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작후기
은유, 그리고 어떤 연애담

- 소설집 『어느 날 은유가 찾아왔다』

  • 창작후기
  • 2023년 겨울호 (통권 90호)
은유, 그리고 어떤 연애담

- 소설집 『어느 날 은유가 찾아왔다』

 

 

나와 소설의 관계는 한 편의 연애담과 비슷할지도 모르겠다. 소설이라는 상대를 만난 건 우연이었다. 그는 내 가까이에 있었지만 눈에 띄지 않는 존재였고 우리는 눈길 한 번 제대로 주고받은 적이 없었다. 나는 정장에 힐을 신고 출퇴근을 반복하며 하루하루가 그저 바쁘기만 했다. 겉으로는 멀쩡한 얼굴로 기업ㅡ세계의 일원을 충실하게 연기하고 있었지만, 내 안은 더는 견디기 힘들 정도로 염증과 허무로 곪아있었다. 그즈음 생각지도 않았던 그가 내게 손을 내밀어주었고 나는 급속도로 빠져들었다.

처음엔 열렬한 연애만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그의 존재만으로 나는 위로받았고 조금씩 변해가는 내 모습도 싫지 않았으니까. 물론 나의 일상은 변한 게 없었다. 여전히 회사 빌딩의 여기저기를 쳇바퀴처럼 맴돌다 집으로 돌아가는 하루가 계속되었고, 어제처럼 오늘도 그리고 오늘처럼 내일도 똑같은 엘리베이터와 주차장과 주변 스타벅스와 식당을 맴돌 뿐이었다. 하지만 나를 둘러싼 세상은 조금씩 변하기 시작했다. 그의 존재를 의식하면서부터 나는 염탐하듯 관찰하는 이가 되었고, 귀 기울이는 자가 되었으며, 이면을 들여다보려고 골몰하는 이가 되었다. 사무실에서 키보드를 두드리다가도, 동료들과 이야기를 나누다가도, 또는 회의 중에도 내 마음은 문득문득 그에게로 달려갔고 오랜만에 느끼는 그런 설렘이 나는 좋았다.

그렇다고 그 관계가 달콤하기만 한 건 아니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나는 내가 주는 만큼 되돌아오지 않는 그의 마음에 안달이 났다. 쉽사리 곁을 내주지 않는 상대에게 느끼는 자괴감은 어쩌면 끝까지 그가 나를 받아주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조바심으로 이어졌다. 어차피 나와는 어울리는 상대가 아니었다고, 희망이 없는 관계라고도 생각했다. 그렇게 짝사랑으로 끝나버릴 상대의 이름을 세상에 대고 부를 일은 영영 없을 것 같았다. 그의 이름은 바로 내 첫 소설집 『어느 날 은유가 찾아왔다』의 표제작에 등장하는 ‘은유’다.

막 인쇄되어 나온 근사한 표지의 소설집을 처음 눈으로 접했을 때의 감흥은 말로 표현하기 힘들다. 그건 은유를 향한 나의 오랜 고백이자 사랑의 증명이었으니까. 그동안 내가 수없이 건네려고 노력했지만 전달하지 못했던 연서를 누군가가 정성스레 모아 이젠 보내도 된다고, 받는 이가 누구든 하고 싶은 대로 하라고 웃으며 내 손에 쥐여 주는 느낌이었다. 책이라는 물성의 형태로 자기 작품을 세상에 선보일 기회란 노력이나 의지만으로 되는 게 아님을 잘 알고 있다. 많은 신인작가에게, 특히 나 같은 미등단 신인작가에게는 더욱, 그 기회가 얼마나 절실한지도 말이다. 그 행운을 내 몫으로 만들어준 대산문화재단과 심윤경, 백민석, 정지아, 세 분 심사위원께 다시 한번 깊은 감사의 마음을 전하고 싶다.

작년 대산창작기금 수혜는 평생 잊지 못할 감격스러운 일이었다. 지금 와서 생각하면 부끄럽지만, 당시 나는 대산창작기금을 받으면 자동으로 책이 출간되는 줄 알았다. 그게 순진한 오해였다는 걸 깨닫기까지는 오래 걸리지 않았지만. 처음엔 출판사에 어떤 식으로 투고해야 하는지 몰라 막막했고 몇몇 유명 출판사의 문을 두드리기까지 우왕좌왕해야 했다. 이후 차례로 거절의 답변을 받으며 출간의 벽이 높다는 걸 실감했다. 낙담을 반복한 시간이 흐른 후 다행히 교유서가와 계약이 되었다. 책은 8개월 만에 나왔다. 원고 교정을 보고, 제목과 목차를 정하고, 여러 차례 수정을 거쳐 표지디자인을 확정하고, 해설과 추천사를 받기까지의 과정을 출판사와 함께하면서 한 권의 책이 만들어지기까지 어떤 수고가 필요한지도 처음으로 경험할 수 있었다. ‘회사생활에 영혼이 묶인 보통사람들의 이야기를 이토록 정치하게 조망할 수 있는 작가가 탄생했다는 것은 한국문학의 축복이다’라고 심윤경 작가님이 써주신 추천사를 전해 받았을 땐 너무나 감동해서 모든 걸 보상받은 기분이 들기도 했다.

책을 내고 보니 지금까지의 내 삶이 얼마나 많은 사람에게 빚지고 있는지를 새삼스럽게 깨닫는다. 그래서 나의 첫 소설집은 그동안 소홀했던 감사의 마음을 명심해 기억할 이유이자 나 자신에게 내미는 새로운 청구서이다. 앞으로 소설로 조금씩, 느리더라도 멈추지 않고 내가 진 빚을 갚아나가리라 다짐해 본다. 다행히 은유와의 연애는 현재진행형이다.

※ 필자의 소설집 『어느 날 은유가 찾아왔다』는 대산문화재단의 대산창작기금을 받아 2023년 교유서가에서 출판되었다.

박이강
소설가
장편소설 『안녕, 끌로이』, 소설집 『어느 날 은유가 찾아왔다』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