니다. 그래서 이준익 감독이 이런 영화를 만드신 거겠지요. 동시대에도 공감대가 충분한 영화니까요. 선생님과의 대화 정말 즐거웠습니다. 마지막으로 독자들에게 하고 싶으신 말이 있다면요?

 정  주제넘단 얘기는 듣고 싶지 않지만 책임감 때문에 한마디만 하리다. 역사는 돌고 도는 법이니 나 같은 사람을 앞세운 영화에도 배울 점이 있을 것이오. 아직 보지 않은 분들에게 일람을 권하오.

윤성은
문화평론가, 영화학 박사
공저 『영상의 이해』 『이야기, 트랜스포머가 되다』 『세도시 이야기』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