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특집
죽음의 서사, 한국의 정치팬덤

  • 기획특집
  • 2023년 겨울호 (통권 90호)
죽음의 서사, 한국의 정치팬덤

1.

기사를 검색해보니 요즈음 ‘정치팬덤’, ‘팬덤 정치’라는 말은 동네북이 되어 있다. 대중문화나 예술 방면의 팬덤은 대략 무해하나, 정치에서의 팬덤은 ‘백해무익하다’는 지탄이 거의 9할로 보인다. 그런데 과연 그렇기만 한 것일까?

 

10월 초, 글 청탁을 받았을 때 ‘팬덤’이라는 말이 나오는 순간, 내가 쓸 수 있는 글은 아니다 싶었다. 동네북이 되어 있어서가 아니었다. 좋아하는 가수나 작가나 배우, 또는 존경하는 학자나 정치가가 없지야 않지만, 그런 호감과 지지를 뜨거운 ‘팬심’이나 ‘팬덤’이라고 느껴본 적은 없었기 때문이다. 팬덤을 모르는데 팬덤에 대해 무얼 쓰겠나.


그렇지만 처음 통화하는 자리에 야박하게 딱 잘라 거절하기 미안했다. 이메일로 글이 실릴 지면 소개와 청탁 취지서를 보내달라고 하였다. 그러고 답장으로 정중하게 사양하려고 했다. 당일 바로 이메일이 왔다. 그런데 그 이메일에 답하기까지 하루 사이, 기사 검색을 해보고 생각이 바뀌었다. 한국의 정치팬덤 현상 전체를 몽땅 비난의 대상으로만 치부하고 넘어가기에는 석연치 않은 무엇이 있다. 그것을 밝혀보고 싶었다.


한국의 정치팬덤을 비판하는 글들에서 비교 대상으로 주로 등장하는 게 2016년 미국 대선에서의 ‘트럼프 팬덤’이다. 과연 트럼프 팬덤은 과거의 정치현상과 다른 무엇이 있다. 자신에 대한 지지보다 상대에 대한 혐오와 적대를 만들어 내기에 몰두했다. 혐오 생산의 주무기는 SNS 트롤링과 어그로, 즉 조롱과 도발이었다. 개인 허물로 보면 힐러리보다 트럼프가 컸다. 그럼에도 트럼프가 만들어 낸 혐오가 트럼프를 향한 혐오보다 컸다. 힐러리와 민주당을 세계화 기득권 대변자로 몰아간 것이 먹혔다. 그 혐오의 양 차이로 트럼프가 이겼다.

 

트럼프식 혐오의 대량 생산은 치밀했다. 원래 군사 심리전을 대행 전문업으로 하던 ‘캠브리지 애널리티카’나 ‘브라이트바트’라는 대안 우파(alternative right) 프로파간다 회사를 은밀히 이용했다. 이들은 페이스북에서 구입한 막대한 개인정보를 바탕으로 개인 호오(好惡) 맞춤형 알고리즘을 이용하여 체계적으로 여론의 방향을 조작했다.


어느 쪽이 더 큰 혐오를 만들어 내느냐가 승부를 갈랐던 것이 2016년 미국 대선이었다. 혐오 생산에서 ‘트럼프 팬덤’이 이겼다. 트럼프 팬덤의 전투력은 2020년의 대선에서도 유감없이 발휘되었다. 선거 패배를 인정하지 않는 트럼프 팬덤의 국회의사당 무장 점거 사태가 막강한 화력을 과시했다. 아직 차기 미국 공화당 대선 후보자가 결정된 것은 아니지만, 아마도 내년 미국 대선에서도 트럼프 팬덤은 괴력을 발휘할 것이다. 트럼프 팬덤이 일시적, 우발적인 현상이 아니라 오래 존속하는 깊은 구조적 배경을 가지고 있음을 말해준다.

 

트럼프 팬덤 현상은 충격적이었지만, 미국뿐 아니라 서구 여러 나라 정치에 혐오와 도발의 정치가 유입되기 시작한 것은 이미 꽤 되었다. 이런 나라들에는 공통적으로 ‘반 이민’, ‘반 세계화’, ‘반 페미’를 내세운 극우 정치세력이 부상했다. 세계화의 결과 뜻밖에도 서구 백인층 기득권이 흔들리게 되었다는 불안과 분노의 심리가 그 배경에 있다. 이러한 세력이 인터넷, 휴대폰, 유튜브 등을 잘 이용하여 적대와 혐오의 온라인 문화전쟁의 첨병이 되었다. 대화가 사라지고 혐오와 도발로 채워진 새 영토에 드디어 트롤 킹인 트럼프가 당당하게 군림할 수 있었다.

 

2.

한국의 정치팬덤을 이상과 같은 트럼프 팬덤 현상과 동일시할 수 있을까? 물론 트럼프 현상을 열심히 학습하고 모방하는 흐름이 지난 한국 대선에서도 당연히 나타났고 일부 먹히기도 했다. 그러나 그렇듯 베껴서 하는 일은 한국 토양에 뿌리가 약하기 때문에 오래 지속되기 어렵다. 우리가 주목해야 할 점은 한국 토양에서 뿌리내린 정치팬덤 현상이다. 이미 꽤 오래전부터 미국과는 전혀 다른 배경과 논리, 심리 위에서 형성되어 왔다.

 

정치팬덤을 논한다면 표면의 물결만 봐서는 부족하다. 겉으로 드러난 현상의 정치적 배경, 사회경제적 바탕을 주목해야 마땅하다. 해류를 봐야 한다. 한국에서 나타난 정치팬덤은 오늘날 서구 사회에서와 같은 ‘기득권 상실에 대한 불안과 분노’와는 전혀 무관했다. 평생 기득권에 속해본 적이 없는 사람들의 기득권 혁파의 열망이 핵심 동력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트럼프처럼 금수저로 태어나 승승장구하여 자신도 재벌이 된 사람은 한국형 정치팬덤의 중심에 설 수 없는 일이었다. 반면 미국에서는 트럼프와 같은 사람이 과거 한때 세계 서열에서 우월한 지위에 있었으나 이제 그 지위에서 굴러떨어지고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주로 백인 중하층)의 대리인, 대표자 코스프레를 할 수 있었다.

 

현재까지도 한국 정치판에서 최대 팬덤을 형성했다고 할 수 있는 노무현 전대통령의 경우를 보면 그러한 차이가 분명히 드러난다. 노무현 전대통령은 고졸의 흙수저 출신이다. 그 후 역경을 딛고 국회의원이 된 후에도 주어진 작은 기득권에 안주하지 않고 지역감정 해소와 정치발전이라는 대의를 위해 낙선을 뻔히 예상하고서도 험지 출마를 반복했다. 이러한 ‘바보 노무현’에 대한 한 번도 기득권이었던 적이 없었던 힘없는 사람들과 젊은이들의 뜨거운 지지가 노무현 팬덤의 시작이었다.

 

그러나 노무현 전대통령에 대한 본격적인 팬덤은 그의 죽음 이후에 만들어졌다. 이 점이 한국 정치팬덤의 또 하나 아주 중요한 특징이다. 기득권에 맞서다가 기득권의 압박에 의해 억울하게 죽었다는 서사가 현대 한국 정치 최대 팬덤을 만들었다. 노무현 전대통령의 팬덤력은 왜 그렇게 강한가? 죽음의 성격이 강렬했기 때문이다. 그의 죽음 이전의 ‘노사모’ 역시 팬덤이었다. 그러나 그의 죽음 이후 형성된 팬덤과는 그 강도에서 비교가 안 된다.

 

비록 온라인 팬덤이 본격화되기 이전이기는 하지만, 김대중 전대통령의 경우도 비슷하다. 기득권에 맞서면서 오랜 시련의 시간을 보냈고 절대 권력자에 의해 죽음의 언저리에 여러 차례 섰다는 사실이 김대중 팬덤의 중심에 있다. 그가 경험했던 ‘코앞까지 다가왔던’ 두 죽음은 모두 처절했다. 그러나 그는 그가 사랑했던 말 ‘인동초’처럼 생존했고, 결국 최초의 야당 집권 대통령이 되어, ‘형식적 민주주의(formal democracy)’를 한국에서 비로소 이뤄냈다는 영광을 누렸다. 그러나 그 영광으로 인해, 그리고 한국형 정치팬덤의 비극적, 역설적 특징으로 인해, 그의 팬덤력의 강도는 다소 감소했다고 할 수 있겠다.

 

이러한 까닭에 한국 정치의 맥락으로 들어오면 팬덤이라는 언어가 서구 정치권에서와는 확실히 질적으로 다른 문화적, 심리적 색채를 띠게 된다. 트럼프는 미친 사람 퍼포먼스로 팬덤을 만들 수 있었지만, 죽음과 관련된 비장미, 비극미 따위는 전혀 없다. 정치적 진지성과 팬덤의 연관성도 한국만큼 강하지 않다. 특히 현대 미국 정치에서 그런 모습은 매우 희귀하다. 고작 존, 로버트 케네디 형제 정도일 것이다.

 

한국 역사에서 죽음서사의 정치팬덤의 연원은 아주 오래된 것으로 보인다. 오늘날까지도 보존되고 있는 모습이 있으니, 바로 무당집, 점집에서 신으로 모셔지고 있는 임경업 장군이다. 그는 힘껏 충의를 다하다 집권 세력에 의해 억울한 죽임을 당했다. 그의 죽음을 숨죽여 울어주던 민초들의 간절한 해원(解冤)의 염력이 임경업 팬덤이었고, 그 팬덤이 오늘날까지 그를 신으로 만들었다.


한국정치에서 죽음서사의 정치팬덤이 만들어졌던 이유는 가혹한 방법으로 정치 라이벌을 죽음으로 내몰 수 있는 절대 기득권층이 존재했기 때문이다. 이러한 상황은 불행하게도 오늘날까지도 크게 바뀌지 않은 것 같다. 과거 군사독재 시절에는 정보부나 군부대의 폭력을 이용했다. 이제는 그 수단이 특정 정치적 라이벌에 대한 몇 년씩이나 계속되는 검찰 조사와 압수수색으로 바뀌었을 뿐이다. 이러한 방식으로 성공을 거둘 수 없다는 사실은 민주화의 지난 역사가 입증해주고 있지 않은가? 사정이 그러하니 지탄할 곳은 팬덤 현상이 아니라 무리한 정치탄압을 통해 한국형 죽음서사의 팬덤 현상을 지속시키고 있는 기득권 독점체제가 아니겠는가? 대화를 불가능하게 하는 원인이 해소되어야 비로소 대화의 정치가 가능하지 않겠는가?

 

사실 ‘과도한’ 팬덤의 부정적 현상이 우려된다고 하여, ‘팬덤’이라는 말 자체가 악마화되어야 할 이유는 없다. 정치팬덤도 마찬가지다. 팬덤(Fandom)이라는 단어는 좋아한다는 팬(fan)에 집단적 현상이라는 의미의 덤(dom)이 붙은 평이한 말이다. 대중문화 스타가 나오니 스타덤(stardom)이란 말이 나온 것과 같다. 영어에 관한 가장 권위있는 사전인 옥스퍼드영어사전(Oxford English Dictionary)은 팬덤이라는 말이 이미 백여 년 전부터 사용된 것으로 보고 있다. 그리고 팬의 어원은 열성적 종교 신자를 말하는 퍼내틱(fanatic)에서 왔다. 광신도라고도 번역한다. 이 말이 세속적 의미에서 팬으로 되었을 때는 말의 무게가 훨씬 가벼워졌다. 대중문화 스타든 정치 스타든 마찬가지다. 퍼내틱에서 팬으로 변한 것은 건강한 가벼움이다. 한국 정치에서 죽음서사적 압박이 사라져 건강한 의미에서 가벼운, 그러면서 더욱 뜻이 크고 긍정적이고 쾌활한 정치팬덤이 출현해주기를 기대해 본다.

김상준
사회학자, 경희대학교 공공대학원 교수, 1960년생
저서 『붕새의 날개 문명의 진로』 『미지의 민주주의』 『맹자의 땀 성왕의 피』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