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을 기록할 때 슬픔은 항상 현재형으로 존재한다. 살아있을 때 모든 겨울이 가능해진다. 가능하지 않은 것들은 모두 과거형이다. 죽은 것들이다. 다시 허락되지 않는 입술이다. 엄마가 쓰던 서랍을 하나둘씩 열어보다가 발견한 일기장을 옮긴다.
1956년 1월 28일
아버지가 내게 선물을 주셨다. 두발자전거다. 아버지가 내게 가장 먼저 가르쳐 준 것은 자전거 바퀴 구멍을 메우는 방법이었다. 아버지가 정상적인 바퀴에 구멍을 내더니 자전거를 메우기 시작했다. 그리고 자전거 타는 법을 배웠는데, 두발자전거를 탈 때는 뒤도 옆도 보면 안 된다고 했다. 앞만 보고 페달을 전속력으로 밟아야 넘어지지 않는다고 했다. 아버지가 뒤에서 잡고 있을 테니 내게 페달을 밟아보라고 했다. 두 손으로 자전거 검은색 손잡이를 꽉 잡고 달렸다. 방둑 위에 흩어지는 구름들이 잡힐 듯 했다. 아버지가 뒤에서 손을 놓은 것 같았다. 페달을 멈추지 않고 밟았다. 처음 느껴보는 발아래 바람들이 감겨서 좋았다.
1956년 12월 22일
양쪽 볼이 풍선처럼 부풀었고 오른쪽 귀에서는 계속 물이 났다. 움직일 수 없을 정도로 온몸에 열이 올랐다. 창 안으로 들어온 겨울바람에 손가락 끝이 시려 주먹을 꽉 쥐었다. 밖에서는 엄마의 목소리와 옆집 순이 아줌마 목소리가 들렸다. “삼선이 이미 늦은 것 같다.” 엄마가 말없이 내게 이불을 덮어주었다. 나는 정신을 잃었다. 차가운 아빠의 손이 나를 잠들지 말라고 흔들었다. 아빠가 나를 업고 자전거 뒤에 앉혔다. 너무 세게 달리는 속도에 떨어질 것 같았다. 아빠의 등을 꽉 잡았다. 아빠의 등허리가 우는 사람처럼 들썩였다. 아빠의 일그러진 눈동자가 반짝인 것 같았다. 겨울인데 햇살은 여전히 따뜻하고 눈부셨다.
1957년 5월 22일
우리 집 마당 앵두나무에 열매들이 열렸다. 햇빛 속에 새들이 숨어 있었다. 산에서 할미꽃을 뽑아 심었다. 금방 시들어 죽어버렸다.
일기 사이에 끼워져 있던 흑백 사진 속에는 단발머리 소녀와 할머니가 보였다. 모녀가 씨앗이 막 자라난 해바라기처럼 웃고 있었다. 그 위로 떠 있는 구름 사이 껴 있는 햇빛이 물기에 젖어 있는 것 같았다. 엄마에게도 엄마가 있던 시절이 있었다니. 엄마의 정원에는 자기의 몫을 다한 마음들이 있겠지. 바람을 흔들어 놓는 앵두꽃들, 겨울을 아직 시작하지 못한 햇빛 속의 새들, 반짝이는 아빠의 일그러진 눈동자가, 산에서 가져온 할미꽃이. 오래 잊혀 진 장면들이 자기의 몫을 다 했다고 생각하면 슬퍼진다. 제 몫을 다 한 것 같아서 슬프고, 제 몫을 다 하지 못한 것 같아 슬프다. 슬픔의 자리에는 그 어떤 슬픔이 있어야 완성이 되고 어떤 기쁨의 자리에는 그런 마음이 있어야 기쁨이 완성될 텐데. 겨울이 오면 내가 가진 몫의 전부에 대해 생각하다가 이미 울어버린 문장들을 되짚는다. 가장 사랑했던 혹은 가상 슬퍼했던 장면들은 우리가 생각해야 할 몫의 자리에 데려다준다. 고요해진다. 처음부터 정해진 슬픔의 총량과 기쁨의 몫이 정해져 있는 것처럼, 그래, 겨울에는 눈이 있어야지, 어제 두고 온 슬픔이 있어야지. 그것을 모두 사용해야만 인간의 영혼이 고요해지는 것처럼. 마음은 미완성의 몫일 것, 흘러가야만 하는 것, 떨어지고 흩날려야만 하는 것, 나도 모르게 울고 싶다고 말해야 하는 것, 미완성으로 남아야 가장 인간다운 것. 나를 떠난 것들 혹은 내가 떠나보낸 이들은 겨울 볕 아래에서, 겨울밤 가로등 아래에서, 눈송이로 흩날려 사라진다 해도. 그런 눈송이에 나는 푹푹 발이 빠져 걸려 넘어지고, 내 몸 위로 자꾸만 쌓이는 눈송이 송이들. 때로는 남겨진 슬픔의 몫은 지지대가 된다. 흘리는 눈물의 방향이 된다. 그 빈 상자에는 아무것도 없어 라고 누군가 대신 말해주기를 기다리거나 삶의 끝을 알기 위해서 얼마나 많은 겨울을 지나야 하는지…… 알고 싶다, 반드시 안녕을 해야 하는 이상하고 아름다운 인간의 마지막 꿈을. 지나가기만 하고 알 수는 없으므로, 이내 겨울이 온다, 눈 없이 온다, 성실한 얼굴을 하고, 본 적 없는 겨울 숲으로, 나의 발 없는 개가 저 먼 곳에서 눈발을 적시며 걸어온다. 긴 숨을 쉬며 성큼 뛰어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