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편소설
한겨울 따뜻한 실내에서

  • 단편소설
  • 2023년 겨울호 (통권 90호)
한겨울 따뜻한 실내에서

11월 19일

 

묵은 마지막으로 일어나 거실을 돌았다. 재작년까지만 해도 한달음에 뛰어오르던 흰 소파를 지나, 창가를 지나, 나무 바닥을 천천히 밟아 다시 자신의 부드러운 방석으로 돌아와 누웠다. 희재는 그런 묵의 몸 위로 조심히 입술을 갖다 대었다. 묵, 나 여기 있어. 지난 몇 년간 수백 번도 넘게 되풀이해 온 말이 음성 없이도 전달되기를 바라면서.

십 분이 지나자 묵은 온몸이 떨릴 정도로 급하게 숨을 쉬었다. 희재는 주사를 손에 쥐었지만, 찌르는 것이 무의미하다는 것을 본능적으로 알았다. 희재는 주사를 놓는 대신에 묵을 끌어안았다. 잠깐의 폭풍이 지나가자 묵은 영원히 평온해졌다. 희재는 아직 따뜻한 묵의 등에 뺨을 대고 마지막 온기를 느꼈다. 오랜 기도가 끝나고 창밖이 밝아졌을 때, 희재는 가까스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고는 이 년 전부터 알아두었던 애견 장례 업체에 전화를 걸었다.

 

11월 23일

 

나흘이 지나고 희재는 또 다른 곳에 전화를 걸었다. 입주 가사도우미가 필요해요. 최대한 빨리 와주시면 감사하겠어요. 최대한 빨리라고 했지만, 그날 오후 초인종이 울렸을 때 희재는 놀랐다.

이렇게 빨리 오실 줄은 몰랐는데.

조금 이따 다시 올까요? 여자가 문밖에 서서 물었다.

괜찮아요. 안으로 들어와요.

희재는 여자를 부엌으로 안내했다. 희재가 차를 끓이러 들어간 사이, 여자는 손바닥으로 식탁을 부드럽게 쓸어보았다. 단단한 원목이 기분 좋은 긴장감을 불러일으켰다. 여자는 식탁에 앉은 채로 거실을 바라보았다. 넓은 거실에는 흰색 소파 하나와 그 옆에 놓인 작은 나무 협탁이 전부였다.

희재가 쟁반을 들고 오자, 여자는 일어나 건네받았다. 희재는 찻주전자에서 차를 두 잔 따라 한 잔을 여자에게 주었다.
저는 이해영이에요. 가사도우미 경력은 삼 년 정도 되었습니다. 사모님께서 원하시는……

사모님은 무슨, 그냥 할머니라고 부르세요.

희재는 해영에게 보다시피 이 집에는 자기 혼자뿐이며, 식사 시간은 오전 여덟 시, 오후 한 시, 오후 여섯 시라고 했다. 못 먹는 음식은 따로 없지만 질긴 음식은 되도록 피해주시고요. 귀가 어두워졌지만 여전히 소음에는 예민해요. 텔레비전 보거나 통화할 때는 방문을 닫아주면 고맙겠어요. 저녁 시간 이후, 그리고 일요일에는 집안일에 손대지 않으셔도 돼요. 주말 지나고 바로 들어오실 수 있나요? 그럼요. 해영이 대답했다.

말을 마친 희재는 차를 한 모금 마신 다음 찻잔을 천천히 내려놓았다. 유리 소서에 잔을 내려놓았는데 아무 소리도 나지 않았다. 해영은 희재를 따라 차를 마신 다음, 마찬가지로 소리 없이 내려놓으려고 엄청나게 애썼지만 실패했다.


11월 25일


희재는 잠결에 소리를 들었다. 분명 거실에서 발소리가, 아주 작은 발톱이 마룻바닥을 스치며 나는 소리가 들려왔다. 희재는 서둘러 일어나 나가 거실을 둘러보았다. 거실은 어제와 마찬가지로 고요했다. 희재는 텅 빈 거실 중앙에 잠시 넋 놓고 서 있었다. 그러다 정신을 차렸다.

그는 찬물로 세수하고, 하얗게 센 머리를 나무 빗으로 단정하게 빗어 넘겼다. 흰색 코트에 붙어 있는 묵의 털을 봤을 때는 심장이 터질 것 같았으나 겨우 진정했다. 희재는 밖으로 나가기 위해 현관문 손잡이를 잡았다. 오늘따라 손잡이가 무척 차갑고 단단하게 느껴졌다. 그것은 이상하게도 희재에게 위안을 주었다.

걸어서 삼 분 거리에 작은 죽집이 있었다. 2차선 도로 하나만 건너면 되는 곳이라서 비가 오나 눈이 오나 희재가 자주 찾는 곳이었다. 때 이른 크리스마스 장식으로 반짝이는 문을 밀고 안으로 들어가자 따뜻한 죽 냄새가 났다. 가게 안쪽에는 테이블이 네 개 있었고, 그중 한 테이블에서는 나이 든 남자 하나가 팥죽을 떠먹고 있었다.

희재 언니 왔어?

유자가 주방에서 나와 반갑게 인사했다. 희재는 손 인사를 하고 창가 자리에 앉았다. 잠시 뒤에 유자가 야채죽 한 그릇을 들고 희재 앞에 앉았다. 희재가 늘 먹던 죽이었다. 희재는 김이 올라오는 죽을 천천히 불어 한 입 떠먹었다. 십이 년 동안 한결같이 따뜻하고 부드러운 맛이었다. 희재는 몸과 정신이 지쳤을 때 밥을 먹으면 곧잘 얹히곤 했다. 그럴 때 유일하게 먹을 수 있는 음식이 유자가 끓인 죽이었다. 네 죽이 없었다면 내 인생은 다섯 배는 더 힘들었을 거야. 희재는 유자에게 종종 말했다.

옆 테이블 남자가 자리에서 일어나자 유자는 잠시만, 하고는 계산을 하러 갔다. 그동안 희재는 조용히 죽을 떠먹었다. 창밖을 보자 나뭇가지들이 바람에 휘청이고 있었다. 남자가 나가면서 문을 열자 찬바람이 밀려 들어와 희재는 몸을 움츠렸다.

추워? 음식 하는 사람은 추운 줄 몰라서 문제야.

유자가 난방 온도를 높이며 말했다. 가게에는 이제 희재와 유자 둘뿐이었다. 희재는 자신이 아직 모자나 코트를 벗지 않았다는 사실을 깨닫고는 모자를 벗었다. 그러고는 수저를 쥐었다가 다시 내려놓았다. 유자가 맞은편 자리에 돌아와 앉았다.

며칠 전 새벽에, 하고 희재가 입을 뗐다. 묵이 갔어.

유자는 물을 따르던 손을 멈추고 한동안 말을 잇지 못했다. 그러더니 자리에서 일어나 가게 문을 잠그고, 블라인드를 내린 다음 희재 옆으로 가서 앉았다. 그들은 아무 말도 주고받지 않았다. 대신에 유자는 희재의 손을 잡았고, 오래도록 함께 앉아 있었다. 한참이 지나고 울음이 멎자, 희재는 유자가 건네주는 따뜻한 물을 한 잔 마셨다. 둘은 묵에 대한 얘기를 나누기 시작했다.

언니, 기억나? 묵이 어렸을 때 용맹하게 참새를 쫓다가 비둘기를 보고 줄행랑쳤잖아.

머리 좋은 개는 아니었지. 밖에서 간식 주면 화단에다가 묻어놓기는 잘했는데, 한 번도 꺼내 먹어본 적은 없어.

묵은 자기 이름도 잘 모르더라.

그건 아니야.

지난번에 내가 욱이라고 불렀는데 왔어.

그건 네 발음이 이상해서 그래.

 

11월 26일

 

해영은 정확히 월요일 아침 아홉 시에 초인종을 눌렀다. 희재가 문을 열자, 해영이 커다란 배낭을 메고 서 있었다. 짐은요? 하고 희재가 묻자 해영은 배낭을 가리키며 이게 전부라고 대답했다.

희재는 해영이 지낼 방을 보여주었다. 방문을 연 해영은 속으로 감탄했다. 해영은 이제껏 이렇게 넓은 방을 가져본 적이 없었다. 방에는 새것으로 보이는 흰색 침구와 텔레비전, 작은 좌식 책상과 옷장이 있었다. 책상과 옷장은 부엌에서 본 식탁과 같은 색상의 원목으로 만들어져 있었다.

해영은 이부자리에 누웠다가, 책상 앞에 앉았다가, 옷장 문을 열어보기도 했다. 그러다 한 달 남짓하면 마흔이 된다는 사실이 떠올랐고, 그와 동시에 탓하고 싶은 사람들과 억울했던 사건들이 머릿속을 빠르게 스쳐 지나갔다. 그만, 하고 해영은 소리 내어 말했다. 그런 것들은 깊이 생각해서 좋을 것이 없었다.

해영이 옷을 갈아입고 나오자, 희재는 장 볼 목록을 건네주었다.

여기 쓰인 거 외에도 먹고 싶은 음식이 있다면 얼마든지 사 와요. 마트는 아파트 정문 건너편에 있어요.

오는 길에 마트를 봤어요.

거기가 맞을 거예요.


희재가 식탁에 앉았을 때는 갓 지은 밥과 바지락을 넣은 콩나물국, 잡채, 참기름에 무친 시금치와 콩나물이 차려져 있었다.

차리느라 고생 많았어요. 그런데 수저가 하나뿐이네요. 같이 먹지 그래요?

아니에요, 저는 따로 먹을게요.

차리고 치우는 게 얼마나 일인데요.

희재는 부엌으로 들어가 해영의 밥과 국을 퍼서 맞은편 자리에 놓았다. 해영은 식탁에 앉아 희재가 수저를 들 때까지 기다렸다가 표정을 살폈다.

음식이 전부 맛있어요. 간도 딱 맞고요. 희재가 말했다.

저녁은 더 맛있는 걸로 해드릴게요.

그러지 말아요. 오늘은 이 반찬들로 충분해요. 삼 년 동안 일해봤다고 했죠?

네. 입주한 건 이번이 처음이에요.

나도 도우미를 부른 건 처음이에요.

집이 이렇게나 넓은데요.

나를 돌보는 일에는 자신 있었으니까요. 게다가 일주일 전까지만 해도 개를 키웠어요. 이 년 전 병으로 눈이 멀었는데, 그때부터 예민해지더라고요. 아주 작은 소리, 낯선 냄새에도 쉽게 겁을 먹었어요. 그 상황에서 다른 사람을 집 안에 들이기가 힘들었어요.

냉장고에 붙어 있던 강아지 사진을 봤어요.

맞아요. 나랑 십오 년을 같이 살았던 묵이에요.

헤어질 때 마음이 너무 안 좋으셨겠어요.

곧 만날 테니까요.

그런 말씀 마세요.

자연스러운 일이에요.

 

12월 1일

 

해영은 일을 시작하기 전에 이어폰을 꽂았다. 좋아하는 캐럴을 조용히 흥얼거리며 해영은 대걸레로 바닥을 닦았다. 한참 청소하다 고개 들었을 때는 눈이 부셨다. 거실 창으로 햇빛이 쏟아지고 있었다. 해영은 창 앞으로 가까이 다가간 다음, 유리창에 왼쪽 손바닥을 갖다 대보았다. 한겨울인데도 유리창이 따뜻했다.

해영은 그 상태로 음악을 들었다. 나중에는 불 가에 앉아 꿈꾸며 계획을 세우고 우리가 세운 대담한 계획들과 마주하게 될 거예요 겨울의 원더랜드를 걸으며……

해영은 유리창에서 천천히 손을 뗀 다음, 손등으로 이마를 짚어 손바닥이 하늘을 향하게 했다. 다른 손은 대걸레를 쥔 채 등 뒤로 부드럽게 뻗었다. 그러고는 왼발을 뒤로 뻗은 채 발끝을 세워 오른쪽 다리에 무게중심을 두었다. 살짝 뒤로 젖힌 등이 긴장하는 것이 느껴졌다. 등, 손목, 종아리, 그리고 발목 순으로 천천히 힘이 들어갔다. 겨울의 원더랜드를 걸으며 겨울의 원더랜드를 걸으며…… 노래는 계속해서 흘러나왔고, 시간이 지날수록 이마를 짚은 손바닥 안으로 햇볕이 따뜻하게 고여 왔다. 해영은 곡이 끝날 때까지 같은 자세를 유지했다.

다음 곡으로 넘어가고 나서야 해영은 눈을 떴다. 그러고는 소스라치게 놀랐는데, 유리창에 희재가 유령처럼 비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고개를 돌리자 부엌과 거실 사이에 희재가 서 있었다. 해영은 재빨리 이어폰을 빼내었다.

미안해요, 놀라게 해서. 물 뜨러 나왔다가 보게 됐어요.

해영은 괜찮다고 말하며 대걸레를 제대로 쥐고는 조금 전 닦았던 데를 다시 닦기 시작했다. 등 뒤에서 물 따르는 소리가 들렸지만, 희재가 있는 쪽으로 고개를 돌릴 수가 없었다. 그런데 희재는 곧장 방으로 들어가지 않고 부엌에 서서 물을 마시는 듯했다. 해영은 윤이 날 때까지 같은 자리를 닦다가, 결국 못 참고 등을 돌렸다. 기다렸다는 듯 희재가 물었다.

무용을 했었어요?

아니요. 오늘 햇살이 너무 좋아서요.

희재는 아, 하고 동의하는 것인지 감탄사인지 모를 소리를 냈다. 그런 다음 느릿느릿 말을 이어갔다. 저도 가끔 햇살이 좋으면 해영 씨가 지금 서 있는 자리에 의자를 놓고 앉아 있기도 해요. 귤 같은 거 까먹으면서. 개는 제 무릎 위에 있었고요.

상상만 해도 따뜻해요. 해영은 진심을 담아 말했다.

다음에 같이 해봐요.

희재는 그렇게 말하고 나서, 물잔을 들고 방으로 들어갔다. 해영은 괜히 바닥을 세게, 아주 세게 문질러 닦았다.

12월 5일

 

창을 열자 찬바람이 들이쳤다. 희재는 침대에서 솜이불을 끌고 와 방 안에 놓인 일인용 소파에 앉아 덮었다. 눕기는 싫었지만 이불은 덮고 싶었다. 그러자 문득 누군가의 잔소리가 듣고 싶었다. 누가 이불을 침대 밖으로 끌고 나오라고 했니. 그렇게 말할 수 있는 사람들은 이미 오래전에 죽었다. 희재보다 나이 든 사람은 이제 어딜 가도 많지 않았다. 희재는 이불을 끌어당겨 목 끝까지 덮었다.

바람이 조금 멎자 바깥소리가 희미하게 들려왔다. 새 소리, 바람 소리, 구급차가 가까워졌다가 멀어지는 소리. 희재는 잠시 눈 감고 두 손을 모아 기도했다. 부디 무사하시길. 지난 수십 년간 구급차 소리가 들릴 때마다 하는 행동이었다. 자연스레 생각이 묵으로 이어졌고, 순식간에 솜이불이 무겁게 느껴졌다. 희재는 쫓기듯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창을 닫고 이불을 제자리에 두었다.

소파로 돌아와 앉자 이번에는 방문 너머 다른 소리가 들려왔다. 도마 위로 일정하게 칼질하고, 쌀을 씻고, 가스 불 켜는 소리가. 누군가 내 주방에서 나를 위한 음식을 만들고 있다니. 벌써 열흘이 지났는데도 희재는 그 사실이 낯설고 어색했다.

희재가 결혼하지 않겠다고 말했을 때 주변 사람들은 이해하지 못했다. 특히 이모가. 이모는 희재가 분명 후회할 거라고 했다. 네 나이가 지금 몇이야. 오십 넘은 여자를 앞으로 누가 데려간다고 그래. 희재는 이모와 통화하며, 이모가 후회라는 단어를 언급할 때마다 노트에 작은 동그라미를 그렸다. 삼십 분 넘는 통화가 끝나자 종이에는 총 스물여덟 개의 동그라미가 그려져 있었다.

나는 올해 여든넷이고, 아직 후회한 적이 없지. 희재는 눈을 감고 하품했다. 시계를 보니 다섯 시 반이었다. 저녁 식사가 준비되면 해영이 문을 두드릴 것이었다. 그전까지 아직 삼십 분이 남아 있었다. 희재는 소파에 등을 편히 기댄 다음 왼쪽으로 고개를 기울였다. 그리고 정신없이 단잠에 빠져들었다.

 

12월 6일

 

잠결에 해영은 무언가 깨지는 소리를 들었다. 일어나 밖으로 나가보니 부엌에서 희재가 깨진 유리잔을 줍고 있었다.
만지지 마세요. 제가 치울게요.

해영은 희재를 식탁 의자에 앉힌 다음, 빗자루를 꺼내와 유리 조각들을 쓸어 담았다. 청소를 끝내고 해영은 물 두 잔을 따라 희재에게 한 잔을 건네고 자신도 마셨다.

운전하는 꿈을 꿨어요. 오래전에 처분했던 은색 볼보를 몰고 탁 트인 도로를 한없이 달리는데 기분이 그렇게 좋을 수가 없었어요. 잠에서 깨어나 다시 운전해볼까, 생각했는데 보다시피 핸들은커녕 물잔 쥘 힘도 없네요.

희재는 거기까지 말하고 잠시 멈췄다가 물 한 모금을 마시고 말을 이어갔다.

개가 가고 나니까 생각이 온통 죽음에 머물러요. 시간이 너무 많아져서 그런가 봐요.

해영은 어떤 말이든 꺼내고 싶었지만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 희재 특유의 시원시원한 성격 탓에 해영은 희재가 노인이라는 사실조차 잊고 지낼 때가 많았다. 지금처럼 낮 동안의 긴장을 풀어버린 얼굴을 마주하자, 희재는 처음으로 원래 나이대로 보였다.

며칠 전에는 친구가 영정사진을 미리 찍어두자는데 거절했어요. 이상하게 그게 그렇게 싫더라고요. 죽는 건 안 무서운데 영정사진 찍는 건 왜 그렇게 싫던지. 원래 사진 찍는 걸 싫어하기도 해요. 찍고 나면 내가 아닌 것 같고 해서.

저도 사진 찍는 거 싫어해요, 하고 해영이 말했다, 사람 시선이 아닌 기계에 의해 기록되는 게 어색하더라고요.

해영 씨는 사람에 대한 애정이 많은가 봐요.

원래부터 그런 건 아니었고 일하면서 그렇게 됐어요. 제가 누드모델이거든요.

누드모델이요?

네. 처음에는 생활비를 벌려고 시작했는데, 이제는 직업이 됐어요.

아, 그래서 지난번에 거실에서…….

맞아요. 자세를 연습하고 있었어요. 때마침 좋아하는 노래가 흘러나오는 중이었고, 햇살도 좋았고요. 그때를 잘 기억했다가 전달해 주고 싶었어요.

그리는 사람들에게요?

네. 감정이 잘 전달될 때 느껴지는 희열이 있어요. 물론 그건 운이 많이 좌우해요.

운, 그거 중요하죠.

정말 그래요.

해영과 희재가 동시에 작게 웃음을 터뜨렸다. 해영이 식탁을 나뭇결대로 쓰다듬자 단단하면서도 매끄러운 느낌이 들었다.

이런 얘기를 편하게 해보고 싶었어요. 희재를 바라보며 해영이 말했다.

번지수를 제대로 찾으셨네요. 희재가 말했다.


12월 8일 낮

유자는 카운터 뒤편에서 신문을 읽고 있었다. 토요일이었고, 가게에는 유자와 남학생 두 명만이 남아 있었다. 유자가 광고면에 실린 관절약 효능을 읽고 있는데, 학생들 대화가 계속 귀에 들어왔다.

햄버거 먹자니까 무슨 죽을 먹냐……죽이 어때서 지도 죽같이 생겼으면서……죽같이 생긴 게 뭔데……이목구비가 푹 끓인 것처럼 퍼졌다고……지금 그걸 말이라고 하냐, 내일 현주 만나면 네가 좋아한다는 거 말할 거다……안 그래도 어제 차였다……뭐라고?……많이 먹어라……

유자는 웃지 않기 위해 애썼다. 남학생들은 순식간에 죽 두 그릇을 깔끔하게 비우고 나갔다. 오후 세 시가 되자 유자는 가게 문을 잠갔다. 설거지를 마치고 바닥을 쓸고 있는데 바깥에서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문을 열자 희재와 처음 보는 여자 하나가 서 있었다.

장 보고 오는 길에 들렀어. 희재가 장바구니에서 약밥을 꺼내며 말했다. 약밥은 유자가 좋아하는 음식이었다. 세 사람은 테이블에 모여 앉았다. 유자는 커다란 접시에 약밥을 옮겨 담은 다음 나눠 먹기 좋은 크기로 잘랐다.

이분은 내가 전에 얘기했던, 나 도와주는 해영 씨야. 여기는 내 친구 유자.

유자와 해영은 인사하고 약밥을 나누어 먹었다. 오후의 햇빛이 유리창 안으로 들어와 가게 바닥을 반쯤 환하게 덮었다.

어제 눈이 하도 내려서 제법 쌓였더라고. 이번 겨울 처음으로 눈다운 눈이 내렸어. 희재가 말했다.

그래서 그 남자애가 고백했던 거로구나, 하고 유자는 속으로 생각했다.

안 그래도 가게 앞에 누가 눈사람을 만들어놨어.

들어오면서 못 봤는데?

해가 떠서 녹아버렸나 봐. 유자가 말했다.

희재는 일어나서 창가 앞으로 갔다. 해영과 유자도 따라서 일어났다. 가게 입구 근처에 아직도 작은 눈사람 하나가 햇빛 속에 서 있었다.

너무 작아서 안 보였나 봐요. 해영이 말했다. 작고 예뻐요.

희재는 노래를 낮게 흥얼거렸다. 하루 종일 우두커니 꼬마 눈사람 무엇을 생각하고 혼자 섰느냐 집으로 들여갈까 꼬마 눈사람…… 해영은 쪼그려 앉아서, 희재와 유자는 허리를 굽힌 채로 한참 눈사람을 들여다보았다. 해영은 자리로 돌아와 앉아서도 눈사람 얘기를 했다.

저는 어렸을 때 눈사람을 만들고 나면 그 당시 싫어하고 있는 사람 이름을 붙여줬어요.

힘들게 만들어 놓고 왜 그랬대요. 유자가 말했다.

다 녹고 나면 미움도 녹아버리라고요. 저만의 미신 같은 거였어요. 그런데 이제는 그렇게도 못하겠어요. 겨울 다 갈 때까지 눈덩이만 굴려야 할걸요.

가만히 듣고 있던 희재가 소리 내어 웃었다. 세 사람은 눈사람이 볕에 조금 녹을 때까지 떠들다가 오후 네 시에 가게 문을 닫고 각자의 길로 향했다.


12월 8일 저녁

해영이 화실에서 돌아왔을 때는 늦은 저녁이었다. 희재는 식탁에 앉아서 차를 마시고 있었다.

어서 들어와요. 밖이 무척 추웠을 텐데. 희재는 해영을 식탁에 앉힌 다음 차1)를 새로 내렸다. 해영은 자신이 하겠다고 일어섰지만, 희재가 즐거움을 빼앗지 말아 달라고 부탁하는 바람에 다시 자리에 앉았다.

희재는 유리 다관 안으로 뜨거운 물을 부었다. 바닥에 깔려 있던 찻잎들이 솟구치며 올라왔고, 해영은 그것들이 유영하듯 떠다니다가 천천히 가라앉는 것을 조용히 지켜보았다. 미리 데워둔 잔에 희재가 차를 따라주었다. 해영은 따뜻한 차를 한 모금 마셨다.

무슨 향이 느껴져요? 희재가 물었다.

제가 차를 잘 몰라서요.

괜찮아요. 그냥 편하게 연상되는 걸 말해봐요.

섬유유연제 뿌린 스웨터랑 잔디 냄새가 나요. 그런 다음 해영은 황급히 덧붙였다. 차가 별로라는 뜻은 아니고요.

희재는 눈을 감고 차 한 모금을 천천히 넘겼다. 그러네요, 하고 잠시 뒤에 희재가 말했다. 정답이 뭐였냐고 해영이 묻자, 정답 같은 건 없다고 희재가 대답했다. 날씨에 관한 짧은 얘기가 오갔고, 그것이 온천욕에 대한 둘의 갈망으로 이어지는 동안 차는 적당히 식었다. 희재는 자리에서 일어나 호박색 위스키 한 병을 들고 왔다. 그러고는 자신의 찻잔에 위스키 몇 방울을 떨어뜨렸다.

오반 14년2)이에요. 섞어 마시면 좋더라고요. 해영 씨도 넣어볼래요?

해영은 그러겠다고 했고, 한 모금 마시자마자 좋은 선택이었다고 생각했다. 아주 적은 양이었을 뿐인데도 향이 놀랄 만큼 풍부해졌다. 입안 가득 진한 벌꿀과 장작 향이 맴돌았다. 너무 좋아서 마실수록 줄어드는 게 아쉽게 느껴졌다.

이상하게 들릴지 모르겠지만, 모닥불에 군고구마 구워 먹던 게 생각나는 맛이네요.

그거 정확한 표현이네요.

아, 보여드리고 싶은 게 있어요.

해영이 가방에서 스케치북을 꺼냈다. 해영은 자신이 몇 년 전부터 취미 삼아 그려온 그림들을 보여주겠다고 했다. 펼쳐진 스케치북에는 남녀의 벗은 몸이 다양한 자세로 그려져 있었다.

희재는 다급히 손을 뻗어 찻잔을 쥐었다. 남아 있던 홍차를 단숨에 들이켰지만 아무 맛도 느껴지지 않았다. 스웨터와 잔디, 모닥불과 군고구마는 이제 사라지고 없었다. 식탁에는 오로지 크림색 도화지 위로 춤추는 선들, 경쾌한 곡선과 거침없는 직선으로 이루어진 피와 살, 육체뿐이었다.

목탄인가요? 희재가 겨우 입을 뗐다.

비슷해요. 콩테를 썼어요. 해영은 그렇게 말하며 희재 쪽으로 스케치북을 돌려놓았다. 거꾸로 보이던 그림들이 희재 앞에 똑바로 놓였다. 누드 크로키를 이토록 자세히 보는 것은 처음 있는 일이었다. 그림을 보는 동안 희재는 지난 십 년간 앓던 관절통을 말끔히 잊었다.

여기서부터 오늘 그린 것들이에요. 해영이 펼친 장에는 공처럼 웅크린 남자, 팔을 괴고 엎드린 남자, 머리 묶는 여자가 그려져 있었다. 주로 검은색 선으로 그려져 있었는데, 종종 붉은빛 도는 갈색 선들도 섞여 있었다. 희재는 자유롭게 그어진 선들이 섬세한 뼈와 근육, 명암을 그려내고 있다는 사실에 감탄했다.

그중 한 남자의 무릎에 희재의 시선이 유독 머물렀다. 크로키 속 남자는 온몸의 뼈가 다 드러날 정도로 마른 몸을 갖고 있었다. 남자의 무릎을 보고 희재는 일순간 고통을 느꼈다. 툭 튀어나온 무릎뼈와 가느다란 종아리, 연약해 보이는 관절은 남자만의 것이 아니었다. 희재는 자신도 모르게 그림 위로 손을 가져다 댔고, 동시에 깜짝 놀라며 손을 뗐다. 다행히 번진 곳은 없었다.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네요. 정말 대단해요. 희재가 말했다.

괜찮아요. 그냥 편하게 연상되는 걸 말씀해 보세요. 해영은 희재가 했던 말을 따라 했다.

우리 몸에 이렇게 많은 굴곡이 있었나 싶어요. 무릎이 앞으로 튀어나와 있다는 게 새삼스럽게 신기했고요. 말해놓고 보니 똑똑한 네 살이 저보다 낫겠네요.

저도 처음 모델이 되었을 때 사람들이 저를 놀린다고 생각했어요. 허벅지는 왜 저렇게 거대하고, 허리는 또 왜 저렇게 구부정하게 그린 건지. 해영이 남은 차를 천천히 마시면서 말했다. 평생 함께한 내 몸에 관해 아무것도 몰랐던 거예요.
그날 밤 희재는 침대에 걸터앉아 잠옷 바지를 걷고 무릎을 들여다보았다. 허리를 구부리는 게 힘들어지자, 발을 들어 다리를 앞으로 펴보기도 했다. 그렇게 한동안 무릎을 살펴보던 희재는 누군가에게 들키기라도 한 듯 재빨리 바지를 내린 다음 불을 끄고 잠자리에 들었다.


12월 11일

이날 희재는 잠옷을 갈아입지 않은 채로 아침 식사를 하고, 홍차에 설탕을 한 숟가락 넣었다가, 잠시 뒤 한 숟가락을 또 넣는 바람에 차를 새로 끓였다. 해영과 눈이 마주쳤을 때는 황급히 고개를 돌리기도 했다.

아침 설거지를 마친 해영이 거실에서 수건을 개고 있을 때였다. 희재가 옆에 다가와 앉았다. 드디어 잠옷을 평상복으로 갈아입은 채였다.

해영 씨, 하고 희재가 불렀다. 그러고도 한참이나 말을 잇지 못했다.

저 혹시 일을 그만둬야 하나요? 해영이 참지 못하고 물었다.

희재는 그렇게 말하는 해영을 멍하니 바라보다가 웃음을 터뜨렸다. 아니요, 왜 그런 생각을 했어요. 오히려 그 반대예요.

해영 씨가 나를 그려줄 수 있을까 해서요. 희재가 해영의 눈을 보며 말했다.

초상화 말씀하시는 건가요?

아니요, 누드 크로키요. 지난번에 해영 씨가 저한테 보여줬던 그림처럼.

누드 크로키를요? 해영이 자기도 모르게 되물었다.

노망난 것 같아 보이겠지만, 맞아요. 누드모델을 해보고 싶어요. 지난 며칠간 가슴속에 담아두었던 말을 내뱉자 희재는 비로소 숨이 트이는 듯했다.

삼 년 만에 처음이었거든요. 묵의 죽음 외에 다른 것을 생각해 본 게. 묵이 시력을 잃고 나서부터는 한순간도 불안하지 않았던 적이 없어요. 묵이 죽고 나서도 계속해서 묵의 죽음만을 생각해서, 나중에는 숨이 막히더라고요. 그런데 해영 씨가 저에게 그림을 보여줬던 날부터는 매일 그림 생각을 했어요.

저는 아마추어인걸요. 그림을 제대로 배운 적도 없어요. 해영은 당황해서 말하다가 쌓아놓았던 수건을 팔로 건드렸고, 그 바람에 수건들이 바닥에 흐트러졌다.

저도 누드모델은 처음이에요. 그리고 저는 해영 씨 그림이 정말 좋았어요. 희재가 수건을 다시 쌓아주며 말했다. 누군가 저를 바라보고, 이해하고, 표현하는 걸 느껴보고 싶었어요. 그런 걸 경험해 본 지 너무 오래됐거든요. 희재는 마지막 수건은 해영에게 직접 건네주었다.

편히 거절해도 괜찮아요. 저도 제가 무리한 부탁을 하고 있다는 걸 알아요.

찰나의 순간 해영은 앞으로 벌어질 일에 대해 생각해 보려고 노력했으나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았다. 하기야 생각대로 흘러간 것은 살면서 아무것도 없었다. 해영은 희재가 건네는 수건을 받았다.

해볼게요. 잘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어요.


12월 14일

희재는 오랜 시간 따뜻한 물로 몸을 씻었다. 나와서는 보디로션을 꼼꼼히 발랐고, 로션이 흡수되는 동안 단정하게 머리를 빗어 넘겼다. 지난 며칠간 감정의 극단을 수없이 오간 끝에 희재의 마음은 그 어느 때보다 평온했다.

희재는 자리에서 일어나 미리 준비해 두었던 베이지색 가운을 맨몸에 걸쳤다. 종잇장처럼 얇은 실크 위로 몸 선이 드러났다. 오늘은 해영이 희재를 그려주기로 한 첫날이었다.

희재가 거실로 나왔을 때 해영은 커튼을 치고 있었다. 간접조명이 켜진 거실은 따뜻하고 포근한 느낌을 주었다.

안 쓰던 조명을 켜니까 꼭 다른 곳 같네요. 희재가 말했다.

그렇죠? 생각보다 근사해요.

희재는 해영이 미리 갖다 놓은 등받이 없는 의자 앞으로 갔다. 의자에는 깨끗한 손수건이 깔려 있었다.

처음이니까 앉아서 하시는 게 좋을 것 같았어요. 준비되시면 타이머 시작 버튼을 누르고 자세를 잡아주세요.

해영이 자신이 앉을 의자를 부엌에서 가져오는 사이, 희재는 타이머를 손에 쥐고 의자에 앉았다. 부엌에서 요리할 때 쓰던 타이머를 이런 용도로 쓰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해영은 희재의 오른편에 약간의 거리를 두고 앉았다. 해영이 스케치북을 펼치자 두꺼운 종이가 공기를 부드러우면서도 팽팽하게 가르는 소리가 났다.

해영은 노래를 틀어놓는 것이 도움이 된다고 했다. 그렇지만 희재는 긴장한 나머지 노래가 귀에 들어오지 않을 것 같았다. 희재는 대신에 크게 심호흡하고, 마음속으로 자세를 정한 다음, 타이머를 오 분으로 설정했다.

문제는 가운을 벗을 용기가 도무지 나지 않았다는 것이다.

갑자기 희재는 몸을 드러내는 게 세상에서 가장 끔찍한 일처럼 느껴졌고, 당장 모든 것을 멈춰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차마 입이 떨어지질 않았다.

시간이 더 필요하세요? 해영이 희재를 살피며 물었다. 시간이 필요하시면 제가 방에 들어가 있을게요.

그게 아니라, 하고 희재가 머뭇거렸다. 해영 씨가 나를 생각해서 하기 싫은 일을 억지로 하는 게 아닌가 싶어서요.

해영은 무릎에 스케치북을 얹은 채 희재를 바라보며 말했다. 저는 하기 싫은 일은 하지 않아요. 십 년 결혼 생활을 끝장낸 다음에 제가 결심한 게 바로 그거거든요. 싫은 걸 참고 견딘 건 십 년이면 충분하잖아요?

충분하네요. 희재가 웃으며 대답했다.


12월 14일

오늘은 뒷모습만 보여도 괜찮을까요? 처음이라 어색하네요.

그럼요.

희재는 가운을 벗어 의자 밑에 두었다. 해영에게서 등을 돌려 앉자 희재에게 보이는 것은 하얀 소파와 유리 협탁, 베이지색 벽지뿐이었다.

보다시피 살면서 한 번도 말라본 적이 없어요. 묵도 저를 닮아서 통통했고요. 오죽하면 갈색 몸이 도토리묵을 닮았다고 해서 묵이었어요.

어머.

왜요?

저는 여태 강아지 이름이 무기인 줄 알았어요.

그게 무슨 끔찍한 소리예요.

해영이 웃음을 터뜨렸다.

그렇지 않아도 이름 짓는 취향이 독특하시다고 생각했어요.

아무리 그래도 무기는 너무하네요.

희재도 웃은 뒤 가벼워진 마음으로 타이머 시작 버튼을 눌렀다. 허벅지에 양손을 얹고 꼿꼿하게 앉은 것이 첫 번째 자세였다. 등 뒤에서 해영이 첫 번째 선을 긋는 소리가 들렸다. 희재는 움직이지 않기 위해 온몸에 힘을 주었다.

누군가 이토록 오랫동안 희재의 벗은 몸을 응시하는 것은 처음이었다. 나이 들수록 사람들이 그를 바라보는 일은 줄어갔다. 마지막까지 희재에게서 눈을 떼지 않았던 것은 묵뿐이었다.

물론 시선이라고 전부 좋았던 것은 아니다. 젊은 시절 받았던 시선 중 대개는 희재가 원치 않았던 것이었다. 그 시선들은 희재가 달라붙는 옷을 입건, 늘어진 운동복을 입건, 낮과 밤을 가리지 않고 따라붙었다.

타이머가 울렸다.

희재는 다리를 꼬고 앉았다. 해영이 거침없이 선을 긋는 소리가 들렸다. 밤새도록 듣고 싶은 소리라고 생각하던 중, 오른쪽 무릎에 묵직한 통증이 밀려왔다. 타이머를 보자 아직 이 분 사십오 초가 남아 있었다. 어떻게든 참아보려고 했으나 이번에는 다리가 심하게 떨려왔다.

괜찮으세요? 해영이 그리기를 멈추고는 물었다.

미안해요. 참아보려고 했는데 안 되겠네요.

아니에요. 조금 쉬었다가 할까요?

그러는 게 좋겠어요.

해영은 희재에게 물을 가져다주었다. 희재는 고맙다고 말한 다음 단숨에 물을 들이켰다.

그림을 봐도 될까요? 희재가 가운을 걸친 채 해영을 바라보며 물었다.

아직이요. 끝나면 제일 마음에 드는 그림을 선물해 드릴게요.

좋아요.


마지막에 희재는 서 있겠다고 했다. 늘 내 뒷모습이 궁금했거든요. 한 번도 본 적 없으니까요.

이번에는 타이머도 맞추지 않았다. 희재는 해영이 원하는 그림을 완성할 수 있도록 충분한 시간을 주고 싶었다. 희재는 왼손으로 등허리를 짚고 편안하게 섰다. 그가 서 있을 때 가장 자주 하던 자세였다. 마트에서 계산을 기다리거나, 산책하다가 잠시 쉬어갈 때, 부엌에서 요리할 때마다 희재는 이 자세로 있었다.

그러는 동안 시간은 온전히 흘러갔다. 서두르지도 늘어지지도 않고 온전하게. 일 분은 일 분. 삼 분은 삼 분. 시간은 손을 뻗어 어루만질 수 있을 것처럼 분명하게 느껴졌다.

시간이 지날수록 해영이 스케치북 넘기는 속도가 점점 빨라졌다. 마침내 해영이 콩테를 내려놓았을 때, 희재는 참았던 숨을 크게 몰아쉬었다.

숨을 참고 계셨어요?

숨만 쉬는데도 몸이 이렇게 많이 움직이는 줄 처음 알았어요.

그 정도 움직임은 괜찮아요.

다음부터 참고할게요.

해영은 희재가 가운을 걸치는 동안 스케치북 한 장을 찢어서 희재에게 건네주었다. 제일 마음에 드는 그림이에요. 희재가 그림을 들여다보자, 처음에는 꼭 다른 사람의 몸을 보는 것만 같았다. 그러나 몸에 비해 가느다란 팔과 다리, 아래로 처진 엉덩이는 분명 자신의 것이었다. 거울을 볼 때마다 싫어했던 특징이었으나 그림으로 보니 나쁘지 않았다.
또 해볼 수 있을까요? 희재가 물었다.

언제든지요. 저는 많이 연습할수록 좋아요.

정말 고마워요. 그림은 잘 간직할게요.

해영이 의자를 치우려고 하자, 희재는 자신이 하겠다고 했다. 잠시 이대로 앉아 있고 싶어서요. 제가 들어가면서 제자리에 놓을게요.

해영이 방에 들어가고 나서도 희재는 의자에 앉아 있었다. 좀처럼 흥분이 가라앉지 않았다. 희재는 불 꺼진 부엌의 원목 식탁을 바라보며 그곳에서 보낸 수많은 낮과 밤을 떠올렸다. 시선을 오른쪽으로 옮기자 해영의 방문이 눈에 들어왔다. 해영의 방은 원래 여름에는 겨울옷을, 겨울에는 여름옷을 보관하던 창고였다. 그곳이 지금은 온기를 품은 채 겨울밤을 지나고 있었다. 오래전 희재가 이 집에 이사 온 뒤로 처음 있는 일이었다.


12월 17일

잠시만 와 볼래요? 희재가 해영을 불렀다.

해영이 가까이 오자 희재는 손가락으로 창밖을 가리켰다. 어둠 속에서 커다란 눈송이들이 소리 없이 쏟아지고 있었다. 산책로도 자동차 지붕도 이미 새하얗게 덮여 있었다.

언제부터 내리기 시작했을까요? 해영이 물었다.

얼마 안 됐을 거예요. 십 분 전에는 눈이 내리지 않았어요.

빨리 소원을 빌어야겠어요.

갑자기요?

첫눈이니까요.

눈은 며칠 전에도 왔는걸요. 같이 눈사람도 구경했잖아요.

하늘에서 내리는 걸 못 봤으니까 그건 무효예요.

해영은 눈 감고 소원을 빌었다. 희재는 기도하는 해영의 얼굴을 바라보다가 다시 창밖을 내다보았다. 아파트 경비원이 함박눈을 맞으며 걸어가고 있었다. 희재는 그가 무사히 초소 안으로 들어갈 때까지 눈을 떼지 않았다.

다 빌었어요. 해영이 말했다.

무슨 소원을 빌었는지 궁금하지만 물어보지 않을게요. 효력이 떨어지면 안 되니까.

좋은 생각이에요. 이제 커튼을 칠까요?

내버려 둬요. 눈 내리는 걸 보고 싶어요.

밖에서 안이 보이지 않을까요?

뒤에는 산이라서 괜찮아요.


희재는 가운을 벗고 소파에 누웠다. 팔걸이에 머리를 기대고, 해영의 조언에 따라 왼쪽 무릎을 반쯤 구부렸다. 고개는 살짝 틀어서 시선이 창가를 향하게 했다.

지난번보다 자세가 훨씬 자연스러워지셨어요. 해영이 말했다.

해영 씨가 준 그림을 매일 보니까 그림 속의 내가 점점 좋아지더라고요. 그 때문인지 자신감이 조금 생겼어요.

반가운 변화네요.

해영은 희재가 누워 있는 흰색 소파와 창밖의 눈 내리는 풍경까지 그려 넣었다. 두 번째 자세로 넘어갈 때, 희재는 노래를 불렀다.

낮에 놀다 두고 온 나뭇잎 배는 엄마 곁에 누워서도 생각이 나요 푸른 달과 흰 구름 둥실 떠가는 연못에서 살살 떠다니겠지

전에도 느꼈는데, 동요를 참 잘 부르세요.

묵은 마지막에 진통제도 듣질 않았어요. 밤에는 통증이 심해져서 더 괴로워했고요. 그때마다 동요를 불러서 재웠는데, 그게 습관으로 남았나 봐요.

희재는 그 뒤로도 노래를 흥얼거렸다. 나뭇잎 배는 희재의 뺨과 어깨, 허리와 엉덩이를 지나 종아리와 가느다란 발목, 발등을 타고 떠다니다가 해영의 그림 속으로 천천히 흘러 들어갔다. 그러고는 이내 창 너머, 겨울 너머, 눈송이들의 시작 지점까지 빠르게 흘러갔다.


12월 22일

공기가 차고 맑은 일요일이었다. 희재는 갈색 단화를 신고 죽집으로 걸어갔다. 가게 안은 맞은편 교회에서 예배를 마치고 나온 노부부가 죽을 떠먹고 있을 뿐 조용하고 한가했다. 유자는 주방에서 희재에게 눈인사하고는, 얼마 지나지 않아 야채죽 한 그릇을 들고 나왔다.

희재는 따뜻한 죽을 한 입 떠먹었다. 걸어오는 동안 얼어붙었던 몸이 녹는 듯했다. 죽을 반 정도 먹었을 때는 몸이 더워져서 입고 있던 코트를 벗어 의자에 걸어두었다. 유자가 희재 맞은편 자리에 앉았다.

해영 씨도 데리고 오지 그랬어. 죽 한 그릇 대접하려고 했는데.

오늘은 일하러 갔어. 다음번에 데려올게.

다른 일도 해?

아 그게, 하고 희재는 잠시 수저를 내려놓았다. 누드모델을 하고 있어.

누드모델?

응.

그렇게 보이지 않았는데.

그게 무슨 말이야?

얌전하게 생겨서 그런 일을 할 줄은 몰랐지.

희재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의자가 나무 바닥에 끌리면서 불쾌한 소리가 났다.

해영 씨 좋은 사람이야. 누드모델이라는 직업도 부끄러운 게 아니고.

말을 마친 희재는 코트를 집어 들고 가게 밖으로 나갔다. 그러나 몇 걸음 가지 않고 몸을 돌려 죽집으로 돌아왔다. 희재는 가게 문을 힘주어 열었다. 문에 달린 종이 시끄럽게 울렸다.

나도 누드모델 해봤어. 나도 다 벗었다고. 희재가 소리쳤다.

유자는 테이블을 닦다 말고 희재를 쳐다보았다. 놀란 것은 노부부도 마찬가지였다. 희재는 마지막으로 그들을 바라본 다음 문을 닫고 나왔다. 집에 도착한 희재는 옷도 갈아입지 않은 채 침대에 누웠다. 그러고는 눈이 아플 때까지 흰 천장을 바라보았다.

 

12월 22일

해영은 집에 오자마자 부엌으로 들어갔다. 찬장에서 머그잔을 꺼내 따뜻한 물을 따르고 꿀도 두 숟가락 넣었다. 해영은 꿀이 물에 녹을 때까지 충분히 저어주었다. 꿀물이 완성되자 해영은 단숨에 들이켰다.

목이 많이 말랐나 봐요. 희재가 방에서 나오며 말했다.

아, 불이 다 꺼져 있어서 집에 계신 줄 몰랐어요.

방에서 책을 읽고 있었어요.

해영은 따뜻한 음료가 마시고 싶었다고 했다. 해영이 오늘 갔던 입시학원은 난방이 잘 안되었다. 두꺼운 패딩을 입고 그림 그리는 학생도 있을 정도였다. 해영은 몸속까지 얼어붙는 듯했다. 마지막에 웅크리는 자세를 취한 것은 순전히 추위 때문이었다.

저녁은 먹었어요? 희재가 물었다.

아직이요.

밤고구마가 있는데 먹을래요?

 

희재는 씻어둔 밤고구마를 냄비에 넣었다. 고구마가 익는 동안 해영은 세수하고 옷을 갈아입었다. 희재가 해영을 부르고, 밤고구마가 가득 담긴 접시를 식탁에 내려놓았을 때, 해영은 처음으로 이곳이 집처럼 편안하게 느껴졌다.

갓 쪄낸 밤고구마는 파근파근하고 따뜻했다. 해영은 찬 우유와 함께 고구마를 먹었다. 희재는 마주 앉아 조용히 차를 마시다가 입을 열었다.

오늘 낮에 유자한테 해영 씨가 누드모델이라고 얘기해 버렸어요.

그때 뵀던 죽집 사장님 말씀하시는 거죠?

맞아요. 내가 누드모델 했다는 것도 말했어요.

정말요? 해영이 놀라서 물었다.

네. 해영 씨한테 묻지 않고 얘기해서 정말 미안해요. 오늘 겪어보고 나니까, 지난번에 해영 씨가 이런 얘기를 편하게 해보고 싶었다고 말한 게 이해 가더라고요. 해영은 고개 숙인 희재를 바라보았다. 긴장했는지 숨을 들이쉬고 내쉴 때마다 희재의 어깨가 조금씩 오르내리는 것이 보였다. 해영은 다시 밤고구마를 먹기 시작했다.

괜찮아요. 숨길 일이 아니니까요. 그래서 친구분 반응은 어땠나요?

아무 말도 마세요.


12월 23일

희재와 해영이 싫어했다가 최근에 좋아하게 된 것들


희재

 

· 동그랗게 개어진 수건들

· 마찬가지로 동그랗게 갠 양말들

· 밥 먹으면서 대화하는 것

· 홍차에 설탕 넣는 것

· 사람들 앞에서 흥얼거리는 것

· 속옷 벗고 자는 것

· 옆집 개(볼 때마다 묵을 괴롭혀서 싫어했는데 며칠 전 엘리베이터에서 개 주인을 마주쳤어요. 자기 개가 산책하고 돌아와서는 우리 집 앞에서 한참을 가만히 서 있더래요. 묵을 그리워하는 것 같았다고요. 위로하려고 해준 말일지라도 고마웠어요.)

 

해영


· 채소만 들어간 된장찌개

· 맨얼굴로 돌아다니는 것

· 짧은 낮잠

· 종이 신문

· 강가나 호수에서 물고기를 구경하는 사람들

· 한 올도 빠짐없이 하나로 머리 묶는 것

· 나이 드는 것

 

정말 나이 드는 게 좋아졌어요? 희재가 물었다.

할머니 덕분이에요. 누드 크로키 할 때 봤던 몸 선이 무척 부드러우셨거든요. 오랜 시간 좋은 마음으로 살아야만 나올 수 있는 선이라고 생각했어요. 그런 선을 가질 수 있다면, 나이 드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더라고요.

그렇게 생각해 줘서 고마워요. 기분 좋네요.

언젠가 말씀드리려고 했는데, 오늘 대화 주제와 맞았네요.

한 가지만 더 물을게요. 강가에서 물고기 보는 사람들은 왜 싫어했어요?

싫다기보다는 부러웠어요. 느긋하고 여유로워 보여서요. 왜, 너무 부러워하다 보면 동시에 미운 감정도 생기잖아요. 다행히 지금은 안 그래요. 그나저나 수건은 미리 말씀해 주시지 그러셨어요. 지금이라도 다른 방식으로 갤까요?

말했잖아요, 이미 새로운 방식이 좋아졌어요.

해영과 희재는 깎아 놓은 사과를 집어 먹었다. 베란다에 보관해 두었던 사과는 차고 달았다. 둘은 접시를 비운 다음 각자의 방으로 들어가 책을 읽고 라디오를 들었다. 밖에서는 빈 나뭇가지들이 바람에 간간이 흔들리고 있었다. 오후 시간이 고요하고 평화롭게 지나갔다.


12월 24일

오늘은 크리스마스이브니까 반대로 해볼까요. 해영이 식탁에서 제안했다. 제가 모델을 할 테니 할머니께서 저를 그려주세요.

일곱 살 때 이후로 그림 그려본 적이 없어요. 희재가 대답했다.

해영은 볼펜을 쥐더니 메모지에 곡선 세 개를 그었다. 휘어진 두 눈과 양쪽으로 올라간 입꼬리. 스마일 표시였다. 해영은 그 옆에 작은 동그라미 하나를 그려 넣었다. 토끼예요, 해영이 그리면서 말했다. 그러고는 처음 그린 토끼와 마주 보는 토끼 한 마리를 더 그렸다.

해영 씨가 토끼라고 말하니까 정말 토끼 같네요.

크로키는 꼭 똑같이 그릴 필요 없어요. 자유롭게 표현하는 데 중점을 두면 돼요. 해보시면 분명 재밌을 거예요.

희재는 해영이 그린 토끼를 손으로 가리켰다.
토끼들이 저에게 용기를 주네요.


해영은 가운만을 걸친 채 거실로 나왔다. 희재는 해영에게서 빌린 스케치북을 무릎에 얹고, 해영이 자세를 취할 때까지 기다렸다. 해영은 능숙하게 머리를 묶은 다음 타이머를 맞추고 가운을 벗었다.

해영이 첫 번째로 취한 자세는 희재가 지난번에 우연히 거실에서 봤던 자세였다. 손등으로 이마를 짚은 채 왼발을 뒤로 향하게 하여 까치발을 세운 자세. 해영이 등을 살짝 뒤로 젖히자, 척추 선을 따라 세로로 뻗은 등 근육이 도드라졌다. 둥글고 매끄러운 어깨, 균형 잡힌 근육들을 보며 희재는 가벼운 충격을 느꼈다.

희재는 깊게 숨을 들이쉬고 얼굴부터 그리기 시작했다. 선이 희미하게 그어지는 바람에 희재는 다시 힘주어 연필을 쥐었다. 매번 웃는 얼굴이라 눈치채지 못했을 뿐, 해영의 얼굴선은 날카로운 편이었다. 턱선을 그리면서 희재는 해영이 정말로 이런 얼굴이었는지 몇 번이고 다시 확인해야 했다.

허리까지 내려가지도 않았는데 사 분이 지났다. 희재가 급하게 허리를 그려 넣자 선이 엉망이 되었다. 희재는 포기하고 다음 장을 넘겼다.

백지를 마주하자 오히려 차분해졌다. 희재는 해영의 몸을 다시 바라보았다. 그러자 이전까지 알아차리지 못했던 새로운 느낌이 전해졌다. 홀가분함이었다. 늘 어디로든 훌쩍 떠나버릴 수 있을 것만 같은 홀가분함이 해영에게는 있었다.
그것을 느끼는 순간부터 희재의 손길에 속도가 붙었다. 선들은 서툴렀고 비율도 맞지 않았지만, 희재는 신경 쓰지 않았다. 종이 위로 선들이 거침없이 그어졌다.

타이머가 울렸다. 해영이 자세를 바꿨다.

해영은 희재를 정면으로 바라보고 섰다. 그러고는 기지개를 켜듯 두 팔을 들어 올렸는데, 자세를 바꾸는 동안의 움직임이 너무나 부드러워서 무용을 하는 듯했다. 조금 전과 비슷한 자세인 것 같은데 가슴과 허리, 목선과 옆구리의 형태가 전부 달라져 있었다. 희재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이내 선을 그었다. 첫 번째 선을 긋고 나면 그다음은 어떻게든 진행되었다.

해영은 끊임없이 새로운 자세들을 보여주었다.

사선으로 서 있는 자세.

팔베개하고 누운 자세.

마지막으로는 앉아서 허공 위로 한 손을 높이 들어 올린 자세.

해영이 마지막 자세를 취했을 때, 희재는 그리던 손을 멈췄다. 허공을 올려다보는 해영의 눈빛 때문이었다. 해영의 시선은 거실의 마룻바닥, 흰색 벽지, 천장에서 무한히 벗어나 새로운 곳에 가닿아 있는 듯했다.

해영은 지금 무엇을 보고 있는 걸까. 타이머 시간이 점점 줄어가는데도 희재는 그런 해영을 바라보기만 했다. 희재마저 움직이지 않자 거실은 잠시나마 시간이 멈춘 듯했다.

이 분 남았을 때 희재는 연필을 집어 들었다. 그리고 지금까지와는 다르게 천천히 선을 긋기 시작했다. 종이 위로 곧게 뻗은 팔과 기울어진 허리, 균형 잡힌 다리가 생겨났다. 십 초를 남기고 희재는 해영의 어깨 위에 작은 새 한 마리를 그려 넣었다.

 

알람이 울렸다. 희재는 자기도 모르게 스케치북을 덮어버렸다. 해영이 가운을 입다 말고 그런 희재를 바라보았다.

그림이 마음에 안 드세요? 해영이 물었다.

보여주긴 창피해서요. 어린애들이 장난친 것처럼 그렸어요.

그러면요, 하고 해영이 가운 끈을 묶으며 말했다, 딱 한 장만 보여주세요. 기념으로 간직하고 싶어서요.

희재는 스케치북을 다시 펼쳐 그림들을 넘겨보았다. 모아놓고 보니 역시나 형편없었다.

사람이 아니라 불가사리를 그렸다고 해야겠어요.

제 몸이 불가사리랑 닮아서 그래요.

희재는 그 말에 웃다가 마지막 그림을 뜯어서 건네주었다. 비율이 엉망인 데다가 위로 뻗은 팔은 지나치게 길었지만, 희재는 그 그림이 가장 마음에 들었다.

너무 좋은데요. 해영이 그림을 받아 들고는 말했다. 어깨 위에 그려진 건 새인가요?

물새예요. 해영 씨랑 잘 어울릴 것 같아서 그려봤어요.

정말 마음에 들어요. 저를 자유로운 사람이라고 생각하셨네요.

맞아요. 어떻게 알았어요?

그림에 쓰여 있으니까요. 크로키는 감정을 숨길 시간을 주지 않거든요.

역할을 바꾸자고 한 건 제 본심을 알기 위한 속셈이었군요.

아니라고는 말 못 하겠어요. 그나저나 이 그림을 제 방에 붙여놓아도 될까요?

제발 그러지만 말아요.


12월 25일


희재와 해영이 저녁을 먹은 다음 쉬고 있을 때였다. 누군가 초인종을 눌렀다. 해영이 나가서 문을 열자 유자가 서 있었다. 바깥이 추운지 양 볼과 코끝이 빨갛게 얼어 있었다.

유자가 왔어? 희재가 현관으로 나왔다.

언니를 봐야겠다는 생각이 불쑥 들었어. 연락도 없이 와서 미안해.

희재는 유자를 자신의 방으로 안내했다. 희재가 저녁을 먹었는지 묻자 유자는 죽을 먹고 왔다고 대답했다. 그럼 같이 차라도 마셔. 해영 씨, 차 두 잔만 부탁해요. 시간이 늦었으니 국화차가 좋겠어요.

해영이 차를 준비하는 사이 유자는 두르고 있던 보라색 털실 목도리를 몇 번이고 곱게 접어 무릎에 올려두었다. 평소 소파나 책상 위에 아무렇게나 겉옷을 던져두던 유자였기에, 희재는 그런 모습을 유심히 보았다.

유자 또한 찻상 앞에 앉아 희재의 방을 천천히 둘러보았다. 방은 십 년이 넘는 세월 동안 조금도 변하지 않았다. 널찍한 공간임에도 나무로 된 침대와 옷장, 일인용 소파를 제외하고는 아무것도 없었다. 희재와 유자는 남는 공간에 찻상을 펼쳐놓고 몇 시간이고 앉아서 수다 떠는 것을 좋아했다.

해영은 국화차 두 잔을 내오면서 필요하면 언제든 자신을 불러 달라고 했다. 오늘 업무는 끝났으니 편히 쉬어요. 희재가 대답했다. 두 사람 사이에 짧은 대화가 오가는 동안 유자는 고개를 숙이고 있다가, 해영이 밖으로 나가고 나서야 겨우 입을 열었다.

처음에는 언니가 그렇게 가버려서 당황하고 화도 났었어. 언니가 누드모델을 했다는 건 또 무슨 소리인가 싶었고. 그런데 다시 생각해 보니 내가 실수했더라고.

희재는 낮은 목소리로 담담하게 말을 이어가는 유자를 바라보았다. 급하게 왔는지 머리가 헝클어져 있었다. 희재는 손을 뻗어 유자의 머리를 정리해 주었다. 가만히 머리를 맡기고 있던 유자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늙은 여자가 혼자 장사하면 별의별 말을 다 듣잖아. 그중에서도 제일 듣기 싫은 말이 뭔지 알아? 희재는 유자 표정이 어두워지는 것을 보았다. 이제 그만 고생하고 자식들한테 기대어 살라는 거야.

희재가 미간을 좁혔다. 희재 또한 나이가 들며 받아온 무례한 시선과 말이 떠올랐다. 그 앞에서는 아무리 시간이 지나도 의연해질 수 없었다.

그런데 이번에는 내가 남에 대해 함부로 말했더라고. 잘못했어.

그날은 나도 잘못했어.

두 사람은 노란 꽃송이가 떠다니는 잔을 내려다보았다. 언제 마셔도 부담 없고 향기로운 국화차였다. 밤중에 깬 희재를 다독이고 다시 잠들 수 있게 해주는 차. 둘은 아직 따뜻한 차를 한 모금 마셨다.

언니를 못 보게 될까 봐 무서웠어.

그럴 리가 있겠어. 너는 내 가족이나 다름없어.

그런데 언니 정말로 빨가벗었어?

희재는 마시던 잔을 내려놓고 크게 웃었다. 희재는 대답 대신에 유자의 손을 잡았다. 오랜 세월 음식을 해온 손. 잠시도 쉴 새 없이 움직여야 했던 두 손을. 희재는 맞잡은 손에 힘을 주었다.


12월 28일

 

그때 무슨 생각 하고 있었는지 물어봐도 돼요?

언제요?
지난번에 제가 해영 씨를 그릴 때 해영 씨 눈빛이 꼭 꿈꾸는 것 같았어요.

아름다운 것들을 생각했어요.

예를 들면요?

불이 환하게 켜진 이층집, 빗소리, 비 오는 날 달리기, 초록색 단추가 달린 셔츠, 강아지 발바닥, 투명한 유리병에 담긴 보리차, 동그란 손잡이, 징검다리……

정말로 그 많은 걸 다 떠올렸어요?

옷을 벗으면 시간이 느리게 흘러가잖아요. 그리고 아름다운 걸 생각하면 그게 몸으로도 나타나고요.

그게 그렇게 되나요?

몸에도 표정이 있으니까요. 무서우면 움츠러들고 슬프면 기울어지고. 아름다운 걸 상상하면 아름다운 몸짓이 드러나요.

일리가 있네요.

얘기 나온 김에 지금 한번 해보실래요?

방금 밥을 먹어서 배가 나왔어요.

괜찮아요. 한 번만 해보시면 금방 감이 올 거예요.

손 씻을 시간만 주세요, 그럼.


희재는 손을 씻고 거실로 나갔다. 해영도 스케치북을 챙겨 자리에 앉았다.

자세 하나만 하고 오늘은 그만이에요. 희재가 옷을 벗으며 말했다.

희재는 바닥에 무릎을 꿇고 앉았다. 그런 다음 두 손을 모은 채 고개를 반쯤 숙였다. 밤마다 잠들기 전에 기도하는 자세였다.

희재는 눈을 감고 아름다운 것을 생각해 보려 했으나, 처음에는 아무 생각도 나지 않았다. 애써 떠올린 것은 화려한 색깔의 꽃과 나무였다. 아름답지만 희재에게 별다른 감흥을 주지는 못했다.

맨바닥에 닿은 무릎이 아파져 왔다. 평소 희재는 기도할 때 방석을 깔고 앉았다. 유자는 그것을 알고 작년 희재 생일에 흰색 방석을 선물해 주었다. 방석 한쪽 귀퉁이에는 희재 이름이 파란색 실로 수놓아져 있었다. 삐뚤빼뚤한 자수를 생각하자 희재는 자기도 모르게 웃음이 나왔다.

그러자 모든 것이 쉬워졌다. 희재는 유자의 호탕한 웃음소리를, 묵의 갈색 꼬리를, 오후 햇빛을 받아 반짝이던 강물을 연달아 생각해낼 수 있었다.

해영은 그런 희재의 변화를 지켜보았다. 어느 순간에 이르자 희재의 표정은 한결 부드러워졌으며, 몸에서도 새로운 빛이 감돌기 시작했다.

해영은 꿈꾸는 듯한 작은 얼굴을 그렸다. 간절히 모은 두 손과 숙인 고개, 굽은 허리 또한 그려냈다. 이 모든 것을 담은 몸을 완성하기 위해 해영은 숨조차 제대로 쉬지 못했다. 해영이 손에 쥔 콩테가 종이를 빠르게 스쳐 지나갔다.


12월 29일


주말에 해영은 다림질을 했다. 섬유유연제와 따뜻한 옷감 냄새가 뒤섞인 기분 좋은 향이 거실 가득 퍼졌다. 다림질이 끝나자 해영은 셔츠가 구겨지지 않도록 조심히 들어서 희재 방으로 갔다. 희재는 바깥에서 산책 중이었다.

한 손에 셔츠를 들고, 다른 손으로 조심스레 방문을 연 해영은 깜짝 놀랐다. 방 한가운데에 커다란 상자가 놓여 있었다. 해영은 상자 중앙에 붙어 있는 노란색 메모지를 발견했다.

해영 씨, 연말 선물이에요. 저를 그려주는 것에 대한 작은 보답이기도 하고요. 메모지에는 그렇게 쓰여 있었다. 해영은 놀란 마음에 셔츠를 침대 위에 내려놓고 상자를 풀어보았다. 상자 안에 들어 있는 것은 커다란 나무 이젤이었다. 해영은 이젤을 꺼내서 눈앞에 세워보았다. 가슴에 손을 얹자 심장 박동이 느껴졌다. 해영은 한동안 말없이 이젤 앞에 서 있었다.


얼마 뒤에 현관문 열리는 소리가 나자, 해영은 청소하다 말고 달려 나갔다.

제 첫 번째 이젤이에요. 해영이 흥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선물이 마음에 들어요? 희재가 신발을 벗으며 물었다.

생각지도 못했어요. 최고의 선물이에요.

그렇다면 다행이에요. 해영 씨가 불편하게 그림 그리는 게 신경 쓰였거든요.

희재가 식탁에 앉아 물잔에 손을 뻗자, 부엌까지 따라온 해영이 대신해서 물을 따라주었다. 희재는 이럴 때마다 해영이 묵과 비슷하게 느껴졌다.

저도 선물을 드리고 싶어요. 해영이 물을 건네며 말했다.

해영 씨는 이미 저에게 선물을 줬어요.

그림 말씀하시는 거예요? 그림은 저도 받았는걸요.

아니요. 희재는 목이 말랐는지 물을 마시고 나서 말을 이어갔다. 오랜 시간 몸은 저에게 부끄러움이었어요. 제 몸인데도 쳐다보기는커녕 가리기에만 급급했었고요. 해영 씨랑 함께 지내면서 처음으로 제대로 몸을 바라보게 된 거예요.
텔레비전에 마술쇼가 나오면 마법사가 모자를 쓰고 있잖아요.

맞아요, 그 까맣고 커다란 모자.

거기에 얼굴을 집어넣고 살다가 비로소 모자를 벗어 던진 느낌이 들었어요.

그때 기분이 어떠셨어요?

아, 정말이지 통쾌했어요. 희재가 그렇게 대답하면서 다 마신 잔을 내려놓자 둔탁한 소리가 났다. 간간이 유리창 너머 거센 바람 소리가 들려왔고, 희재와 해영은 나무 식탁에 앉아 얘기를 이어 나갔다. 그동안 해영의 스케치북은 그의 방, 침대 옆에 세운 나무 이젤 위에 놓여 있었다. 마치 아주 오래전부터 그 자리에 있었던 것처럼.

 

12월 31일


희재와 해영은 죽집 마감 시간을 집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아홉 시가 되기까지는 아직 삼십 분이 남아 있었다.

두 사람은 나갈 준비를 마친 다음 식탁에 마주 앉았다. 해영은 기다리는 동안 그림들을 감상하자고 제안했다. 해영이 스케치북에서 뜯어낸 그림들을 식탁 위에 펼치자, 사인용 식탁이 희재의 누드 크로키로 가득 채워졌다. 그동안의 그림을 한꺼번에 보는 것은 희재로서는 처음이었다.

첫날 그렸던 그림이에요. 해영이 맨 왼쪽에 놓인 그림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희재의 뒷모습이 담긴 그림이었다.

신기하네요. 나중으로 갈수록 시선이 정면으로 돌아서고 있어요. 희재가 말했다.

정말 그러네요. 자세도 훨씬 편안해지셨어요. 해영이 그림들을 살펴보며 말했다. 나중에 이 그림들로 전시를 열어도 좋겠어요.

전시 장소로는 노인회관이 좋겠네요. 다들 까무러치는 모습 좀 보게.

그 말에 해영은 들고 있던 그림을 내려놓고 웃었다.

진심이에요. 나이 든 사람들에게도 자극은 필요하니까요. 그보다 이걸 먼저 보여줘야 할 사람이 있어요.

희재는 시간을 확인해 보더니 이만 일어나자고 했다. 둘은 자리에서 일어나 겉옷을 챙겨 입고, 불을 끈 다음 집을 나섰다. 위스키 한 병과 그림을 챙기는 것 또한 잊지 않았다. 아파트 정문을 지나던 중 해영이 문득 들러야 할 곳이 생각났다고 했다.

먼저 가서 계시면 금방 따라갈게요.
천천히 조심해서 와요.

 

희재가 죽집에 도착했을 때 유자는 잠들어 있었다. 식탁 의자 두 개를 이어 붙이고 그 위에서 잠든 것이었다. 희재는 소리 나지 않게 조심해서 가방을 내려놓고 맞은편 의자에 앉았다. 잠시 뒤에 유자가 몸을 일으켰다.

깨우지 그랬어.

아니야, 더 자. 해영 씨도 아직 안 왔어.

희재는 옆에 있던 의자를 끌어당겼다. 그러고는 유자처럼 신발을 벗고 옆으로 웅크려 누웠다. 그 모습을 본 유자도 도로 누웠다. 두 사람은 테이블 밑으로 서로를 볼 수 있었다. 유자는 눈 감은 희재를 가만 바라보다가 따라서 눈을 감았다.

희재도 유자도 잠들지는 않았다. 가게 밖에서 사람들이 오가는 소리, 맞은편 마트에서 흘러나오는 캐럴, 차들이 속력 내는 소리가 희미하게 들려왔다. 바깥의 소음은 죽집 유리문을 거치면서 부드러운 소리로 바뀌어 휴식에 방해되지 않았다.

얼마 지나자 가게 문에 달린 종이 울렸다. 해영이 꽃다발과 함께 안으로 들어왔다. 한 손에는 케이크 상자도 들려 있었다. 희재와 유자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주무시고 계셨어요?

잠깐 쉬고 있었어요. 이게 웬 꽃이에요? 유자가 꽃다발을 건네받으며 물었다. 붉은 튤립 열 송이가 초록색 포장지에 싸여 있었다.

아까는 꽃을 사러 갔던 거군요. 희재가 옆에서 말했다.

맞아요. 연말 분위기를 내보려고 준비했어요. 해영이 대답했다.

유자는 희재 앞으로 꽃다발을 내밀었다. 희재가 고개를 숙이자 싱그럽고 푸르른 향이 났다.


그들은 식탁에 모여 앉아 딸기가 올라간 생크림 케이크를 나누어 먹었다. 테이블 중앙에는 붉은 튤립들이 꽃병에 꽂혀 있었는데, 유자가 튤립을 오래 간직하기 위해 포장지에서 꺼내어 다듬은 다음 옮겨둔 것이었다.

케이크를 먹던 희재가 유자에게 보여줄 게 있다고 말했다. 희재는 가방에서 그림들을 꺼냈다.

내가 누드모델 했다는 거, 정말이야. 희재가 유자에게 그림을 건네며 말했다.

전부 언니를 그린 그림이야?

응. 해영 씨가 나를 그려준 거야.

잠시만, 나 돋보기 좀 갖고 올게.

유자가 돋보기를 가지러 일어난 사이, 희재는 집에서 들고 온 위스키3)를 꺼내어 잔에 따랐다. 깊은 호박색 액체가 유리잔에 찰랑였다.

돋보기보다 이게 더 필요할 거야. 유자가 돌아왔을 때 희재가 잔을 건네며 말했다.

희재는 해영에게도 한 잔을 주고, 자신의 잔도 따랐다. 해영은 한 모금 마시더니 인상을 찌푸렸다.

소독약 아닌가요? 해영이 위스키병을 가리키며 물었다. 그러면서도 손에서 잔을 내려놓지 않았다.

저도 처음엔 그렇게 생각했는데 언니 때문에 계속 먹다 보니까 익숙해졌어요. 묘한 짠맛이 바다 같기도 하고. 유자가 대답했다.

유자는 마시던 잔을 내려놓고 앞에 놓인 그림들을 찬찬히 보았다. 희재가 뒤돌아선 모습, 춤추듯 양팔을 벌린 모습, 기도하는 모습이 종이에 그려져 있었다. 유자는 그것들을 유심히 들여다보다가 다음 장을 넘겼다. 또 넘겼다. 계속해서 넘겼다. 희재와 해영은 그런 유자를 말없이 기다렸다.

유자는 한참 만에 입을 열었다. 그러니까 정말로, 라고 말하고서도 한동안 말을 잇지 못했다. 유자는 짧게 심호흡한 다음 나머지 문장을 말했다. 정말로 아름다워요.

희재는 유자가 왼손으로 목을 몇 번씩 감싸 쥐었다가 푸는 모습을 보았다. 그건 유자가 어느 방향으로든 감정이 격해질 때 나오는 행동이었다. 희재가 호박색 술을 입안에서 굴리다가 삼키자, 따뜻한 피가 심장에서부터 얼굴과 손끝, 발끝을 부드럽게 도는 것이 느껴졌다.

시간이 지나도 유자는 그림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해영은 그런 유자 옆에 앉아 라가불린에 조금씩 익숙해져 가고 있었다. 희재는 의자 등받이에 기대어 두 사람을 바라보았다. 조금만 더 기다리면 제야의 종이 울릴 것이었다. 근사한 밤, 정말이지 근사한 밤이라고, 희재는 생각했다.

임선우
소설가, 1995년생
소설집 『유령의 마음으로』 『초록은 어디에나』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