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편소설
한겨울 따뜻한 실내에서

  • 단편소설
  • 2023년 겨울호 (통권 90호)
한겨울 따뜻한 실내에서

11월 19일

 

묵은 마지막으로 일어나 거실을 돌았다. 재작년까지만 해도 한달음에 뛰어오르던 흰 소파를 지나, 창가를 지나, 나무 바닥을 천천히 밟아 다시 자신의 부드러운 방석으로 돌아와 누웠다. 희재는 그런 묵의 몸 위로 조심히 입술을 갖다 대었다. 묵, 나 여기 있어. 지난 몇 년간 수백 번도 넘게 되풀이해 온 말이 음성 없이도 전달되기를 바라면서.

십 분이 지나자 묵은 온몸이 떨릴 정도로 급하게 숨을 쉬었다. 희재는 주사를 손에 쥐었지만, 찌르는 것이 무의미하다는 것을 본능적으로 알았다. 희재는 주사를 놓는 대신에 묵을 끌어안았다. 잠깐의 폭풍이 지나가자 묵은 영원히 평온해졌다. 희재는 아직 따뜻한 묵의 등에 뺨을 대고 마지막 온기를 느꼈다. 오랜 기도가 끝나고 창밖이 밝아졌을 때, 희재는 가까스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고는 이 년 전부터 알아두었던 애견 장례 업체에 전화를 걸었다.

 

11월 23일

 

나흘이 지나고 희재는 또 다른 곳에 전화를 걸었다. 입주 가사도우미가 필요해요. 최대한 빨리 와주시면 감사하겠어요. 최대한 빨리라고 했지만, 그날 오후 초인종이 울렸을 때 희재는 놀랐다.

이렇게 빨리 오실 줄은 몰랐는데.

조금 이따 다시 올까요? 여자가 문밖에 서서 물었다.

괜찮아요. 안으로 들어와요.

희재는 여자를 부엌으로 안내했다. 희재가 차를 끓이러 들어간 사이, 여자는 손바닥으로 식탁을 부드럽게 쓸어보았다. 단단한 원목이 기분 좋은 긴장감을 불러일으켰다. 여자는 식탁에 앉은 채로 거실을 바라보았다. 넓은 거실에는 흰색 소파 하나와 그 옆에 놓인 작은 나무 협탁이 전부였다.

희재가 쟁반을 들고 오자, 여자는 일어나 건네받았다. 희재는 찻주전자에서 차를 두 잔 따라 한 잔을 여자에게 주었다.
저는 이해영이에요. 가사도우미 경력은 삼 년 정도 되었습니다. 사모님께서 원하시는……

사모님은 무슨, 그냥 할머니라고 부르세요.

희재는 해영에게 보다시피 이 집에는 자기 혼자뿐이며, 식사 시간은 오전 여덟 시, 오후 한 시, 오후 여섯 시라고 했다. 못 먹는 음식은 따로 없지만 질긴 음식은 되도록 피해주시고요. 귀가 어두워졌지만 여전히 소음에는 예민해요. 텔레비전 보거나 통화할 때는 방문을 닫아주면 고맙겠어요. 저녁 시간 이후, 그리고 일요일에는 집안일에 손대지 않으셔도 돼요. 주말 지나고 바로 들어오실 수 있나요? 그럼요. 해영이 대답했다.

말을 마친 희재는 차를 한 모금 마신 다음 찻잔을 천천히 내려놓았다. 유리 소서에 잔을 내려놓았는데 아무 소리도 나지 않았다. 해영은 희재를 따라 차를 마신 다음, 마찬가지로 소리 없이 내려놓으려고 엄청나게 애썼지만 실패했다.


11월 25일


희재는 잠결에 소리를 들었다. 분명 거실에서 발소리가, 아주 작은 발톱이 마룻바닥을 스치며 나는 소리가 들려왔다. 희재는 서둘러 일어나 나가 거실을 둘러보았다. 거실은 어제와 마찬가지로 고요했다. 희재는 텅 빈 거실 중앙에 잠시 넋 놓고 서 있었다. 그러다 정신을 차렸다.

그는 찬물로 세수하고, 하얗게 센 머리를 나무 빗으로 단정하게 빗어 넘겼다. 흰색 코트에 붙어 있는 묵의 털을 봤을 때는 심장이 터질 것 같았으나 겨우 진정했다. 희재는 밖으로 나가기 위해 현관문 손잡이를 잡았다. 오늘따라 손잡이가 무척 차갑고 단단하게 느껴졌다. 그것은 이상하게도 희재에게 위안을 주었다.

걸어서 삼 분 거리에 작은 죽집이 있었다. 2차선 도로 하나만 건너면 되는 곳이라서 비가 오나 눈이 오나 희재가 자주 찾는 곳이었다. 때 이른 크리스마스 장식으로 반짝이는 문을 밀고 안으로 들어가자 따뜻한 죽 냄새가 났다. 가게 안쪽에는 테이블이 네 개 있었고, 그중 한 테이블에서는 나이 든 남자 하나가 팥죽을 떠먹고 있었다.

희재 언니 왔어?

유자가 주방에서 나와 반갑게 인사했다. 희재는 손 인사를 하고 창가 자리에 앉았다. 잠시 뒤에 유자가 야채죽 한 그릇을 들고 희재 앞에 앉았다. 희재가 늘 먹던 죽이었다. 희재는 김이 올라오는 죽을 천천히 불어 한 입 떠먹었다. 십이 년 동안 한결같이 따뜻하고 부드러운 맛이었다. 희재는 몸과 정신이 지쳤을 때 밥을 먹으면 곧잘 얹히곤 했다. 그럴 때 유일하게 먹을 수 있는 음식이 유자가 끓인 죽이었다. 네 죽이 없었다면 내 인생은 다섯 배는 더 힘들었을 거야. 희재는 유자에게 종종 말했다.

옆 테이블 남자가 자리에서 일어나자 유자는 잠시만, 하고는 계산을 하러 갔다. 그동안 희재는 조용히 죽을 떠먹었다. 창밖을 보자 나뭇가지들이 바람에 휘청이고 있었다. 남자가 나가면서 문을 열자 찬바람이 밀려 들어와 희재는 몸을 움츠렸다.

추워? 음식 하는 사람은 추운 줄 몰라서 문제야.

유자가 난방 온도를 높이며 말했다. 가게에는 이제 희재와 유자 둘뿐이었다. 희재는 자신이 아직 모자나 코트를 벗지 않았다는 사실을 깨닫고는 모자를 벗었다. 그러고는 수저를 쥐었다가 다시 내려놓았다. 유자가 맞은편 자리에 돌아와 앉았다.

며칠 전 새벽에, 하고 희재가 입을 뗐다. 묵이 갔어.

유자는 물을 따르던 손을 멈추고 한동안 말을 잇지 못했다. 그러더니 자리에서 일어나 가게 문을 잠그고, 블라인드를 내린 다음 희재 옆으로 가서 앉았다. 그들은 아무 말도 주고받지 않았다. 대신에 유자는 희재의 손을 잡았고, 오래도록 함께 앉아 있었다. 한참이 지나고 울음이 멎자, 희재는 유자가 건네주는 따뜻한 물을 한 잔 마셨다. 둘은 묵에 대한 얘기를 나누기 시작했다.

언니, 기억나? 묵이 어렸을 때 용맹하게 참새를 쫓다가 비둘기를 보고 줄행랑쳤잖아.

머리 좋은 개는 아니었지. 밖에서 간식 주면 화단에다가 묻어놓기는 잘했는데, 한 번도 꺼내 먹어본 적은 없어.

묵은 자기 이름도 잘 모르더라.

그건 아니야.

지난번에 내가 욱이라고 불렀는데 왔어.

그건 네 발음이 이상해서 그래.

 

* 계간 <대산문화> 2023 겨울호(통권 90호)에 전문이 수록되어 있습니다.

임선우
소설가, 1995년생
소설집 『유령의 마음으로』 『초록은 어디에나』 등