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밭단상
아직도, 이 독한 ‘오리엔탈리즘’

  • 글밭단상
  • 2023년 겨울호 (통권 90호)
아직도, 이 독한 ‘오리엔탈리즘’

어제 신문에서, 올해 <프랑크푸르트도서전>에서 받기로 한 상의 시상식이 취소되어 한순간에 주목을 받게 된 팔레스타인 작가 아다니아 쉬블리의 기사를 읽었다. 더욱 관심이 갔던 것은 광주에서 격년으로 열리는 <아시아문학페스티벌>의 ‘아시아문학상’의 후보로 참석해 직접 대면하고, 또 이번 에 참석 중이며, 지금 하마스로 촉발된 팔레스타인 전투에서 제노사이드 같은 위기를 느끼기 때문이다. ‘아시아문학읽기’라는 모임을 진행하고 있는 내게, 그녀가 받기로 한 ‘리베라투르상’이 정치적 국가분쟁의 이유로 취소되었다는 지극히 ‘엄연한’ 사실은 참 씁쓸하고 독한 ‘한 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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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년퇴임을 하고, 소설을 써야지 했다. 지방 사립대학, 특히 재단이 넉넉하지 못한 대학교에 근무해 본 사람들은 고개를 끄덕이며 이해할 터이지만, 여러 부족함을 인적 자산으로 대체하겠다는 듯이, 작품보다는 논문 한 편-교육부 평가를 위해-, 연구보다는 정부 프로젝트 참여 등을 넌지시, 그렇지만 상당한 압력으로 요구하기 때문에 개인적 시간을 얻기가 힘이 든다.

그래서 시간만 나면 나는 좋은 소설을 쓸 것이라고 스스로를 마취시키며, 근근이 단편 소설 한두 개 발표하며, 사실 문학과도 버성기며 살아왔던 것이 억울한 탓인지, 정년만 하면 소설만 쓸 것이라고 호언도 장담도 했다. 그러나 오늘 못한 것을 내일 할 수 있다는, 증처가 어디 있겠는가. 그 장담은 곧 흰소리가 되어 버렸다. 귀가 약한 나를 꼬드기는 몇 사람들에 의해 ‘아시아문학읽기’라는 모임이 만들어지고, 나는 순전히 타의에 의해 - 지금 활동하는 아시아문학교류 위원회 역시 - 그 모임의 모가비가 되었다. 그 좌장이란 자리가, 능력이 기준이 된 것이 아니라, 오로지 내가 소설을 쓰겠다고 2년간 부부싸움 끝에 얻어낸 좁은 개인 공간이 시내 중심에 있다는 이유 때문이다. 정말 씁쓸하고, 독한 잔이다. 12명 정도의 시인과 소설가들이 격주 한 권의 엄선된 아시아 문학작품을, 한 해 16~17권 정도 읽었으니, 거의 50권의 작품들을 읽은 셈이다.

대학에서 소설 창작을 가르치던 나 역시 학생들을 가르치면서 주로 서구 소설들을 중심으로 예를 들어가며 논의하고, 분석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비단 나뿐 아니라 많은 동료 교수들 역시, 학부 시절부터 외국 문학이론 서적으로 공부해 온 현실에서는 어쩔 수 없는 현상일 것이다. 그래서 제3세계 작품이나 정작 인근의 아시아 작품들은 그야말로 ‘베스트셀러’가 아니면 접근하지 않았고 못했다. 우리 독서 시장에 번역 출판되는 서적들은 유럽과 미주에 치우친 분포도를 그릴 것이며, 세계적 문학상 수상작 역시 같은 현상으로, 우리는 아직 오리엔탈리즘이 포스트~라는 접두사를 붙일 단계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아시아의 텍스트를 읽으면서 우리는 두 가지 사실에 아연했다. 왜 이렇게 좋은 작품들을 우리는 몰랐고, 사실은 우리보다 좋을 수 없을 것이라는 우월의식에서 도외시했다는 부끄럼이 첫째였다. 서구의 어느 작품과 비겨도 기울지 않은 작품들이 우리를 책망했다. 이국적 정서에서 온 생소함에서 온 것은 아니다. 객관적으로 작품들은 자기 가치를 갖고 있었다.

다른 하나는, 식민지 경험을 했던 모든 아시아인이 겪어야 했던 가혹한 무력 지배 아래에서 행해진 갖가지 폭력에 의한 인간의 존엄성을 박탈당한 데에 대한 분노였다. 극동·동남·서남 아시아 어느 국가의 문학작품이든지 거의 모든 작품에서 식민지 수탈로 인한 기아와 경제적 빈곤과 인종 차별, 인간성 박탈 등이 관습처럼 목록화되어 있다는 것이다. 작가에 따라서 그 담론화 과정에서 차이점들은 존재하지만, 그들의 무의식에서 저장되었다가 작품 속으로 스며든 핵심은 ‘아시아인의 슬픔’이었다.

극심한 고통으로 체화된 비극은 결코 쉬 사라지지 않는다. 그것은 민중적 무의식으로 확대되고 역사의식에 의해 강화되어 응축되어 있다가 조금씩 폭발하며 용해되기 때문일 것이다. 용해가 되고 나서야 새로운 세계로 항해할 수 있다. 그래서 우리는 좀 더 많은 ‘아시아의 작품’과 ‘제3세계 작품’들을 공감하며 읽어야 한다. 우리나라를 비롯한 많은 나라에서 식민지 피해의 고통은 아직 다 해결되지 않았으며, 다른 얼굴로 더욱더 공고히 되고 있지 않은가?
나는 쉬블리의 『사소한 일』을 내년 우리의 도서목록에 처음으로 올릴 예정이다.

채희윤
소설가, 오월문예연구소 소장, 1954년생
장편소설 『소설 쓰는 여자』, 소설집 『곰보 아재』 『스무고개 넘기』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