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서관에 물귀신이 나온다는 이야기가 벌써 몇 달 전부터 떠돌고 있었다. 책이 젖고 서가 주변에 물이 흥건하게 고여 있는 사건이 자꾸 벌어지는데 그 장소가 매번 달랐기 때문이다. 같은 자리에 계속 물이 새면 누수가 생겼다고 짐작해서 전문가를 부르는 것이 합리적인 방안일 것이다. 그런데 비가 억수같이 쏟아진 다음 날 보면 서가가 멀쩡해서 안심했다가 그렇게 하루, 이틀, 일주일 아무 일도 안 일어나서 잊어버리고 있었는데 맑게 갠 어느 날 아침에 출근해 보면 갑자기 서가에 물이 흥건히 흘러 있곤 해서 주임 사서 김 선생님은 정말 미칠 지경이었다. 그래서 김 선생님은 무슨 수를 써서라도 범인을 색출하고야 말겠다고 굳게 결심하고 어느 날 집에 굴러다니는 핸드폰 공기계를 가지고 출근해서 퇴근하기 전에 공기계의 카메라를 켜서 서가를 비추도록 설치해 두고 도서관을 나섰다. 마음 같아서는 하룻밤 숨어서 서가에서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자기 눈으로 지켜보고 싶었지만 도서관 시스템은 승인되지 않은 야근에 대해 수당을 지급하지 않았고 출근했던 직원이 밤 10시가 넘어도 퇴근하지 않으면 경고 메시지가 자동으로 경비회사에 넘어가서 경비직원이 확인하러 오게 되어 있었다. 그래서 김 선생님은 일단 영상을 찍어놓고 다음 날 확인한 뒤에 판단하기로 했다.
김 선생님의 오래된 핸드폰 카메라에 한밤중의 불 꺼진 서가를 비추는 최신식 ‘나이트 비전’ 기능 같은 게 탑재되어 있을 리는 없었고 야간 투시는 고사하고 핸드폰이 진짜로 오래되다 보니 충전도 잘 안 되는 지경이었다. 그래서 김 선생님이 아침에 출근해서 간밤에 설치해 놓은 핸드폰부터 들여다봤을 때 오래된 핸드폰은 배터리가 방전되어 까맣게 죽어 있었다. 김 선생님이 불쌍한 핸드폰에 충전기를 꽂고 어르고 달래서 마침내 다시 살려낸 뒤에 동영상 앱을 켜 보니 핸드폰이 죽기 직전에 허덕거리며 간신히 녹화한 약 20분 분량의 파일에는 그저 시꺼먼 어둠 속에 비상구 표시등만 엷게 녹색으로 빛나는 단조로운 광경만 하염없이 이어지고 있었다.
실망한 김 선생님이 핸드폰 충전기를 빼고 동영상 앱을 도로 닫아 버리려 했을 때 화면에 희끄무레한 덩어리가 휙 지나갔다.
김 선생님은 깜짝 놀랐다. 허둥지둥 충전기를 도로 꽂고 동영상 앱을 열었다. 영상의 마지막 부분만 다시 돌려보았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핸드폰은 김 선생님이 보고 싶은 마지막 몇 초 구간만 보여주기를 거부하고 상태진행 막대기를 손가락으로 움직일 때마다 동영상 시작 부분으로 돌아가서 화면에 비상구 표시등이 엷은 녹색으로 빛나는 시꺼먼 어둠만 한없이 단조롭게 비추어 주었다. 몇 번 그렇게 고집부리는 오래된 핸드폰과 씨름하다가 김 선생님은 포기하고 핸드폰이 보여주는 어둠을 성난 눈빛으로 노려보며 기다렸다.
영상이 끝나기 직전에 이번에도 화면에 희끄무레한 덩어리가 휙 지나갔다.
그 희끄무레한 덩어리가 지나가는 모습을 두 번째로 확인한 뒤에야 김 선생님은 영상을 자기 SNS 계정으로 전송해서 고물 핸드폰보다 말을 잘 듣는 컴퓨터 화면으로 보는 쪽이 낫다는 생각을 떠올렸다. 그 정도로 김 선생님은 놀랐던 것이다. 그래서 김 선생님은 핸드폰을 컴퓨터에 연결했다.
도서관 무선인터넷은 등록된 기기로만 사용할 수 있었고 한 사람이 등록할 수 있는 기기 숫자는 2대로 제한되어 있었다. 김 선생님은 이미 현재 사용하는 핸드폰과 노트북을 등록했기 때문에 더 이상 기기를 추가할 수 없었다. 태블릿을 써야 하는 경우가 상당히 자주 있었는데 김 선생님은 그럴 때마다 핸드폰 와이파이를 끄고 노트북으로 무선인터넷 사용허가 페이지에 접속해서 핸드폰 기기등록을 삭제하고 태블릿을 추가해서 사용하다가 다시 핸드폰을 써야 하는 상황이 되면 또 태블릿의 와이파이를 끄고 노트북으로 무선인터넷 사용허가 페이지에 접속해서 태블릿을 삭제하고 핸드폰을 추가하는 삽질을 반복해 왔다. 한번은 김 선생님이 그러다가 열받아서 그냥 태블릿을 무선인터넷 사용 기기로 등록해두고 핸드폰이 필요해지면 그때그때 데이터를 털어 썼는데 가장 값싼 요금제를 사용하다 보니 일주일도 되기 전에 데이터가 다 떨어져서 태블릿 와이파이 사용등록을 삭제한 뒤 다시 핸드폰을 도서관 무선인터넷에 등록해두고 이후 3주 동안 이를 악물고 집과 도서관과 길거리 공공 와이파이로 버텨야 했던 뼈아픈 기억이 있는데 김 선생님에게 가장 어이없었던 것은 도서관 무선인터넷보다 길거리 공공 와이파이가 신호강도도 훨씬 세고 사용하기 훨씬 편하더라는 사실이었다. 도서관에서 1인당 전자기기 3대 이상 한꺼번에 와이파이에 연결해 사용하고 싶으면 공문을 보내 허가를 받으라는 지침은 본 적이 있지만 공문을 어디로 보내라는 것이며 그 허가가 과연 실제로 내려오는지 아무도 알지 못했다. 얼마 전에 퇴임하신 관장님은 새로 취임했을 때 핸드폰과 노트북 외에 스마트워치를 도서관 무선인터넷에 연결하고 싶어서 그 허가를 내 달라고 시에 공문을 보냈는데 시는 정부 관련 부처에 직접 요청하라고 답변했고 정부 관련 부처에 공문을 보내자 해당 안건은 지자체 소관이니 지자체에 요청하라는 답변이 왔으며 그렇게 양쪽 기관 사이에 공문을 보내고 다른 쪽에 알아보라는 답변을 받는 ‘공문 탁구’를 진행하는 사이에 관장님은 정년퇴임했다.
어쨌든 그래서 김 선생님은 노트북에 오래된 핸드폰을 연결했고 낡고 지친 핸드폰은 케이블을 연결하는 즉시 놀라서 꺼졌다 다시 켜졌고 김 선생님은 이유 없이 재부팅하는 핸드폰을 말리려다가 다 켜진 폰을 다시 한 번 재부팅하고 말았으며 그런 우여곡절을 겪은 끝에 마침내 문제의 동영상을 노트북에서 재생해 보니 그 마지막 순간에 희끄무레한 덩어리가 확실히 나타나긴 나타나는데 어쩐지 마치 그래픽으로 조작한 것처럼, 혹은 동영상 앱에 오류가 나서 노이즈가 생긴 것처럼, 다분히 가짜처럼 보였다.
김 선생님은 낙담했다. 수사 드라마에 나오는 것처럼 폐쇄회로 감시카메라 영상을 벽 가득 깔린 거대한 화면에 척 띄워서 막 확대도 하고 얼굴인식도 하고 프레임별로, 아니 픽셀별로 분석도 하고 그래서 이 희끄무레한 덩어리가 한밤중에 도서관에 침입한 인간 범죄자인지 귀신인지 아니면 그냥 고물 핸드폰 동영상 앱이 일으킨 오류인지 확실한 답이 딱 나오면 좋겠다는 상상을 해 보았지만 그런 건 그저 상상일 뿐이고 김 선생님의 현실은 그렇게 화려하지 않았다.
그래서 김 선생님은 그날 밤 도서관에 숨어서 서가 사이에 나타나는 물귀신을 자기 손으로 체포하기로 결심했다. 그러나 서가 사이에 나타난 희끄무레한 형체가 물귀신이 아니라 건조물 침입을 즐기는 범죄자일 경우를 대비해야 되니까 야간경비를 도는 박씨 아줌마에게 같이 잠복해 달라고 부탁했다.
박씨 아줌마는 김 선생님이 야근을 못 하게 내쫓으러 오는 일이 너무 자주 일어나다 보니 스실사실 친해진 사이였다. 맨 처음 만났을 때 박씨 아줌마는 매뉴얼대로 경비 출입증을 찍고 들어와서 인터폰으로 도서관 전체에 들리게 방송했다.
“사서 선생님, 퇴근 안 하십니까? 야근이면 빨리 끝내고 나오십시오. 위급한 상황이면 경찰 부르겠습니다.”
방송에 놀란 김 선생님은 노트북을 대충 닫고 핸드폰과 함께 주렁주렁 손에 들고 지퍼도 잠그지 못한 배낭은 한쪽 어깨에 걸쳐 메고 현관으로 뛰어나왔다. 그다음 번에 박씨 아줌마가 찾아왔을 때 김 선생님은 조금 덜 놀랐고 세 번째 박씨 아줌마가 찾아왔을 때는 노트북을 제대로 종료하고 케이스에 넣어서 배낭에 집어넣고 바람막이도 꼼꼼히 걸쳐 입는 여유를 보였다. 여섯 번째인지 일곱 번째 김 선생님을 내쫓으러 왔을 때부터 박씨 아줌마는 방송을 하지 않았다. 대신 김 선생님이 일하고 있던 책상 옆에 와서 벽을 똑똑 두드렸다.
“아니 무슨 일을 그렇게 열심히 해요? 밤늦었는데 빨리 집에 가서 자요!”
박씨 아줌마가 잔소리를 했다. 김 선생님이 고개를 들었다.
“그치만 이거 오늘까지 보고서 내야 되는데요. 십 분만 기다려 주시면 안 돼요?”
“안 돼요.”
박씨 아줌마가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지금 벌써 열 시 삼분이에요. 저 열 시 오 분에 전원 퇴거했다고 회사에 보고해야 한단 말이에요.”
박씨 아줌마는 초등학생 딸이랑 둘이 살고 있었고 야간경비 일은 용역업체가 10개월씩 끊어서 재계약했다. 1년 이상 연속적으로 근무하면 퇴직금을 줘야 하기 때문이다. 계약직은 파리 목숨이라 밤 10시 5분까지 전원 퇴거했다고 보고하지 못하는 사태가 세 번 쌓이면 계약기간이고 나발이고 근무규정 위반으로 그냥 잘린다고 했다.
“퇴근카드 찍고 일단 나가세요.”
박씨 아줌마가 단호하게 말했다. 김 선생님은 어렸을 때 무척 좋아했던 애니메이션에 나오는 고양이의 표정을 흉내내며 애원했다.
“그렇지만 저도 이거 오늘까지 꼭 내야 되는데…”
“퇴근카드 찍고 사람이 밖에 나간 거 확인하고 회사에 보고하고 나서 제가 나중에 다시 입장시켜 드릴 수 있어요. 그렇지만 먼저 나가셔야 돼요.”
그래서 김 선생님은 경비직원은 전지전능하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퇴근 카드를 찍고 나간 뒤에 출입문이 자동으로 잠기는데, 입구 번호패드에 ‘경비 코드’를 입력하면 아무 일 없다는 듯 문이 열리고 자유롭게 안에 들어올 수 있었다. 그런 뒤에는 도서관에서 밤을 새도 상관없었다. 오전 9시에 다시 밖에 나가서 출근 카드를 찍으면 시스템은 김 선생님이 정상 퇴근했다 정상 출근한 것으로 기록했다.
“그러니까 오늘 저하고 같이 여기서 좀 지켜 주시면 안 돼요?”
김 선생님이 부탁했다.
“위층도 돌고 와야 되는데…”
박씨 아줌마는 잠시 망설였다.
“커피 사드릴게요, 네?”
김 선생님이 다시 애니메이션의 고양이 표정을 최대한 흉내내며 애원했다.
“저 혼자 여기 있긴 너무 무섭단 말이에요…”
“그럼 나 위층 돌고 올 테니까 그사이에 무슨 일 있을 것 같으면 불러요.”
박씨 아줌마가 마침내 동의했다.
실제로 그 ‘무슨 일’이 일어났을 때 김 선생님을 부른 쪽은 박씨 아줌마였다. 김 선생님은 밤 열 시에 퇴근카드를 찍고 박씨 아줌마를 기다려서 경비코드를 입력하고 같이 도서관으로 들어왔다. 박씨 아줌마는 위층을 순찰하러 가고 김 선생님은 서가 사이에 웅크리고 앉아 미리 가져온 담요를 꺼내 두르고 지켜보기 시작했다. 그러다 김 선생님은 깜빡 졸았다. 얼마나 자 버렸을까, 김 선생님이 퍼뜩 정신을 차렸을 때는 박씨 아줌마가 김 선생님을 열심히 흔들며 최대한 목소리를 죽여 소곤거리고 있었다.
“저기 봐요! 저기!”
김 선생님은 박씨 아줌마가 다급하게 가리키는 곳으로 시선을 돌렸다.
희끄무레한 덩어리가 서가 사이를 흐르듯이 떠다니고 있었다.
“저거…!”
소리치며 벌떡 일어서려는 김 선생님을 박씨 아줌마가 눌러 앉혔다. 박씨 아줌마가 입에 손가락을 갖다 대 조용히 하라는 표시를 했다. 김 선생님은 박씨 아줌마에게 고개를 끄덕인 뒤 소리가 나지 않게 조심하며 천천히 일어섰다. 그리고 희끄무레한 덩어리를 뒤쫓는 박씨 아줌마 뒤를 따라 살금살금 서가 쪽으로 향했다.
희끄무레한 덩어리는 부드럽게 유영하듯 서가 사이를 움직이다 한 곳에 멈추어 섰다. 박씨 아줌마도 김 선생님도 따라서 멈추어 섰다. 희끄무레한 덩어리가 방향을 돌리는 것 같았다. 같은 자리에서 빙글빙글 돌았다. 그와 동시에 박씨 아줌마가 가슴에 달고 있던 경비업무용 태블릿이 번쩍거리며 삑삑 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그거 끄세요!”
김 선생님이 다급하게 소곤소곤 외치며 핸드폰을 꺼냈다. 희끄무레한 덩어리가 혹시나 도망칠까 봐 김 선생님은 서둘러 촬영을 하기 시작했다. 그 사이에 박씨 아줌마는 이미 업무용 태블릿을 똑딱단추 어깨걸이에서 떼어내 열심히 만지는 중이었다. 삑삑 소리는 곧 멈추었다.
희끄무레한 덩어리는 도망가지 않았다. 제 자리에서 빙글빙글 돌고 있었다.
“비 오네?”
박씨 아줌마가 태블릿을 만지다가 중얼거렸다.
“네?”
김 선생님이 고개를 들었다. 희끄무레한 덩어리가 번쩍이며 빙글빙글 도는 빛 사이로 뚝뚝 떨어지는 물방울이 언뜻언뜻 보였다.
“저 물귀신이 책을 다 적시고…!”
김 선생님이 화가 나서 팔을 휘두르는 순간 희끄무레한 덩어리는 눈 깜짝할 사이에 사라져 버렸다.
“뭐예요, 저게?”
김 선생님이 얼이 빠진 채 중얼거렸다.
“물귀신은 아니네요.”
박씨 아줌마가 태블릿 화면을 가리켰다.
“홀로그램 안내기예요. 천장에서 물이 새니까 해당 구역 책 치우고 수리하라고 누수탐지 알림 보낸 거예요.”
박씨 아줌마에 따르면 홀로그램 안내기 자체는 상당히 오래된 것 같다고 했다. 원래는 음성안내가 함께 나왔어야 하는데, 도서관을 옮기고 전산체계와 경비 및 건물관리 시스템을 바꾸면서 음성안내에 필요한 하드웨어는 없어지고 건물 전체 관리시스템과 연결된 프로젝터만 천장 어딘가에 아직도 달려 있는 모양이라고 박씨 아줌마는 추측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박씨 아줌마에게 지급된 업무용 태블릿도 그다지 최신 모델이라고는 할 수 없었기 때문에 홀로그램 안내기가 관리시스템에 누수 경고를 보내자 태블릿이 그 경고를 제대로 알아듣고 사용자에게 통역해 준 것이다.
“내일 날 새면 배관공 불러서 수리하면 되겠네요. 해결!”
박씨 아줌마가 상쾌하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김 선생님은 한숨을 푹 쉬었다.
“왜요, 해결이 아니에요?”
박씨 아줌마가 김 선생님의 표정을 살피며 물었다.
“배관공 부를 돈이 없어요.”
김 선생님이 조그맣게 중얼거렸다.
“수리가 아니라 누수탐지만이라도 해 달라고 요청한 지가 언젠데 시에서는 중앙에 요청하라고 하고 중앙에선 예산 없으니까 지자체에 문의하라고 하고 장마 오기 전에 했어야 되는데 이러다 해 넘기게 생겼어요…”
김 선생님은 물에 젖은 책을 서가에서 꺼내 손가락으로 조심스럽게 표지를 문질렀다. 다행히 책은 심하게 젖지 않았다. 김 선생님은 주의 깊게 손가락 끝으로 책장을 살살 넘겨 책을 펼쳐 보았다. 20세기 중반에 출간된 역사학 연구서였다. 제목부터 한자투성이였고 책장은 모두 갈색으로 빛이 바래 있었으며 본문은 깨알 같은 글씨에 세로쓰기로 인쇄돼 있었다.
“이 책이 아직도 있었네요… 살아남은 줄 몰랐는데…”
김 선생님이 어쩐지 감동한 목소리로 조그맣게 말했다. 박씨 아줌마는 세로쓰기 책에 그다지 관심이 없었다.
“아니, 예산이 왜 없어요? 책이 젖으면 다 못 쓰게 될 텐데 도서관에서 책이 망가지게 그냥 둔단 말이에요?”
박씨 아줌마가 흥분했다.
“도서관 이제 없어질 거예요.”
김 선생님이 불쑥 털어놓았다.
“제가 계속 야근하던 이유가 그거예요. 지금 서가에 남은 책 중에서 십 퍼센트만 국립중앙도서관 서고로 옮기고 나머지는 다 폐기한다고, 폐기할 책하고 보존할 책하고 나눠서 ‘고객 임팩트 지수’를 계산해서 제출하래요.”
“고객 임팩트 지수? 그게 뭐예요?”
박씨 아줌마가 어리둥절해서 물었다.
“대출 빈도하고 작품 지명도하고 저자 지명도하고 문헌학적 중요성하고 사료 가치하고 또 뭐뭐 해서 점수 매겨서 표를 만든 거예요. 그런데 사실 대출 빈도가 제일 중요해요. ‘취업 영단어 1만 개 외우기’하고 이런 역사서하고 노벨문학상 받은 소설하고 비교하면 ‘취업 영단어 1만 개 외우기’가 대출빈도가 제일 높으니까 그것만 남기고, 노벨문학상 받은 소설하고, 한국에서 처음으로 유학 안 하고 국내 대학 박사학위 받은 교수님이 쓴 역사학 연구서는 버리라는 거예요.”
말하다가 김 선생님은 울기 시작했다.
“대출 빈도 적은 책은 스캔해서 전자화하는 것도 아니고 그냥 다 버린다고 그래서… 중요한 책들은 제가 대출했어요… 스캔하고… 친구들도 다 동원하고… 그런데 이젠 도서관을 아예 없애겠대요… 서울에 있는 국립중앙도서관 빼면 지역엔 이제 우리 도서관하고 제주도하고 두 군데밖에 안 남았는데…”
박씨 아줌마는 허리춤에 찬 가방에서 손수건을 꺼내 김 선생님에게 건네주었다. 눈물을 닦아내는 김 선생님의 어깨를 두드려 주며 박씨 아줌마가 중얼거렸다.
“어쩐지 우리 애 도서관증 만들어주려고 해도 가입이 안 되더라니….”
김 선생님이 훌쩍거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작년에 어린이 독서프로그램 예산 깎여서 다 사라지고 올해 초부터 국공립 도서관 전부 노키즈존으로 운영한다고 공문 내려왔어요.
15세 미만은 학교에서 도서관 출입 사유서 받아서 교장선생님 도장하고 부모님 서명 받아 와야 들여보내 준대요.”
“아, 그러면 우리 딸도 사유서 받아 오면 도서관 출입증 만들 수 있어요?”
박씨 아줌마가 잠깐 반색했다. 김 선생님은 고개를 흔들었다.
“도서관 출입할 때마다 매번 사유서 받아 와야 돼요.”
“아니, 한창 자라는 애한테 책을 못 읽게 하면 어쩌라는 거예요?”
박씨 아줌마가 분노했다. 김 선생님이 한숨을 쉬었다.
“지난번에 지자체장 담화문 못 들으셨어요? 시민의 세금으로 운영되는 공공기관에 세금도 안 내는 미성년자들이 와서 책도 공짜로 보고 와이파이도 공짜로 쓰고 화장실 가서 물도 공짜로 좍좍 틀고 어렸을 때부터 뭐든지 공짜로 써 버릇을 하니까 나라가 망한대요.”
김 선생님은 다시 흐느끼기 시작했다.
“제가 어렸을 때는 이 건물 전체가 다 도서관이었어요… 5층까지 전부 다… 지하에는 서고만 있고… 그때는 서고가 무슨 비밀스러운 보물 창고 같은 덴 줄 알고… 서고 들어가 보는 게 꿈이었어요…”
이제는 서고가 있던 지하 중에서도 가장 아래층인 지하 3층, 물이 새는 한 층만 도서관이 사용하고 있었다. 지하 1층과 2층은 유료 주차장이었고, 지상 1층은 시간당 요금을 받는 스터디 카페, 지상 2층은 음식점, 3층부터 5층까지는 고시원이었다. 지하 3층 도서관을 제외하면 이 건물 전체가 사람이 안에 들어오기만 하면 가만히 서서 숨만 쉬어도 요금을 청구했다. 건물은 지자체 소유였으며 박씨 아줌마가 소속된 경비업체도 지자체의 하청을 받아 건물을 관리했다.
“석 달 남았어요… 3개월 있으면 도서관 문 닫는대요…”
김 선생님은 이제 통곡하고 있었다.
“우리 도서관 없어지면… 제주도하고, 육지에는 국립중앙도서관하고…. 그렇게밖에 안 남아요… 도서관… 없어요, 이제…”
박씨 아줌마는 김 선생님의 등을 토닥토닥 두드렸다.
“도서관이 없어지면 사서 선생님은 어떻게 해요? 선생님도 책 따라서 국립중앙도서관으로 가는 거예요?”
“아뇨…”
김 선생님은 울면서 고개를 저었다.
“저는 다른 일자리 찾아봐야 돼요… 도서관이 없으면… 사서도 없어요…”
그리고 김 선생님은 박씨 아줌마가 건네준 손수건에 얼굴을 파묻고 서럽게 울었다. 박씨 아줌마가 쯧쯧, 하고 혀를 차며 김 선생님의 등을 쓸어 주었다.
김 선생님은 자기 처지만 서러워서 우는 게 아니었다. 사실 김 선생님도 비정규직이었다. 도서관이 없어지지 않더라도 자신이 언제든 해고될 수 있다는 현실은 김 선생님의 마음 한구석에 언제나 가시처럼 뾰족하게 박혀 있었다. 그러나 김 선생님은 대부분의 사서들이 그렇듯이 문헌정보학과 출신이었다. 문헌정보학은 이름 그대로 정보가 문헌의 형태로 축적되고 사용자에게 유통되는 전 과정을 이해하고 정보의 분류와 유통을 최적화화기 위한 이론과 실무를 익히는 분야이다. 쉽게 말해 김 선생님은 정보 전산화 전문가였고 코딩부터 데이터베이스 구축까지 다 배웠고 관련 자격증도 몇 개 가지고 있었으며 도서관이 아니라도 앱 개발 회사부터 빅데이터 전문기관까지 정보를 다루는 곳이라면 어디든 도서관보다 몇 배나 더 좋은 조건으로 취업할 수 있었다. 현대 사회에서는 모든 일의 시작과 끝이 다 데이터이니까 말이다.
그런데 한편 김 선생님은 공부를 더 하고 싶다는 생각도 항상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도서관이 사라지고 자신의 일자리도 함께 없어진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김 선생님은 대학원 과정을 알아보았다.
대학도서관도 사라지고 없었다. 그와 함께 수많은 대학원 과정들도 사라졌다.
정부는 문화예술부문 지원 예산에서 도서관 관련 예산만 삭감한 게 아니었다. 고등교육 지원과 연구개발 예산도 몇 년 전에 전부 없어졌다. 이 때문에 전국의 대학들은 연구과제에 대학원생을 참여시키고 연구비를 지급할 수 없게 되었다. 대학원생은 그렇지 않아도 학부생에 비해 장학금이나 여러 지원 기회가 적은 편이다. 여기에 연구과제 예산마저 사라지자 대학원생들이 전부 학내 조교 자리에 달려들어 행정조교 경쟁률이 한때 세 자리 수를 기록하는 기현상이 일어났다. 이런 살인적인 경쟁률을 뚫고 행정조교 자리를 따내 봤자 삼십 년 전부터 조교 월급이 50만 원으로 동결돼 있는데 이래 가지고는 대학원 학비도 낼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고 대학원생들은 학교를 떠나기 시작했다. 몇 년 동안 대학원 강의가 개설됐다가 개강 후 일주일만에 다 폐강되고 신입생이 한 명도 없고 그나마 기존의 석, 박사 과정에 머무르던 학생들도 모두 휴학하거나 자퇴하거나 졸업해서 드디어 대학원생의 씨가 마르는 사태가 벌어지자 여러 대학들이 사립을 중심으로 대학원 과정을 살금살금 폐쇄하기 시작했다. 졸업해도 취업이 잘 안 되는 문과 계통 비인기 학과, 유럽어문계열 학과들이 가장 먼저 사라졌다. 연구개발 지원금이 없으면 연구실을 운영할 수 없는 이공계 전공들은 대학원 과정을 차마 없애지는 못했지만 거의 개점휴업 상태로 추락했다. 반면에 애초에 연구개발이나 과제 수주와 크게 상관이 없던 학과들은 대학원생 숫자에 큰 변화가 일어나지 않았다. 대학들은 이런 학과들이 오히려 ‘학위 장사’에 유리하다는 사실을 깨닫고 대학원 과정을 확장하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대학들은 도서관 재정비를 함께 진행했다. 연구개발 지원이 끊어지고 대학원이 텅 비면서 문학이나 철학 계통 이론서 등 일부 장서를 정말 아무도 찾지 않게 되었기 때문이다. 도서관은 이렇게 자리만 차지하고 먼지만 뿜어내는 책들을 ‘정리’하고 도서관 ‘공간을 효율화’하기 시작했다. 전자책 사용이 ‘친환경적’이라 주장하며 대학 도서관들은 장서를 폐기했다. 그리고 동시에 대학원 과정을 없애면서 전자책과 전자적 형태의 논문을 검색하고 열람할 수 있는 데이터베이스 구독을 차례차례 철회했다. 장서도 없고 지식에 접근할 통로도 막힌 대학 도서관은 학생들은 물론 지역주민들이 취업준비를 하는 스터디 카페로 아주 요긴하게 사용되었다. 모든 사람이 비정규직이었고, 모든 사람이 취업준비를 하고 있었고, 대학은 외부인에게 요금을 받고 도서관 출입증을 팔아 짭짤한 수익을 챙겼고, 아무도 책을 읽지 않았다.
“상것들한테 글 안 가르치던 시절로 다시 돌아간 거지 뭐.”
역사학을 전공하다 대학원을 그만둔 김 선생님의 대학 동기는 한마디로 이렇게 잘라 말했다. 이 대학 동기는 김 선생님이 도서관 장서를 살리기 위해 인기 없는 책을 대출해서 스캔하는 작업에 동원했던 지원군 중에서 가장 정열적으로 작업에 참여한 자칭 ‘도서관 빨치산’이었다. 김 선생님의 동기는 대학원을 그만둔 뒤 부모님 국밥집에서 일을 도우면서 한동안 어느 유명 동영상 플랫폼에 역사 관련 콘텐츠를 제작해서 올렸다. 조회수도 제법 늘고 구독자도 생기고 평판도 그럭저럭 좋아서 보람을 느낀다고 했다. 그런데 가장 최근에 올린 콘텐츠가 갑자기 ‘가짜 뉴스’로 신고당해서 채널 운영이 중단되었다.
“삼일절에 우리 조상들이 일본 제국에 항거해서 봉기하여 조선 독립을 위해 만세 운동을 했다. 이게 왜, 어딜 봐서 가짜 뉴스냐고.” 김 선생님의 대학 동기가 한탄했다. 김 선생님의 대학 동기의 동영상 채널을 신고한 사람은 삼일절이 어느 듣도 보도 못한 고대 종교의 기념일이라 주장하며 생성형 인공지능의 설명을 증거로 제출했고 동영상 플랫폼 측에서는 벌써 영겁의 시간 동안 ‘사실관계를 확인’만 계속하는 중이었다. 한편 김 선생님의 대학 동기의 부모님은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으니 로스쿨에 가는 게 어떻겠냐고 들들 볶는다고 했다. 석사까지 땄는데 국밥집하기엔 너무 아깝다는 것이었다.
“처음에는 로스쿨이 나 같은 사람 받아줄 정도로 한가한 데가 아니라고 생각했는데, 저따위 쓰레기 같은 이유로 채널이 정지를 먹으니까 나도 법을 좀 알아야겠다는 생각은 들더라.”
김 선생님의 대학 동기가 말했다.
“그래서, 로스쿨 가게?”
김 선생님의 물음에 대학 동기가 한 마디로 대답했다.
“미쳤냐.”
김 선생님의 대학 동기는 대학 졸업 후 잠시 출판사에서 일했다. 애초에 ‘잠시’ 일할 생각은 아니었는데, 하필 문화예술부문 정부 예산이 전부 사라지면서 출판 지원도 같이 사라진 해에 취직했던 것이다.
“소규모 출판사들은 정부 지원이 있든 없든 항상 돈이 없었으니까, 이번에도 어떻게든 버텨 봅시다.”
김 선생님의 대학 동기가 입사했을 때 환영회 겸 회식을 하면서 사장은 이렇게 말했다. 그 사장은 얼마 후에 경찰에 불려갔다. 그리고 국세청 공무원들이 몰려와서 손톱만 한 출판사를 홀랑 뒤집어 세무조사를 하기 시작했다. ‘노동운동사’라는 제목이 붙은 책을 출판했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이 노동운동사를 집필한 저자들이 대부분 특정 노동조합 소속인데, 그 노동조합이 북한을 추종하는 불온 조직이니 불법 단체로부터 자금 지원을 받지 않았는지 출판사도 조사를 받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조사받는 과정에서 출판사 사장이 대학 시절 러시아어 교양수업을 두 번이나 들은 적이 있다는 사실이 드러나면서 상황은 더욱 악화되었다. 처음 러시아어를 수강했을 때 D를 받았기 때문에 재수강해서 간신히 C+로 만들었으며 그 이유는 어문계열 전공자는 제2외국어 교양수업을 필수로 들어야만 학교를 졸업할 수 있었기 때문인데 다른 교양과목들은 전부 수강인원이 차 버려서 그나마 시간도 맞고 수강신청도 가능했던 러시아어를 선택했던 게 일생일대의 실수였다고 사장이 정부 요원들에게 몇 번이나 설명했지만 소용없었다.
“그놈의 노동운동사 책 팔아서 돈이나 벌었으면 억울하지나 않지.”
출판사를 폐업하기 전에 사장은 이렇게 말했다. 세무조사 때문에 출판사는 근 2년 동안 책을 한 권도 내지 못했다. 사장은 사돈의 팔촌까지 돈을 빌려 아등바등 버티다가 가장 막내로 입사한 김 선생님의 대학 동기가 입사 18개월을 찍은 바로 그날에 ‘경영상의 이유’로 직원을 전부 해고했다. 실업급여 기준요건만이라도 어떻게든 맞춰주려는 필사의 배려였다.
지하 3층에 남은 마지막 지역 도서관에서 김 선생님은 박씨 아줌마에게 이런 사정을 전부 다 말할 수 없었다. 박씨 아줌마는 다시 위층에 올라가 순찰을 돌아야 했다.
“노조에 가입해요.”
박씨 아줌마가 도서관을 나가기 전에 김 선생님에게 권했다.
“나도 노조 가입하기 전엔 말이 좋아 순찰이지 우리가 청소까지 다 했거든요. 2층 음식점은 자기들이 따로 청소업체 부르는데, 1층 스터디 카페하고 3, 4, 5층 고시원 복도 다 우리가 밤새도록 청소했어요. 용역회사는 딸랑 이거 태블릿 하나 주고 청소도구도 안 줘서 세제고 빗자루고 다 사비로 샀다니까. 노조 가입하고 나서 경비는 경비만 하고 청소는 청소만 하고, 미화 분과에서 쓰는 세제나 소모품은 원청이 제공하기로 했지.”
“저 혼자 남았는데 무슨 노조에 가입해요…”
김 선생님이 다시 울기 시작했다. 박씨 아줌마는 더 이상 김 선생님을 달래줄 여유가 없었다.
“알아보면 다 방법이 있을 거예요.”
친절하지만 다분히 막연한 위로의 말을 남기고 박씨 아줌마는 서둘러 나가 버렸다. 김 선생님은 녹색 비상구 표시판이 어스름한 빛을 뿜어내는 깜깜한 지하 서가에 또다시 혼자 남았다.
정수리에 차가운 것이 떨어졌다. 김 선생님은 고개를 들었다. 천장에서 또 물이 떨어지고 있었다. 희끄무레한 홀로그램 안내 영상이 다시 나타났다. 김 선생님은 이번에는 팔을 휘두르지 않았다. 홀로그램 영상은 도서관을 관리하고 책을 지키는 역할을 수행하고 있었다. 김 선생님은 홀로그램 영상에게 어쩐지 동지애를 느꼈다.
홀로그램 영상이 멈추어 선 지점으로 가서 김 선생님은 물에 젖을 위기에 처한 책들을 서가에서 꺼냈다. 그러다가 김 선생님은 희끄무레한 홀로그램 빛 덩어리 속에 희미한 얼굴이 보인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이전에 다 죽어가는 고물 핸드폰으로 처음 촬영한 영상 속에서 희끄무레한 덩어리가 디지털로 조작한 것처럼 부자연스럽게 보였던 이유는 실제로 그 빛무리 안에 오래된 디지털 기술로 조악하게 구현한 얼굴이 입을 움직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물귀신’의 실체를 알지만 그래도 어쨌든 오싹하다고 생각하면서 김 선생님은 핸드폰을 꺼내 그 얼굴을 촬영했다. 그리고 책들을 모아서 서가 한구석에 놓인 책상 아래로 가져가 ‘귀신’이 나오는지 지켜보려고 꺼내 두었던 담요를 편편하게 깔고 그 위에 책을 조심스럽게 늘어놓았다. 지하 3층은 언제나 습하지만 그래도 물에 젖은, 혹은 젖을 뻔한 책들의 습기를 담요가 어느 정도는 빨아들여 주기를 김 선생님은 바랐다. 그리고 김 선생님은 이제 집에 가는 건 포기하고 노트북을 켜서 핸드폰으로 촬영한 동영상을 옮겨 담은 뒤 “입술 움직임”, “대사 텍스트 변환”을 검색했다. 인터넷은 정보의 바다였고 김 선생님은 전문가라서 필요한 사이트를 금방 찾아냈다. ‘물귀신 얼굴’이 말하는 내용은 간단했다. 박씨 아줌마의 경비업무용 태블릿이 이미 통역해준 대로, 물이 새서 책이 상할 수 있으니 책을 치우고 누수 지점을 수리하라는 단순한 경고였다. 그렇게 변환된 텍스트 상자 아래 관련 광고로 몇 가지 영상이 떠올랐다. 그중 하나가 김 선생님의 시선을 붙잡았다.
어린이를 위한 도서관 이용안내.
오래된 영상이었다. 김 선생님은 동영상을 재생했다.
어린이 자료실. 함께 그림책을 보는 아이들. 사서 선생님에게 질문을 하는 어린이들. 어린이를 서가로 안내하는 사서 선생님. 김 선생님이 어렸을 때만 해도 흔한 도서관에서 흔하게 볼 수 있는 광경이었다. 김 선생님은 다시 울기 시작했다.
만화처럼 그려진 영상 속 어린이가 도서관 책을 가방에 숨겼다. 영상 속 사서 선생님이 이 광경을 보고 어린이에게 주의를 주었다.
김 선생님은 울음을 그쳤다. 담요 위에 놓인 책들을 바라보았다.
책을 숨길까.
죽어가는 도서관에서 책들을 데리고 탈출해야 할까.
김 선생님은 머릿속으로 도서관 책의 인식 칩과 바코드를 제거하고 책을 몰래 반출한 뒤 칩을 제거하느라 훼손된 책을 다시 수선하고 복원하는 과정을 자기도 모르게 구체적으로 궁리하기 시작했다.
그러다 다시 담요 위에 무방비하게 놓인 책을 바라보며 김 선생님은 마음을 다잡았다. 사서는 정보유통 전문가이기도 했지만 무엇보다도 지식과 문화의 수호자였다. 서울의 남쪽, 제주도 북쪽에 마지막 남은 도서관의 마지막 장서를 사서인 자신이 훼손해서 밀반출할 수는 없었다. 한 줌 남은 사서로서의 자긍심이 그것만은 허용하지 않았다.
그러나 이대로 두면 물이 새는 지하실에서 이 책들은 도서관과 함께 죽어 영원히 사라질 것이다.
김 선생님은 시계를 보았다. 달력을 보았다.
아직은 시간이 있다. 단 한 뼘 남은 시간이지만, 그래도 아직은 조금 시간이 남아 있었다.
담요 위에 놓은 책들을 바라보면서, 김 선생님은 정부청사 앞에서 농성하고 있는 전직 국립도서관 사서 선생님들을 찾아가야겠다고 생각했다. 도서관과 책과 지식과 정보와 문화와… 나라의 미래가 모두 함께 이대로 죽도록 놔둘 수는 없었다.
‘알아보면 다 방법이 있을 거예요.’
박씨 아줌마가 말했다.
그렇다. 김 선생님은 바로 그 ‘알아보는’ 일의 전문가였다.
“내가 구해줄게.”
김 선생님이 책들에게 말했다.
대답 대신 희끄무레한 홀로그램 빛무리가 다시 나타났다.
김 선생님은 물귀신으로부터 책을 구하기 위해 분연히 일어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