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장立場 속으로, 미자, 微子에게

  • 2023년 겨울호 (통권 90호)
입장立場 속으로, 미자, 微子에게

이제 그간의 시간들을 더듬어 보며 다시 고쳐 살 수 있는 것은 최대한 고쳐 살아야 하겠다는 정도의 의욕은 남아있는 모양이다. 이 의욕마저 쇠잔해지면 안 된다는 강박에 조금씩이나마 손볼 데를 꾸준히 손보는 모습이 보인다. 다행이다.
아주 크게 돕지는 못하더라도 우왕좌왕하는 마음들에 희미한 등불이라도 달아주어야겠다는 걸음과 하늘에서 일어나는 눈부신 일들을 낌새라도 느껴보자는 그런 의욕이 이 순간의 나를 추동하고 있음을 알아채는 중이다. 굳이 결심한 일은 아니다. 문득 나를 마주하고 보니 내가 나에게 그런 웃음을 보내고 있었다. 다행이다.

 


입장立場 속으로


만나러 가고 있는 중이다
도움을 주어야 할 입장이다
걸음이 새털처럼 가볍다고 할 순 없다
어디까지 관여해야 훈훈할 것인가
화근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받았다는 기억은 시간이 흐른 뒤
여러 가지 태도를 낳기 때문이다
한 태도 때문에 밤샘을 한 적도 있다
그래도 만나러 가고 있는 중이다
말없이 오래 안아주는 느긋한 천성을
오래 부러워만 하며 살아왔다
입장을 바꿔 보라는 귀한 조언을
여러 번 귀하게 쓴 적이 있을 뿐
땀을 흘리며 관여한 적은 없었다
거의 다 와 가고 있는 중이다
그의 입장 속으로 입속의 사탕처럼,
혹은 눈이 녹듯 입장入場하려 애쓴다
걸음이 점점 빨라지고 있는 건 아니다


미자, 微子에게
-Neutrino-

미자야, 오늘도 어제처럼 해가 떴구나
덕분에 외로움이 많이 줄었다
너를 기어코 만났구나
없다고 했을 때는 그렇게 있더니
있다고 했을 때는 그렇게 없더니
속속들이 다녀가면서도
오래 입다물어 주었던 것
알 수 없었던 느낌들이 언제나
포도송이처럼 부풀어 대롱거렸었지
네가 있을 것이라 짐작했다
나를 관통해주던 매 순간의 고요로
깊이 없던 얄팍한 미소와
누더기로 지은 한 생각, 생각들
다 감싸 안고 쓰다듬어 주었던 것
고맙다, 두려움이 많이 가셨다
다녀가면서 또 채워 주는 마음 씀에
부끄러움과 안도를 함께 전한다
오늘도 해가 천천히 다녀가더구나

한영옥
시인, 성신여자대학교 명예교수, 1950년생
시집 『슬픔이 오시겠다는 전갈』 『아늑한 얼굴』 『비천한 빠름이여』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