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특집
트로트 팬덤, 중년들의 해방구

  • 기획특집
  • 2023년 겨울호 (통권 90호)
트로트 팬덤, 중년들의 해방구

1.

때는 1973년 6월, 서울 시민회관(현 세종문화회관) 무대에서 나훈아가 <찻집의 고독>을 부르고 있었다. ‘그 다방에 들어설 때에/ 내 가슴은 뛰고 있었지/ 기다리는 그 순간만은 꿈결처럼 감미로웠다.’ 그때 누군가가 무대로 난입하여 깨진 사이다병으로 나훈아의 얼굴을 가격했다. 이른바 ‘나훈아 피습사건’은 대중들에게 큰 충격을 줬다. 나훈아는 70여 바늘을 꿰매는 중상을 입었다. 폭력 전과가 있던 범인이 나훈아를 해치면 라이벌인 남진에게 보상을 받을 수 있을 것이라는 터무니없는 생각을 가지고 벌인 일이었다. 이 때문에 남진은 한동안 ‘피습사건 배후’로 지목되어 곤욕을 치렀다.
트로트 팬덤을 얘기하는 지면에서 쌍팔년도 사건을 꺼낸 데는 나름의 이유가 있다. 1970년대 초 트로트의 양대 산맥이었던 남진과 나훈아를 둘러싼 라이벌 구도는 팬덤 문화의 효시였다. 당시 두 사람의 인기도 막상막하였지만 연예 매체들도 대결 구도를 만드는 데 한몫했다. 목포 출신의 부잣집 아들 남진과 부산에서 무작정 상경한 나훈아는 전라도와 경상도라는 지역대결 구도와 맞물리면서 과열 양상을 빚었다.

두 사람의 리사이틀(지금의 콘서트)이 열리는 극장 앞에는 암표상들이 들끓었다. 가는 데마다 여성 팬들이 몰려들었고, 초등학생들도 두 편으로 나뉘어 싸웠다. 나훈아가 히트곡을 내놓으면 남진이 뒤를 이으면서 자존심 대결을 펼쳤다. 두 사람이 소속된 레코드사에 팬레터와 선물이 쌓이고, 리사이틀이 열리는 극장에 열성팬들이 줄을 서는 진풍경이 연출됐다.

그렇게 시작된 팬과 스타의 관계는 시대별로 이름을 달리하면서 변모돼왔다. 조용필이 독주하던 시대에는 ‘오빠 부대’가 있었고, 서태지와 H.O.T.가 있던 시절에는 ‘팬클럽’이 있었다.

 

2.

새로운 천년이 시작되면서 대중음악계는 소위 ‘아이돌 음악’이 장악했다. 국내를 넘어서 전 세계 시장에서 K-POP이라는 이름으로 자리 잡았다. 당연히 팬클럽의 규모도 달라졌다. 그 용어도 팬덤(Fandom)으로 불리면서 세계화됐다. 그 전 세대의 아티스트들이 국내용 팬덤을 거느렸다면 BTS 등 새로운 아이돌 그룹들의 팬덤은 다양한 나라와 인종으로 확산됐다.

이 와중에 트로트는 변방의 어디쯤서 맥도 못 춘 채 사망 선고를 기다리는 장르였다. 누구도 트로트가 지금처럼 번성할 거라고 예측하지 못했다. 그러나 지상파 방송에 오디션 프로그램 시장을 내주고 지켜보기만 하던 종합편성 채널이 트로트 오디션을 들고 나오면서 전세가 역전됐다. 그 중심에는 2019년 시작된 TV조선의 <내일은 미스 트롯>(이하 미스 트롯)과 <내일은 미스터 트롯>(이하 미스터 트롯)이 있었다. 특히 <미스터 트롯>은 종합편성 채널 사상 최초로 35.7%라는 전인미답의 시청률을 기록하면서 소위 ‘대박’ 프로그램이 됐다. 이들 프로그램을 통해 선발된 트로트 가수 송가인과 임영웅, 김호중 등은 순식간에 거대한 팬덤을 몰고 다니는 대세 가수로 떠오르면서 대중음악계 판도를 바꿨다.

아이돌 중심의 음악 시장에서 소외감을 느끼며 코로나 시대를 살아가던 중장년들은 트로트 신인들에게 열광하면서 무시하지 못할 세력을 형성했다. 더군다나 중장년 팬들은 아이돌 그룹의 팬들에 비해 경제적으로도 여유가 있기에 소위 ‘덕질’을 통한 구매력도 대단했다. 그러나 이때만 해도 중장년층들로 결성된 트로트 팬덤이 아이돌 그룹의 그것보다 더 큰 결속력을 과시하면서 국내 대중음악계의 판도를 뒤흔들 것으로 생각하는 사람은 별로 없었다.

 

3.

2019년 <미스 트롯>으로 송가인 열풍이 불면서 트로트가 대세 장르가 되자 문화계에서는 다양한 분석을 내놨다. 매년 트렌드를 예측자료를 발표해온 김남도 서울대 교수는 2020 트렌드로 ‘오팔 세대’를 꼽았다, ‘오팔(OPAL)’은 ‘올드 피플 위드 액티브 라이프(Old People with Active Life)’의 영문 앞 글자로, 새로운 소비층으로 떠오른 5060세대를 지칭한다. 베이비부머의 맨 앞단에 서 있는 1958년생을 상징하기도 한다. 이들 세대는 전 세대와 다르게 경제적 여유를 갖고, 모바일로 최신 트렌드를 접하면서 소비한다. 송가인·임영웅·김호중의 팬덤을 이끄는 중심에 그들이 있다.

 

 

시계를 돌려서 2003년 일본으로 가보자. 그해 4월 NHK에서 배용준과 최지우 주연의 로맨스 드라마 <겨울연가>를 방영했다. 외국 드라마로는 최초로 20%가 넘는 높은 시청률로 엄청난 인기를 끌었다. 그때부터 배용준은 ‘욘사마(よんさま)’로 불리면서 일본의 중년 여성들의 우상이 됐다. 배용준은 편당 10억 원이 넘는 초특급 대우를 받으면서 각종 CF모델을 휩쓸었으며, 일본팬들이 한국의 촬영장을 찾는 발길이 십수 년 동안 이어졌다. 한국의 오팔 세대가 중심이 된 트로트 팬덤은 일본에서 욘사마를 추종하던 세대와 맥을 같이 한다. 그 발생 과정과 형성과정, 사회적 배경이 닮은 구석이 많다.

현재 임영웅의 ‘영웅시대’ 팬카페 회원 수는 19만 명, 김호중의 ‘트바로티’는 14만5천 명, 송가인의 ‘어게인’은 9만 명이다. 실로 어마어마한 숫자다. 그냥 이름만 걸어놓은 숫자가 아니라 그들이 애정하는 스타를 위해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행동하는 숫자라는 점에서 더욱 놀랍다.

 

4.

임영웅이 팬카페 히어로의 적극적인 지원 덕분에 광고계의 블루칩이 된 지는 오래다. 쌍용차는 <미스터 트롯>의 방영 당시 우승자에게 상금 1억 원과 G4 렉스턴 차량을 제공하기로 했다. 그 주인공이 임영웅으로 결정되면서 쌍용차는 날개를 달았다. 당장 판매량이 50% 이상 급증했고, 내수 시장도 적자를 극복하면서 서서히 살아났다.

임영웅이 뜨면 완판이라는 공식이 이어졌다. ‘청년피자’의 피자, ‘청호나이스’의 정수기, ‘에스프레카페’의 커피머신 등 임영웅 효과는 대단했다. 그 이면에는 막강한 재력으로 무장한 팬카페가 있었다. 10대 중심의 아이돌 그룹 팬덤과 달리 트로트 팬덤은 안정된 재력을 가진 50~60대가 주축을 이뤘다. 광고계에서 몸값이 높은 김호중이나 송가인도 그 뒤에 열성적인 팬클럽의 구매력이 버티고 있다는 점은 별반 다르지 않다.

한편에서는 트로트 팬덤 때문에 5060세대의 스마트폰 이용에 대한 숙련도를 높였다는 우스개도 있다. 임영웅의 노래를 음악 차트 1위에 올리기 위해서는 음반매장에서 음반을 구입하는 것이 아니라 스마트폰에서 ‘스트리밍’을 해야 한다. 특히 트로트 팬들은 음반도 사고, 스트리밍도 하는 열성 팬들이다.

그들은 자신의 스타를 위해 능수능란하게 스마트폰을 다루는 법까지 공부한다. 이 때문에 트로트 팬덤에 속한 회원들은 ‘스밍(스트리밍)’에 익숙하다. 차트 상위권에 자신이 좋아하는 가수의 노래를 진입시키기 위해서 온종일 스트리밍을 한다. 트로트 가수들의 콘서트장에 가면 팬카페가 마련한 ‘스밍부스’가 눈에 띈다. 아직 온라인 세상에 익숙하지 않은 팬들을 위해 팬카페 가입부터 ‘스밍’하는 법을 직접 알려준다.

팬덤의 영향력은 광고계나 음원 시장에서 파워를 입증하는 데 그치지 않는다. 올해 4월 프로축구 K리그에서 임영웅이 시축자로 나서자, 예매 오픈 30분 만에 티켓 2만5천장이 판매됐다. 심지어 임영웅이나 김호중의 콘서트 현장을 편집한 영화(?)가 멀티플렉스에서 상영되어 웬만한 개봉작들의 관객 수를 넘어서기도 했다.

업계는 임영웅이 연간 700억 원이 넘는 매출을 기록하는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음반 및 음원 매출을 비롯하여 편당 4억 원 정도의 광고 수익, 또 콘서트 수익만으로도 중소기업의 그것을 넘어선다. 더군다나 트로트 가수들은 아이돌 그룹과는 달리 ‘딸린 식구’가 적기 때문에 훨씬 더 경제적이기에 ‘걸어 다니는 1인 기업’이 아닐 수 없다.

 

5.

기자 출신으로 언론사에서 고위직에 있는 50대 여성 A씨는 김호중에 매료되어 열성 팬이 됐다. 그는 남편 몰래 김호중 앨범 500장을 구입하여 친정에 보관 중이다. 그는 친구를 만날 때나 지인을 만날 때면 김호중 앨범을 선물로 준비한다. 10대 시절에도 그 흔한 팬클럽에 가입하거나 라디오 공개방송 현장에서 줄 한 번 서 본 적이 없다는 그는 자신의 변화에 스스로 놀란다. 그 배경에는 “김호중의 노래를 들으면서 평생 느껴보지 못했던 위로를 받았다”라고 말한다.

‘위로’를 받고 싶어 하는 팬들의 규모는 상상을 초월한다. 트로트 삼인방의 콘서트는 소위 ‘광클(광적인 클릭)’로 구매해야 하는 티켓전쟁 상품이 됐다. 1만5천석 규모의 KSPO돔(올림픽체조경기장)에서 열리는 임영웅의 콘서트는 6회차 티켓이 판매 1분 만에 매진됐다. 16만 원짜리 티켓이 100여만 원까지 치솟았다는 하소연, 당근에서 티켓을 사려다가 사기를 당했다는 하소연까지 후폭풍도 다양하다.

올가을에 밀려드는 행사로 유난히 바빴던 송가인은 가는 곳마다 소위 ‘핑크 부대’(팬카페 어게인의 굿즈상품들이 모두 핑크색)의 열렬한 호위를 받았다. 임영웅이나 김호중의 팬덤과 달리 중년 남성들이 많은 송가인 팬덤 특성상 행사장을 가득 덮는 것은 기본이고, 대통령 행차를 무색하게 하는 경호도 철통같다.

팬카페의 구성원들은 ‘덕질’을 통해 고독한 삶에 큰 위로를 받는다고 말한다. 일밖에 모르던 지난 세월을 뒤로하고 병마와 싸우거나, 부모나 배우자를 간병하거나, 황혼 육아에 시달리다가도 자신이 좋아하는 가수의 노래를 들으면 눈 녹듯이 근심이 사라진다. 기대할 일이 없던 삶에 기대할 일이 생겼다. 소속감이 없던 삶에 소속이 생겼다. 누군가를 미칠 듯이 좋아해도 부담을 느끼지 않는 마음의 공간이 생겼다. 매일 산에 오르는 일이 전부인 일상에서 누군가를 위해 온종일 마음 쓸 일이 생긴 것이다.

대중문화평론가 이무영(동서대 영화과 교수)은 “2000년대 이후 아이돌 음악이 대세를 이루면서 상대적으로 중장년층을 위한 음악은 찾아보기 힘들었다”면서 “그 시장을 트로트 음악이 파고들면서 큰 성공을 거둔 것”이라고 분석했다. 한마디로 트로트 팬덤은 아이돌을 중심으로 한 댄스나 힙합 음악 시장의 반작용으로 형성된 틈새시장 공략의 결과라는 것이다.

그러나 다양성이 생명인 대중음악계가 아이돌 그룹과 트로트 가수로 양분된 건 결코 바람직하지 않다. 방송사들이 너도나도 트로트 오디션 프로그램을 제작하면서 봇물을 이뤘지만, 그 영향력이 갈수록 약화되고 있다. 세련된 문화는 편중이 아니라 다양성에서 출발한다. 다양한 변주가 필요한 시점이다.

오광수
시인, 대중음악평론가, 영상물등급위원회 위원, 1961년생
에세이집 『낭만광대 전성시대』, 시집 『이제 와서 사랑을 말하는 건 미친 짓이야』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